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BOOK/에세이2013. 10. 9. 09:22


'비에 젖어 지금 당장 무너져 내릴듯한 길가의 페옥이라도 바라보는 눈길'로 '보너스는 어떻게 하실거냐'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나도 최근 들었다. (에세이 초반부에 관련 에피소드가 나온다.) 보너스나 퇴직금이나 매일반이긴 하지만 어찌됐든 이런 이야기를 듣게되면 좀더 사람들이 배려심이 있었다면 세상이 좀더 살기 좋을텐데라고 생각하곤 한다. 물론 이건 하루키의 삶과 직업적 특징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가 자유직이어서 은행에 들르고 직원이 직업이 뭐냐고 묻고 난 그런거 없다고 말하고 직원은 불쌍한 눈으로 쳐다본다는 건 그 직원의 착각이지 하루키가 불쌍할 이유는 없다. 그 직원보다 열배이상 부자일테니까. 


다만 그저 일반 사람들이 바라보는 통상적인 시선에 대한 약간의 비꼼. 이윽고 세상이 결코 바라는데로 확연하게 변해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아래에서 앙탈부리듯 그건 잘못된거야라고 고집세게 우겨보는 것에 대한 안스러움 같은 것이다. 나라면 아마도 하루키가 고군분투하듯 세상의 고정관념과 싸울때 응원이라도 보내주는 정도겠지. 왠지 안스럽거나 동질감을 느껴 책장 한 귀퉁이에서 모서리를 접고 '맞아요 하루키 아저씨 저도 그래요'라고 겸연쩍게 외친 적이 한 두번이었던가. 약간은 비겁하게 하루키 에세이를 읽으면서도 응원을 잃지 않는 것, 그게 하루키 에세이를 읽는 나만의 태도였던 것 같다.  


가끔 NY양키스보단 NY메츠, 베니티페어 보단 애틀렌틱, 일본식보다는 타이식, 팜비치보다는 마이애미 비치, 노먼 테일러보단 고어비달, 뉴욕타임즈보단 월스트리트 저널이 더 INSVILLE 하다고해도 사실은 그 차이가 뭔지 잘 모른다고 생각한다.('인터뷰'지에 실린 기사에 관한 에피소드) 하루키도 그런가보다라고 생각했을 거다. (나도 몇개 생각해봤지만 MS보단 애플, 한가인보다는 수지 뭐 이래야 하나싶어 관둬버렸다.) 나는 그의 글 한복판에서 '의도'가 뭔지를 읽으려고 애쓰는 편이다. 그가 대충 '그런가보다'라든지 '그럼 할수 없지'라고 관조적이고 수용적인 문장으로 마무리한다고 해도 결국 속으론 굴복하지 않을 걸 안다. 이미 '여느때는 무엇인가 있던 자리에 아무것도 없게되는 마이너스 상황, 결락의 상황쪽을 더 선호한다'고 밝힌바 있고, '파업좋잖아요.오래이어졌으면 하는데요'라고 지면에 쓰진 못해도 에세이에 끄적일 정도의 용기도 가지고 있다. 기타 태풍을 좋아한다던지.요인암살은 유쾌하다라든지 같은 경쾌함은 세상이 정말 천편일률적이라하더라도 나야말로 그렇게 살수는 없다고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중년의 아저씨같다. 아웃사이더이자 반항아적 틴에이저 스피릿이라도 있는걸까. 아마 그가 재즈적이지 않고 록적이었다면 볼만 했을텐데..폭압적인 사회적 이슈에대해서 강렬한 참여적인 일탈로 무시무시한 사운드를 뿜어내 주셨을 지 누가 아는가.


그런 그가 경험적 산물에 대해서 경의를 표할때는 좀 더 진지하게 바라보곤 하는데 사실 문장들을 주루륵 내려가면서 읽다보면 아 이분께서는 기분 좋은 상상력을 통해서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지 않으시나보다라고 생각한다. 이건 고정관념에 대한 반감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형성된 세월의 축적과 정서상에서 우러러나오는 일종의 편안함 때문이 아닐까싶다. 언어는 공기와 비슷해서 어느지역에나 그곳만의 공기가 있고 그 공기에 맞는 언어가 있어, 웬만해서 그것을 거역하기 어렵다고 했던 건 이런 이유에서 기발하다고 느껴지곤 하는데 역시 스파게티는 이탈리아의 그 스파게티가 적절했던 것도 그 환경에서 벌어지는 진정한 의미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 낭만을 즐기는 듯해서 편안하다. 나도 그 공기가 특별하다는 건 안다. 동네 근처에서는 더듬거리며 몇 문장도 이야기 못했던 내가 아틀란타의 모 호텔 로비에서는 그 곳 공기에 맞게 편안하게 프론트에서 조크따먹기라도 한다. 그건 분명 그곳 공기탓일거라고 상상하곤 한다. 이런게 바로 하루키적 영향력이라고 할테지. 


