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Pantry2014. 6. 14. 11:56

1. 

레이먼드 챈들러를 읽게 된 건, 완전히 무라카미 하루키의 영향이었지만, 사실 하루키가 극찬한다고 해서 내가 그걸 재미있게 읽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아무래도 난 무게감있고 진지하며 자아성찰적이면서 눅눅한 현실을 담담히 묘사해서 그럴듯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야말로 명작들에 대해서 그걸 인내심을 가지고 읽을 만한 '태도'를 갖추지 못한 독자쪽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스토리가 두근거릴정도로 재미있어야 하고, 문체는 재기발랄하면 더 좋고 구질구질하지 않으면서 암울한 불운의 스토리가 비엔나 쏘세지처럼 이어지지 않는 그야말로 뻔한 소설쪽이 더 어울린다. 실제로도 그런 쪽을 더 잘읽는다. 이건 피해갈 수 없는 진실이다. 그래서 내가 어디가서 잰체할 수 없고 뭔가를 안답시고 주절거릴 수가 없다. 좀만 아는 척해버리면 이윽고 들통 나버릴 수 있는 확률이 커질테니까. 그런 점에서 보면 챈들러의 소설은 좀 자유로운 편이다. 


'빅슬립'당시에 문장의 간격에서 벌어지는 왠지 모를 쿨함때문에 피식피식 웃음이 나버리고 쉽게 쉽게 사건이 요약되고 뭔가 위트가 사이사이에 치즈처럼 발라져 있다.   어느날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면도를 하고 맥주 하나를 까서 먹으면서 침대로 향하다가  누가 내목을 강하게 내려쳐서 정신을 잃었다라는 식의 전개가 무덤덤하게 전개된다 .주인공이 쓰러졌다라는 사실에 군더더기가 없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 빠르고도 전광석화같은 반전들이 일목요연하게 요약되는 와중에 주인공은 상황에 맞지 않는 시니컬한 농담이나 끄적이고 있고.....결국 문장 자체에서 이런 일목요연하면서 깔끔한 리듬을 느끼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지 싶다. 챈들러의 장기는 구구절절한 설명이 없다는 거였어. 그저 사건이 벌어지고 그 사건들이 짧게 묘사되는 동안 생각은 독자가 하고 필립말로우는 그걸 쿨하게 받아들이는 거지. 하드보일드적이란건 대체로 이런 거였나..혼자 상상하게 된다. 빅슬립이 완전히 흠뻑 빠질만큼 재밌다곤 할 수없었음에도 이런 매력때문에 '기나긴 이별'을 읽으려고 '호수의 여인'대신 고르게 되었다. 기나긴 이별쪽이 더 길고, 긴 만큼 이 여운을 더 즐길 수 있을 거라는 조삼모사식의 해석 때문이었다. 두고 보면 알겠지. 


2.

SS 밴다인의 '비숍 살인사건'을 최근 읽었다.  읽다가 보면 역시 추리소설의 중흥기는 1900년대 이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스 마플엘러리퀸필립 말로우마이크 해머,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이먼 템플러라든지 말이다. 물론 대다수의 독자들이 생각하는 탐정소설의 캐릭터는 '셜록'이다. 컴버배치의 씽크로 100%에 가까운 BBC 드라마만 해도 몰입도를 극대치로 키워줄 정도니까 이런 탐정물의 역사는 하루아침에 이루진 건 결코 아닌 셈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 추리소설은 죄다 일본 소설이나 스칸디나비아풍의 변종 소설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뭔가 지나치게 작위적인 느낌을 지울 길 없고 뭔가 드럽게 재미없다는 (매니아분들께는 죄송) 느낌이 반복되고 있다. 어떤 점에서는 참신함을 발굴하고자 기존 고전들의 따분함을 아예 거세해버리는 선택을 한 셈인데 이게 효용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팔리는걸 보면 이를 인정 안할 수도 없어서 그저 난 개인적으로 뒤쳐져버린 세대가 되버렸군이라는 생각만 든다. 난 아직도 브라운 신부의 스토리를 좋아하고 에퀼 포와로의 사색을 잊지 못한다.  아무리 베스트셀러에 올라가 있어도 히가시노의 갈릴레오는 내 추억의 캐릭터에 비교조차 안된다. 이게 진정한 고리타분함이라고도 할수 있겠다.


3.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 재출간이 되자마자 그동안 중고사이트에서 폭등한 가격으로 흠칫 놀라게 만들었던 몇 몇의 중고상품들이 가격 하락을 겪고 있다. 올곶이 버티는 분들도 계시는데 그 분들은 아예 자신들이 등록한 대성당이 있었는지도 잊고 있는 양반들이거나 대성당 신판이 등장한 것을 아예 모르고 계시는 아주 바쁜 분들일 가능성이 크다. 아무튼 중고사이트에 등록되는 몇가지의 서적들에 대한 가격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제때 구입하지 못한 책에 대한 댓가가 제대로 돌아온다는 느낌이다. 그 때 구입했어야 하는건데 라는 후회는 사실 말짱 아무짝에 쓸모없는 후회일 뿐이지만, 어찌됐든 형편상 책을 구입하지 못하는 것도 운명적이 측면이 있다. 


어떤 책들은 생각조차 안했음에도 불현듯 구매해서 충동질의 결과로 남고, 어떤 책은 매번 갈때마다 집었다놨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그 자리에 모셔두고 그냥 오는 경우도 있다. 그런 책들의 운명은 내가 읽을 운명이 아닌 아이러니한 책들의 목록에 추가된 채, 인생 전체를 부유하게 된다. 내가 놓쳐버린 책, 읽었어야 하는 책..뭐 이런 타이틀이 붙은 채 말이다. 다만 훗날이라도 그 책을 찾아 해메일때 가격이 적당했으면 좋으련만, 흠칫 놀랄 정도의 가격표를 보노라면..이 책을 절판시킨 출판사를 원망하게 된다. 이 모든 가격폭등의 책임자는 출판사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렇게 대성당 처럼 신판이 나와주면 좋은 일이긴 하다. 가끔은 가격을 너무 터무니 없이 올려버린 중고서적들의 주인들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볼 때, 이런 신판은 '책의 정체성'을 교란시키는 배신행위처럼 비추어질 수도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운명은 절판의 운명이니까 이대로 둬. 세상의 몇권만 남은채 나를 부각시키고 싶단 말이야 ..뭐 이런..대성당은 그러기에는 대중의 욕구가 큰 소설이었지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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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ewell

드디어 나온다. 


