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Pantry2014. 5. 27. 10:46

1.

백년의 고독을 읽고 있다. 1권은 그럭저럭 잘 넘어갔는데 갑자기 여기도 호세, 저기도 호세, 여기도 아우렐리아노 저기도 아우렐리아노, 여기도 부엔디아 저기도 부엔디아. 이러고 있다. 내가 아무리 워킹메모리가 1M 수준이라지만 이정도면 나를 농락하다못해 희롱하는 수준이다. 앞에 떡하니 가계도를 붙여놓긴 했는데 읽다가 느닷없이 앞으로 펼쳐서 이 아르카디오가 어떤 아르카디오였는지 확인해봐야하는 닭 같은 짓을 해야하는게 약간 불쌍하다. 공부도 못했는데 책을 읽을 때도 이모양이라니...


2.

'작가란 무엇인가'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랬다. 다들 미도리를 택할 거라고, 실제 와타나베가 미도리를 택하기도 했고..그래 난 특이한게 아니라 주류였던 거다. 짐짓 나오코와의 비현실적인 의식 침몰에 포커스를 두는 채하고 미도리의 조크에 빨려든 것이겠지. 아무튼 하루키는 아예 대놓고 전략적으로 '노르웨이의 숲'을 썼다고 밝혔드랬다. 그래놓고 자기 글은 읽기쉽고 유머도 있고 페이지가 잘 넘어가고 균형을 잘지키며..어쩌고.. 블라블라 하셨다. 이 분 스스로는 소설가는 판단을 유보하고 독자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게 제 역할이라고 해놓고 자기 글에는 어떤 식이라고 잘도 결론을 내리신다.ㅎㅎ. 생각외로 하루키는 유별난게 아니라 그냥 심플한 거라고 생각되어진다. 이게 아쿠타카와라든지 나오키상에 대한 인터뷰였다면 분명 하루키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거다. 어 그렇게 신경쓰지 않았는데도 이런 상을 받게 되다니 어떨떨하네요. 저도 제 책을 많이들 읽어주시는 이유를 잘 알지못해요. 전 그저 쓸 뿐인거죠. 상을 받았다고해서 제가 어떻게 달라질 것도 아니구요. 아무튼 감사해요어쩌고...겸손한듯 이렇게 인터뷰했을 텐데, 느닷없이 파리 리뷰에서 본색을 드러내주시다니...^^ 스스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단 뜻. 어쩌면 하루키는 몸속에 천마리의 고양이를 키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양이 대마왕 하루키..


3.

내가 아끼는 아주 어린 후배에게 물었다. 넌 요즘 무슨 책을 읽니. 책 읽을 시간이 별로 없어서..뭐..그다지..읽진 않는데요 요즘 책을 읽기에는 할 일이 너무나 많아요. 할 일 뭐. 음 연애도 해야하고 놀러도 가야하고 스샷질에 카톡도 열심히 해야하죠 소셜 라이프인셈이죠. 제기랄소셜라이프같으니라구..  카톡과 페북과 트위터는 넘실넘실대는 감각으로 철철 넘치는데 페이퍼에 밝힌 글자들은 시간을 잡아먹는 머신이라도 되나보다. 다들 정색들을 하신다. 이게 요새 젊은이들의 특질인거다. 온라인소셜라이프~ 터치질과 책의 3분의 1사이즈 영역에 시선을 맞추는 아주 고된 일을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캘리브레이팅 라이프인 것이다. 여기서 고전 문학을 읽어야 한다 어쩌고 내가 그래버리면 그때부터 난 꼰데가 되는거다. 책을 읽고 안읽고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의지와 마음이니 여기서 멈춘다. 잘 참았다. 언제고 때가되면 풍경이 책을 부르고, 음악이 장면이 묘사된 구절을 떠올리게 하고 그러겠지. 요즘 애들의 삶에는 모험같은게 없으려나.  아..그러고 보니 최근 책에서도 유명 저자가 그랬다. 요즘 누가 '모비딕'을 읽냐고..이제 책이 사람들을 선별하는 계절이 왔고 그 계절은 바뀔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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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ewell
Review BOOK/소설2013. 11. 13. 20:16


