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BOOK/소설2013. 11. 13. 20:16


불운은 너무나 오스카 와일드적이었고, 우연은 피츠 제럴드적이었으며 스팬서적인 암울함이 깃든 공기들이 앨런 포우적이었다고 느낄 때 데자뷰처럼 읽었던 단편들의 문장들이 현실세계의 미장센처럼 복원되곤 한다. 막연히 묵었던 숲속 호텔의 수영장에서 홀로 튜브에 둥둥떠다니다가 '개츠비'도 이렇게 마지막을 맞이했을거라는 둥, 아틀란타 레지던스 인 카운터에 놓여있던 은화단지를 보면서 '발할라 드러그 스토어'를 떠올리고, 매일매일 가쉽처럼 터지는 아이돌의 연애사 틈새에서 '멕기니스'의 사랑 이야기를 슬며시 떠올리는 식이다. 그게 카버가 되었든 피츠제럴드가 되었든 사실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다. 다만 언젠가 삶의 언저리에서 맞닥드릴만한 사건들의 이면에는 '예전부터 있어왔었던 모종의 반복' 메커니즘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사소하게 스쳐지나가지 못하게 되는게 신경쓰일 뿐인거다.  아...이건 뭔가 상징적인 건가...내 인생의 중대한 핀 포인트라도 되는 걸까 라고 자꾸 되뇌이듯...


트루먼 커포티의 단편들도 유독 그런 기시감이 강했던 것 같다. 삶이란 세월을 지치듯 쏜살같이 지나쳐왔어도 질감은 비슷한 걸까. 다양하게 수놓았던 무늬들의 패턴이란 결국 모두 같은 뉘앙스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야기들은 시종일관 계속되었고 '요트여행'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커포티에 대한 안스러움이 종이 지면 위에 눈 내리듯 내려앉아버렸다. 이것도 소설일 뿐이데 어차피 허구의 세계와 가상의 이야기들이 남겨놓은 감정의 배출구를 따라 무엇인가를 토해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싶어 몇 번이고 앞쪽으로 리와인드해서 회상해보곤 했다. 커포티의 재능을 고려해본다면 대중들은 이 <차가운 벽>에서 따뜻하고 온정어린 시선이 맴도는 단편 몇 개를 이런 절절한 기억의 대상이었음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크리스마스의 추억>(1956)과  추수감사절에 온 손님(1967), 그리고 어떤 크리스마스(1982)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시대는 다르지만 정서는 비슷한 과거로 가게 될 것이고,  이 이야기들이 커포티의 자전적 이야기란걸 눈치 챌 즈음, 커포티의 쓸쓸했던 생애의 끝자락과 대비된 유년시절의 따스함, 그리고 밑바닥 정서에 침몰되어버린 불운한 나날들에 대한 회한같은 것들이 읽혀지게 된다.  아침, 찬서리가 풀잎을 덮어 반들거리고, 오렌지처럼 둥글고 더운날씨의 달처럼 오렌지빛인 태양이 지평선위에 떠올라 은색으로 빛나는 겨울 숲을 달구며, 검은색 풍로와 안락의자 두개가 놓여있는 벽난로에서 버디는 숙과 퀴니와 소근거린다. 으르렁거리는 국화꽃오드 헨더슨보다 더 치졸했던 과거야 불편한 기억도, 추억도 아니 될수 없겠다. 누구나 성장의 길목에서 졸렬해지기도 하고 끝없이 순수했음이 상처받기도 할테니까..독자들이 느끼는 안타까움이란 건, 이 정서가 성장의 연료로 쓰여지지 않은 채 불완전 연소되어 성인의 커포티에게 드리웠을거라는 막연한 추측 때문일 것이다. 커포티는 불운했던 것 같아...라고 혼자서 몇번이고 중얼거렸었지아마... 