질리게도 오랫동안 언제 나올지 알 수도 없던 바로 그 <대성당>. 책 호갱들께서 값을 천정부지로 띄우시는 바람에 중고서적에서도 어안이 벙벙한 책값으로 놀래키던 그 작품. 대체로 이 책이 유명해진건 몇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무라카미 하루키가 레이먼드 카버를 좋아라한다는 건 알만한 양반들은 다 알고 있을테고, 카버의 작품들 중 몇개가 아주 좋은데 그 중에 이 작품이 끼어들어가있다는 점. 그리하여 대다수의 글쟁이들께서 카버의 이 작품을 오래도록 곁에두고 읽고 또 읽는다는 풍문. 여기에 이걸 번역하신 분이 소설가 김연수라는 사실도 부수적으로 이슈가 되었드랬다. 


얼마전에도 김중혁씨가 김연수씨가 대성당 재출간으로 분주하다고 했을 때, 아 조만간 나오겠구나 싶었는데 드디어 등장한다. 이 책을 구해볼라고 얼마나 뻘 짓을 했는지 그 사연을 소설로 써도 그럴듯한 단편소설이 될거다.  아무튼 세계 문학전집의 표지 디자인이 썩 그다지 좋다곤 말하기 힘들지만 어쩌겠는가 절판된 운명의 초판들을 뒤로하고 이렇게라도 읽을수 있다면 만족해야지. 이전 노란색 표지도 나쁘지 않았다. 카버의 단편선들은 왠지 시리즈의 일편으로 끼워넣기엔 약간 모양새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문학동네측으로서는 세계문학의 한 부분으로 장식해놓고 싶었을지도...하도 문의가 많아서 골머리좀 썪혔을 것 같기도 하고...


나도 노란색 대성당을 가지고 있었는데...개정판으로 읽어봐야겠다. 




Posted by kewell
Vanilla Essay2014. 3. 12. 21:52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시오리코다자이 오사무<만년>에 불을 붙이는 쇼로 가사이를 충격에 빠뜨릴 때 가사이는 '시오리코가 결코 책에다가 불을 붙일 부류의 인간이 아니었음을 알았음에도 당황했었드랬다. 왜 그랬을까. 좋아하는 책이 소멸된다고 생각해서다. 앞뒤 가릴 것없이 그것만 눈에 들어오는 좁아진 시야를 보면서 한정판의 위력을 본다. 모든 한정판은 가슴을 뛰게 한다던 지인의 표현처럼 어떤 대상이든 그것이 제한적이거나 소멸의 과정에 있다면 남기고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게 마련이다. 책같은 경우에는 좀 다르다고는 생각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책이 불탄다고 상상하면 나도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는 결코 책에다가 불을 불일 수 없는 시오리코 같은 부류가 반드시 존재한다. 그 사람들은 책을 찢을 수도 구길 수도 그리고 불태울 수도 없는... 제 몸이 구겨지고 찢겨질 지언정 책은 보듬어 안고 언제까지나 깊은 자신들만의 서재에 꽂아두고 싶어 하는 쪽이다.  나는 그정도는 아니어서 영원한 소유를 꿈꾸지도 않지만 가끔 읽어야 할 책들이 내곁에 늘 있어서 읽고 싶을 때 언제든 집어들 수 있기를 기대한다. 기대하고 바라는게 죄는 아니지 않은가. 단순히 읽고 싶은 순간에 찾아도 찾아도 없는 경우가 문제인거지..가끔 읽었어야 했지만 여러가지 저간의 사정으로 읽지 못했던 회한의 책들을 다시 찾으면서 이번에는 읽어야지 이젠 여유도 있고 시간도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때가 무르익지 않았겠어 읽어야 할 때가 도래했으니 나는 읽어야만해 라고 마음먹고 당차게 서점사이트를 클릭하지만...온라인 책 검색결과에 쓰여있는 책의 정보 하단에는 덩그러니 '절판' '품절'이라는 글자가 두둥 하고 불길하게 등장한다. 제기랄 그러게 내가 뭐랬어 미리 사두자고 했잖아. 



오래전 짝사랑하던 연인으로 부터 차갑게 들었던 '거절'의 뉘앙스가 '품절'이라는 글자에 박혀있었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놓쳐버린 그리고 제때에 챙기지 못했을 괴이한 회한으로 자책질의 폭풍이 지나고 나면 현실적으로 이 책을 구할 방법이 없을까쪽으로 선회한다. 요즘은 온라인쪽이 많이 발전하여 어디서든 중고서적의 검색이 자유롭다. 지레 포기할 단계가 아닌 것이다. 우리의 '마술램프'와 '공원'사이트를 뒤지고 저명한 몇 개의 중고서적 사이트를 헤메다가 재고를 발견하게 되면 쾌재를 부르는 거고 그렇지 않아도 때를 모색하며 쥐죽은 듯 인내의 시간을 버티면 된다. 책이란 수요에 의해서 언젠가 다시 검색란에서 재등장할 날이 오니까..그러나 이런 과정을 거친다고 해도 세상에서 감쪽같이 모습을 감춘채 종적이 사라져버린 소멸의 책들도 있긴하다. 그 책은 내가 읽을 인연의 책이 아니었던 거다.