불운은 너무나 오스카 와일드적이었고, 우연은 피츠 제럴드적이었으며 스팬서적인 암울함이 깃든 공기들이 앨런 포우적이었다고 느낄 때 데자뷰처럼 읽었던 단편들의 문장들이 현실세계의 미장센처럼 복원되곤 한다. 막연히 묵었던 숲속 호텔의 수영장에서 홀로 튜브에 둥둥떠다니다가 '개츠비'도 이렇게 마지막을 맞이했을거라는 둥, 아틀란타 레지던스 인 카운터에 놓여있던 은화단지를 보면서 '발할라 드러그 스토어'를 떠올리고, 매일매일 가쉽처럼 터지는 아이돌의 연애사 틈새에서 '멕기니스'의 사랑 이야기를 슬며시 떠올리는 식이다. 그게 카버가 되었든 피츠제럴드가 되었든 사실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다. 다만 언젠가 삶의 언저리에서 맞닥드릴만한 사건들의 이면에는 '예전부터 있어왔었던 모종의 반복' 메커니즘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사소하게 스쳐지나가지 못하게 되는게 신경쓰일 뿐인거다.  아...이건 뭔가 상징적인 건가...내 인생의 중대한 핀 포인트라도 되는 걸까 라고 자꾸 되뇌이듯...


트루먼 커포티의 단편들도 유독 그런 기시감이 강했던 것 같다. 삶이란 세월을 지치듯 쏜살같이 지나쳐왔어도 질감은 비슷한 걸까. 다양하게 수놓았던 무늬들의 패턴이란 결국 모두 같은 뉘앙스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야기들은 시종일관 계속되었고 '요트여행'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커포티에 대한 안스러움이 종이 지면 위에 눈 내리듯 내려앉아버렸다. 이것도 소설일 뿐이데 어차피 허구의 세계와 가상의 이야기들이 남겨놓은 감정의 배출구를 따라 무엇인가를 토해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싶어 몇 번이고 앞쪽으로 리와인드해서 회상해보곤 했다. 커포티의 재능을 고려해본다면 대중들은 이 <차가운 벽>에서 따뜻하고 온정어린 시선이 맴도는 단편 몇 개를 이런 절절한 기억의 대상이었음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크리스마스의 추억>(1956)과  추수감사절에 온 손님(1967), 그리고 어떤 크리스마스(1982)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시대는 다르지만 정서는 비슷한 과거로 가게 될 것이고,  이 이야기들이 커포티의 자전적 이야기란걸 눈치 챌 즈음, 커포티의 쓸쓸했던 생애의 끝자락과 대비된 유년시절의 따스함, 그리고 밑바닥 정서에 침몰되어버린 불운한 나날들에 대한 회한같은 것들이 읽혀지게 된다.  아침, 찬서리가 풀잎을 덮어 반들거리고, 오렌지처럼 둥글고 더운날씨의 달처럼 오렌지빛인 태양이 지평선위에 떠올라 은색으로 빛나는 겨울 숲을 달구며, 검은색 풍로와 안락의자 두개가 놓여있는 벽난로에서 버디는 숙과 퀴니와 소근거린다. 으르렁거리는 국화꽃오드 헨더슨보다 더 치졸했던 과거야 불편한 기억도, 추억도 아니 될수 없겠다. 누구나 성장의 길목에서 졸렬해지기도 하고 끝없이 순수했음이 상처받기도 할테니까..독자들이 느끼는 안타까움이란 건, 이 정서가 성장의 연료로 쓰여지지 않은 채 불완전 연소되어 성인의 커포티에게 드리웠을거라는 막연한 추측 때문일 것이다. 커포티는 불운했던 것 같아...라고 혼자서 몇번이고 중얼거렸었지아마... 


