Review BOOK/에세이2014. 1. 23. 22:55


한동안 이것저것 먹고살기위해 두리번거리는 통에 책 모양 비슷한 뭐라도 읽긴 읽어야겠는데라고만 생각했다. 뭐 세상일이란게 그런거지 때론 어느날 정신차려보니 내 키보다 더 자라있었다는 남쪽나라의 대나무보다도 소리없이 쌓여가는 책들의 탑 높이에 놀라곤 했다. 햐 언제이렇게 쌓였어 읽어야 할 책들의 바벨탑이로군... 시간을 한탄하는 것도 여유가 있을 때다. 대부분은 세상의 시계는 다른 방법으로 초침을 움직이니까. 인지할 틈도 그리고 깨달을 틈도 주지않고 무조건 달리게만 한다. 풀려버린 두루마리 휴지를 꼬랑지에 매달고 뛰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뭔가 큰 실수를 했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느낌이라니... 나도 풀린 휴지를 끊어버리고 그 자리에 앉아서 빨리 모아놓은 책들을 읽어야했는데라는 생각정도는 한다. 핑계가 너무 많아서 문제인거지. 


어쨋든 요즘에는 책을 미션수행하듯 해치우듯 읽는건 사절이다. 그렇게 읽는건 읽는 행위 이상의 무엇도 남겨주지 않더라. 쫓기듯 읽고 표지를 덮고 책장에 쑤셔넣으면 '무협지 마지막권 말미에 붙어있는 '완결'이라는 단어를 읽어버린 것만큼 허무하다. 읽다가 도중에 아무런 깃발이 들려지지 않는다면 (잠시 생각하게 되는 걸 난 '깃발을 든다'고 사용한다.) 그저 똥만 싼 것과 같을 뿐이다. 내 피와 위장과 뇌에 어떤 영양소를 공급했는지 알길이 없다. 내 독서의 질량에 어떤 질감의 살이 붙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똥만 싼거지..게다가 이런 읽기에는 아무런 추억도 기억도 공간을 할애해 주지 않는다. 그러고보면 뇌라는건,...아님 감성이라는건 굉장히 이기적이지 않나 마음에 드는 몇개의 문장과 상상속에서 스물거리듯 올라왔던 이미지들 몇 장면에게만 저장소를 허락한다. 그리고 나머진 다 너저분한 잡스러운 것들이라 다 잊어버려주겠다고 통보한다. 그렇게 해서 잊혀진 책들이 몇 권인가...이런게 리얼 비효율라 말할 수 있는거다. . 어찌됐든 개인적으로 책읽기란 '해치우듯' 읽어선 곤란하다는 말 하려고 이렇게 길게 주절거렸다.


그런 점에서 요 며칠간 눅눅히 읽어갔던 이 책은 정말이지 뭔가를 푸짐하게 먹고 제대로 소화시킨 느낌이다. 바로  빌 버포드앗뜨거워-'Heat' 이다. 여기에는 저자가 갑자기 뉴요커의 삶을 살다가 마리오 바탈리(뉴욕에서 밥보라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유명한 요리사)를 만나면서 '요리사'의 삶으로 자신의 삶을 바꾸는 희한한 모험담이 등장한다. 이게 소설이냐고? 그랬으면 위트와 농담으로 뒤섞인 그의 문학적 감수성을 높히 평가하면서 '갈등구조'의 적재적소를 비판적으로 저미듯 노려봤을 것이다. 이래가지고 재미가 있겠어 여기서 한번 주방을 엎어버려야지..앞건물에 경쟁자 레스토랑이 등장하고 새로운 요리개발에 매진하고 경연대회에서 일등먹고 ..등등...그렇게 나갔어야 했겠지...그런데 이건 공교롭게도 소설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체험기다. 진짜로 요리사의 삶을 경험해보려고 주방으로 뛰어든 기자가 자기란 이야기다. 


뭐 자세한 이야기야 나중에 리뷰라도 쓰면서 절절히 써볼 작정이지만, 슬쩍 끄적여두는 이유는 책을 읽은 요 며칠간의 경험이 적어두지 않으면 휘발되어버릴까봐다. 어디서든 치열한 삶이 있고 언제든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이벤트들이 도처에 널려있을 것이나 실제로 이걸 해볼려고 발을 떼는 인간들은 극소수다. 가히 이정도의 모험담은 일생을 두고 한번쯤 해볼만한 치열함이 아닌가... 나도 내 현실의  프레임의 골조를 절단해 줄 전기톱같은 결단력이 있었으면 했는데도 그렇게 안되던데...... 이 아저씨는 그야말로 폭풍처럼 자발적으로 주방으로 처들어가 온몸에 요리흔적을 생채기처럼 새겨댄다,  그야말로 놀랄 지경이다. 400페이지가 넘어가는 책두께가 쉴새없이 넘어가고 요리와 음식의 즐거움이 오후 한창 때의 식당처럼 부산스럽게 쏟아진다. 


우리는 요리와 음식에서 레시피적인 가이드만을 원하곤 한다. 내가 마늘을 세워서 칼로 저밀때 어느 각도로 내려야 하는지에 대해서 애매하게 고민하거나 달궈진 플레이트위에서 뜨거운 열기를 맞아가면서 이렇게 고단스러운 폭풍 점심의 손님들을 감당해낸다는 그 느낌이 어떤지 내가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이런 것들은 대다수의 독자들이 원하는 요리책의 본분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에서 문학적 감수성을 원했겠는가. 에세이정도의 소소함만을 목표로 하기에는 그냥 딱봐도 거대 사이즈의 사전 정체성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다.  보기만해도 '이건 패착이야 이렇게해선 에세이로서 성공할수 없겠어'라는 소리나 들을 테지..이유야 가져다가 붙이면 널렸지만 정작 난 이 책을 진득히 읽을수록 '패착'이란 단어따윈 꺼낼 엄두도 나지 않았다.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만한 경험을 한 것만 같은 그런 현실감과 동조의 감정들. 그리고 마치 양념이 베어나올 것만 같은 책장을 넘기며 나도 그 자리에 있다고 생각했던 셈이다. 다 읽고 나니 든 생각인데 요리에 관한 책조차도 굳이 메뉴얼적으로 써대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다. 요리책에는 생뚱맞게도 문화와 개인적인 대소사가 머릿말로 등장하고 뒤 이어 계량적인 이야기로 본격 다큐가 되곤 했다. 그러지말고도 너무 위트있고 너무 절절하고 웃음이 날만한 일들이 음식의 세계에는 있다. 간만에 즐거운 경험이었던 것 같다. 굳이 요리사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도 한번 정도 읽어보면 삶의 경험을 다른 브랜치에서 느껴본 것만 같은 기분좋은 착각을 느낄수 있을 것이다. 




앗 뜨거워(Heat)

저자
빌 버포드 지음
출판사
해냄출판사 | 2007-01-30 출간
카테고리
요리
책소개
지지고 볶고 튀기고 썰고 찢고! 인생에서 배워야 할 모든 것은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
Review BOOK/소설2013. 11. 13. 20:16


불운은 너무나 오스카 와일드적이었고, 우연은 피츠 제럴드적이었으며 스팬서적인 암울함이 깃든 공기들이 앨런 포우적이었다고 느낄 때 데자뷰처럼 읽었던 단편들의 문장들이 현실세계의 미장센처럼 복원되곤 한다. 막연히 묵었던 숲속 호텔의 수영장에서 홀로 튜브에 둥둥떠다니다가 '개츠비'도 이렇게 마지막을 맞이했을거라는 둥, 아틀란타 레지던스 인 카운터에 놓여있던 은화단지를 보면서 '발할라 드러그 스토어'를 떠올리고, 매일매일 가쉽처럼 터지는 아이돌의 연애사 틈새에서 '멕기니스'의 사랑 이야기를 슬며시 떠올리는 식이다. 그게 카버가 되었든 피츠제럴드가 되었든 사실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다. 다만 언젠가 삶의 언저리에서 맞닥드릴만한 사건들의 이면에는 '예전부터 있어왔었던 모종의 반복' 메커니즘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사소하게 스쳐지나가지 못하게 되는게 신경쓰일 뿐인거다.  아...이건 뭔가 상징적인 건가...내 인생의 중대한 핀 포인트라도 되는 걸까 라고 자꾸 되뇌이듯...


트루먼 커포티의 단편들도 유독 그런 기시감이 강했던 것 같다. 삶이란 세월을 지치듯 쏜살같이 지나쳐왔어도 질감은 비슷한 걸까. 다양하게 수놓았던 무늬들의 패턴이란 결국 모두 같은 뉘앙스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야기들은 시종일관 계속되었고 '요트여행'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커포티에 대한 안스러움이 종이 지면 위에 눈 내리듯 내려앉아버렸다. 이것도 소설일 뿐이데 어차피 허구의 세계와 가상의 이야기들이 남겨놓은 감정의 배출구를 따라 무엇인가를 토해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싶어 몇 번이고 앞쪽으로 리와인드해서 회상해보곤 했다. 커포티의 재능을 고려해본다면 대중들은 이 <차가운 벽>에서 따뜻하고 온정어린 시선이 맴도는 단편 몇 개를 이런 절절한 기억의 대상이었음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크리스마스의 추억>(1956)과  추수감사절에 온 손님(1967), 그리고 어떤 크리스마스(1982)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시대는 다르지만 정서는 비슷한 과거로 가게 될 것이고,  이 이야기들이 커포티의 자전적 이야기란걸 눈치 챌 즈음, 커포티의 쓸쓸했던 생애의 끝자락과 대비된 유년시절의 따스함, 그리고 밑바닥 정서에 침몰되어버린 불운한 나날들에 대한 회한같은 것들이 읽혀지게 된다.  아침, 찬서리가 풀잎을 덮어 반들거리고, 오렌지처럼 둥글고 더운날씨의 달처럼 오렌지빛인 태양이 지평선위에 떠올라 은색으로 빛나는 겨울 숲을 달구며, 검은색 풍로와 안락의자 두개가 놓여있는 벽난로에서 버디는 숙과 퀴니와 소근거린다. 으르렁거리는 국화꽃오드 헨더슨보다 더 치졸했던 과거야 불편한 기억도, 추억도 아니 될수 없겠다. 누구나 성장의 길목에서 졸렬해지기도 하고 끝없이 순수했음이 상처받기도 할테니까..독자들이 느끼는 안타까움이란 건, 이 정서가 성장의 연료로 쓰여지지 않은 채 불완전 연소되어 성인의 커포티에게 드리웠을거라는 막연한 추측 때문일 것이다. 커포티는 불운했던 것 같아...라고 혼자서 몇번이고 중얼거렸었지아마... 


 지인들과 이야기했었는데, 대개의 경우 <인 콜드 블러드>의 명성만으로 기억하고 <티파니에서 아침을>과 같은 로맨스적 감성만을 커포티의 정체성처럼 꺼내놓곤 했었다. 매스컴에서 떠들어대고 광고지에서 큰 폰트체로 위압적으로 시선을 장악당하고,  '20세기 소설지형을 바꾸어버린 역작' 타이틀에 포커스가 가면, 안 읽고는 못배기는 커포티의 마스터피스, 그리고 그동안의 이미지들은 다 점거당할테세다. 우리는 반지의 제왕을 읽으면서 사우론을 내일 만날것 처럼 생각하지도 않고, 어느 동물원에서 호랑이가 사자를 잡아먹었다던 해괴망칙한 또 하나의 이슈를 내 걱정거리로 치환하지도 않아서 '인콜드블러드'의 다큐멘터리 서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격리시킬수 있지만, <차가운 벽>에는 호랑이도 사자도 등장하지 않으며 사우론도 없고 몇 명을 피칠해가며 해치우는 연쇄살인마도 없어서 그냥 무미건조하다.  그저 일상적인 삶의 무늬를 그려놓았는데, 어쨋든 자주 읽게 되는건 <차가운 벽>쪽이다. 뜻뜻한 한 여름 아무도 없는 호텔 수영장 비치파라솔 밑에서 레몬색 햇볕을 배경으로 '차가운 벽'을 읽으면 완벽하게 온정적 관찰자로 변할 수 있다. 내 이야기일수도 있고 친구 이야기일수도 있으며 어제 있었던 사건의 감정 복제판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인 콜드 블러드'같은 부풀어오른 풍선의 불안함쪽 보단 개인적으로 완벽히 우위에 있는 셈이다.