 지인들과 이야기했었는데, 대개의 경우 <인 콜드 블러드>의 명성만으로 기억하고 <티파니에서 아침을>과 같은 로맨스적 감성만을 커포티의 정체성처럼 꺼내놓곤 했었다. 매스컴에서 떠들어대고 광고지에서 큰 폰트체로 위압적으로 시선을 장악당하고,  '20세기 소설지형을 바꾸어버린 역작' 타이틀에 포커스가 가면, 안 읽고는 못배기는 커포티의 마스터피스, 그리고 그동안의 이미지들은 다 점거당할테세다. 우리는 반지의 제왕을 읽으면서 사우론을 내일 만날것 처럼 생각하지도 않고, 어느 동물원에서 호랑이가 사자를 잡아먹었다던 해괴망칙한 또 하나의 이슈를 내 걱정거리로 치환하지도 않아서 '인콜드블러드'의 다큐멘터리 서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격리시킬수 있지만, <차가운 벽>에는 호랑이도 사자도 등장하지 않으며 사우론도 없고 몇 명을 피칠해가며 해치우는 연쇄살인마도 없어서 그냥 무미건조하다.  그저 일상적인 삶의 무늬를 그려놓았는데, 어쨋든 자주 읽게 되는건 <차가운 벽>쪽이다. 뜻뜻한 한 여름 아무도 없는 호텔 수영장 비치파라솔 밑에서 레몬색 햇볕을 배경으로 '차가운 벽'을 읽으면 완벽하게 온정적 관찰자로 변할 수 있다. 내 이야기일수도 있고 친구 이야기일수도 있으며 어제 있었던 사건의 감정 복제판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인 콜드 블러드'같은 부풀어오른 풍선의 불안함쪽 보단 개인적으로 완벽히 우위에 있는 셈이다.


불현듯 왜 단편집의 제목이 '차가운 벽'이었을까 생각해보았는데 '열여섯은 키스를 한번도 받아보지 않은게 아니라 한번도 강간을 당하지 않았다는 뜻이겠죠'(차가운 벽-1943) ..이 문장이 첫작품에 등장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혹시라도 '차가운 벽'이란 독자가 커포티의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반항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16살의 풋풋하고 설익은 애송이라할지라도 독자들의 '감정'을 받아들여 '연한 장미빛이 감도는 벽이 있는 방'에서 잠이 들 것이라고....자신의 작품이 좀더 따뜻해질수 있다는 인트로, 무언의 투정같은 것이었으리라. 물론 차갑다는 평에서 상처도 받고 토라지기도 한다는 은근한 고백까지 덧붙여서 말이다. 그 뒤로는 사실상 다양한 인간군상에 대한 씁쓸함(자기만의 밍크코드-1944)과 말도안돼는 행운이 현실로 다가오는 과정(은화단지-1945)을..., 그리고 노년의 여인이 정체성에 위협받으며 존재감을 잃어가는(미리엄-1945) 이야기까지.. 삶을 편광시켜 프리즘처럼 다반사시켜준다. 이외에도 이 책에는 다양한 편린들이 공존한다. 


예전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언급했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모티브, <마지막 문을 닫아라>도 이 책에 있다. 그러고보니 이 정서를 이해할 것도 같다. 솔직하고 욕구적인 본능을 감출줄 몰라서 불행한 결말로 이어지고 말거라는 아슬아슬함은 1960년 앨랭들롱의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 Purple Noon) 가 떠오른다. 그때 들었던 캐릭터평이 '아름답지만 천박한 알랭들롱'이었던가. (아마 시오노 나나미의 평이었을 것이다.) 애나 스탐슨이 주인공 월터에게 말미에 한마디 던진 내용도 "그런건 싸구려것이야 월터, 싸구려지" 였다. 주인공은 신분상승의 욕구를 억누르지못해 끊임없이 사람들을 이용하며 상처주고 버린다. 욕구의 결말이 뻔해질 즈음. ..항상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싶었지만..외면하는 연인의 뒤를 따라가 소리없이 사랑해라고 말할수도 있었지만 기어코 모든 것이 자신을 외면하고 난 후, 배개에 얼굴을 파묻고 손으로 귀를 막아버리고 "아무것도 생각하지마, 바람만 생각해' 라고 속삭인다. 지극히 자연스러워서 겸연쩍은 감정이 들어버렸다면 반쯤은 '월터래니' 적인 거지 피할수 없는 숙명적 캐릭터인 거다. 우리는 모두 '월터래니'적일수 있다고 비아냥 거렸던 옛 친구가 기억날 정도다. 