최근에 몇 권의 절판 및 품절 서적을 손에 넣었다. 라파엘 사바티니<스카라무슈>, 그리고 야마다 에이미<슈거 앤 스파이스>, 이언 매큐언<암스테르담>, 레이먼드 카버<대성당>이다. 사바티니의 저작들은 국내에 정말 제대로 등장한지 꽤 되었다. 스카라무슈라 그렇다쳐도 (옛날 고리짝시절 문고판으로 등장하긴 했었다), 불후의 명작 캡틴 블러드 따위는 아예 등장도 안한다. 어린 시절에 보물섬에서 보았던 이현세옹의 만화을 떠올리며 스카라무슈를 기억할 뿐이었다. 활극소설로 사바티니를 능가할 작가도 별로 없다고 보는데.. <스카라무슈> 몇 년전 등장했다가 휘리릭 사라져 주셨드랬다. 물론 중고 서적에 이 책이 등장하기는 했는데 가격대가 후덜덜해서 문제인거지 싶다. 3배 넘는 가격으로 등장해버려서 과연 내가 이 책을 이 가격에 읽어야만 할까로 한참 고민을 안겨주고 있었다. 최근 또 다른 서적상으로부터 적절한 가격으로 번개처럼 검색이 되었다. 후다닥 결제라인을 완료하고 나니 다시 품절로 가버리는 걸 보고 인연의 끝을 마지막에 잡은 느낌이라니...



야마다 에이미의 작품들은 약간 논란이 있긴 한데 왠지 여성들이 읽는 책이란 선입관과 너무 에로적이고 적나라하다는 속성때문에 대중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칭찬하는 부류는 아니었을 거다. 이렇게 보수적인 나라에서 섹스장면이 부지기수로 등장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묘사해대는 과감함은 또 다른 오해를 부르기 딱 좋지 않은가. <설국>도 그렇게 매도된지 오래다. 대중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책을 읽는 사람들의 수준 운운하는 모양인데 요시모토 바나나쿠니 가오리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으면서 야마다 에이미를 은근슬쩍 꺼려하는건 이율 배반적이지 않은가. 난 개인적으로 야마다 에이미의 소설을 맹렬히 좋아하진 않았어도 나쁘지 않게 읽는 편이다. <풍장의 교실>같은 건 드물게 정서를 침참시켜서 절구통에 삐죽삐죽한 짜증덩어리를 넣고 돌려대는 느낌이다. 너의 정서란 세상의 그저 한 부스러기일 뿐이야 라고 책망받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에이미의 저작들도 초기작들은 왠간에서 구하기가 어렵다. <슈거 앤 스파이스>가 아마도 나쁘지 않은 작품일텐데도 제대로 읽어볼 기회조차 오질 않았다니...희한하긴 희한하다. 아무튼 이 책도 중고서적에서 건져냈다. 


이언 매큐언<암스테르담>은 사실 주변의 지인들이 열렬히 찾던 책이다. 이 책은 온라인에서 검색해서 구할 수 있긴 한데 역시나 가격이 문제다. 두배이상으로 뻥튀기 되어있기 때문에 약간 망설여지는데 어차피 읽어야 할 책이라면 그냥 마음 편하게 확 구매해서 읽으면 그만이긴 하다. 그나저나 <암스테르담>이 재판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없다. <토요일>은 아직도 버젓이 유명 서점에 꽂여 있는데 <암스테르담>의 어떤 점이 절판의 블랙홀로 이끌었는지 감지조차 되지 않을 뿐이다. (하기사 토요일에 비할바가 아니지..매큐언의 소설도 어쩌면 대중적이어야만 했을 거다.)


 마지막으로 카버의 <대성당>. 이건 정말이지 할 말이 많은데, 문학동네측에도 문의했던 데로 아마 이 책은 신판 문학시리즈의 하나로 재출간되긴 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이지 질리게도 시간을 오래끌고 지지리도 진척이 없어서 문제다.  문의한게 작년인데 아직도 나오지 않는다. 대성당의 가격이 미친x 머리칼 나부끼듯 폭주하는걸 보면서 혹시 저 책의 특정 페이지에 카버의 유서라도 들어있는건가 의심하곤 했다. 하지마 이 책은 우연찮게 지나던 중고 서점에서 구했다. 물론 제 가격에...


이런 걸 보면 책이란건 정말 인연이란게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된다. 읽으려고 읽으려고 애써도 손에 안들어오는 책이 있는가하면...한참을 잊고 있었어도 결국에는 손에 들어와 읽히는 책들이 있다. 그 책들과 나와 어떤 운명적인 실타래가 있는지 알수 없다. 때로는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던 책들이 오랜 시간 후에 내 손에서 읽히는 날도 많았으니까..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을 순 없다는 걸 안다. 그래도 최소한 눈에 걸리는데로 읽어야 겠다고 다짐한 책들의 일부분 만이라도 나와 같이 숨쉬며 생존해 있기를 바라고 잠시 기억에서 사라졌더라도 언제고 다시 나타나 주길 꿈속에서라도 기대할 것이다. 


   

Posted by kewell
Vanilla Essay2013. 10. 17. 17:36


펭귄 클래식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다가 '거울나라의 앨리스'까지 읽지 않으면 도저히 안되겠다는 막연하고도 충동적인 느낌때문에 서점을 뒤졌다. 문제는 '거울나라의 앨리스'가 절판의 경지에 다다렀다는 점이다. 교보에도 절판중이시고 (현재까지는..) 반디앤루니스에서도 약 2권 남짓만 남아있는 상태고 어느 서점에서도 유독 '거울나라의 앨리스'만 집착적으로 많이 팔려주셨다. 괴이하기도 하지만 어쩔수 없겠다싶어 발품을 팔고 종로타워지점까지 가서 북셀프로 '거울나라의 앨리스'을 질렀다. 속이 다 후련하지만 책을 이렇게 충동적으로 사가지고 온 적이 어디 한 두번도 아니고 매번 이럴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혼자 자책하는 시나리오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내 책장의 책들은 다 이런 식으로 구매된 랜덤과 무작위와 충동적인 감정의 산물들이었으니 숙명적으로 습관과의 평생 전쟁을 치룰 조짐들이라는....