불현듯 왜 단편집의 제목이 '차가운 벽'이었을까 생각해보았는데 '열여섯은 키스를 한번도 받아보지 않은게 아니라 한번도 강간을 당하지 않았다는 뜻이겠죠'(차가운 벽-1943) ..이 문장이 첫작품에 등장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혹시라도 '차가운 벽'이란 독자가 커포티의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반항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16살의 풋풋하고 설익은 애송이라할지라도 독자들의 '감정'을 받아들여 '연한 장미빛이 감도는 벽이 있는 방'에서 잠이 들 것이라고....자신의 작품이 좀더 따뜻해질수 있다는 인트로, 무언의 투정같은 것이었으리라. 물론 차갑다는 평에서 상처도 받고 토라지기도 한다는 은근한 고백까지 덧붙여서 말이다. 그 뒤로는 사실상 다양한 인간군상에 대한 씁쓸함(자기만의 밍크코드-1944)과 말도안돼는 행운이 현실로 다가오는 과정(은화단지-1945)을..., 그리고 노년의 여인이 정체성에 위협받으며 존재감을 잃어가는(미리엄-1945) 이야기까지.. 삶을 편광시켜 프리즘처럼 다반사시켜준다. 이외에도 이 책에는 다양한 편린들이 공존한다. 


예전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언급했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모티브, <마지막 문을 닫아라>도 이 책에 있다. 그러고보니 이 정서를 이해할 것도 같다. 솔직하고 욕구적인 본능을 감출줄 몰라서 불행한 결말로 이어지고 말거라는 아슬아슬함은 1960년 앨랭들롱의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 Purple Noon) 가 떠오른다. 그때 들었던 캐릭터평이 '아름답지만 천박한 알랭들롱'이었던가. (아마 시오노 나나미의 평이었을 것이다.) 애나 스탐슨이 주인공 월터에게 말미에 한마디 던진 내용도 "그런건 싸구려것이야 월터, 싸구려지" 였다. 주인공은 신분상승의 욕구를 억누르지못해 끊임없이 사람들을 이용하며 상처주고 버린다. 욕구의 결말이 뻔해질 즈음. ..항상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싶었지만..외면하는 연인의 뒤를 따라가 소리없이 사랑해라고 말할수도 있었지만 기어코 모든 것이 자신을 외면하고 난 후, 배개에 얼굴을 파묻고 손으로 귀를 막아버리고 "아무것도 생각하지마, 바람만 생각해' 라고 속삭인다. 지극히 자연스러워서 겸연쩍은 감정이 들어버렸다면 반쯤은 '월터래니' 적인 거지 피할수 없는 숙명적 캐릭터인 거다. 우리는 모두 '월터래니'적일수 있다고 비아냥 거렸던 옛 친구가 기억날 정도다. 


이 후에도 '내 복숭아가 싫다면 내 통조림에는 손도 대지말라'던 보빗양의 파격, '꿈을 5달러에 팔아버린' 실비아가 내뱉은 '정말로 무섭지 않다고..어쨋건 더 이상 훔쳐갈것도 남아있지 않다던 고백을 기억한다. 방울뱀과 여자를 두려워하는 조지슈미트와 아이보리헌터, 그리고 중간에서 사랑을 인터셉트했던 프레디 페오, 현실도피하는 조지슈미트를 자신으로 치환해버린 조지와 부인 사라이야기를 읽으면서 레이먼드 카버도 이렇게 일상적 삶에서 벌어지는 균열을 '불륜과 일탈'로 묘사했었는데...묘하게도 다들 일상을 소리없는 균열로 보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쳐간다. 불편함이 느껴지지만 마치 몸의 일부인 것마냥 떨어지지 않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렇듯 이 책에서 행운과 행복을 말했던 단편은 몇개 안된다.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했던 작품은 <어떤 크리스마스>(1982)다. 어린 시절의 커포티가 자신의 아빠에게 말했을 것 같은 대사 때문이다. 자신을 낳아서 인생이 망가져버렸다는 엄마의 고백과 산타클로즈도 없고 하느님도 없다는 아빠의 외침사이에서 묵묵히 시선을 돌리는 버디, 아니 커포티의 불행이 떠올라서다. 아마 이런 감성조차 없었다면 그가 말미에 그토록 인정받고 싶어했을까. 사랑 결핍증이었던 것 같다..커포티는.....



"안녕하세요. 아빠 잘지내세요? 

나도 잘지내요. 

나는 이제 비앵기 페달을 아주 빨리 밥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금방 하늘로 날아갈거니까 눈을 크게 뜨고 잘 보세요. 그리고 

네 사랑해요. 아빠.  


버디 올림" 


 


차가운 벽

저자
트루먼 커포티 지음
출판사
시공사 | 2013-06-24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헤밍웨이와 더불어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한 작가 트루먼 커포티 소...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
Review BOOK/에세이2013. 10. 9. 09:22


'비에 젖어 지금 당장 무너져 내릴듯한 길가의 페옥이라도 바라보는 눈길'로 '보너스는 어떻게 하실거냐'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나도 최근 들었다. (에세이 초반부에 관련 에피소드가 나온다.) 보너스나 퇴직금이나 매일반이긴 하지만 어찌됐든 이런 이야기를 듣게되면 좀더 사람들이 배려심이 있었다면 세상이 좀더 살기 좋을텐데라고 생각하곤 한다. 물론 이건 하루키의 삶과 직업적 특징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가 자유직이어서 은행에 들르고 직원이 직업이 뭐냐고 묻고 난 그런거 없다고 말하고 직원은 불쌍한 눈으로 쳐다본다는 건 그 직원의 착각이지 하루키가 불쌍할 이유는 없다. 그 직원보다 열배이상 부자일테니까. 


다만 그저 일반 사람들이 바라보는 통상적인 시선에 대한 약간의 비꼼. 이윽고 세상이 결코 바라는데로 확연하게 변해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아래에서 앙탈부리듯 그건 잘못된거야라고 고집세게 우겨보는 것에 대한 안스러움 같은 것이다. 나라면 아마도 하루키가 고군분투하듯 세상의 고정관념과 싸울때 응원이라도 보내주는 정도겠지. 왠지 안스럽거나 동질감을 느껴 책장 한 귀퉁이에서 모서리를 접고 '맞아요 하루키 아저씨 저도 그래요'라고 겸연쩍게 외친 적이 한 두번이었던가. 약간은 비겁하게 하루키 에세이를 읽으면서도 응원을 잃지 않는 것, 그게 하루키 에세이를 읽는 나만의 태도였던 것 같다.  


가끔 NY양키스보단 NY메츠, 베니티페어 보단 애틀렌틱, 일본식보다는 타이식, 팜비치보다는 마이애미 비치, 노먼 테일러보단 고어비달, 뉴욕타임즈보단 월스트리트 저널이 더 INSVILLE 하다고해도 사실은 그 차이가 뭔지 잘 모른다고 생각한다.('인터뷰'지에 실린 기사에 관한 에피소드) 하루키도 그런가보다라고 생각했을 거다. (나도 몇개 생각해봤지만 MS보단 애플, 한가인보다는 수지 뭐 이래야 하나싶어 관둬버렸다.) 나는 그의 글 한복판에서 '의도'가 뭔지를 읽으려고 애쓰는 편이다. 그가 대충 '그런가보다'라든지 '그럼 할수 없지'라고 관조적이고 수용적인 문장으로 마무리한다고 해도 결국 속으론 굴복하지 않을 걸 안다. 이미 '여느때는 무엇인가 있던 자리에 아무것도 없게되는 마이너스 상황, 결락의 상황쪽을 더 선호한다'고 밝힌바 있고, '파업좋잖아요.오래이어졌으면 하는데요'라고 지면에 쓰진 못해도 에세이에 끄적일 정도의 용기도 가지고 있다. 기타 태풍을 좋아한다던지.요인암살은 유쾌하다라든지 같은 경쾌함은 세상이 정말 천편일률적이라하더라도 나야말로 그렇게 살수는 없다고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중년의 아저씨같다. 아웃사이더이자 반항아적 틴에이저 스피릿이라도 있는걸까. 아마 그가 재즈적이지 않고 록적이었다면 볼만 했을텐데..폭압적인 사회적 이슈에대해서 강렬한 참여적인 일탈로 무시무시한 사운드를 뿜어내 주셨을 지 누가 아는가.


그런 그가 경험적 산물에 대해서 경의를 표할때는 좀 더 진지하게 바라보곤 하는데 사실 문장들을 주루륵 내려가면서 읽다보면 아 이분께서는 기분 좋은 상상력을 통해서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지 않으시나보다라고 생각한다. 이건 고정관념에 대한 반감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형성된 세월의 축적과 정서상에서 우러러나오는 일종의 편안함 때문이 아닐까싶다. 언어는 공기와 비슷해서 어느지역에나 그곳만의 공기가 있고 그 공기에 맞는 언어가 있어, 웬만해서 그것을 거역하기 어렵다고 했던 건 이런 이유에서 기발하다고 느껴지곤 하는데 역시 스파게티는 이탈리아의 그 스파게티가 적절했던 것도 그 환경에서 벌어지는 진정한 의미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 낭만을 즐기는 듯해서 편안하다. 나도 그 공기가 특별하다는 건 안다. 동네 근처에서는 더듬거리며 몇 문장도 이야기 못했던 내가 아틀란타의 모 호텔 로비에서는 그 곳 공기에 맞게 편안하게 프론트에서 조크따먹기라도 한다. 그건 분명 그곳 공기탓일거라고 상상하곤 한다. 이런게 바로 하루키적 영향력이라고 할테지. 


하루키의 에세이들의 대개는 B급정서도 꽤 많이 녹아져있다. 상상력의 퀄리티가 꼭 어마어마한 내용으로 채워져야 하는 건 결코 아닌데도 요즘에는 교양이니 소양이니 하면서 거장과 마스터피스 범람의 세계가 되어버렸다. 슬며시 반감이 치솟을 무렵, 하루키가 은근슬쩍 내뱉는  B급, C급 영화를 뼈다귀째 쪽쪽파는 기분으로 보게된다고 할 때는 찬란한 B급 매니아정서가 내몸과 정신에 맞는 옷처럼 느껴질때도 많은 것이다. 요즘은 B급정서도 개성의 구별이라는 액서세리로 활용되지만 사실 내용이 중요한거지 단어에서 풍겨나오는 이미지만 노리다보면 너무 유행적이라는 느낌도 든다. 하루키적 뉘앙스도 그렇게 흘러갔던 적이 많다. '브룩스 브라더스'의 블레이저코트를 입는다고 에피소드에 끄적였다고 해서 하루키가 이 브랜드를 선호하고 콜트레인의 음반을 어마어마하게 듣고 마라톤을 즐겨하며 생선요리에 맥주를 즐겨먹는다고 한 들, 그게 현대인의 라이프사이클에 어떤 영향을 준다는 것일까. 그건 그저 하루키의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다. 