이 후에도 '내 복숭아가 싫다면 내 통조림에는 손도 대지말라'던 보빗양의 파격, '꿈을 5달러에 팔아버린' 실비아가 내뱉은 '정말로 무섭지 않다고..어쨋건 더 이상 훔쳐갈것도 남아있지 않다던 고백을 기억한다. 방울뱀과 여자를 두려워하는 조지슈미트와 아이보리헌터, 그리고 중간에서 사랑을 인터셉트했던 프레디 페오, 현실도피하는 조지슈미트를 자신으로 치환해버린 조지와 부인 사라이야기를 읽으면서 레이먼드 카버도 이렇게 일상적 삶에서 벌어지는 균열을 '불륜과 일탈'로 묘사했었는데...묘하게도 다들 일상을 소리없는 균열로 보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쳐간다. 불편함이 느껴지지만 마치 몸의 일부인 것마냥 떨어지지 않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렇듯 이 책에서 행운과 행복을 말했던 단편은 몇개 안된다.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했던 작품은 <어떤 크리스마스>(1982)다. 어린 시절의 커포티가 자신의 아빠에게 말했을 것 같은 대사 때문이다. 자신을 낳아서 인생이 망가져버렸다는 엄마의 고백과 산타클로즈도 없고 하느님도 없다는 아빠의 외침사이에서 묵묵히 시선을 돌리는 버디, 아니 커포티의 불행이 떠올라서다. 아마 이런 감성조차 없었다면 그가 말미에 그토록 인정받고 싶어했을까. 사랑 결핍증이었던 것 같다..커포티는.....



"안녕하세요. 아빠 잘지내세요? 

나도 잘지내요. 

나는 이제 비앵기 페달을 아주 빨리 밥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금방 하늘로 날아갈거니까 눈을 크게 뜨고 잘 보세요. 그리고 

네 사랑해요. 아빠.  


버디 올림" 


 


차가운 벽

저자
트루먼 커포티 지음
출판사
시공사 | 2013-06-24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헤밍웨이와 더불어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한 작가 트루먼 커포티 소...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
Vanilla Essay2013. 9. 3. 08:41





<이미지 출처 : http://culturacolectiva.com/lo-surreal-en-murakami/>


 


'노르웨이의 숲'을 '상실의 시대'로 읽은 지 대략 이십여년이 흐른 듯 싶다. 그땐 하루키의 문체가 좋다느니 혹은 그의 스타일이 좋다느니 하는 열렬함이 있긴했는데 그렇다고 정서상의 '원심분리기'라는게 있어서 하루키 책을 넣고 스위치를 켜면 45 퍼센트의 우울함과 15 퍼센트의 로맨스, 5 퍼센트의 자기연민, 그리고 35 퍼센트의 재즈가 백그라운드로 깔려있는 연상녀와의 섹스로 구성되어있어요라고 딱 부러지게 말할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모호함과 개인적인 느낌이었을 뿐이다. 어찌됐든 당시 대중의 문학습득 분위기는 지루함을 무찔러라같은 느낌이었다고 기억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때는 바야흐로 밀레니엄을 맞이하며 세기말의 회색빛 암울함을 장식처럼 주렁주렁 매달고 누군가가 돗자리만 펴준다면 이 욕구들을 다  싸질러버리겠다고 마음먹었던 시절이었으니까..'희망'따위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됐고 일탈과 방황과 젊은시절의 타락정도로 질펀한 섹스를 묘사했어도 뭐 그정도 쯤이야라는 젊은층의 배려(?)가 있었드랬다. 


약물에 중독되서 그룹섹스를 벌이는 파격적인 내용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무라카미 류)를  모 당시 유명 작가는 '의미있다'며 자기 부인에게 읽어보라고 추천까지 했다고 들었는데, 사실 난 그 때 그 책을 읽으면서 이런 걸 읽고나서 누군가에 추천해준다는건 '나도 너와 이런걸 해보고 싶어'라고 은밀히 의사표시를 하고 있다는 오해를 피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었다. 욕구 탐닉의 위험수위라는게 이런게 아니면 뭘까라고 이견이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개인이 바라보는 문학의 질감들은 다 다르기에 나같은 속물적이면서도 대중 표피층에 살면서 정도껏 소비를 일삼은 범인들의 입장에선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의 의미를 안다고해도 내 삶은 더 투명해지지 않기를 바랬다.