 지인들과 이야기했었는데, 대개의 경우 <인 콜드 블러드>의 명성만으로 기억하고 <티파니에서 아침을>과 같은 로맨스적 감성만을 커포티의 정체성처럼 꺼내놓곤 했었다. 매스컴에서 떠들어대고 광고지에서 큰 폰트체로 위압적으로 시선을 장악당하고,  '20세기 소설지형을 바꾸어버린 역작' 타이틀에 포커스가 가면, 안 읽고는 못배기는 커포티의 마스터피스, 그리고 그동안의 이미지들은 다 점거당할테세다. 우리는 반지의 제왕을 읽으면서 사우론을 내일 만날것 처럼 생각하지도 않고, 어느 동물원에서 호랑이가 사자를 잡아먹었다던 해괴망칙한 또 하나의 이슈를 내 걱정거리로 치환하지도 않아서 '인콜드블러드'의 다큐멘터리 서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격리시킬수 있지만, <차가운 벽>에는 호랑이도 사자도 등장하지 않으며 사우론도 없고 몇 명을 피칠해가며 해치우는 연쇄살인마도 없어서 그냥 무미건조하다.  그저 일상적인 삶의 무늬를 그려놓았는데, 어쨋든 자주 읽게 되는건 <차가운 벽>쪽이다. 뜻뜻한 한 여름 아무도 없는 호텔 수영장 비치파라솔 밑에서 레몬색 햇볕을 배경으로 '차가운 벽'을 읽으면 완벽하게 온정적 관찰자로 변할 수 있다. 내 이야기일수도 있고 친구 이야기일수도 있으며 어제 있었던 사건의 감정 복제판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인 콜드 블러드'같은 부풀어오른 풍선의 불안함쪽 보단 개인적으로 완벽히 우위에 있는 셈이다.


불현듯 왜 단편집의 제목이 '차가운 벽'이었을까 생각해보았는데 '열여섯은 키스를 한번도 받아보지 않은게 아니라 한번도 강간을 당하지 않았다는 뜻이겠죠'(차가운 벽-1943) ..이 문장이 첫작품에 등장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혹시라도 '차가운 벽'이란 독자가 커포티의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반항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16살의 풋풋하고 설익은 애송이라할지라도 독자들의 '감정'을 받아들여 '연한 장미빛이 감도는 벽이 있는 방'에서 잠이 들 것이라고....자신의 작품이 좀더 따뜻해질수 있다는 인트로, 무언의 투정같은 것이었으리라. 물론 차갑다는 평에서 상처도 받고 토라지기도 한다는 은근한 고백까지 덧붙여서 말이다. 그 뒤로는 사실상 다양한 인간군상에 대한 씁쓸함(자기만의 밍크코드-1944)과 말도안돼는 행운이 현실로 다가오는 과정(은화단지-1945)을..., 그리고 노년의 여인이 정체성에 위협받으며 존재감을 잃어가는(미리엄-1945) 이야기까지.. 삶을 편광시켜 프리즘처럼 다반사시켜준다. 이외에도 이 책에는 다양한 편린들이 공존한다. 


예전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언급했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모티브, <마지막 문을 닫아라>도 이 책에 있다. 그러고보니 이 정서를 이해할 것도 같다. 솔직하고 욕구적인 본능을 감출줄 몰라서 불행한 결말로 이어지고 말거라는 아슬아슬함은 1960년 앨랭들롱의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 Purple Noon) 가 떠오른다. 그때 들었던 캐릭터평이 '아름답지만 천박한 알랭들롱'이었던가. (아마 시오노 나나미의 평이었을 것이다.) 애나 스탐슨이 주인공 월터에게 말미에 한마디 던진 내용도 "그런건 싸구려것이야 월터, 싸구려지" 였다. 주인공은 신분상승의 욕구를 억누르지못해 끊임없이 사람들을 이용하며 상처주고 버린다. 욕구의 결말이 뻔해질 즈음. ..항상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싶었지만..외면하는 연인의 뒤를 따라가 소리없이 사랑해라고 말할수도 있었지만 기어코 모든 것이 자신을 외면하고 난 후, 배개에 얼굴을 파묻고 손으로 귀를 막아버리고 "아무것도 생각하지마, 바람만 생각해' 라고 속삭인다. 지극히 자연스러워서 겸연쩍은 감정이 들어버렸다면 반쯤은 '월터래니' 적인 거지 피할수 없는 숙명적 캐릭터인 거다. 우리는 모두 '월터래니'적일수 있다고 비아냥 거렸던 옛 친구가 기억날 정도다. 