다만 하루키의 에세이가 잘 읽혀지는건 그가 설명하는 이야기들이 대개 공감할 만하고 또 참신하다고 느껴질만큼 특별해서(역설적이게도 대중적이지 않은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대중적으로 인기를 구가한다는..)인데 역시 그가 말했던 것처럼 나도 '유려한 문장이나 치밀한 심리묘사에 감탄스러워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모조리 잊히고 아주 사소할지라도 효율적인 종류의 것만 부분적으로 기억난다'고 할때 이 아저씨는 자기가 유별나지 않고 우리랑 똑같다고 말하는 것 같다. 나도 역시 그런데..도대체 좋은 문장들은 적어놓지 않으면..때때로 인용하거나 써먹지 않으면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저 줄거리에서 파격적인 부분들에 대한 장면만 떠오른다. 어쩌면 과정에서 오는 좋은 느낌들은 공기중으로 사라지고 결과만 남는게 세상의 구조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횡행하는 수많은 주장의 대부분은 끝이 좋으면 그만이라는 정신으로 성립되어있다' (P68) ..이 문장이 진리라는건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여지껏 감상평이라고 주절거렸는데 이제 본론이라니..) 이 에세이 역시 문학동네에서 내놓은 에세이 수필집 시리즈중 하나다. 제목으로 보면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묘한 뉘앙스가 느껴지시는 분은 자신의 감수성의 예리함을 뿌듯해하는 대신 약간의 변태기질과 그 흔해빠진 AV의 몇장면이 상상되는걸 민망하셔도 상관없다. 왜냐면 하루키가 제목을 이렇게 지은건 에세이 안에 등장하는 동일한 이름의 에피소드때문이었으니까. 어느날 갑자가 'F심 연필은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 같지 않습니까' 라는 말에 '무척 난감하다고 하면서도 최근에 F심 연필을 손에 쥘때마다 그만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이 떠오르고 '이번엔 어디 , 널 한번 써볼까' '꺅 싫어요, 거짓말이죠' 라고 하는 괴이한 광경을 떠올리는 하루키 아저씨와 별반 다를게 없을테니까. 이 정도면 하루키도 역시 평범한 중년의 욕망의 아저씨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에세이는 늘 이런식이어서  어떤 중심이 되는 주제같은 것들을 책의 뼈대라고 말하기 어렵다.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다양한 사건과 여러가지 생각들이 스파게티처럼 엉크러져 하나둘씩 차곡착곡 등장했으며 그 과정에서 그저 하루키적 라이프스타일의 편린을 엿보다는 정도? 아무튼 다들 이런 것들이 궁금한 거겠지. 하루키의 소설로부터 연유한 다양한 호기심은 에세이말고는 충족할수 있는 곳이 없을테니까. 적어도 거짓말하지 않고 털털하고 속내를 가끔 드러내는 에세이야말로 하루키의 진면목을 보는 또 하나의 창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가끔 삶을 대충, 혹은 무덤덤하게 살면서도 기기묘묘한 자기정체성에 대해 특출나게 표현하는 방법을 모른다. 나는 밥을 먹었고 잠을 잤고 그리고 친구를 만났고 기분은 별로고 그래서 TV를 봤고 다시 누워서 꿈을 꿨다 정도의 패턴만 이어질 뿐이지 세상이란 이런 지루함과 뻔함의 연속인것이고 머리속에는 디지털적인 회로에서 또 하나의 연산이 이뤄지는 것처럼 변화도 없는 무미건조함이 이어지곤 한다. 


일상생활에서 낭만이란 건 묘한 감정잡기에 불과하다고 느껴질때가 종종있는데도 하루키 에세이 편린속에서는 내가 누려왔던 일상들이 그와 다르지 않음에도 훨씬 더 풍요롭게 다가온다. 그 정체가 바로 하루키의 감수성때문이 아닐까. 그가 소설을 휘리릭 쓸것 같아도 '소설가도 옛날처럼 한가로이 뜰에 앉아 참새떼를 보며 '벌써 봄이로군'하고 주절거릴수 있는 시대가 아니어서 세금이니 대출금이니 신경쓸일이 많다고 토로하고 스파게티 5인분을 방바닥에 퍼질러놓은 듯한 전깃줄 더미에 파묻혀 악전고투하면서 이것을 데모크라시의 죽음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그의 로망이다. 솔직하기도 하고 낭만적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는 솔직히 '인간은 반드시 실수를 하기 때문에 글을 쓰노라면 실수가 확고한 형태로 남는 걸 두려워한다고 고백도 했다. 


아 그래 하루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던 게지. 천재적으로 문장들을 유려하게 배치하고 단백하게 쓰며 상징적인 정서들이 담긴 단어들이 곳곳에 놓이는 걸 읽을땐 전혀 다른 거장의 모습처럼 보였는데 여전히 그는 일반사람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사는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솔직한 견해를 늘어놓을때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공감했나보다. 그도 실수를 하는 사람이라는 걸 잊기라도 한건 아닌데도 가끔 작가들은 고고한 서민 레이어에 살지 않고 몇단계 위 성층권 어디즈음에 깨끗한 정서의 레이어층에 집이 있어서 거기에서 공중정원에서 뜰에 물을 부면서 바람에 눈을 감고 글을 쓰고 있을것 같은 착각이 들곤했는데..그건 다 환타지였던 거지 싶다. 


그도 핀천의 <제49호 품목의 경매>를 읽다가 좌절하고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을 부인과 공유하며 읽는다. 하루종일 일하고 가게문을 닫은뒤 긴장을 풀기 위해 맥주를 한두병 마시고, 그 뒤에 우리집 부엌 데이블에 앉아 소설을 섰다. 거창한 공간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생계를 도외시하고 미친놈처럼 수염도 안깍고 글을 쓴것도 아니다. 금연을 할때는 남에게 시비도 걸고 지저분한 말을 내뱉으면서 남에게 싫은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요즘 사람들이 디킨즈따위를 읽지 않고 샬럿 브런테니 푸시킨이니 스타인백을 모르고 산다는 것에 대해 의아해한다. 그래놓고 자기비하적으로 '삶을 사는 방식자체가 근본적으로 글러먹은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역설적으로 내뱉어놓았는데 그 어느 누구도 이런 자기비하에 불쌍하다고 말하지 못한다. 왜냐면 그 만큼 독특하면서도 개성적이라는 뜻인데 가끔은 우리도 그렇게 살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동경의 대상이 된다면 모를까. 


나는 가끔 이런 하루키의 에세이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끼곤 한다. 나도 과거 어느지점에서는 자유스럽게 생각하고 틀에 구애받지 않았던 적이 있었는데 칠칠맞게 허술하고 구멍 빵빵 뚤린 인생이긴 했어도 좀더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었고 어느날 아침의 공기가 특별해서 뭔가 흥미진진한 일이 생길것만 같은 모험의 요일들이 등장하곤 했었는데 ..지금은 기억조차 나질 않다니 ..하루키가 가끔 이렇게 에세이에서 자신의 괴이함을 겸연쩍게 내뱉는 건 사실 자신이 민망해서라기 보단, 나 이렇게 사는데 바꿀생각도 별로 없고 내가 이렇게 생겨먹은 놈이니까 앞으로도 이렇게 살께요 라고 은밀히 이야기 하는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에서 ..고정관념속에서 익숙해져있고 깊이 있게 파고들지 않으며 회로에서 벗어나려고 하지않은 현대인들로서는 은근한 질투와 동경과 부러움이 느껴질 수 밖에 없는 삶이 아닐까. 아마도 대리만족이라도 하고 싶어서 하루키 에세이를 읽는 거겠지 싶다.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2-07-24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노르웨이의 숲』 『해변의 카프카』 등으로 폭넓은 사랑과 지지를...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
Review BOOK/철학-사상2013. 9. 28. 09:24


이 책의 원제가 '셜록홈즈로 보는 스토리텔링의 모든기술'(on Conan Doyle: Or, The Whole of Art of Storytelling)이다보니 약간의 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도 있겠다. 아마 대다수의 독자는 제목의 뉘앙스로부터 분명 '<셜록홈즈를 읽는 밤>을 기대했거나 <코난도일의 글쓰기 방법>이라던지 이것도 아니면 <코난도일은 셜록흠즈를 어떻게 썼을까>정도의 내용을 기대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이 책의 진실은 '코난도일이 저작했던 책들에 대한 소개'쪽이 오히려 더 가까운 것 같다. 


코난도일을 생각하면 '셜록 홈즈'(Sherlock Holmes)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데 이는 그의 다른 작품세계를 생각할 때, 축복이자 불행이었다. 셜록의 정체성을 벗어나기 그만큼 어려웠다는 이야기가 될테니까. 그렇지만 코난도일을 소개하겠다고 <잃어버린 세계>나 <마이커 클라크>, <백색용병단>이야기를 해봐도 독자가 과연 들어줄까 과연 셜록만큼 책종이가 뚫어져라 몰입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엄밀히 말해 저자도 '셜록을 읽는 밤'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마치 골수 셜로키언이 '셜록'을 이야기하고 싶어 언저리의 이야기를 밑밥으로 깔아놓고 틈을 엿보면서 미소짓고 있는 장면처럼 말이다.  


아마 더다(이 책의 저자 : Michael Dirda)가 서두에 인용했던 그레이엄 그린의 '나이가 든 다음 우리는 어떤 책을 존중하고, 거기서 즐거움을 얻고 , 또 이미 품고 있던 선입견을 교정하는 기회를 가지며 책을 통해서 이미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던 확신을 재발견하는' 그런 경험을 고백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최소한 폭풍이 몰아치고 쇠덩어리같은 회색의 오후에 코난도일의 소설을 읽어던 유년을 추억했던 것이겠지 싶다. '위어드 테일스', '블랙마스크' '섀도', '스릴링 원더스토리즈'같은 잡지들에 대한 추억을 알길 없는 국내의 독자로서는 이런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에 그리 크게 동화되진 않겠지만 어차피 유년으로 치자면 '소년중앙' '새소년' '어깨동무' 정도의 잡지에서 홈즈이야기를 우리도 몇번이고 접했을테니 비슷하게는 그 심정을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결국, 이야기의 포커스가 셜록홈즈가 아니라면 코난도일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지루하고 따분할 수도 있다. 솔직히 이 책에 등장하는 코난도일의 다른 작품들은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생경한 작품들 투성이다. <마이커 클라크>(1889)도 썼고 <백색용병단>도 그렇다. <잃어버린 세계>같은 경우에는 비록 조지 에드워드 챌린져 교수가 히어로적 설정이 아님에도 어드벤쳐라는 특징과 맞물려서 꽤 알려지기도 했었다.(최근에 영화로까지..) 그래도 도일의 자랑스러운 작품들 이력들에서 '셜록'이외에 다른 아무런 기억조차 떠오르지 않을땐 한가지만 선명해질 뿐이다. '지지리도 재미없는 소설' 아니었으면 '셜록홈즈'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범작들이라고 ..그래서 인지불가능의 영역에서 세월의 먼지를 얹으며 잊혀져가는 것이겠지. 그게 우리의 잘못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다 코난도일 탓이지뭐..


셜록을 좋아한다고 해서 '코난도일'의 다른 작품들도 같은 선상에서 좋아해주면 좋겠지만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코난도일의 정체성과 가치관, 그리고 성격, 글쓰는 스타일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들을 알게되는 부수적인 재미가 따라붙을 뿐이다. 덕분에 저자도 밝힌 바와 같이 약간은 인종차별적이고 '심령주의'에 물든 코난도일의 일면들이 드러나고 '명예주의자'이자 '대영제국의 식민주의'정책에 딱히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지 않는 보수적 성향도 알게된다. 맹신적이고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 되기에는 여전히 하자많은 작가로서의 모습에 실망감이 밀려오는 팬들도 있겠으나 어쩌면 그가 추구했던 것은 '셜록'만의 세계가 아닌 '모험'의 세계 전체를 꿈꾸는 순수성을 감안하면 여전히 그는 활력넘치는 작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쨋든 작가는 코난도일의 셜록그림자를 지우지 못하고 몇번의 토로를 거쳐서 '홈즈'를 썼다는 점을 설득력있게 밝혀준다.


 '최고의 문학이란 독서이후 더 나은 사람이 될수 있는 작품을 뜻한다. 셜록홈즈를 읽는 사람은 물론 더 즐거운 시간을 보냈겠지만 아주 높은 차원에서 예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가능성은 없다...중략...셜록홈즈는 절대로 고귀한 문학이 될 수 없다'


동감이지만 셜로키언의 입장에선 약간의 쓸쓸함을 느낄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홈즈를 통해서 무슨 문학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위해서 읽지 않는다는 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도일의 가치가 좀 더 '문학'적인 부분에 치중되어 있기때문에 셜록홈즈가 폄하되는 듯한 뉘앙스가 보인다는 건 실망스러운 일로 비쳐질수 있겠다. 코난 도일은 솔직했고 이런 점에서는 '셜록 홈즈'를 통해서는 '재미만을 느껴라'라고 이야기한다고 단언해도 무리가 없지만 사실 논리적 전개나 치밀한 구성에서 왠지 머리속의 뇌 한귀퉁이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활성화되면 '굉장히 셜록스러운 상태'가 되는 것에 은밀한 쾌감을 느끼지 않았던 독자들이 얼마나 될까. 우리의 뇌는 '셜록홈즈'의 일면처럼 되고 싶다는 굉장히 지적인 욕구들이 있었으므로 '기여'없다곤 말하기 어려우며 더더우기 '영향'이 없었다곤 이야기하기 힘들다.  