언제나 충동적인건 아니지만 간혹 제대로 걸리는 날들이 있다.  지금도 이언매큐언의 '암스테르담' 그리고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 그리고 커트보네거트의 '타이탄의 미녀'같은 책들은 언제나 '충동구매'의 영역안에 산다. 서점 책장 어디 한 귀퉁이에 꽂혀있기라도 하다면 그야말로 심마니 산삼보듯 쾌재를 불러줄텐데 요즘 같은 시절에는 결코 벌어지지 않는 꿈같은 이야기다.  온라인에서 절판이라는 딱지가 붙어버린면 오프라인으로 구매하는 것도 힘들긴 매한가지니까.. 구하기가 어려워서 중고서적을 기웃거려도 보지만 예전 중급의 중고서적을 받아들었던 기억으로 볼 때 그 볼품없는 타인의 흔적때문에 실망한 적이 하도 많아서 별로 내키지도 않는다. 중고는 나름대로는 어느정도 대안이 될 수있지만 여전히 아니다싶은 구석도 많다. 책을 읽을때 나아닌 다른 사람의 자취를 대면한다는 건 그리 좋은 기분이 아니고.... 어찌됐든 서점을 오고가다 보면 충동적인 구매의 향연을 벌일 때가 있다. 일전에도 아르투르 페레즈 레베르테의 '뒤마클럽'을 봤는데 얼마전까지 절판으로 구하기가 어려워서 헤맸던 책이었다. 경제적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질러볼까하다가 그동안 저지른 충동의 통장내역이 한심스러워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던 적이 있었다.  


다자이 오사무 전집도 충동적으로 질렀고, 레이먼드 챈들러의 절판 작품들도 혈안이 되서 찾곤 했었다. 그리하여 현재 읽어제끼는 책들보다 읽어야할 책들이 책상에 쌓여간다. 키는 점점 높아져서 이윽고 모니터 높이를 넘어서고 그리고 책장의 두칸정도높이로 솟구쳐올라 굉장한 기세로 말한다. 도대체 언제 읽을거냐고...그래도 시간이 흘러 그 책들을 구하지 못하게 되는건 너무나도 쓰라리다. 일단 구해놓으면 언제고 읽게 되니까. 벌이가 한심스러워서 책구매에 돈지출을 매조지해버리지 않는 이상 이런 투자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곤 했다. 친구말마따나 내가 이런 책의 탑에서 한권씩 한권씩 읽어 해치워 나간다고 해서 내 소양이 배가되고 인문학적 통찰력이 레벨업 되고 그럴거라고 기대하진 않는다. 


뭐라고 할까. 식신로드 중 만나는 별미를 놓치기 어려운 매니아적, 취향적인 식탐과 유사할까. 뭐하여튼 그런 느낌이다. 그냥 책속의 내용을 탐닉하고 그 작가를 읽어야만 하는 운명적인 데자뷰 같은 것들. 그리고 단 몇줄의 문장만 덩그러니남아 노트귀퉁이에서 조용히 말할 때, 그저 읽어버린 책 이상의 아우라들이 있게 된다. 어쩌면 코난도일의 말이나 망구엘 할아버지 표현대로 글쓰기를 위한 굉장히 효율적인 보물창고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일부러 그럴듯하게 보이려고 퀼트처럼 명문을 갖다 붙이는 작위적인 의도는 꿈도 꾸지 않는다. 대개의 경우는 문장보단 감정이 남게되고 그런 감흥의 뒤에선 뭔가 스물거리는 삶의 묘미를 느낄 뿐이다. 아이러니하고 때론 우여곡절끝에 다다르는 간만의 정서적 안도감 정도면 그럴듯하다고 생각한다. 



Posted by kewell
Vanilla Essay2013. 9. 3. 08:41





<이미지 출처 : http://culturacolectiva.com/lo-surreal-en-murakami/>


 


'노르웨이의 숲'을 '상실의 시대'로 읽은 지 대략 이십여년이 흐른 듯 싶다. 그땐 하루키의 문체가 좋다느니 혹은 그의 스타일이 좋다느니 하는 열렬함이 있긴했는데 그렇다고 정서상의 '원심분리기'라는게 있어서 하루키 책을 넣고 스위치를 켜면 45 퍼센트의 우울함과 15 퍼센트의 로맨스, 5 퍼센트의 자기연민, 그리고 35 퍼센트의 재즈가 백그라운드로 깔려있는 연상녀와의 섹스로 구성되어있어요라고 딱 부러지게 말할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모호함과 개인적인 느낌이었을 뿐이다. 어찌됐든 당시 대중의 문학습득 분위기는 지루함을 무찔러라같은 느낌이었다고 기억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때는 바야흐로 밀레니엄을 맞이하며 세기말의 회색빛 암울함을 장식처럼 주렁주렁 매달고 누군가가 돗자리만 펴준다면 이 욕구들을 다  싸질러버리겠다고 마음먹었던 시절이었으니까..'희망'따위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됐고 일탈과 방황과 젊은시절의 타락정도로 질펀한 섹스를 묘사했어도 뭐 그정도 쯤이야라는 젊은층의 배려(?)가 있었드랬다. 


약물에 중독되서 그룹섹스를 벌이는 파격적인 내용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무라카미 류)를  모 당시 유명 작가는 '의미있다'며 자기 부인에게 읽어보라고 추천까지 했다고 들었는데, 사실 난 그 때 그 책을 읽으면서 이런 걸 읽고나서 누군가에 추천해준다는건 '나도 너와 이런걸 해보고 싶어'라고 은밀히 의사표시를 하고 있다는 오해를 피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었다. 욕구 탐닉의 위험수위라는게 이런게 아니면 뭘까라고 이견이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개인이 바라보는 문학의 질감들은 다 다르기에 나같은 속물적이면서도 대중 표피층에 살면서 정도껏 소비를 일삼은 범인들의 입장에선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의 의미를 안다고해도 내 삶은 더 투명해지지 않기를 바랬다.


당시에 읽었던 책들은 다 이런 류의 정서를 광고 카피로 가지고 있었다. 어쟀든 인기를 끌었고.. 시대를 풍미했고.. 살아남을 것들은 살아남고 사라져줄 것들은 침식되고 세월의 퇴적층으로 가라앉아주셨다. 그런데 묘하게 '정서'는 남았드랬다. 하루키 정서가 아직도 꿈틀거린다는 느낌, 이윽고 언론에서 인용한 하루키스러운 이디엄들을 나열했는데 피식 웃음이 나온다. 레이먼드 챈들러, 트루먼 카포티, 스콧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카버정도야 인정해줄만하지만 삿포르 맥주라디오헤드스탠게츠니 하는 것들은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어서다. 물론 그가 라디오 헤드를 듣고 게츠의 음악을 듣기야 했겠지만, 하루키가 '그럼 난 뭐 삿포르 맥주를 먹다가 라디오헤드를 듣고 스탠게츠로 레이블을 돌려가며 듣는 천편일률적인 인간인가'라고 한숨이라도 쉴 판이다.  