이 후에도 '내 복숭아가 싫다면 내 통조림에는 손도 대지말라'던 보빗양의 파격, '꿈을 5달러에 팔아버린' 실비아가 내뱉은 '정말로 무섭지 않다고..어쨋건 더 이상 훔쳐갈것도 남아있지 않다던 고백을 기억한다. 방울뱀과 여자를 두려워하는 조지슈미트와 아이보리헌터, 그리고 중간에서 사랑을 인터셉트했던 프레디 페오, 현실도피하는 조지슈미트를 자신으로 치환해버린 조지와 부인 사라이야기를 읽으면서 레이먼드 카버도 이렇게 일상적 삶에서 벌어지는 균열을 '불륜과 일탈'로 묘사했었는데...묘하게도 다들 일상을 소리없는 균열로 보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쳐간다. 불편함이 느껴지지만 마치 몸의 일부인 것마냥 떨어지지 않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렇듯 이 책에서 행운과 행복을 말했던 단편은 몇개 안된다.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했던 작품은 <어떤 크리스마스>(1982)다. 어린 시절의 커포티가 자신의 아빠에게 말했을 것 같은 대사 때문이다. 자신을 낳아서 인생이 망가져버렸다는 엄마의 고백과 산타클로즈도 없고 하느님도 없다는 아빠의 외침사이에서 묵묵히 시선을 돌리는 버디, 아니 커포티의 불행이 떠올라서다. 아마 이런 감성조차 없었다면 그가 말미에 그토록 인정받고 싶어했을까. 사랑 결핍증이었던 것 같다..커포티는.....



"안녕하세요. 아빠 잘지내세요? 

나도 잘지내요. 

나는 이제 비앵기 페달을 아주 빨리 밥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금방 하늘로 날아갈거니까 눈을 크게 뜨고 잘 보세요. 그리고 

네 사랑해요. 아빠.  


버디 올림" 


 


차가운 벽

저자
트루먼 커포티 지음
출판사
시공사 | 2013-06-24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헤밍웨이와 더불어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한 작가 트루먼 커포티 소...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
Review BOOK/에세이2013. 10. 9. 09:22


'비에 젖어 지금 당장 무너져 내릴듯한 길가의 페옥이라도 바라보는 눈길'로 '보너스는 어떻게 하실거냐'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나도 최근 들었다. (에세이 초반부에 관련 에피소드가 나온다.) 보너스나 퇴직금이나 매일반이긴 하지만 어찌됐든 이런 이야기를 듣게되면 좀더 사람들이 배려심이 있었다면 세상이 좀더 살기 좋을텐데라고 생각하곤 한다. 물론 이건 하루키의 삶과 직업적 특징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가 자유직이어서 은행에 들르고 직원이 직업이 뭐냐고 묻고 난 그런거 없다고 말하고 직원은 불쌍한 눈으로 쳐다본다는 건 그 직원의 착각이지 하루키가 불쌍할 이유는 없다. 그 직원보다 열배이상 부자일테니까. 


다만 그저 일반 사람들이 바라보는 통상적인 시선에 대한 약간의 비꼼. 이윽고 세상이 결코 바라는데로 확연하게 변해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아래에서 앙탈부리듯 그건 잘못된거야라고 고집세게 우겨보는 것에 대한 안스러움 같은 것이다. 나라면 아마도 하루키가 고군분투하듯 세상의 고정관념과 싸울때 응원이라도 보내주는 정도겠지. 왠지 안스럽거나 동질감을 느껴 책장 한 귀퉁이에서 모서리를 접고 '맞아요 하루키 아저씨 저도 그래요'라고 겸연쩍게 외친 적이 한 두번이었던가. 약간은 비겁하게 하루키 에세이를 읽으면서도 응원을 잃지 않는 것, 그게 하루키 에세이를 읽는 나만의 태도였던 것 같다.  