난 우연찮게도 T.S 엘리엇<주머니쥐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지혜로운 고양이 이야기> '숨겨진 발톱' 별명을 가진 '범죄의 나폴레옹'을 알고 있었고 그 고양이가 '모리아티'의 현신인 것도 알아채렸다. 역시 케네스 그레이엄의 명작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에서 사냥모자를 쓴 물쥐 래트가 몰이 무엇인가에 걸려넘어지고 은밀한 조사끝네 '정말 이게 뭘 뜻하는지 모르겠어? 이 아둔한 친구야'라고 말할때의 그 장면이 홈즈와 왓슨을 패러디한 것이라는 것도 눈치채고 있었다. 이런 패러디는 도처에 깔려있다. 홈즈 편린에 대한 반가움을 논하자면 끝이 없겠지만 (다만 저자가 이야기한 움베르크 에코의 '세사람의 서명 : 뒤팽, 홈즈, 퍼스 같은건 취향적으로 별로다. 그건 오버이자 쇼같은 허세라고 생각할 뿐이다.) 어쨋든 이 후 홈즈 패러디가 우후 죽순으로 등장하는 역사적 흔적들에서 굉장한 반가움을 느낀다.


작가는 이 책에서 그래도 셜록을 최대한 절체해가면 전반부를 버텼다. 이윽고 굉장히 폭력적으로 글을 써댔던 코난도일의 엄청난 체력과 열정도 소개했고 (그는 근 한달내 보헤미아 스캔들, 신랑의 정체, 빨강머리 연맹, 보스컴 계곡사건을 써내려갔다.) 코난도일이 말했던 '자신 스스로의 관심을 끌지 않는 줄거리나 사건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절대 홈즈 이야기를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부분에서도 셜록홈즈의 지향점을 얼핏 보여줬다. 이로써 코난도일이 셜록홈즈를 써내려갈때의 심정과 상황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특별하지만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이질적이지도 않는 도일의 이런 이야기들은 '셜록'매니아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도 있겠고 너무나 평이로와서 '기대에 못미치는 셜록창조자'로서 실망감을 느낄수도 있겠다. 그래도 코난도일의 '셜록'에 대한 열정만큼은 부인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겠다. 


최근 몇 년사이에 '셜록홈즈'(Sherlock Holmes)의 저작권 시효만료로 인하여 우후죽순처럼 소설 출판이 이루어졌드랬다. (시공사와 황금가지를 비롯한 여러군데서 기다렸다는 듯이 출판 시작함. 어떤 출판사가 낫다고 말하기에는 곤란함.) 이윽고 당대의 매력적인 캐릭터 홈즈가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Sherlock으로 BBC방송으로 등장한 최근에는 홈즈에 대한 매력도가 최고 피크치까지 치솟은 느낌이다. (그야말로 홈즈가 환생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는...) 물론 BBC의 Sherlock이 아니었어도 홈즈의 재래는 여러형태로 등장했던 게 사실이다. 미드  '하우스'(House)그레고리 하우스 조차도 홈즈 캐릭터의 차용이었으니까...뭐 굳이 그가 CSI 마냥 경찰노릇이나 탐정노릇을 하지않아도 그가 홈즈였다고 추정할만한 증거들은 꽤 많다. 바이코딘 중독에 아파트주소는 221B, 시즌2에서는 총으로 쏜 인물의 이름조차 잭 모리아티(Jack Moriaty)다. 하우스뿐일까. 세상에 등장했던 수많은 캐릭터들의 이면에는 '셜록'스러운 뉘앙스의 피쳐들이 슬쩍슬쩍 등장했다. 그야말로 홈즈는 불사의 캐릭터처럼 현대에도 충분히 숨쉬고 있는 셈이다.




개인적으로는 셜록 시리즈의 리바이벌이 저자가 후반부에 밝힌 '베이커가 특공대'처럼 잊혀져가는 이벤트처럼 인식되길 원치는 않는다. 그리고 그런 이벤트들은 '순수하게 셜로키언'으로서의 희열과 희극처럼 번져가는 '쇼맨쉽'에 가까운 재미들이었으므로 때로는 그런 퍼포먼스들이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굉장히 재밌고 흥미롭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덧없다고 생각하면 모를까


적어도 셜로키언이라면 '캠퍼벨 독극물 사건', '모페르튀 남작의 어마어마한 음모', '그라이스 패터슨 일가가 우파섬에서 겪은 기이한 사건', '아마추어 탁발승 협회', '비숍게이트 보석 사건' 같은 에피소드들을 창의적으로 지어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코넌도일이 마무리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그만의 형식을 빌어서 철저히 셜록스럽게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해줬으면 하는 것이다. 아직도 코넌도일만큼 재밌게 쓴 후속 작가들을 만나지 못했고 작가가 이야기한 도둑맞은 담배케이스나 랑데일 파이크 사건같은 것으로 그런 허기를 채우기에는 모자르다. 적어도 제대로된 단편 정도는 책 후반부에 실어줬으면 했는데..작가의 희열을 독자에게 강요시키는 퍼포먼스에 속은 느낌이다.


차라리 BBC의 셜록에서 약간 가능성을 보곤하는데 모리아티 사건이후에도 에피소드를 나열해야한다면 이런 미공개 사건들에 대한 에피소드작업을 이어가면 아주 그럴듯해보이지 않을까. 




코난 도일을 읽는 밤

저자
마이클 더다 지음
출판사
을유문화사 | 2013-08-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추리 소설 학교에 코난 도일 학과가 있다면 공통 필수 교재가 될...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
Review BOOK/경제-경영2013. 9. 13. 14:40


"오늘 당신기업이 사라진다면 내일 세상이 달라지겠는가" 라는 글귀를 보았을 때, 직감적으로 이 책은 기업을 운영하는 오너, 회사의 전략적 기획과 비전을 빌딩하는 기획과 전략부서 요직에 있는 인물들을 위한 일종의 강좌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많은 수의 '경영 전략'에 대한 비즈니스 서적들의 교묘함은 '전략'이라는 단어의 남용에 있다는 점을 볼 때,  책 제목으로 옥석을 가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나 최근에는 산업 발전사와 경영에서의 혁신부분에서 '매니지먼트'에 대한 진화로 '전략'의 설정과 설계에 포커스를 맞춘 탓에 전략이라는 표현들이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시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고르고 또 고르고 읽고 또 읽는다. 


폭풍처럼 불어닥쳐 뭔가 고민하고 생각하고 열심히 탐구한다는 태도에 대한 피치못할 끌림과 그럴듯한 지능적 사고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에 들떠서 무늬만 '전략'인 책들도 많았을텐데도 줄기차게 팔리는 걸 보면 궁지에 몰린 사람들은 지푸라기든 뭐든 다 잡을 것이라는 세간의 평이 틀린게 없어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책 광고에 있어서 일반인들이 통상적으로 경험하기 어려운 높은 수준을 담보하는 듯한 단어들이 등장하면 이 기대효과는 증폭된다. 이를 테면 하버드 경영 실제강좌라든지 케임브리지 경영스쿨에서 소수정예로 실시하는 특강이라던지 하는 것들 말이다. 


뭐 어찌됐든 그런 수없이 많은 트랩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서점 도처에 널려 있었다. 고르는 사람의 몫이자 선택에 모든 책임이 주어질테니 행운이 함께하시길라며 기도하는 것 외 어떻게 혜안을 주겠는가. (좋은 책들도 질떨어지는 광고를 어쨋든 붙이고 보는 시절이니..) 그래서 말인데 이 책도 이미 상업적 장치라고 불리우는 몇가지를 사용한 탓에 의심의 눈초리가 읽는 내내 이어졌드랬다. 전략가하버드 경영대학원. 이제 의미도 퇴색되어버려서 별 영향도 없다고 항변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두가지를 제거한 채 귀퉁이 이 책이 '경쟁력있는 기업되기'따위의 제목을 붙였다면 구입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해보자. 확률적으로도 구매는 어렵다.


전략에 대한 베스트셀러들의 통상적인 오류나 실수같은 것들은 이런 것들이다. '전략의 요체'대한 개념설명으로 모든 것을 대신하려고 하는 듯한 자세, 그리고 실제 있어왔던 예제나 사건들의 나열,(여기서도 IKEA가 등장한다. 뭐 어쩔수 없는거겠지 싶긴하다.) 벌어진 결과에 대해 귀납적인 도출로 결과를 가지고 이론에 꿰다 맞추려는 태도. 그리고 그걸 전략적 혜안의 결과였다고 포장하는 일들..우리가 신이 되어서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모든 인과관계를 이렇게 천편일률적으로 재단해버린다면 이 세상은 보다 더 디지털적이고 매트릭스적이고 완벽하게 들어맞는 귀납적 세계가 될텐데 실제로는 모두들 아시는 거처럼 전혀 아니올시다다. 지금 이 순간에도  경제와 경영의 세계는 카멜레온처럼 변한다. 아마 이 책이 시작을 '슈퍼 경영자 신화' (경영자의 능력에 기대어서 무엇이든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경영자는 자기가 믿는 바를 실천할 뿐이라는..)가 비즈니스를 망하게 만들수 있다는 지점에서 출발한건 참신했다. 


많은 수의 책들은 경영자의 철학적이고도 심오한 마인드에 초점을 맞추곤 하는데 사실 그런 다짐이나 신념들이 경영에 얼마나 많은 리스크를 야기시키는지에 대한 검증은 들은 바가 없다. 그저 성공하면 '신화'가 되는거고 실패하면 '소리없이 사라져주시니까' 사람들이 접하는 레전드와 신화의 세상에서는 동일하게 반복되는 경영자의 능력이 얼마나 영향력을 미칠까라고 생각해보면..그게 다일걸. 경영은 그게 다야라고 말할 전문가분들이 계실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히어로를 마냥 기다려야 한다. 슈퍼 경영자는 저자의 표현대로 굉장히 오류에 빠지기 쉬운 일반 논리이자 맹목적인 바램 기대 같은 것으로 이뤄진 위험 일수도 있는 것이다.  얼마 전에도 들은 바 있었던 경영의 환경은 '카오스적인 혼돈'과 '예측가능한 영역'으로 구성되어질 수 밖에 없다고..따라서 혁신이란 어쩌면 우연처럼 얻어걸린 '선물'처럼 다가올 수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 이면에는 예측하기 어렵고 괴이하게 요동치는 요인들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다. 그래서 전략가가 갖추어야 하는 능력 첫머리에다가 업계분석이라고 하는 상황적 부분들을 심어놓았을 것이다. 특히나 통제할 수 없는 경쟁요인의 인지.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어느날 등장해버리는 블랙스완과도 같은 사고들, 그리고 변혁들에 대해서 경쟁요인,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시각을 사소하게 여기지 말라는 지적은 경영자들에게 '당신네들의 신념보다 그런게 더 중요하잖소. 주위를 둘러보고 상황파악을 해보시구료'라고 말해주고 있는 듯 하다.  신화적이고도 우화적인 이야기들의 허상이 없어서 좋긴 했지만 손에 잡히지 않을 가치상승에 대한 '기업목적'은 사실 증명하기에 너무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 언제부터 이미지 광고가 시작되었다고..언제부터 기업이 자신들의 가치를 고고한 무엇들이 포장하기 시작했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지만 그대로 실천하다고 느껴지는 회사를 떠올리라고 하면 딱히 할말이 없다.  