그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 핀볼'이래로 수없이 끄적였던 에세이 시리즈, (이를테면 무라카미 라디오)를 보다보면 영미 문학쪽의 조예가 남다르다는 것즈음은 짐작할 수 있으니까 그가 피츠제럴드의 개츠비 이야기를 자꾸 이야기하는 이유를 알게된다.(이 아저씨는 피츠 제럴드를 너무 좋아하긴 한다.) 예전 등단시절, 오에 겐자부로의 초기평에서는 하루키가 '너무 미국문학의 영향을 받아 개성이 없다'라는 평도 있었다. 챈들러를 칭찬하고 카버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며 카포티의 유려함을 감탄하는 정도는 그의 문학적 스타일로 볼 때, 어떤 모체가 될만한 스타일상의 '목표치'같은 것이었을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카버나 카포티가 되려고 노력했다는 건 아니다.  (가끔가다가 챈들러의 하드보일드가 슬쩍 엿보인다고는 할 수 있어도..) 다만 하루키의 문체가 어떤 독서를 통해서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해소해줄만 하다. 그래서 다들 챈들러니, 카버니 카포티니 찾아 읽는거겠지 싶다. 


그런데 왜 이런 것들이 관심거리가 될까 궁금증이 생긴다. 그가 브룩스브라더스의 자켓을 걸치던 윈드 브레이커를 즐겨입던 뭐 특출난 건 아니지 않나 싶다. ...그럼 아침에 조깅을 하고 가끔가다가 커틀릿을 만들어먹고 거품많은 맥주에  튀긴 두부를 한 모이상 먹으면서, 마일스 데이비스와 빌리 할리데이 음악을 잔잔히 듣고, 진구구장 뒤에 누워 푸른하늘을 보면서 '네가 응원하는게 저팀이야'라는 핀잔도 여친으로부터 들어야 하루키를 닮아가는건가라는 생각도 들어버린다. 이런걸 해보면 하루키의 감정상태가 묘한 리듬을 타고 정서에 와서 콱 박히기로 한단 뜻인가... 문학의 싸구려티를 내기위해서라면 주저없이 하루키를 읽어라라고 비아냥 거렸던 비평가들의 입장에서는 이거야말로 무턱대고 추종하는 하루키빠들의 무지함아닌가라고 지적할지도 모르겠다. 


상실의 시대를 읽으면서 옳다구나 카포티도 나왔고 챈들러도 나왔어..카버도 나오고 피츠 제럴드에 개츠비도 나왔으니 이젠 뭐 또 되새김질할만한 하루키적 특성들이 반복되는게 눈에 보인다고 이젠 하루키는 끝장난거라고 밑천이 드러난 교활한 자기복제의 증거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고 의미심장하게 미소라도 짓는다면 이거야말로 오해하는거 아닌가. 개인적으론 최근의 다자키 쓰쿠루 건도 그렇고 업계가 인기매몰의 포커스가 하루키에게 다 쏠리는걸 못마땅해한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상실의 시대를 읽었던 세대가 현재의 사회주류층이기 때문이라는 부분에 생각이 미치면 이해못할 것도 없다.  어차피 지나가는 세대고 흐르고 나면 다시금 기억하려고해야 생각나는 이미지들에 불과하다. 하루키가 아니었어도 조정래의 정글만리나 히가시노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 알랭드 보통의 세대가 온다. 다만 하루키적 정서라는것도 알고 보면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나 그리스인 조르바와 같은 대중성을 갖지 말란 법이 없으니 좀더 족적을 남기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나쁠 건 없지 않을까. 아무리 그래도 그의 스타일상 하루키가 뭘 했다고 해서 그걸 따라하거나 그게 그의 스타일이라고 하는건 좀 웃음이 나온다. 



cf. 하루키는 삿포르 맥주보다는 거품이 많은 맥주라면 뭐라도 좋다고 했고, 특별히 스탠게츠보단 두루두루 재즈음악을 좋아하며 라디오헤드외에도 역시 레드핫칠리페퍼등도 많이 등장한다. 블레이저 코트야 그렇다치지만 슬리퍼에 가벼운 차림으로 나다니는 걸 좋아하고 다만 야쿠르트 스왈로즈를 선호하긴한다. 이 정도는 각자 다 있는 취미들이다. 이게 하루키여서 생겨난 뭔가 스타일리쉬한건 아니지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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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BOOK/소설2013. 8. 14. 18:18



레이먼드 카버의 이야기를 읽으면 '두려움'을 느끼곤 하는데 그 이유는 삶에 뭔가 문제가 생겨서 평온한 상태가 왕장창 깨져버릴 것만 같아서다. 젠장 안좋은 소식이야...라고 누군가가 굳은 얼굴로 이야기하고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뭐 그런 상태가 되는거다. 내 이럴줄 알았어 어쩐지 좋은 날들이 이어지나 싶었는데 기어코 이런 일이.....이렇게 혼자 읇조리면서 말이다. (드라마에서는 비일비재이지만 일상에서 일어나기를 원하는 독자들은 없겠지설마.) 그래서 말인데 카버 소설을 읽으면서 마음편히 즐기면서 읽지는 못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이 아저씨가 도대체 후반부에서 어떤 충격적인 결말을 보여주실려고 이러시나 그러면서 조마조마하면서 책장을 넘겼드랬다. 이윽고 처연하게 마무리되고 나면 씁쓸함이 가슴언저리에서 떠나지 않게 되고, 결과적으로  지구에는 늘 행복한 사람도 늘 기쁜 사람도 있을수가 없으며 슬펐다가 기뻤다가 그러는 반복된 일상이 진짜 인생인거야라는 속삭임만 가슴에 덩그라니 남는다. 이래서야 일부러라도 카버 소설을 집어들고 편안한 휴가를 보내고 싶을까.