가끔 NY양키스보단 NY메츠, 베니티페어 보단 애틀렌틱, 일본식보다는 타이식, 팜비치보다는 마이애미 비치, 노먼 테일러보단 고어비달, 뉴욕타임즈보단 월스트리트 저널이 더 INSVILLE 하다고해도 사실은 그 차이가 뭔지 잘 모른다고 생각한다.('인터뷰'지에 실린 기사에 관한 에피소드) 하루키도 그런가보다라고 생각했을 거다. (나도 몇개 생각해봤지만 MS보단 애플, 한가인보다는 수지 뭐 이래야 하나싶어 관둬버렸다.) 나는 그의 글 한복판에서 '의도'가 뭔지를 읽으려고 애쓰는 편이다. 그가 대충 '그런가보다'라든지 '그럼 할수 없지'라고 관조적이고 수용적인 문장으로 마무리한다고 해도 결국 속으론 굴복하지 않을 걸 안다. 이미 '여느때는 무엇인가 있던 자리에 아무것도 없게되는 마이너스 상황, 결락의 상황쪽을 더 선호한다'고 밝힌바 있고, '파업좋잖아요.오래이어졌으면 하는데요'라고 지면에 쓰진 못해도 에세이에 끄적일 정도의 용기도 가지고 있다. 기타 태풍을 좋아한다던지.요인암살은 유쾌하다라든지 같은 경쾌함은 세상이 정말 천편일률적이라하더라도 나야말로 그렇게 살수는 없다고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중년의 아저씨같다. 아웃사이더이자 반항아적 틴에이저 스피릿이라도 있는걸까. 아마 그가 재즈적이지 않고 록적이었다면 볼만 했을텐데..폭압적인 사회적 이슈에대해서 강렬한 참여적인 일탈로 무시무시한 사운드를 뿜어내 주셨을 지 누가 아는가.


그런 그가 경험적 산물에 대해서 경의를 표할때는 좀 더 진지하게 바라보곤 하는데 사실 문장들을 주루륵 내려가면서 읽다보면 아 이분께서는 기분 좋은 상상력을 통해서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지 않으시나보다라고 생각한다. 이건 고정관념에 대한 반감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형성된 세월의 축적과 정서상에서 우러러나오는 일종의 편안함 때문이 아닐까싶다. 언어는 공기와 비슷해서 어느지역에나 그곳만의 공기가 있고 그 공기에 맞는 언어가 있어, 웬만해서 그것을 거역하기 어렵다고 했던 건 이런 이유에서 기발하다고 느껴지곤 하는데 역시 스파게티는 이탈리아의 그 스파게티가 적절했던 것도 그 환경에서 벌어지는 진정한 의미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 낭만을 즐기는 듯해서 편안하다. 나도 그 공기가 특별하다는 건 안다. 동네 근처에서는 더듬거리며 몇 문장도 이야기 못했던 내가 아틀란타의 모 호텔 로비에서는 그 곳 공기에 맞게 편안하게 프론트에서 조크따먹기라도 한다. 그건 분명 그곳 공기탓일거라고 상상하곤 한다. 이런게 바로 하루키적 영향력이라고 할테지. 


하루키의 에세이들의 대개는 B급정서도 꽤 많이 녹아져있다. 상상력의 퀄리티가 꼭 어마어마한 내용으로 채워져야 하는 건 결코 아닌데도 요즘에는 교양이니 소양이니 하면서 거장과 마스터피스 범람의 세계가 되어버렸다. 슬며시 반감이 치솟을 무렵, 하루키가 은근슬쩍 내뱉는  B급, C급 영화를 뼈다귀째 쪽쪽파는 기분으로 보게된다고 할 때는 찬란한 B급 매니아정서가 내몸과 정신에 맞는 옷처럼 느껴질때도 많은 것이다. 요즘은 B급정서도 개성의 구별이라는 액서세리로 활용되지만 사실 내용이 중요한거지 단어에서 풍겨나오는 이미지만 노리다보면 너무 유행적이라는 느낌도 든다. 하루키적 뉘앙스도 그렇게 흘러갔던 적이 많다. '브룩스 브라더스'의 블레이저코트를 입는다고 에피소드에 끄적였다고 해서 하루키가 이 브랜드를 선호하고 콜트레인의 음반을 어마어마하게 듣고 마라톤을 즐겨하며 생선요리에 맥주를 즐겨먹는다고 한 들, 그게 현대인의 라이프사이클에 어떤 영향을 준다는 것일까. 그건 그저 하루키의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다. 