"오늘 당신기업이 사라진다면 내일 세상이 달라지겠는가" 


여러번 되뇌어봐도 그럴 거 같지는 않다. 세상은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그저 묵묵히 흐를거고 사람들은 서서히 기업이름을 잊게 된다. 그렇다고 희소성과 진입장벽에 대한 워렌버핏의 충고를 잊었을 리는 없다. 모두들 다른 기업들이 진입해 들어오도록 허락하지 않는 막강한 힘은 '제품을 구성하고 설계하는 유틸리티적인 능력'외에도 가치를 부여하는 그 기업의 존재목적일 것이라고 누군들 생각안할까. 누구나가 그러고 싶어한다. 다만 이것을 어떻게 실현하는지에 대해서 막막함을 느낄 뿐이다. 그리고 인내의 시간이 흐른다. 언제즘이면 우리기업의 가치가 수익실현의 중요성을 넘어설 수 있나하고 말이다. 전략가들의 대개는 이런 불확실성에 대해서 예견하고 측정하는일을 꺼려한다. 어디로 튀는지 가늠하기 어렵고 얼마나 걸릴지도 애매하기 때문이다. 통제할 수 있는 분야에만 주력하는 전략가라는 지적은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분명히 업계에서는 통제불가능한 요소들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걸 파악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라는 점이 포인트인 것이다. 


이걸 이길수 있는 경쟁력이란 목적을 다시 한번 재고하는 것. 우리의 기업은 어떤한 목적을 향해가고 있느냐의 문제. 끊임없이 이 목적과 가치에 대한 재검토와 궤도 수정과 경재요인의 다각적인 분석과 불확실한 요인에 대한 준비, 그리고 다시 목적부합에의 여러가지 고려사항들을 끌면서 전략가는 끊임없이 시스템을 교정하며 성과물에 대한 효율성을 재고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요약하자면 딱 두 부분이다. 하나는 당신의 기업은 필요한가요? 그리고 또 하나는 당신의 기업의 목적은 무엇인가요..다. 돌이켜생각해보면 많은 전략가들이 '업계분석' 및 '불확실한 경쟁요인'을 감안하지 않는다는소리와 같고..눈앞의 이익때문에 궁극적으로 기업을 대표할 만한 정체성같은걸 아주 가볍게 생각한다는 소리와도 같다. 


어쩌면 지나치게 세속적인 어떤 이디엄이 그 기업을 지배한다고 할지라도 구성원들이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며 경쟁요인에 대한 끊임없는 교정이 이뤄지는 기업이라면 험난한 경쟁의 토네이도 속에서 굳건히 버텨나갈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전략가로서의 롤을 감안한다면 굉장히 난해하고 분주하고 고뇌해야 할 난제들이다.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아니 그런 상황에 처해있다면 늦었다고 느낄수도 있겠고 어쩌면 아주 먼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잘하는 분야만 보려고 할테니까. 공포의 영역에 진실이 놓여져 있다면 더더군다나 성공의 확률은 더 떨어지겠지. 그래서 당신은 전략가입니까라고 물었나보다. 제대로 된 전략가들이 해야 할 일이 그런거라고...  




당신은 전략가 입니까

저자
신시아 A. 몽고메리 지음
출판사
리더스북 | 2013-04-01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 이 책은전세계 35개국 164명의 글로벌 리더들이 오직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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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ewell
Review BOOK/에세이2013. 9. 12. 21:39


난, 하루키가 예전 무라카미 라디오에서 밝힌 브래지어 에피소드에서 (여권신장을 위해서 브래지어 소각 이벤트를 벌이는 걸 보고 '과연 입던 속옷일까'라는 의문을 가졌다고 밝힌 ..) 약간의 기이한 변태(?) 기질이 있다고 느꼈던 적이 있었다. 그 뒤로도 1Q84의 덴고와 후카에리의 판타지 퍼포먼스(?)도 그렇고, 이미 <노르웨이의 숲>에서 와타나베도 나오코와 미도리, 그리고 레이코와 자유분방함을 보여준바 있었으니까 (당시의 평론들을 보면 '학생들의 머리속에 온통 섹스밖에 없는게 놀랍다'라는 비스무리한 평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오해도 그런 오해가 없을거다라고 생각해도 역시 성적인 코드가 등장하면 그 아저씨 또 변태기질이 도지셨나봐 그런쪽으론 굉장히 기발한 하루키씨..라고 해도 뭐 딱히 할 말도 없다.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이란 제목도 약간은 그런 기질이 반영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쌍둥이 자매를 여자친구로 가지고 싶다는 에피소드에 달린 제목이었으니까. 어쩌자고 쌍둥이 자매를 여친으로 해서 뭐 . 언니인지 동생인지 일부러라도 헷갈리고 싶다는 거에요 뭐에요 하루키씨 !!! 라고 말이라도 하고 싶지만..사실은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역시 '이번엔 널 한번 써볼까?" "꺅 싫어요 거짓말이죠" 라고 이미 또 쓰셨으니  이 정도되면 기발한 상상력을 넘어서 주책이다 싶을 정도다. 사실 우리도 이보다 더한 상상력을 발휘해서 개개인의 본능속에서 더 엉뚱한 광경들을 만들어내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다. 더하면 더했지... 하루키의 매력은 꼭 소설속에서 '상실'과 '비관'만을 말하고 '본질'에 대한 탐구만으로 일목요연하게 달려가는 그런 형태 외에도 이런 엉뚱함과 유쾌함이 더 본질적인건 아닐까. 실제 삶과 더 관련이 있을테니까 말이다. 


기질적으로 보면 형식적인 부분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성격때문에 안티 시스템 히어로(Anti-System-hero)같은 작가 같다고 느낌도 종종 든다. 이 동네에서 이 정도의 아웃사이더 히어로는 '커트 보네거트'옹 하나만으로 충분하겠지만 하루키도 거참 나도 만만치 않아 제기랄 하고 속으로 외치지 않는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애초부터 그는 이사를 거주지변경따위의 개념으로 인식하지 않고 주기적인 휴지통 비우기로  이사의 필요성을 인식한 바 있고, 레이 파커 주니어의 'I Still Can't Get Over Loving you'보단 제목으로 'I Still 사랑해'가 더 낫다고 할 만큼 심플한면도 있다. 본인이 에세이에서 밝힌 것처럼 그저 '그런거지뭐'와 '그래서뭐'를 남발하면서 넉넉하고 무책임(?)하게 살고 싶어하는 쪽일 수도 있다. 물론 이 정도되면 일반 서민들도 바라마지 않는 편안하고 쾌적한 마인드일테지만 우리가 정작 부러워하는건  동심과 감성의 스파게티가 오밀조밀 잘 자리잡고 있는 특유의 정서지 싶다. 


종종 그의 글에서 선더버드를 탄 여인이 등장하곤했는데 이게 바로 영화 <청춘낙서>에서 '리차드 드레이퍼스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본 선더버드를 탄 꿈의 여자'the girl of a dream'를 잊지못해 밤새도록 찾아다니는 에피소드에서 연유한 거였다. 그리고도 그는 원래 사랑이란 이렇게 기존 시스템을 넘어선 행위라고 했드랬다. (난 지금도 그런 여인이 아무리 멋져도 밤새 찾아헤메고 싶은 마음같은 건 없지만) 세상의 끊임없는 고착화된 시스템과 고정관념들의 틈에서 분투하는 하루키씨라니...그러고 보니 문득 소설을 쓰는 이유로 '개인의 혼이 가진 존엄함을 드러내어 거기에 빛을 더하기 위해서..우리들의 혼이 시스템에 끌려들어가 멸시당하는 일이 없도록 항상 거기에 빛을 비추고 경종을 울리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보자면 소설이든 에세이든 그는 세상의 고정관념 따위는 내 알 바 아니다라고 지속적으로 은근히 글로 표현하고 있는거 아닌가. 



고정관념 같은 거야 그렇다쳐도 개인적으론 그의 정서적인 표현능력이 부러울 따름이다. <렉스턴의 유령>도 그렇고 <도쿄 기담집>외에도 로저 젤라즈니의 <고독한 시월의 밤>같은 고딕적인 뉘앙스를 좋아하는데.. 하루키에겐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상상력으로 충분히 이런 이미지들이 글로 아무렇지도 않게 재현되어지나보다. 찰스턴의 유령이라는 대목으로 그가 묘사한 문장들...


'해질 무렵 코블스톤이 깔린 찰스턴의 고즈넉한 거리를 걷다보면 화려하게 세공된 검은 철문 너머에 , 또는 뿌옇고 희미한 불빛에 드러난 차고 한구석에 무슨 이상한 그림자가 비친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밤의 정원은 적막하고 아름드리 떡갈나무가지에 털실처럼 늘어진 착생식물은 강바락에 흔들리고 백일홍 꽃이 저녁 어둠에 어스름하게 떠있다...모든 것이 고풍스럽고 조용하고 그리고 우아하다


라고 했다. 소설적 배경으로도 하나도 아쉬울 것 없는 밑그림들이다. 그래서 아마 감탄하고 찬탄하는 거겠지. 일부러 만들어보려고 해도 이미지화 시키기 힘든 것들은 수월찮게 글로 그려내는 재주라고나 할까. 그게 관찰력이었든 아니면 그가 가진 특유의 정서적 질감이든 간에 그런 부분은 부러울 수 밖에 없다. 내가 멈춰버린 시계를 보면서 '전지식 시계의 죽음에는 차갑고 무거운 어떤 것이 있어서 몇년에 한번 밖에 멈추지 않기 때문에 그 죽음에서 피할 수 없는 숙명의 도래'를 느끼기야 하겠는가. 강의에 들어갔는데 '휴강'이라고 써있어서 이 짜투리 시간이 마치 인생에 있어서 덤으로 주어진 캐러멜 같다고, '핀볼머신'을 보면서 왠지 멸종해가는 공룡같은 슬픔이 떠다닌다고 혼자서 감상에 젖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저 멍이나 때리면서 현상이 눈표피에서 뇌쪽으로 혹은 가슴으로 더 이상 진입하지 못하고 증발해버리는 거다. 그래서 이 에세이를 읽으며서 감정 회로사이에 끼인 고정관념의 콜레스테롤이 녹는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삶의 유쾌함 지수가 올라가는 느낌과 소소함으로 읽혀지는 소중함같은 것들을 뒤늦게 알게되는 기쁨...그런 것들이 에세이 전반에 구름 처럼 떠있다. 


'모든 면도기에도 철학이 있다'고 했으니 어쩌면 계속해서 무라카미의 에세이를 읽다가 보면 그 느낌들이 내몸에 맞는 옷처럼 편안하고 당연하게 느껴질 날도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그나저나 본인 말처럼 '자기를 둘러싼 호의와 악의의 총량을 양방향으로 , 그것도 비약적으로 확대된지 꽤 되셔서 (유명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 당시 에세이를 쓸 때처럼 자연스럽게 오가면서 편안히 뭔가를 하실 수 있을지 의문이다. 마라톤이라고 뛰려고 참가하면 갑자기 옆에서 '오..하루키씨 아니세요. 책 잘 봤구요. 사진보다 낫네요 라고 할 수도 있다. 이젠 그가 사진 찍는 걸 별로로 생각한다고 해도 이미 많은 스틸들이 퍼져나간지 꽤 됐다. 오히려 모르는 사람이 있는게 더 이상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지금의 하루키씨는 에세이에 뭘 쓰려고 해도 이젠 정말 귀찮아졌을수도 있다. 그냥 상상해봤다.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2-07-24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작가가 아닌 생활인 하루키, 젊은 하루키를 만난다 무라카미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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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BOOK/철학-사상2013. 9. 6. 22:41


간혹, 아주 두터운 두께의 고전이나 오랜 문학소설, 그리고 이해하기 어려운 현대 문학들을 접하게 될 때, 테크놀로지적인 습득장치가 마련되어서 코인을 넣고 머리에 뭔가를 연결하고 '스팍'하고 번쩍이면 머리의 기억장소에 정확하게 내용과 핵심들이 저장되면 정말 편할거야라고 황당한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아마 키아누 리브스가 코드명 J에서 비슷한 걸 했었지싶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 싶지만 그만큼 세월을 감내한 마스터 피스 일수록 왠지 모를 거대 지루함은 견디기 힘들고,  암연과도 같은 혼란의 미로속에서 헤맬 만큼의 얕은 이해력을 생각하면 상상이라도 이랬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왜 그렇게 책 읽기가 어려운 건지.... 술술 읽히고 머리속에서 갈갈히 용해되고 지독히도 다양한 문장의 치즈들이 덕지덕지 발려져 꾸역꾸역 뇌로 들어오면 이를 재빨리 녹여줄 콜라같은 '이해력'이 있었으면 하는데 하지만 그런게 있을 턱이 있나 세상은  출중한 독서가를 많이 등장시켰어도 절대로 '훌륭한 독서가'가 되는 기발한 방법같은 건 알려주지 않는 법이다. 이게 다 진득히 뭔가를 읽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서일 수도 있고 뭔가를 진득히 읽고 생각하기를 세상이 원하지 않아서 일 수도 있다.  그래서 책 다이제스트도 생겨났다고 믿는다. 책 내용을 친절히 풀어서 설명해주고 핵심이 뭔지도 가르쳐주고 개인적인 평도 덧붙여주고 그러면서 그 험난한 '독서생활'이 없을지라도 유사 그럴듯한 독서가 행세를 할 수 있지 않은가. 그야말로 편한 세상인 것이다.  