대개 영미권의 현대소설, 특히 단편들에 이런 분위기가 많이 깃들어있는데 작품성으로는 깔끔하고 함축적이고 주저리주저리대지 않는 단백함으로 격을 높였다는 평가를 많이 받아왔다. '중산층의 체호프'라니...낯간지러운 타이틀일수도 있겠는데 오죽했으면 카버에게 그런 걸개를 걸어주었을까. 이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미니멀리즘'의 여파라기 보단 '서프라이징 엔딩' 효과 때문인 것 같다. 


평이하게 이야기하다가 느닷없이 반전으로 마무리하는 그런 흐름....'확 찬물을 끼얹으면서 정신차려 친구 이 이야기가 이렇게 끝나지 않는다는걸 눈치채고있었어야지 라는 식으로 말이다. 때론 충격적일수도 있고 그정도가 아니라면 잔잔하게 파도를 일으키며 끊임없는 밀물이 들이닥치는 자극들이 이어진다. 카버의 이 단편집에서도 그렇다.  <정자>에서 드웨인과 홀리 부부가 처음부터 나누는 대화가 뭘 의미하는지 당최 모르겠지만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고. 이윽고 드웨인이 하우스키퍼와 11호실에서 지속적으로 섹스하면서 아내인 홀리를 속여왔고 결국 들통이 났다는 중심사건이 드러나면서 씁쓸하게 마무리된다.  


사람들 마음속에는 사실 스토리의 반전만 가지고 '인상깊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보다 임팩트있는 것들은 카버의 소설에는 가슴속을 저미는 대목들이리라.  홀리는 '내 가슴은 돌이 되었어. 나는 아무 쓸모가 없어. 무엇보다도 나쁜 건 그거야. 내가 더이상 아무 쓸모가 없게되었다는 거'라고 말하며 드웨인을 압박하고 드웨인은 이제 그만하라며 홀리보다 더 괴로워한다. 이게 인생인거야 어느 가정에서도 일어날수 있는 폭압적이고 거침없는 일탈들..그런 걸 말하고 싶었나보다. 이외 카버의 단편들에서는 일탈이 묘한 '성적 일탈'로 이어지는 경향들이 있다. 


<봉지>역시 레스의 아버지가 어머니와 이혼하기 전에 있었던 스탠리 프로덕트 회사의 여직원과 불륜을 이어갔고 <미스터커피와 수리공양반>도 화자의 아내인 '머나'가 바람이 나서 가출했다가 돌아오는 아이러니한상황을 연결시켜놓았다. <우리가 아버지를 죽인 세번째 이유>도 뭔가 모자란 '더미'가 바람난 젊은 아내를 죽이고 자신도 몸을 던지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심각한 이야기>에서는 이혼한 가정에서 새롭게 남자친구가 생길려는 아내를 용납하지 못하는 남자의 심리를 묘사했다. 


이중에서 <봉지>는 더 인상적이다. '남자에게는 결혼과 관련된 모든 규칙을 지켜오다가 어느 한순간 그것이 더이상 문제되지 않는 때가 있단다. 운명처럼 말이야' 라고 레스의 아버지가 말한 대목때문이다. 그러니까 삶속에서 규칙처럼 지켜오는 것을 위반하는 일탈의 순간이 '본능적이면서도 운명적'으로 이뤄진다는 변명같은 것들이긴 하지만.... 일부러 '삐뚤어질테다'라고 마음먹고 일탈을 감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겠지?  그저 살다보니 갑자기 운명처럼 느껴지는 순간을 맞닥드리게 되고 그것을 따라가면 결국 기존 삶에서 중요하다는 것들이 다 무너진다는...뭐..그런 것들..불륜과 외도가 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것들을 가지고 있는게 아닌가. (이런걸 옹호하는건 결코 아니다.) 어찌됐든 미국 중산층에서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었나보다. 언제인가 '존 치버<그게 누구였는지만 말해봐>을 읽었는데 묘하게 카버와 오버랩 되었다. 이 더러운 기분이 뭐지라고 데자뷰를 느끼면서 카버의 단편들이 촘촘히 박혀있는 장면을 떠올렸던 것이다.(치버소 설에서는 더 구체적이고 절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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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버나 치버나 둘다 다 비슷한 양반들이로구만 그러고 말았는데 어쩌면 단편에서 임팩트를 주려면 서프라이징은 뻔하지 않을까싶기도 하다. 죽음. 사고. 불륜, 외도. 배신. 이런 것들 말고는 이야기하기 힘들테니까..그런데 불행과 불운이 끼어들어가 있으면 왠지 아..이래야만 하나..뭔가 희망을 말해주면 안되나 싶은 마음이 한구석에서 스물스물 피어오른다. <목욕>을 읽을때 유독 그랬던 것 같다. 아들이 생일을 맞이하고 케익을 주문하고 일상이 유지되나 싶었는데 그만 교통사고를 당하고 식물인간이 되고 깨어나지 못한다. 아이러니하게 부모는 아들을 두고 병원에서 안절부절하다가 몸이 더러워 목욕을 하러 잠시 들른다는 아주 단촐한 이야기다. 그런데 목욕을 하는 자신의 심리상태.그리고 말미에 조용히 울리는 병원에서 온 전화가 이어지면서 독자들은 자신들의 시각으로 이 상황이 불운이 아닐까하는 급작스런 우려을 지울길 없어진다. 


'남자는 운이 좋았고 행복했다. 하지만 이제 두려움이 생기자 그는 목욕이 하고 싶어졌다' 라고 써 있는데...행복했던 가정에 불운이 들이닥친 느낌이지 않나. 이게 무슨 전화일지 상상조차 하기 싫어지는 느낌이다.  