하루키의 에세이들의 대개는 B급정서도 꽤 많이 녹아져있다. 상상력의 퀄리티가 꼭 어마어마한 내용으로 채워져야 하는 건 결코 아닌데도 요즘에는 교양이니 소양이니 하면서 거장과 마스터피스 범람의 세계가 되어버렸다. 슬며시 반감이 치솟을 무렵, 하루키가 은근슬쩍 내뱉는  B급, C급 영화를 뼈다귀째 쪽쪽파는 기분으로 보게된다고 할 때는 찬란한 B급 매니아정서가 내몸과 정신에 맞는 옷처럼 느껴질때도 많은 것이다. 요즘은 B급정서도 개성의 구별이라는 액서세리로 활용되지만 사실 내용이 중요한거지 단어에서 풍겨나오는 이미지만 노리다보면 너무 유행적이라는 느낌도 든다. 하루키적 뉘앙스도 그렇게 흘러갔던 적이 많다. '브룩스 브라더스'의 블레이저코트를 입는다고 에피소드에 끄적였다고 해서 하루키가 이 브랜드를 선호하고 콜트레인의 음반을 어마어마하게 듣고 마라톤을 즐겨하며 생선요리에 맥주를 즐겨먹는다고 한 들, 그게 현대인의 라이프사이클에 어떤 영향을 준다는 것일까. 그건 그저 하루키의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다. 


다만 하루키의 에세이가 잘 읽혀지는건 그가 설명하는 이야기들이 대개 공감할 만하고 또 참신하다고 느껴질만큼 특별해서(역설적이게도 대중적이지 않은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대중적으로 인기를 구가한다는..)인데 역시 그가 말했던 것처럼 나도 '유려한 문장이나 치밀한 심리묘사에 감탄스러워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모조리 잊히고 아주 사소할지라도 효율적인 종류의 것만 부분적으로 기억난다'고 할때 이 아저씨는 자기가 유별나지 않고 우리랑 똑같다고 말하는 것 같다. 나도 역시 그런데..도대체 좋은 문장들은 적어놓지 않으면..때때로 인용하거나 써먹지 않으면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저 줄거리에서 파격적인 부분들에 대한 장면만 떠오른다. 어쩌면 과정에서 오는 좋은 느낌들은 공기중으로 사라지고 결과만 남는게 세상의 구조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횡행하는 수많은 주장의 대부분은 끝이 좋으면 그만이라는 정신으로 성립되어있다' (P68) ..이 문장이 진리라는건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여지껏 감상평이라고 주절거렸는데 이제 본론이라니..) 이 에세이 역시 문학동네에서 내놓은 에세이 수필집 시리즈중 하나다. 제목으로 보면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묘한 뉘앙스가 느껴지시는 분은 자신의 감수성의 예리함을 뿌듯해하는 대신 약간의 변태기질과 그 흔해빠진 AV의 몇장면이 상상되는걸 민망하셔도 상관없다. 왜냐면 하루키가 제목을 이렇게 지은건 에세이 안에 등장하는 동일한 이름의 에피소드때문이었으니까. 어느날 갑자가 'F심 연필은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 같지 않습니까' 라는 말에 '무척 난감하다고 하면서도 최근에 F심 연필을 손에 쥘때마다 그만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이 떠오르고 '이번엔 어디 , 널 한번 써볼까' '꺅 싫어요, 거짓말이죠' 라고 하는 괴이한 광경을 떠올리는 하루키 아저씨와 별반 다를게 없을테니까. 이 정도면 하루키도 역시 평범한 중년의 욕망의 아저씨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에세이는 늘 이런식이어서  어떤 중심이 되는 주제같은 것들을 책의 뼈대라고 말하기 어렵다.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다양한 사건과 여러가지 생각들이 스파게티처럼 엉크러져 하나둘씩 차곡착곡 등장했으며 그 과정에서 그저 하루키적 라이프스타일의 편린을 엿보다는 정도? 아무튼 다들 이런 것들이 궁금한 거겠지. 하루키의 소설로부터 연유한 다양한 호기심은 에세이말고는 충족할수 있는 곳이 없을테니까. 적어도 거짓말하지 않고 털털하고 속내를 가끔 드러내는 에세이야말로 하루키의 진면목을 보는 또 하나의 창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가끔 삶을 대충, 혹은 무덤덤하게 살면서도 기기묘묘한 자기정체성에 대해 특출나게 표현하는 방법을 모른다. 나는 밥을 먹었고 잠을 잤고 그리고 친구를 만났고 기분은 별로고 그래서 TV를 봤고 다시 누워서 꿈을 꿨다 정도의 패턴만 이어질 뿐이지 세상이란 이런 지루함과 뻔함의 연속인것이고 머리속에는 디지털적인 회로에서 또 하나의 연산이 이뤄지는 것처럼 변화도 없는 무미건조함이 이어지곤 한다. 