당시에 읽었던 책들은 다 이런 류의 정서를 광고 카피로 가지고 있었다. 어쟀든 인기를 끌었고.. 시대를 풍미했고.. 살아남을 것들은 살아남고 사라져줄 것들은 침식되고 세월의 퇴적층으로 가라앉아주셨다. 그런데 묘하게 '정서'는 남았드랬다. 하루키 정서가 아직도 꿈틀거린다는 느낌, 이윽고 언론에서 인용한 하루키스러운 이디엄들을 나열했는데 피식 웃음이 나온다. 레이먼드 챈들러, 트루먼 카포티, 스콧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카버정도야 인정해줄만하지만 삿포르 맥주라디오헤드스탠게츠니 하는 것들은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어서다. 물론 그가 라디오 헤드를 듣고 게츠의 음악을 듣기야 했겠지만, 하루키가 '그럼 난 뭐 삿포르 맥주를 먹다가 라디오헤드를 듣고 스탠게츠로 레이블을 돌려가며 듣는 천편일률적인 인간인가'라고 한숨이라도 쉴 판이다.  


그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 핀볼'이래로 수없이 끄적였던 에세이 시리즈, (이를테면 무라카미 라디오)를 보다보면 영미 문학쪽의 조예가 남다르다는 것즈음은 짐작할 수 있으니까 그가 피츠제럴드의 개츠비 이야기를 자꾸 이야기하는 이유를 알게된다.(이 아저씨는 피츠 제럴드를 너무 좋아하긴 한다.) 예전 등단시절, 오에 겐자부로의 초기평에서는 하루키가 '너무 미국문학의 영향을 받아 개성이 없다'라는 평도 있었다. 챈들러를 칭찬하고 카버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며 카포티의 유려함을 감탄하는 정도는 그의 문학적 스타일로 볼 때, 어떤 모체가 될만한 스타일상의 '목표치'같은 것이었을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카버나 카포티가 되려고 노력했다는 건 아니다.  (가끔가다가 챈들러의 하드보일드가 슬쩍 엿보인다고는 할 수 있어도..) 다만 하루키의 문체가 어떤 독서를 통해서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해소해줄만 하다. 그래서 다들 챈들러니, 카버니 카포티니 찾아 읽는거겠지 싶다. 


그런데 왜 이런 것들이 관심거리가 될까 궁금증이 생긴다. 그가 브룩스브라더스의 자켓을 걸치던 윈드 브레이커를 즐겨입던 뭐 특출난 건 아니지 않나 싶다. ...그럼 아침에 조깅을 하고 가끔가다가 커틀릿을 만들어먹고 거품많은 맥주에  튀긴 두부를 한 모이상 먹으면서, 마일스 데이비스와 빌리 할리데이 음악을 잔잔히 듣고, 진구구장 뒤에 누워 푸른하늘을 보면서 '네가 응원하는게 저팀이야'라는 핀잔도 여친으로부터 들어야 하루키를 닮아가는건가라는 생각도 들어버린다. 이런걸 해보면 하루키의 감정상태가 묘한 리듬을 타고 정서에 와서 콱 박히기로 한단 뜻인가... 문학의 싸구려티를 내기위해서라면 주저없이 하루키를 읽어라라고 비아냥 거렸던 비평가들의 입장에서는 이거야말로 무턱대고 추종하는 하루키빠들의 무지함아닌가라고 지적할지도 모르겠다. 


상실의 시대를 읽으면서 옳다구나 카포티도 나왔고 챈들러도 나왔어..카버도 나오고 피츠 제럴드에 개츠비도 나왔으니 이젠 뭐 또 되새김질할만한 하루키적 특성들이 반복되는게 눈에 보인다고 이젠 하루키는 끝장난거라고 밑천이 드러난 교활한 자기복제의 증거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고 의미심장하게 미소라도 짓는다면 이거야말로 오해하는거 아닌가. 개인적으론 최근의 다자키 쓰쿠루 건도 그렇고 업계가 인기매몰의 포커스가 하루키에게 다 쏠리는걸 못마땅해한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상실의 시대를 읽었던 세대가 현재의 사회주류층이기 때문이라는 부분에 생각이 미치면 이해못할 것도 없다.  어차피 지나가는 세대고 흐르고 나면 다시금 기억하려고해야 생각나는 이미지들에 불과하다. 하루키가 아니었어도 조정래의 정글만리나 히가시노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 알랭드 보통의 세대가 온다. 다만 하루키적 정서라는것도 알고 보면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나 그리스인 조르바와 같은 대중성을 갖지 말란 법이 없으니 좀더 족적을 남기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나쁠 건 없지 않을까. 아무리 그래도 그의 스타일상 하루키가 뭘 했다고 해서 그걸 따라하거나 그게 그의 스타일이라고 하는건 좀 웃음이 나온다. 