다만 하루키의 에세이가 잘 읽혀지는건 그가 설명하는 이야기들이 대개 공감할 만하고 또 참신하다고 느껴질만큼 특별해서(역설적이게도 대중적이지 않은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대중적으로 인기를 구가한다는..)인데 역시 그가 말했던 것처럼 나도 '유려한 문장이나 치밀한 심리묘사에 감탄스러워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모조리 잊히고 아주 사소할지라도 효율적인 종류의 것만 부분적으로 기억난다'고 할때 이 아저씨는 자기가 유별나지 않고 우리랑 똑같다고 말하는 것 같다. 나도 역시 그런데..도대체 좋은 문장들은 적어놓지 않으면..때때로 인용하거나 써먹지 않으면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저 줄거리에서 파격적인 부분들에 대한 장면만 떠오른다. 어쩌면 과정에서 오는 좋은 느낌들은 공기중으로 사라지고 결과만 남는게 세상의 구조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횡행하는 수많은 주장의 대부분은 끝이 좋으면 그만이라는 정신으로 성립되어있다' (P68) ..이 문장이 진리라는건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여지껏 감상평이라고 주절거렸는데 이제 본론이라니..) 이 에세이 역시 문학동네에서 내놓은 에세이 수필집 시리즈중 하나다. 제목으로 보면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묘한 뉘앙스가 느껴지시는 분은 자신의 감수성의 예리함을 뿌듯해하는 대신 약간의 변태기질과 그 흔해빠진 AV의 몇장면이 상상되는걸 민망하셔도 상관없다. 왜냐면 하루키가 제목을 이렇게 지은건 에세이 안에 등장하는 동일한 이름의 에피소드때문이었으니까. 어느날 갑자가 'F심 연필은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 같지 않습니까' 라는 말에 '무척 난감하다고 하면서도 최근에 F심 연필을 손에 쥘때마다 그만 세일러복을 입은 여학생이 떠오르고 '이번엔 어디 , 널 한번 써볼까' '꺅 싫어요, 거짓말이죠' 라고 하는 괴이한 광경을 떠올리는 하루키 아저씨와 별반 다를게 없을테니까. 이 정도면 하루키도 역시 평범한 중년의 욕망의 아저씨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에세이는 늘 이런식이어서  어떤 중심이 되는 주제같은 것들을 책의 뼈대라고 말하기 어렵다.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다양한 사건과 여러가지 생각들이 스파게티처럼 엉크러져 하나둘씩 차곡착곡 등장했으며 그 과정에서 그저 하루키적 라이프스타일의 편린을 엿보다는 정도? 아무튼 다들 이런 것들이 궁금한 거겠지. 하루키의 소설로부터 연유한 다양한 호기심은 에세이말고는 충족할수 있는 곳이 없을테니까. 적어도 거짓말하지 않고 털털하고 속내를 가끔 드러내는 에세이야말로 하루키의 진면목을 보는 또 하나의 창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가끔 삶을 대충, 혹은 무덤덤하게 살면서도 기기묘묘한 자기정체성에 대해 특출나게 표현하는 방법을 모른다. 나는 밥을 먹었고 잠을 잤고 그리고 친구를 만났고 기분은 별로고 그래서 TV를 봤고 다시 누워서 꿈을 꿨다 정도의 패턴만 이어질 뿐이지 세상이란 이런 지루함과 뻔함의 연속인것이고 머리속에는 디지털적인 회로에서 또 하나의 연산이 이뤄지는 것처럼 변화도 없는 무미건조함이 이어지곤 한다. 