일상생활에서 낭만이란 건 묘한 감정잡기에 불과하다고 느껴질때가 종종있는데도 하루키 에세이 편린속에서는 내가 누려왔던 일상들이 그와 다르지 않음에도 훨씬 더 풍요롭게 다가온다. 그 정체가 바로 하루키의 감수성때문이 아닐까. 그가 소설을 휘리릭 쓸것 같아도 '소설가도 옛날처럼 한가로이 뜰에 앉아 참새떼를 보며 '벌써 봄이로군'하고 주절거릴수 있는 시대가 아니어서 세금이니 대출금이니 신경쓸일이 많다고 토로하고 스파게티 5인분을 방바닥에 퍼질러놓은 듯한 전깃줄 더미에 파묻혀 악전고투하면서 이것을 데모크라시의 죽음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그의 로망이다. 솔직하기도 하고 낭만적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는 솔직히 '인간은 반드시 실수를 하기 때문에 글을 쓰노라면 실수가 확고한 형태로 남는 걸 두려워한다고 고백도 했다. 


아 그래 하루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던 게지. 천재적으로 문장들을 유려하게 배치하고 단백하게 쓰며 상징적인 정서들이 담긴 단어들이 곳곳에 놓이는 걸 읽을땐 전혀 다른 거장의 모습처럼 보였는데 여전히 그는 일반사람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사는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솔직한 견해를 늘어놓을때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공감했나보다. 그도 실수를 하는 사람이라는 걸 잊기라도 한건 아닌데도 가끔 작가들은 고고한 서민 레이어에 살지 않고 몇단계 위 성층권 어디즈음에 깨끗한 정서의 레이어층에 집이 있어서 거기에서 공중정원에서 뜰에 물을 부면서 바람에 눈을 감고 글을 쓰고 있을것 같은 착각이 들곤했는데..그건 다 환타지였던 거지 싶다. 


그도 핀천의 <제49호 품목의 경매>를 읽다가 좌절하고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을 부인과 공유하며 읽는다. 하루종일 일하고 가게문을 닫은뒤 긴장을 풀기 위해 맥주를 한두병 마시고, 그 뒤에 우리집 부엌 데이블에 앉아 소설을 섰다. 거창한 공간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생계를 도외시하고 미친놈처럼 수염도 안깍고 글을 쓴것도 아니다. 금연을 할때는 남에게 시비도 걸고 지저분한 말을 내뱉으면서 남에게 싫은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요즘 사람들이 디킨즈따위를 읽지 않고 샬럿 브런테니 푸시킨이니 스타인백을 모르고 산다는 것에 대해 의아해한다. 그래놓고 자기비하적으로 '삶을 사는 방식자체가 근본적으로 글러먹은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역설적으로 내뱉어놓았는데 그 어느 누구도 이런 자기비하에 불쌍하다고 말하지 못한다. 왜냐면 그 만큼 독특하면서도 개성적이라는 뜻인데 가끔은 우리도 그렇게 살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동경의 대상이 된다면 모를까. 


나는 가끔 이런 하루키의 에세이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끼곤 한다. 나도 과거 어느지점에서는 자유스럽게 생각하고 틀에 구애받지 않았던 적이 있었는데 칠칠맞게 허술하고 구멍 빵빵 뚤린 인생이긴 했어도 좀더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었고 어느날 아침의 공기가 특별해서 뭔가 흥미진진한 일이 생길것만 같은 모험의 요일들이 등장하곤 했었는데 ..지금은 기억조차 나질 않다니 ..하루키가 가끔 이렇게 에세이에서 자신의 괴이함을 겸연쩍게 내뱉는 건 사실 자신이 민망해서라기 보단, 나 이렇게 사는데 바꿀생각도 별로 없고 내가 이렇게 생겨먹은 놈이니까 앞으로도 이렇게 살께요 라고 은밀히 이야기 하는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에서 ..고정관념속에서 익숙해져있고 깊이 있게 파고들지 않으며 회로에서 벗어나려고 하지않은 현대인들로서는 은근한 질투와 동경과 부러움이 느껴질 수 밖에 없는 삶이 아닐까. 아마도 대리만족이라도 하고 싶어서 하루키 에세이를 읽는 거겠지 싶다.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2-07-24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노르웨이의 숲』 『해변의 카프카』 등으로 폭넓은 사랑과 지지를...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