한편 굉장히 히스테릭하고 잠재된 폭력성을 터트리는 일탈도 등장한다. <여자들에게 우리가 간다고 말해줘>같은 경우에는 무슨 일본의 묻지마 살인을 연상시키는 사이코패스 이야기들이나 싶을 정도다. 빌 재머슨과 제리 로버츠. 두사람은 둘도 없는 친구. 그리고 인생을 공유하며 살다가 평범한 결혼에 아이들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남자들끼리 노는 것'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차를 몰고 나가서 유부남들임에도 불구하고 길거리의 '바버라와 샤론'에게 작업을 건다. 두 여자가 시니컬하고 거절의 의사를 표시하자 제리는 숨겨두었던 폭력성을 드러낸다. 너희들이 우리를 거절해 감히..뭐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말미가 이렇게 끝난다. 


'그는 제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했다. 하여튼 바위로 시작하여 바위로 끝났다. 제리는 같은 바위를 두여자에게. 처음은 샤론이라는 여자에게 그 다음에는 빌리의 몫인 여자에게 사용했다' 라고...



한참동안 고민해봤는데 바위라고 해서 결국에 제리가 유혹해서 억지로라도 두 여자를 강간했다는 소리인지..아니면 기어코 둘과 섹스를 했다는 뜻인지 헷갈렸다. 그러다가 바위에 눈이 가는 순간..이건 두 여자를 돌로 쳐죽였다는 소리도 되겠다 싶었다. 제리가 일을 저질렀군. 이 변태같은 살인마같으니라고 유부남주제에 거절했다고 돌로 쳐서 죽이다니...굉장히 충격적인 결말로 마무리된 거였다. 


카버 아저씨 너무 무서워요 이렇게까지 하셔야 하나요. 잔잔한 감동같은 건 없는거에요 구질구질하게 혼자 주절댔던 것 같다. 더군다나 몇 문장 되지도 않고 행간에는 상당한 공백과 고요와 침묵이 있는 것 같은데 우울한 정서들이 사이사이를 다 매꾸고 있다니... 이것이야말로 더블우울빅맥아닌가. 엄청난 공복감을 달래기위해 이 커다란 인생버거를 우걱우걱 씹어먹는 꼴이라니...달콤한 일상들 사이로 껴들어간 일탈과 우울, 그리고 서글픈 사이드메뉴라니...


아무리 먹어도 허무하겠지. 채우긴 어렵겠지 싶다. 




책을 덮고도 늘러붙은 껌딱지마냥 계속해서 궁금증이 따라붙는다. 

<대중역학>의 그 아기는 솔로몬의 지혜도 필요없어서 결국 분리된 건 아닐까. 

그리고 <그에게 달라붙어 있는 모든 것>..이건 내 이야기가 아닐까..




좀 절절하고 너무 생생해서 문제인거다. 

카버의 소설은....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저자
레이먼드 카버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05-02-24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젊은 소설가들의 번역으로 만나는 단편소설의 진경, 레이먼드 카버...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
Vanilla Essay2013. 8. 8. 20:45


챈들러

레인먼드 챈들러, 무라카미 하루키, 스콧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카버, 트루먼 커포티, 존 치버, 그리고 업다이크까지..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는 특별한 이유로 위 작가들의 작품을 읽었다. 슬쩍 눈치빠른 분들은 아셨을 것이다. 선택과 순서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람은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라는 걸... 그가 어디 작품 한 귀퉁이에서라도 이 작가들을 언급안하고 넘어갔던 적이 있었던가. 그는 위의 작가들을 사랑했고 또 열렬히 추종하기도 했었다. 그리하여 하루키를 읽었던 대다수의 독자들에게는 한가지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실마리를 이 작품들에게서 찾게된다. 그는 어떻게 이렇게 군더더기 없으며 세련된 문장들을 구사할 수있는가에 대한 궁금증말이다.  


여타의 기사와 사설과 평론을 몇개 찾아보니까 나같은 경우가 적지 않았나 보다. 죄다 하루키 팬이랍시고 줄줄히 피츠제럴드, 카버, 커포티를 찾아서 읽었다고 고백들을 하고 계셨으니까.. 평론가들은 왠지 그런 하루키팬들에게 거봐 하루키가 소개해주지 않았으면 찾아보지도 않았을텐데 용케 좁은 소양으로 운좋게 명작들을 찾아 읽으셨네라며 은근슬쩍 비아냥거렸다. (지금도 이 현상은 진행 중이라고 본다.) 어찌됐든 좋은 명작이야 두루두루 읽히면 좋다. 아무리 좋은 작품들도 시간에 한번 매몰되면 어떤 계기가 벌어지기전까지는 '무덤속 신세'면할 길 없으니까. 이상한 나라 앨리스도 그랬고 위대한 개츠비도 그랬으며 '그리스인 조르바'도 모두 무덤속 신세들이었다. 


스콧 피츠제럴드

행여 갑자기 조인성이나 소지섭이 나와서 한 손에 <폭풍의 언덕>을 들고 커피한잔들고 읽으면서 혼자 '왜 너는 괴로우면 안되니'라고 읇조리며 연인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이라도 날린다면 그 다음날 서점가에는 에밀리 브론테의 이름이 박힌 책들의 탑을 보게 될 수도 있다. 그게 무슨 죄라고. 민망해야 할 꺼리도 못된다. 찬밥되었던 고전들을 평상시 알아보지 못해서? 어차피 되새김질은 소만 하는 것도 아니고 그 소조차도 과거에 소화불량이었던 시절을 생각하며 다시 억센 풀을 뜯어먹을 절호의 기회가 생긴다고 생각하면  이 보다 더 흥미진진한 모험도 없다. 그래서 다시 읽는 건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가끔 여러 문학계의 글들을 접하다보면 일상에서 김치드시듯 늘 고전을 탐독하지 않으면 당신은 독서가의 자격이 없는거야라고 나무라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다. 고전 문학소설을 삼면에 켜켜히 쌓아두고 고전의 숲에 파묻혀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러지 못했다고 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고전명작 몇 권 다시 드는 것도 꽤 의미심장한 일이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닐테니..