이런게 다 나쁘다는건 아니다. 솔직히 언제 읽을 지 알수도 없는 수없이 많은 고전들과 듣도 보지 못한 소설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나오게 되면 여기서 뭘 골라낸다는 것 자체가 노동이다. 이렇게되면 읽는 능력외에도 '골라잡는' 능력도 필요하게 되고  골라잡으려면 '모니터링'을 잘해야 하고 이 모든 걸 다 감안하면 거대한 시간 놀음 속에서 점점 침몰되어가는 자신을 볼 수도 있다. 어떻게든 좋은 책을 골라는 잡아야겠지만 이런 걸 누가 가르쳐줄까..그리하여 책을 읽고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책을 다시 골라잡게 된다. 아마도 MD추천이니 하는걸 믿고 책을 잡았다가 지적허세질에 당했다고 부르르 떨면서 책을 놓아버렸던 경험이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래도 다행인건 알려진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이런 책을 내게 되면 적어도 그 책 속에서 언급했던 비평과 이야기들에 신뢰감을 가지고 받아들이게 된다는 점이다. 


서평도 그렇고 책읽기에 대한 책들도 그렇고 교습적인 강요투의 문장만 무더기로 반복되지 않는다면 해가 될 이유가 없다. 어차피 다들 참고이상으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고 개인적인 취사선택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을테니까 책을 읽는 시점에서는 아 그래 이 책이 그런 책이야 한번 고려해보도록하지 라고 스스로 모종의 체크만 해둘 뿐이다. 나중에 한번 그 책에 대한 저자의 평을 떠올리며 슬쩍 몇장 넘겨보다보면 책의 저자가 말한 뉘앙스가 맞는지 어떤지 알게 되고 그러다가 보면 저자가 책을 읽고 감회를 밝혔던 그 책의 가치를 알게 된다. 그정도면 훌륭하다. 그런데 여기에 몇가지 더 보너스로 추가한다면 이런게 있다. 



닉 혼비


책에 대한 평을 쓰면서 자기만의 스타일과 격조있는 문장과 그럴듯한 비유와 기발한 표현들을 버무려서 독자가 책을 읽지도 않았는데 마치 이제 막 읽은 것처럼 감정을 전달해줄 때, 옆에서 친한 친구가 어제 읽었던 책 이야기를 도란도란 이야기해주는 것 같을 때가 있다. 그리고 자꾸 이 친구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지는거다. 어떤 재미난 이야기를 해줄까 오늘은 또 어떤 책을 읽고 유머있는 이야기를 해줄까. 번뜩이는 재기와 신랄한 지적질과 솔직한 표현들을 기대하며 기대한다. 그렇게 즐거움을 가지고 책에 대한 책을 읽는 것. 그 속에서 저자의 아이덴티티까지 덤으로 획득되어지면 단순히 책정보를 전달해주는 것 이상의 에세이를 만나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 책이 바로 이 <런던 스타일 책읽기>다.  


물론 알베르토 망구엘 할아버지가 이걸 봤으면 이런 허접한 독자들을 봤나. 내가 그랬지 않나 책을 읽을때 낱낱히 문장을 해부하고 그 이면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완전한 번역가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어라고 신랄하게 뭐라고 하시겠지만 설사 그렇다고해도 우리는 책에 대해 대작해주는 작가를 믿을 수 밖에 없다. 그는 나보다 더 지적우위에 있고 사리를 분별할줄 알고 가치기준의 명확함과 대중들에 대한 개인적인 판단이 어느정도 인정되어있으니까..그렇지 않았으면 내가 닉혼비의 소설을 읽었을 이유가 없고 이 책을 굳이 들고 닉혼비 특유의 재치를 읽으며 미소를 지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닉은 책에 대해 훌륭한 자세를 가지고 있다. 그는 '돈을 받지 않았어도 했을일, 즉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쓴 글에 대해서 돈을 받을 셈이었다고 솔직히 고백했고, '우리는 스스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이미 읽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책을 읽는 경우가 많다고 짐짓 아픈 곳을 찌른다. 그렇다. 이런 허세질이 없으면 우리가 괜히 뜬금없이 날도 더운데 혹은 스산해질때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이해도 안가는 고리타분한 고전문학을 집어들겠는가. 스스로를 속이는 또 하나의 기묘한 지적놀이로 독서를 택해도 개멋 부린다고 뭐라 하지 않는다. 다만 닉혼비의 이 글을 접하게 되면 등짝을 손바닥으로 짝하고 맞은 기분일 거다. 


그런 재미없는 책을 읽으면 지루해지고, 지루해지면 성격이 더러워지고 그렇게 되지 않기란 너무 쉬운 방법, 재밌는 책을 찾아서 읽으시라는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그리고 솔직한 권유야말로 가식없는 '독서가'로서 진솔한 모습이 아닌가. 닉혼비여서가 아니라 어느누구라도 이렇게 말해줬어야하는데 다들 청소년 권장도서 100선이니 뭐니 하는 항목에다가 읽기도 싫은 무지막지한 목록을 나열해주면 어떡하란 말인가. 이런걸 접하면 개인적으론 다들 독서의 적들 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더 읽고 더 배우신 양반들이 추천해주는 책이란 것들이 지나칠 정도의 개인적이라는 건 뭔가 이기적이란 생각이 든다. 그럼 결국 닉이 말한 '책은 어려워야 하고 어렵지 않으면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박혀있는 그런 분들 뿐인거다. 


사방팔방에서 이런 공격들로 버티려면 이 책을 읽으면서 닉혼비가 종횡무진 펼치는 쾌도난마를 구경하면 된다. 정치인 전기따위를 읽으면서 하품하지 않고 좀 더티하지만 3류소설을 읽으면서도 피식 피식 웃는게 더 유익하다는 무언의 공감대가 문장을 통해 드러난다.  이 책에서 언급한 책들의 대개는 국내에 출판되지도 않은 듣도보지 못한 책들도 부지기수지만 그 책들이 가지는 진정한 요약본을 바란건 아니었으니 애초에 별 문제는 없다. 하지만 그가 어떤 책에는 기막힌 칭찬을 ...그리고 어떤 책은 도저히 좋은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책제목도 표기할 수 없다고 솔직히 써주었을 땐, 닉 혼비는 믿어도 된다고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런던스타일 책읽기>의 서평스타일을 본받으려는 MD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화려한 책편력의 이면에서 미친듯이 읽어야 하고 미친듯이 책을 구매해야하는  필수부가결한 삶이 따라붙어야만 가능하다고 느낄즈음 , 닉혼비의 이 책이 시리즈로 나와줬으면 어떨까하는 기대를 하게 된다. VOL.1 VOL.2 이런식으로..정말 재밌지 않을까. 수없이 쌓인 책더미에서...무한히 반복되는 바벨의 도서관에서 책장의 한칸씩을 먹어치우는 신출귀몰한 책벌레를 보는 재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자 즐거움이다. 




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

저자
닉 혼비 지음
출판사
청어람미디어 | 2009-05-18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19세기 찰스 디킨스, 체호프의 고전부터 21세기의 최신소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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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BOOK/소설2013. 8. 28. 11:04


블레이크 애드워즈의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1961)을 본 건 어린시절이었는데 지금와 생각해보니 도대체 뭐가뭔지 알지도 못한 채 그냥 보았던 것 같다. 이건 다들 아시는 오드리 햅번(Audrey Hepburn) 때문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게 없다. 청순하고 깜찍하면서도 톡톡튀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홀리'에 이입되었을 때, 모두들 <로마의 휴일>의 앤이 좀더 세속적이고 거침없어졌구나라고 이해했었으니까. 관객들은 영화속에서 오드리 크로니클을 모니터링하는 마음가짐으로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로마의 휴일>(1953)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오드리가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에서 명예와 인기를 지속시키기 위해서 캐릭터를 유지하겠다고 선언했었어도 이상할 건 없다. 다만 <로마>나 <티파니>는 오드리를 담는 같은 성향의 그릇이었을까란 물음이 남긴한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계속 이야긴 하고 있지만, 사실 말하고 싶은건 영화가 꼭 트루먼 커포티의 <티파니>를  100% 반영했던 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로마의 휴일>의 앤은 결코 <티파니에서 아침을>(이하 티파니)의 홀리가 될 수 없었다. 이게 오드리였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도 있긴 하지만 가능했던 이유라면 '티파니'가 소설 원작과는 다른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다는데에도 이유가 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발리에서 생긴 일>의 하지원이 조인성과 소지섭 중 한명에게 고백하고 한명과는 친구먹고, 발리에서 셋이 나이트파티라도 하면서 소근소근 웃으며 엔딩이 되버린 것과 비슷하다.) 


뭐 굳이 새드엔딩이나 극적인 내러티브가 있어야만 그럴듯한 작품완성도가 유지되는 건 아니지만 '홀리'는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영혼이었고 '폴'이란 인물은 등장도 안했고 (그럼 소설의 화자가 '폴'이 아니라면 누구냐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소설 어디에도 화자가 홀리와 결혼해야겠다고 다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화자는 커포티의 감정이 깃든 CCTV 정도..게다가 커포티는 동성애성향의 뉘앙스를 너무 풍긴다.) 홀리는 행복했지지도 않았드랬다. 나도 홀리가 행복해지는데는 찬성이다. 소설속  인물이 불행을 향해 치닷는 걸 보면서 이게 제대로된 현실반영이야 이랬어야 해라고 위안따위를 하며 가식떨고 싶은 마음 추호도 없다. 결국 내가 어린 시절 보았던 영화 <티파니>의 그 꽉찬듯한 희망과 행복은 그저 꿈같은 연출의 산물이었으며 실제 원작에서의 홀리는 좀더 애처롭고 처연하며 쓸쓸하게 저벅저벅 스토리를 기어나가 풍문으로 엔딩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대로 했다간 1960년대 영화를 보고나서 다들 길거리에 침을 뱉거나 술병하나를 들고 '삐뚤어져버릴거야라고 우울해했을 것이다. 이걸 시대가 용납했을리가 없지 않나..


티파니에서 아침을 (양장)트루먼 카포티(Truman Cap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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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간히 섞인 황갈색 머리카락. 알비노처럼 하얀금발. 노란머리채가 아른거리고 여름에 가까운 따듯한 저녁에, 날씬하면서도 시원한 검은 드레스에 검은 샌들을 신었으며, 진주초커를 건 채 세련되게 마른몸매를 자랑하며 아침 식사용 시리얼처럼 건강하고 비누와 레몬처럼 청결한 분위기를 풍겼던 여인이 홀리였고 오드리였다. (햅번 스타일이라고 불리우는 블랙드레스와 진주목걸이 매치업은 솔직히 커포티의 묘사덕분이지 오드리가 창안해낸게 아닌 것일 수도 있다.) 영화에서의 오드리는 원작의 이미지를 제대로 반영했다. 이걸 그레이스 켈리가 할수도 없고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더더군다나 할수 없는 영역의 이야기다. 활자그대로 옮긴다면 오드리는 '홀리' 그 자체로 완벽한 변신을 했던 셈이다. 이후로도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는 홀리를 떠올리기에 앞서 먼저 머리속에 오드리 햅번이 해맑게 웃는 모습이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그 다음 소설의 명문장, 혹은 영화속 대사가 떠오르는 식이다. 