cf. 하루키는 삿포르 맥주보다는 거품이 많은 맥주라면 뭐라도 좋다고 했고, 특별히 스탠게츠보단 두루두루 재즈음악을 좋아하며 라디오헤드외에도 역시 레드핫칠리페퍼등도 많이 등장한다. 블레이저 코트야 그렇다치지만 슬리퍼에 가벼운 차림으로 나다니는 걸 좋아하고 다만 야쿠르트 스왈로즈를 선호하긴한다. 이 정도는 각자 다 있는 취미들이다. 이게 하루키여서 생겨난 뭔가 스타일리쉬한건 아니지싶다. 




Posted by kewell
Review BOOK/소설2013. 8. 28. 11:04


블레이크 애드워즈의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1961)을 본 건 어린시절이었는데 지금와 생각해보니 도대체 뭐가뭔지 알지도 못한 채 그냥 보았던 것 같다. 이건 다들 아시는 오드리 햅번(Audrey Hepburn) 때문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게 없다. 청순하고 깜찍하면서도 톡톡튀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홀리'에 이입되었을 때, 모두들 <로마의 휴일>의 앤이 좀더 세속적이고 거침없어졌구나라고 이해했었으니까. 관객들은 영화속에서 오드리 크로니클을 모니터링하는 마음가짐으로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로마의 휴일>(1953)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오드리가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에서 명예와 인기를 지속시키기 위해서 캐릭터를 유지하겠다고 선언했었어도 이상할 건 없다. 다만 <로마>나 <티파니>는 오드리를 담는 같은 성향의 그릇이었을까란 물음이 남긴한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계속 이야긴 하고 있지만, 사실 말하고 싶은건 영화가 꼭 트루먼 커포티의 <티파니>를  100% 반영했던 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로마의 휴일>의 앤은 결코 <티파니에서 아침을>(이하 티파니)의 홀리가 될 수 없었다. 이게 오드리였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도 있긴 하지만 가능했던 이유라면 '티파니'가 소설 원작과는 다른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다는데에도 이유가 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발리에서 생긴 일>의 하지원이 조인성과 소지섭 중 한명에게 고백하고 한명과는 친구먹고, 발리에서 셋이 나이트파티라도 하면서 소근소근 웃으며 엔딩이 되버린 것과 비슷하다.) 


뭐 굳이 새드엔딩이나 극적인 내러티브가 있어야만 그럴듯한 작품완성도가 유지되는 건 아니지만 '홀리'는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영혼이었고 '폴'이란 인물은 등장도 안했고 (그럼 소설의 화자가 '폴'이 아니라면 누구냐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소설 어디에도 화자가 홀리와 결혼해야겠다고 다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화자는 커포티의 감정이 깃든 CCTV 정도..게다가 커포티는 동성애성향의 뉘앙스를 너무 풍긴다.) 홀리는 행복했지지도 않았드랬다. 나도 홀리가 행복해지는데는 찬성이다. 소설속  인물이 불행을 향해 치닷는 걸 보면서 이게 제대로된 현실반영이야 이랬어야 해라고 위안따위를 하며 가식떨고 싶은 마음 추호도 없다. 결국 내가 어린 시절 보았던 영화 <티파니>의 그 꽉찬듯한 희망과 행복은 그저 꿈같은 연출의 산물이었으며 실제 원작에서의 홀리는 좀더 애처롭고 처연하며 쓸쓸하게 저벅저벅 스토리를 기어나가 풍문으로 엔딩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대로 했다간 1960년대 영화를 보고나서 다들 길거리에 침을 뱉거나 술병하나를 들고 '삐뚤어져버릴거야라고 우울해했을 것이다. 이걸 시대가 용납했을리가 없지 않나..