트루먼 커포티

어찌되었든 언급한 책들을 주욱 돌아보다가 미처 읽지 못했던 몇 권의 책들을 발견했다. 어..그런데 읽었던 책도 책장을 넘기다보니 이게 또 새로운 거다. 기억도 하나도 안나는데다가 줄거리조차 새롭다고 느껴질 때는 혹시나 오래전 책 사재기만 하고 읽지도 않았던 비운의 책들이 아니었을까 곰곰히 생각하게 된다. 역시 기록이 없으면... 그리고 적용과 응용이 없으면 전부 휘발되어 날아가버리는 걸까. 내 과거의 책탐독의 결과는 실온에 나온 드라이아이스만도 못한 수명이었나보다. 그렇다고 시디나 DVD같은 기억력을 바랬던 것은 아니었는데 이토록 생경하다니..이래서야 책을 읽었다고 할수나있나 푸념만 나왔다. 


아마도 당시에는 미사여구와 화려한 만연체 난무하는 고전소설의 페이지속에서 지루함을 이기는 방편으로 그저 '읽기'만 했으리라. 미션 클리어처럼 앞으로 돌진하면서 한 줄 한 줄 해치우는 심정으로...그 의미와 행간의 뜻따위는 어떻게되도 좋다고 생각했겠지 그러다가 맨 뒤쪽 표지로부터 몇 십장 안쪽에 다다르면 아 대충 이렇게 결말이 되는구나라고 신속히 덮어버리고  치워버렸을 게다. 그래서말인데 누가 카버의 단편을 이야기하거나 커포티의 세련된 문장을 인용하거나 하면 속으로 '그런걸 다 기억한단 말이야?' 엄청 감동적이었나보네라며 놀라워했다. 소설의 편린을 기억한다는 건 두고두고 그 사람의 인생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다. 물론 그 대상이 되는 문장이 독을 품고 있을지 아니면 아름다운 로망을 이야기일지 선택하는 독자의 몫이겠지만 책 귀퉁이 아니 메모지 짜투리에 끄적여쓴 글귀조차도 어느날 문득 발견하게 되면 고구마 넝쿨캐듯 당시의 감흥들까지 부록으로 얻을 수 있다. 추억이든 영향이든 이런 것들이 가능하려면 적어도 뭔가를 기억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레이먼드 카버

아쉽게도 그런 기억의 파편 및 짜투라기 끄적임조차 보이지 않는 내 독서인생이라니..좀 한심스럽고 허무했다. 최근 들어서는 한 권을 읽으면 조그만한 페이지에 단순하게라도 써둔다.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자만 그래도 쓴다. 그렇다고 뭘 어떻게 활용하겠다는 거창한 생각같은 건 없다. 그저 써둘 뿐이다. 억울하니까. 뭔가 현재의 생생함이 잠재의식으로 가버리는건 너무 매정하고 무책임스러워 보여서다. 뇌는 너무 매정하고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으니 안간힘을 쓰면서 무엇이든 써서 남겨야 겠다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어제 그렇게 많이 읽었다고 자부했던 커포티의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또 다시 읽었고 카버의 단편집 '사랑을 말할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을 다시 꺼냈다. 읽다가 보니 언저리 비슷한 처지의 책들을 죄다 다시 읽고 싶어졌다. 이를 어쩌지 시간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고 먹고는 살아야 하는데 이 충동적이고도 무책임한 의욕이라니..


존 치버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독서가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가치있을까라고 ..명사들의 서슬퍼런 꾸짖음이 귓가에 들리는 듯 하지만 사실 내가 책을 몇 권 더 읽는다고 해서 내 삶이 윤택해질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경험적으로 보면 감성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좀 더 사색적이 되는건 맞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스타일에 대한 구성요소지 경제적인 구성요소로 작용하진 않는다.  매정하게 이야기해서 내가 고전 몇 권을 더 읽어도 마이너스 통장에 뭔가 입금되는 건 아니다.  무형의 자산. 좋은 소리다. 마음의 양식이 되고 깊어가는 내면의 성찰도 좋고 다양한 인간군상의 간접경험도 사는데 도움이 될테지 그런데도 이 독서가 죽고 못하는 어떤 거만스러움이 될 때가 있다. 가난하고 우울해도 정신적으로 좀 더 깊어질거라는 늘러붙은 자존심마냥 하염없이 비현실적인 어떤 고리타분함 같을 때가 있다. 그런데도 이런 책들을 읽게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존 업다이크

난 아무래도 아무생각없이 그냥 읽나보다. 그래서 오래도록 곁에 두고 읽고 또 읽고..좀 바보스럽고 무의미한듯 하지만 왠지 이야기들이 나와 너무도 달라서 황당해서 그런걸까 것도 아니면 언젠가 경험했었던 유사감정의 기시감때문이었을까.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겠고 어떻게든 좀 공유해보려고해도 누구랑 말해야할지 모르는 막막한 그런 상태에서 맞닥드린 공감대 같은 것들...? 이도저도 아니면 챈들러나 커포티나 카버, 피츠제럴드가 일정부분 추억을 점거하고 있어서일수도 있겠다. 그들이 없었으면 내 청춘의 초상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거라는 .....뭐...비스무리한 착각같은 것들인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 모든 작가들을 사랑한 덕에 그를 읽었던 대다수의 팬들도 이 작가들의 작품을 따라 읽었다. 어떤 점에 있어서는 그냥 찾아읽었어도 좋았겠지싶다.  우연찮게 도서관을 뒤지다가 문득 '달려라 토끼'를 읽고 '그게 누구였는지 말해봐'를 읽고 '빅슬립'을 발견하고 '위대한 개츠비'를 집어들고 하는 일들이 운명처럼 일어나는것도 흥미진진한 일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고 한들..즉 하루키 아저씨가 소설에 언급하고 에세이에서 칭찬하고 개인적으로 너무좋다 어쨌다고 몇 줄 써놓은걸 보고 호기심에 찾아 읽었다고  한들 그게 부끄러운 책읽기가 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책을 어떻게든 읽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렇게 된 이상 이 후 스토리는 읽은 사람의 몫으로 남겨질 뿐이다. 읽었으니 좋은 것이고 좋았다면 더 기쁜일이다. 그게 비록 하루키덕이었지만..그게 아주 친한 친구를 통해서 또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속으로 쾌재를 부를 일이다. 쾌재를 부를 일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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