영화의 잔상이 이토록 강했으니 원작소설을 읽을 때 홀리가 어떤 캐릭터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건 다 영화덕분이지만 초반부를 지나 중반부를 넘어갈때까지도 괴리감은 미미했으니까 나쁜 상상력은 아니었다. 다만 스토리가 진행됨에 따라 커포티 원작의 소설이 좀더 농도짙은 현실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이건 위스키에 눈이 풀려서 <왈츠추는 마틸다>를 합창하는 호주장교들 틈을 스카프처럼 떠다니는 홀리의 행실에 관한 묘사때문만은 아니다. 코티지 치즈와 멜바토스토로 연명하면서도 레즈비언이 훌륭한 주부라는 홀리의 익살스러움같은 건 오히려 애처로운 것이기도 했고..주변에서도 그녀를 '세코날 병바닥을 비우고 인생끝났다고 신문에서 보게될 여자라고 읇조릴 때는 아 커포티가 홀리를 어떤 부류의 삶을 상징하는 캐릭터로 묘사하리라는 것정도는 예측이 되고 있었다. 다만 영화는 너무 귀여웠고 매력적이었을 따름이다.

시간이 지났어도 홀리가 사람들의 기억과 추억속에 남는건 오히려 이미지도 이미지지만 특유의 '솔직함' 때문이었을 것 같다. 대중매체들은 홀리를 고전 된장녀의 프로토타입이라고 가끔 언급하지만 된장녀는 모름지기 스스로를 되돌아보거나 처지를 신랄하게 비꼬거나 하는 일 따위는 별로 안하거나 스스로 인정하지 않거나 뭐 그렇다. 홀리가 영화배우로 변신해서 스타가 될 만한 기회가 왔음에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자신은 절대 영화스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너무 힘들고 자신의 콤플렉스는 그럴만큼 열등하지 못했으며 영화스타가 된다는 것과 하늘높은 줄 모르고 솟는 자존심이 손을 잡고 나란히 가야하는 일이었다고...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난들 부자고 유명해지는게 싫겠어요. 내가 어느날 아침 '티파니'에서 아침을 먹는다해도 여전히 나이고 싶어요 " 라고..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라고 제목이 정해진 이유가 뭔지 좀 깨끗해지는 느낌이다. 

쿨하면서도 적극적이고 활력이 넘치고 매력적이기까지하면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기 마련이다. 때가 지금의 분위기와도 많이 달랐던 원스어폰어타임 시절인데도 이런 여성을 그릴수 있었다는 건 굉장히 파격적이면서도 진취적인 여성성에 대한 사회적분위기를 가늠케한다. 대개의 경우 이렇게 매력적인 여성들이 이야기구조상 '결핍'을 가지지 않는건 일종의 배신같은 것이었을테지만 이런 것들은 동정심을 자아내고 애처롭게 바라봐주는 독자들의 증가를 위한 것들이지 신랄한 삶을 이야기하고 싶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가 그렇게 흘러갔던 거겠지 그래서 홀리가 마지막 프로포즈를 받아들이고 정상적인 삶으로 제자리 했던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아니올시다였다. 

홀리 골라이틀리의 소설속 등장에서 드러나는 몇가지는 '고양이에게 이름 붙이지 않기' 그리고 '심술궂은 빨강'에 대한 공포. 사랑을 바라보는 굉장히 작위적이고 가벼운 듯한 홀리의 태도. 감춰진 현실의 이름 '룰러매반스'에 담겨진 그녀 본연의 과거들. 그럼에도 유지되는 그녀의 애처로운 모습이다. 소설책의 정확히 반의 지점이 지나게 되면 이런 우울함과 안타까움들이 와인잔에 와인이 넘치도록 수위가 올라온다. 적당히 끝냈어도 좋았을 파티용 와인이었는데 그만 흘러서 넘치고 파티는 망가지고 그러는 느낌 알잖는가..

" 난 이 고양이에게 이름을 줄 권리가 없어요. 얘는 누군가의 것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우리는 어느날 그저 강가에서 마주친거나 다름없죠. 서로의 소유가 아닌걸요. 얘는 독립적인 존재이고 나도 그래요 " 

"두렵고 돼지처럼 땀이 나는데 뭐가 두려운지 모르는...다만 나쁜 일이 생긴다는 것 말고는..그런데도 뭔지 모르는 거예요" 

홀리가 그렇게까지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아마 스스로에대한 독립심이나 현실에서 불현듯 닥쳐올 미지의 아슬아슬함 공포감에 대한 반작용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도 가끔은 홀리같다면 참 삶에 조언같은 건 적나라하게 말해줄거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아마 홀리가 화자에게 이야기했던 '돈을 버는편이 좋을것 같다고 비싼 상상을 하니까라고 말하는 대목들은 폐부를 찌르면서도 현실적인 부분 아닐까. 그리고 내가 빈정거리며 그 의견에 반대라도 한다면 그녀는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여기서 저 문까지가는데 4초면 되겠죠. 난 2초 주겠어요. 라고....정신이 확들 것 같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커포티의 소설에서만큼은 여러가지로 머리가 복잡해지곤 한다. 나뭇잎이 쌓인 호숫가에서 낙엽을 태운 모닥불이 인디언 신호처럼 흔들리는 공기속의 유일한 얼룩이었다고 할 때만 해도 편안한 정서와 커포티의 탐닉적인 묘사를 그냥 즐기면 될 뿐이야라고 생각했는데 화자의 소설에 대한 평을 하면서 "두번 읽어봤는데 짜증나는 애들이랑 흑인이랑 떨리는 이파리 어쩌고...아무 의미없잖아요"라며 폭풍의 언덕고 비교하면 그야말로 멘붕이 올 것이다. 짝사랑하던 여인에게 의외에 말투에 당황하고 찬물담긴 컵한잔 확 뿌려맞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솔직함도 지나치면 병이겠지만 홀리정도 되야 현실에 발딪고 사는 것 아니겠는가. 티파니를 동경한다고 해서 상류사회를 꿈꾸는 머리에 바람든 여인이라고 매도하기는 억울한 거다.


그래서 아마 말미에 휘몰아친 사건들에 묻혀 사라져버린 홀리가 해피엔딩일지 새드엔딩일지 가늠이 안되는 것이겠지싶다. 걸어온 것만 보면 폭풍처럼 살아갈 수도.. 그렇다고 박차고 나갈 용기와 재능도 없어져버린 보통사람들로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었으니까. 그저 소설의 화자처럼 슬쩍 다가갔다가 연정의 마음을 품었다가 의외로 쌀쌀함에 상처받고 다시 너도 함 상처받아봐라고 외면했는데 아예 그 존재가 삶에서 사라져버린 느낌..비워진 자리를 보며 더 쓸쓸하고 슬프다는 느낌..그래서 차라리 홀리가 티파니에서 아침을 먹더라도 자리에 있었으면 하는 느낌...


아마 그런 느낌이 소설을 읽고 난 한동안 계속 스물스물 거렸던 것 같다. 


티파니에서 아침을

저자
트루먼 커포티 지음
출판사
시공사 | 2013-06-24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잊을 수 없는 한 시절에 관한 짧은 동화!고독한 소년의 눈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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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ewell
Review BOOK/자기계발2013. 8. 26. 14:04


인문학이 아무리 모호하고 힘들어도 사실 문학이든 소설이든 역사이야기든 인문학과 관련없다고 단언할만한 분야가 없다고보면  이건 완전히 새로운 뭔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원래 인문학이란 그런거니까. 사람에 대한 학문이 인문학인데.. 어디 인간을 빼고 이야기할만한 학문들이 설마 있기나 할까. 우리 모두는 어느정도 인문학을 뒷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지갑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지니고 다녔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어쩌면 일상속에서 겪어온 모든 예제들은 '인간사'에 이미 다 출제되었을테니 바이블도 이런 바이블이 없지 싶기도 할테고...어차피 인문학적 회귀는 누구나가 예측가능한 것들이었다. 원래 뭐가 잘 안풀리면 기본부터 생각하기 마련이다. 새삼스럽게시리 이제와서 인문학 붐이라니..약간은 일희일비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대개 폼 좀 잡으시고 수사학적인 진지함이 덕목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중에는 '봄날 담장에 앉아 물방울 무늬의 옷을 입고 사탕을 빠는 아이들'이 쉽게 인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게 영 미덥지 않으실 수도 있다. 너무 가볍고 천박해보일테니까...그래서 인문학 입문에 관한 진지터지는 책들이 쏟아져나오는거라고 본다. 인문학적인 본연을 말하기에 앞서 태도부터 거론할 때는 묘한 반감 같은게 괜히 스물거리겠는가. 


최근에 읽었던 <런던스타일 책읽기>의 닉혼비는 '독서가 레저활동으로 자리잡으려면 독서의 불분명한 혜택보다는 즐거움이 장려되어야 한다'고 했었드랬다. 들여다보기에도 두터운 고전들의 향연틈에서 재미는 어따 팽개치고 읽어야 할 당위성만 강조해대는게 유행이라면 이건 '일종의 쇼에 가까운 것이다. 근데 인문학이 딱 요모양이다. 추천이랍시고 등장하는 많은 서적들은 '거대한 지루함'과 '난해함'이 하이브리드하게 엮어져 독자들을 공격한다. 이런 걸 이해못한다면 인문학근처에는 얼씬도 하지말라고 윽박지르듯... 그래서 말인데 인문학을 소개하는 많은 책들은 '굉장히 어렵고 난해한 인문학'이란 인식이 생겨남에 대해서 일말의 책임을 져야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저자도 초반부에서 되도록이면 알기쉽게 인문학에 접근하는 방법을 말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독서 이야기도 나오는 것이고 책을 읽는 방법같은 것들을 주르륵 써놓으셨던게지.. 그런데 인문학을 제대로 알려면 독서를 해야 한다는 전제가 맞기는 해도 독서가 되면 인문학이 저절로 이해되는 건 아니기에 방법론적인 기술에 너무 많은 분량을 할애하면 핀트가 빗겨간다. 통찰력을 길러주는 인문학 공부법인데 갑자기 넌 책도 제대로 못읽으니까 처음부터 제대로 읽는 법을 알려줄테니 잘 따라해보기바람 이라고 첨자 교육이라도 당한 느낌이다.  물론 책에 줄긋고 줄거리 따라가고 등장인물의 관계도도 그려보고 체력을 기르기위해서 효율과 목적등을 감안하는 게 비휼적이거나 잘못된 방법이란건 결코 아니다. 다 맞는 이야기지 싶다. 솔직히 유행따라 삼천리라면 인문학적인 소양이란 '독서하는 방법' 일수도 있으니까 이런게 통찰력을 얻는 방법이 아닐 가능성은 별로 없다.  


기투와 앙가주망을 대목을 보면서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어려운 용어에 대한 이해가 되고 나면 사상이 보일 거다라는 생각들. 근데 이건 내용을 이해하는 것인데 지식의 한 페이지를 채우는 결과적인 경험이야기 일 뿐이다. 앙가주망에 대해서 개인적인 느낌이 어떤건지 슬쩍 내비추었어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고 어떻게 삶에 불쑥뿔쑥 이런 지식들이 튀어나왔는지 좀 털털하게 이야기해줬어도 더 친밀했을 것 같다. 이렇게 끝내고 넘어가야 한다면 이거 어디 입시시험 또는 토익시험 맞추기위한 맞춤식 예제 설명 아닌가. 내가 사르트르에 대해서 이론적 배경과 개념들을 알아야 한다면 용어 정리이외에 상황에서 실존주의에 대한 어떤 통찰을 보고 싶어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러니까 실존주의를 통해서 어떤 시각을 가지게 된 거라는...그래서 난 어느날 카페에서 친구와 이야기하다가 친구놈이 '초인'적인 삶에 대한 갈구만큼이나 미달하는 현실에 절망하고 있는 걸 보고 위로해줄 수 있다는...시덥지 않은 일상이야기라도 등장하길 바랬던 거지..싶다. 