티파니에서 아침을 (양장)트루먼 카포티(Truman Cap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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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간히 섞인 황갈색 머리카락. 알비노처럼 하얀금발. 노란머리채가 아른거리고 여름에 가까운 따듯한 저녁에, 날씬하면서도 시원한 검은 드레스에 검은 샌들을 신었으며, 진주초커를 건 채 세련되게 마른몸매를 자랑하며 아침 식사용 시리얼처럼 건강하고 비누와 레몬처럼 청결한 분위기를 풍겼던 여인이 홀리였고 오드리였다. (햅번 스타일이라고 불리우는 블랙드레스와 진주목걸이 매치업은 솔직히 커포티의 묘사덕분이지 오드리가 창안해낸게 아닌 것일 수도 있다.) 영화에서의 오드리는 원작의 이미지를 제대로 반영했다. 이걸 그레이스 켈리가 할수도 없고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더더군다나 할수 없는 영역의 이야기다. 활자그대로 옮긴다면 오드리는 '홀리' 그 자체로 완벽한 변신을 했던 셈이다. 이후로도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는 홀리를 떠올리기에 앞서 먼저 머리속에 오드리 햅번이 해맑게 웃는 모습이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그 다음 소설의 명문장, 혹은 영화속 대사가 떠오르는 식이다. 


영화의 잔상이 이토록 강했으니 원작소설을 읽을 때 홀리가 어떤 캐릭터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건 다 영화덕분이지만 초반부를 지나 중반부를 넘어갈때까지도 괴리감은 미미했으니까 나쁜 상상력은 아니었다. 다만 스토리가 진행됨에 따라 커포티 원작의 소설이 좀더 농도짙은 현실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이건 위스키에 눈이 풀려서 <왈츠추는 마틸다>를 합창하는 호주장교들 틈을 스카프처럼 떠다니는 홀리의 행실에 관한 묘사때문만은 아니다. 코티지 치즈와 멜바토스토로 연명하면서도 레즈비언이 훌륭한 주부라는 홀리의 익살스러움같은 건 오히려 애처로운 것이기도 했고..주변에서도 그녀를 '세코날 병바닥을 비우고 인생끝났다고 신문에서 보게될 여자라고 읇조릴 때는 아 커포티가 홀리를 어떤 부류의 삶을 상징하는 캐릭터로 묘사하리라는 것정도는 예측이 되고 있었다. 다만 영화는 너무 귀여웠고 매력적이었을 따름이다.

시간이 지났어도 홀리가 사람들의 기억과 추억속에 남는건 오히려 이미지도 이미지지만 특유의 '솔직함' 때문이었을 것 같다. 대중매체들은 홀리를 고전 된장녀의 프로토타입이라고 가끔 언급하지만 된장녀는 모름지기 스스로를 되돌아보거나 처지를 신랄하게 비꼬거나 하는 일 따위는 별로 안하거나 스스로 인정하지 않거나 뭐 그렇다. 홀리가 영화배우로 변신해서 스타가 될 만한 기회가 왔음에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자신은 절대 영화스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너무 힘들고 자신의 콤플렉스는 그럴만큼 열등하지 못했으며 영화스타가 된다는 것과 하늘높은 줄 모르고 솟는 자존심이 손을 잡고 나란히 가야하는 일이었다고...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난들 부자고 유명해지는게 싫겠어요. 내가 어느날 아침 '티파니'에서 아침을 먹는다해도 여전히 나이고 싶어요 " 라고..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라고 제목이 정해진 이유가 뭔지 좀 깨끗해지는 느낌이다. 

쿨하면서도 적극적이고 활력이 넘치고 매력적이기까지하면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기 마련이다. 때가 지금의 분위기와도 많이 달랐던 원스어폰어타임 시절인데도 이런 여성을 그릴수 있었다는 건 굉장히 파격적이면서도 진취적인 여성성에 대한 사회적분위기를 가늠케한다. 대개의 경우 이렇게 매력적인 여성들이 이야기구조상 '결핍'을 가지지 않는건 일종의 배신같은 것이었을테지만 이런 것들은 동정심을 자아내고 애처롭게 바라봐주는 독자들의 증가를 위한 것들이지 신랄한 삶을 이야기하고 싶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가 그렇게 흘러갔던 거겠지 그래서 홀리가 마지막 프로포즈를 받아들이고 정상적인 삶으로 제자리 했던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아니올시다였다. 