아쉽게도 그런 목적으로 이 책을 읽은게 아니라서 정말 말그대로 아쉽게 되었다. 아마 목적이 잘못되었나보다. 이건 전적으로 내잘못이지 책이 잘못된 건 아닐듯 싶고..다만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 뭔가를 읽을만한 태도와 체력이 없으면 '인문학' 접근이 요원할거라는 메시지 정도다. 그렇겠지 우선 뭔가를 읽고 깨달아야 통찰력이 생길테지. 진득히 읽어야 뭘 느낄테지만 읽기 중독자들도 읽기는 읽는다. 그리고 책도 좋아라하고 목록도 꿰고 난해함도 꾸준함으로 돌파한다. 이런식의 취미활동을 보면 언뜻 '어떤 통찰력에 대한 본질'이 꼭 독서여야만 하는가라는 의구심이 남기도 한다. 사람들은 여전히 인생에서 각자 스스로의 분량들을 깨닫곤 하는데 도대체 인문학이라고 카테고리화 시켜서 책을 읽고 지식을 얻게 되면 더 지혜로워지는 걸까라는 호기심이 끊이질 않는 것이다. 좀 다른 이야기지만 , 학습적 관점에서 인문학을 이해하고 싶으신 분들은 이 책을 고르기보단 정신적으로 동기화가 잘된 저자의 저작들을 줄기차게 읽으시는게 더 나을 듯 싶다. 


물론 이 책도 나쁘진 않다. 추천은 글쎄...정도..




인문학 공부법

저자
안상헌 지음
출판사
북포스 | 2012-06-2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인문학 공부에는 특별한 방법이 있다!『통찰력을 길러주는 인문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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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하게 산다 - 도미니크 로로  (4) 2013.03.04
Posted by kewell
Review BOOK/소설2013. 8. 14. 18:18



레이먼드 카버의 이야기를 읽으면 '두려움'을 느끼곤 하는데 그 이유는 삶에 뭔가 문제가 생겨서 평온한 상태가 왕장창 깨져버릴 것만 같아서다. 젠장 안좋은 소식이야...라고 누군가가 굳은 얼굴로 이야기하고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뭐 그런 상태가 되는거다. 내 이럴줄 알았어 어쩐지 좋은 날들이 이어지나 싶었는데 기어코 이런 일이.....이렇게 혼자 읇조리면서 말이다. (드라마에서는 비일비재이지만 일상에서 일어나기를 원하는 독자들은 없겠지설마.) 그래서 말인데 카버 소설을 읽으면서 마음편히 즐기면서 읽지는 못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이 아저씨가 도대체 후반부에서 어떤 충격적인 결말을 보여주실려고 이러시나 그러면서 조마조마하면서 책장을 넘겼드랬다. 이윽고 처연하게 마무리되고 나면 씁쓸함이 가슴언저리에서 떠나지 않게 되고, 결과적으로  지구에는 늘 행복한 사람도 늘 기쁜 사람도 있을수가 없으며 슬펐다가 기뻤다가 그러는 반복된 일상이 진짜 인생인거야라는 속삭임만 가슴에 덩그라니 남는다. 이래서야 일부러라도 카버 소설을 집어들고 편안한 휴가를 보내고 싶을까.


대개 영미권의 현대소설, 특히 단편들에 이런 분위기가 많이 깃들어있는데 작품성으로는 깔끔하고 함축적이고 주저리주저리대지 않는 단백함으로 격을 높였다는 평가를 많이 받아왔다. '중산층의 체호프'라니...낯간지러운 타이틀일수도 있겠는데 오죽했으면 카버에게 그런 걸개를 걸어주었을까. 이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미니멀리즘'의 여파라기 보단 '서프라이징 엔딩' 효과 때문인 것 같다. 


평이하게 이야기하다가 느닷없이 반전으로 마무리하는 그런 흐름....'확 찬물을 끼얹으면서 정신차려 친구 이 이야기가 이렇게 끝나지 않는다는걸 눈치채고있었어야지 라는 식으로 말이다. 때론 충격적일수도 있고 그정도가 아니라면 잔잔하게 파도를 일으키며 끊임없는 밀물이 들이닥치는 자극들이 이어진다. 카버의 이 단편집에서도 그렇다.  <정자>에서 드웨인과 홀리 부부가 처음부터 나누는 대화가 뭘 의미하는지 당최 모르겠지만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고. 이윽고 드웨인이 하우스키퍼와 11호실에서 지속적으로 섹스하면서 아내인 홀리를 속여왔고 결국 들통이 났다는 중심사건이 드러나면서 씁쓸하게 마무리된다.  


사람들 마음속에는 사실 스토리의 반전만 가지고 '인상깊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보다 임팩트있는 것들은 카버의 소설에는 가슴속을 저미는 대목들이리라.  홀리는 '내 가슴은 돌이 되었어. 나는 아무 쓸모가 없어. 무엇보다도 나쁜 건 그거야. 내가 더이상 아무 쓸모가 없게되었다는 거'라고 말하며 드웨인을 압박하고 드웨인은 이제 그만하라며 홀리보다 더 괴로워한다. 이게 인생인거야 어느 가정에서도 일어날수 있는 폭압적이고 거침없는 일탈들..그런 걸 말하고 싶었나보다. 이외 카버의 단편들에서는 일탈이 묘한 '성적 일탈'로 이어지는 경향들이 있다. 


<봉지>역시 레스의 아버지가 어머니와 이혼하기 전에 있었던 스탠리 프로덕트 회사의 여직원과 불륜을 이어갔고 <미스터커피와 수리공양반>도 화자의 아내인 '머나'가 바람이 나서 가출했다가 돌아오는 아이러니한상황을 연결시켜놓았다. <우리가 아버지를 죽인 세번째 이유>도 뭔가 모자란 '더미'가 바람난 젊은 아내를 죽이고 자신도 몸을 던지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심각한 이야기>에서는 이혼한 가정에서 새롭게 남자친구가 생길려는 아내를 용납하지 못하는 남자의 심리를 묘사했다. 


이중에서 <봉지>는 더 인상적이다. '남자에게는 결혼과 관련된 모든 규칙을 지켜오다가 어느 한순간 그것이 더이상 문제되지 않는 때가 있단다. 운명처럼 말이야' 라고 레스의 아버지가 말한 대목때문이다. 그러니까 삶속에서 규칙처럼 지켜오는 것을 위반하는 일탈의 순간이 '본능적이면서도 운명적'으로 이뤄진다는 변명같은 것들이긴 하지만.... 일부러 '삐뚤어질테다'라고 마음먹고 일탈을 감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겠지?  그저 살다보니 갑자기 운명처럼 느껴지는 순간을 맞닥드리게 되고 그것을 따라가면 결국 기존 삶에서 중요하다는 것들이 다 무너진다는...뭐..그런 것들..불륜과 외도가 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것들을 가지고 있는게 아닌가. (이런걸 옹호하는건 결코 아니다.) 어찌됐든 미국 중산층에서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었나보다. 언제인가 '존 치버<그게 누구였는지만 말해봐>을 읽었는데 묘하게 카버와 오버랩 되었다. 이 더러운 기분이 뭐지라고 데자뷰를 느끼면서 카버의 단편들이 촘촘히 박혀있는 장면을 떠올렸던 것이다.(치버소 설에서는 더 구체적이고 절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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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버나 치버나 둘다 다 비슷한 양반들이로구만 그러고 말았는데 어쩌면 단편에서 임팩트를 주려면 서프라이징은 뻔하지 않을까싶기도 하다. 죽음. 사고. 불륜, 외도. 배신. 이런 것들 말고는 이야기하기 힘들테니까..그런데 불행과 불운이 끼어들어가 있으면 왠지 아..이래야만 하나..뭔가 희망을 말해주면 안되나 싶은 마음이 한구석에서 스물스물 피어오른다. <목욕>을 읽을때 유독 그랬던 것 같다. 아들이 생일을 맞이하고 케익을 주문하고 일상이 유지되나 싶었는데 그만 교통사고를 당하고 식물인간이 되고 깨어나지 못한다. 아이러니하게 부모는 아들을 두고 병원에서 안절부절하다가 몸이 더러워 목욕을 하러 잠시 들른다는 아주 단촐한 이야기다. 그런데 목욕을 하는 자신의 심리상태.그리고 말미에 조용히 울리는 병원에서 온 전화가 이어지면서 독자들은 자신들의 시각으로 이 상황이 불운이 아닐까하는 급작스런 우려을 지울길 없어진다. 


'남자는 운이 좋았고 행복했다. 하지만 이제 두려움이 생기자 그는 목욕이 하고 싶어졌다' 라고 써 있는데...행복했던 가정에 불운이 들이닥친 느낌이지 않나. 이게 무슨 전화일지 상상조차 하기 싫어지는 느낌이다.  


한편 굉장히 히스테릭하고 잠재된 폭력성을 터트리는 일탈도 등장한다. <여자들에게 우리가 간다고 말해줘>같은 경우에는 무슨 일본의 묻지마 살인을 연상시키는 사이코패스 이야기들이나 싶을 정도다. 빌 재머슨과 제리 로버츠. 두사람은 둘도 없는 친구. 그리고 인생을 공유하며 살다가 평범한 결혼에 아이들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남자들끼리 노는 것'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차를 몰고 나가서 유부남들임에도 불구하고 길거리의 '바버라와 샤론'에게 작업을 건다. 두 여자가 시니컬하고 거절의 의사를 표시하자 제리는 숨겨두었던 폭력성을 드러낸다. 너희들이 우리를 거절해 감히..뭐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말미가 이렇게 끝난다. 


'그는 제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했다. 하여튼 바위로 시작하여 바위로 끝났다. 제리는 같은 바위를 두여자에게. 처음은 샤론이라는 여자에게 그 다음에는 빌리의 몫인 여자에게 사용했다' 라고...



한참동안 고민해봤는데 바위라고 해서 결국에 제리가 유혹해서 억지로라도 두 여자를 강간했다는 소리인지..아니면 기어코 둘과 섹스를 했다는 뜻인지 헷갈렸다. 그러다가 바위에 눈이 가는 순간..이건 두 여자를 돌로 쳐죽였다는 소리도 되겠다 싶었다. 제리가 일을 저질렀군. 이 변태같은 살인마같으니라고 유부남주제에 거절했다고 돌로 쳐서 죽이다니...굉장히 충격적인 결말로 마무리된 거였다. 


카버 아저씨 너무 무서워요 이렇게까지 하셔야 하나요. 잔잔한 감동같은 건 없는거에요 구질구질하게 혼자 주절댔던 것 같다. 더군다나 몇 문장 되지도 않고 행간에는 상당한 공백과 고요와 침묵이 있는 것 같은데 우울한 정서들이 사이사이를 다 매꾸고 있다니... 이것이야말로 더블우울빅맥아닌가. 엄청난 공복감을 달래기위해 이 커다란 인생버거를 우걱우걱 씹어먹는 꼴이라니...달콤한 일상들 사이로 껴들어간 일탈과 우울, 그리고 서글픈 사이드메뉴라니...


아무리 먹어도 허무하겠지. 채우긴 어렵겠지 싶다. 




책을 덮고도 늘러붙은 껌딱지마냥 계속해서 궁금증이 따라붙는다. 

<대중역학>의 그 아기는 솔로몬의 지혜도 필요없어서 결국 분리된 건 아닐까. 

그리고 <그에게 달라붙어 있는 모든 것>..이건 내 이야기가 아닐까..




좀 절절하고 너무 생생해서 문제인거다. 

카버의 소설은....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저자
레이먼드 카버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05-02-24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젊은 소설가들의 번역으로 만나는 단편소설의 진경, 레이먼드 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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