홀리 골라이틀리의 소설속 등장에서 드러나는 몇가지는 '고양이에게 이름 붙이지 않기' 그리고 '심술궂은 빨강'에 대한 공포. 사랑을 바라보는 굉장히 작위적이고 가벼운 듯한 홀리의 태도. 감춰진 현실의 이름 '룰러매반스'에 담겨진 그녀 본연의 과거들. 그럼에도 유지되는 그녀의 애처로운 모습이다. 소설책의 정확히 반의 지점이 지나게 되면 이런 우울함과 안타까움들이 와인잔에 와인이 넘치도록 수위가 올라온다. 적당히 끝냈어도 좋았을 파티용 와인이었는데 그만 흘러서 넘치고 파티는 망가지고 그러는 느낌 알잖는가..

" 난 이 고양이에게 이름을 줄 권리가 없어요. 얘는 누군가의 것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우리는 어느날 그저 강가에서 마주친거나 다름없죠. 서로의 소유가 아닌걸요. 얘는 독립적인 존재이고 나도 그래요 " 

"두렵고 돼지처럼 땀이 나는데 뭐가 두려운지 모르는...다만 나쁜 일이 생긴다는 것 말고는..그런데도 뭔지 모르는 거예요" 

홀리가 그렇게까지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아마 스스로에대한 독립심이나 현실에서 불현듯 닥쳐올 미지의 아슬아슬함 공포감에 대한 반작용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도 가끔은 홀리같다면 참 삶에 조언같은 건 적나라하게 말해줄거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아마 홀리가 화자에게 이야기했던 '돈을 버는편이 좋을것 같다고 비싼 상상을 하니까라고 말하는 대목들은 폐부를 찌르면서도 현실적인 부분 아닐까. 그리고 내가 빈정거리며 그 의견에 반대라도 한다면 그녀는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여기서 저 문까지가는데 4초면 되겠죠. 난 2초 주겠어요. 라고....정신이 확들 것 같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커포티의 소설에서만큼은 여러가지로 머리가 복잡해지곤 한다. 나뭇잎이 쌓인 호숫가에서 낙엽을 태운 모닥불이 인디언 신호처럼 흔들리는 공기속의 유일한 얼룩이었다고 할 때만 해도 편안한 정서와 커포티의 탐닉적인 묘사를 그냥 즐기면 될 뿐이야라고 생각했는데 화자의 소설에 대한 평을 하면서 "두번 읽어봤는데 짜증나는 애들이랑 흑인이랑 떨리는 이파리 어쩌고...아무 의미없잖아요"라며 폭풍의 언덕고 비교하면 그야말로 멘붕이 올 것이다. 짝사랑하던 여인에게 의외에 말투에 당황하고 찬물담긴 컵한잔 확 뿌려맞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솔직함도 지나치면 병이겠지만 홀리정도 되야 현실에 발딪고 사는 것 아니겠는가. 티파니를 동경한다고 해서 상류사회를 꿈꾸는 머리에 바람든 여인이라고 매도하기는 억울한 거다.


그래서 아마 말미에 휘몰아친 사건들에 묻혀 사라져버린 홀리가 해피엔딩일지 새드엔딩일지 가늠이 안되는 것이겠지싶다. 걸어온 것만 보면 폭풍처럼 살아갈 수도.. 그렇다고 박차고 나갈 용기와 재능도 없어져버린 보통사람들로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었으니까. 그저 소설의 화자처럼 슬쩍 다가갔다가 연정의 마음을 품었다가 의외로 쌀쌀함에 상처받고 다시 너도 함 상처받아봐라고 외면했는데 아예 그 존재가 삶에서 사라져버린 느낌..비워진 자리를 보며 더 쓸쓸하고 슬프다는 느낌..그래서 차라리 홀리가 티파니에서 아침을 먹더라도 자리에 있었으면 하는 느낌...


아마 그런 느낌이 소설을 읽고 난 한동안 계속 스물스물 거렸던 것 같다. 


티파니에서 아침을

저자
트루먼 커포티 지음
출판사
시공사 | 2013-06-24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잊을 수 없는 한 시절에 관한 짧은 동화!고독한 소년의 눈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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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ew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