일상생활에서 낭만이란 건 묘한 감정잡기에 불과하다고 느껴질때가 종종있는데도 하루키 에세이 편린속에서는 내가 누려왔던 일상들이 그와 다르지 않음에도 훨씬 더 풍요롭게 다가온다. 그 정체가 바로 하루키의 감수성때문이 아닐까. 그가 소설을 휘리릭 쓸것 같아도 '소설가도 옛날처럼 한가로이 뜰에 앉아 참새떼를 보며 '벌써 봄이로군'하고 주절거릴수 있는 시대가 아니어서 세금이니 대출금이니 신경쓸일이 많다고 토로하고 스파게티 5인분을 방바닥에 퍼질러놓은 듯한 전깃줄 더미에 파묻혀 악전고투하면서 이것을 데모크라시의 죽음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그의 로망이다. 솔직하기도 하고 낭만적이기도 하다. 게다가 그는 솔직히 '인간은 반드시 실수를 하기 때문에 글을 쓰노라면 실수가 확고한 형태로 남는 걸 두려워한다고 고백도 했다. 


아 그래 하루키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던 게지. 천재적으로 문장들을 유려하게 배치하고 단백하게 쓰며 상징적인 정서들이 담긴 단어들이 곳곳에 놓이는 걸 읽을땐 전혀 다른 거장의 모습처럼 보였는데 여전히 그는 일반사람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사는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솔직한 견해를 늘어놓을때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공감했나보다. 그도 실수를 하는 사람이라는 걸 잊기라도 한건 아닌데도 가끔 작가들은 고고한 서민 레이어에 살지 않고 몇단계 위 성층권 어디즈음에 깨끗한 정서의 레이어층에 집이 있어서 거기에서 공중정원에서 뜰에 물을 부면서 바람에 눈을 감고 글을 쓰고 있을것 같은 착각이 들곤했는데..그건 다 환타지였던 거지 싶다. 


그도 핀천의 <제49호 품목의 경매>를 읽다가 좌절하고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을 부인과 공유하며 읽는다. 하루종일 일하고 가게문을 닫은뒤 긴장을 풀기 위해 맥주를 한두병 마시고, 그 뒤에 우리집 부엌 데이블에 앉아 소설을 섰다. 거창한 공간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생계를 도외시하고 미친놈처럼 수염도 안깍고 글을 쓴것도 아니다. 금연을 할때는 남에게 시비도 걸고 지저분한 말을 내뱉으면서 남에게 싫은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요즘 사람들이 디킨즈따위를 읽지 않고 샬럿 브런테니 푸시킨이니 스타인백을 모르고 산다는 것에 대해 의아해한다. 그래놓고 자기비하적으로 '삶을 사는 방식자체가 근본적으로 글러먹은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역설적으로 내뱉어놓았는데 그 어느 누구도 이런 자기비하에 불쌍하다고 말하지 못한다. 왜냐면 그 만큼 독특하면서도 개성적이라는 뜻인데 가끔은 우리도 그렇게 살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동경의 대상이 된다면 모를까. 


나는 가끔 이런 하루키의 에세이에서 묘한 기시감을 느끼곤 한다. 나도 과거 어느지점에서는 자유스럽게 생각하고 틀에 구애받지 않았던 적이 있었는데 칠칠맞게 허술하고 구멍 빵빵 뚤린 인생이긴 했어도 좀더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었고 어느날 아침의 공기가 특별해서 뭔가 흥미진진한 일이 생길것만 같은 모험의 요일들이 등장하곤 했었는데 ..지금은 기억조차 나질 않다니 ..하루키가 가끔 이렇게 에세이에서 자신의 괴이함을 겸연쩍게 내뱉는 건 사실 자신이 민망해서라기 보단, 나 이렇게 사는데 바꿀생각도 별로 없고 내가 이렇게 생겨먹은 놈이니까 앞으로도 이렇게 살께요 라고 은밀히 이야기 하는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실에서 ..고정관념속에서 익숙해져있고 깊이 있게 파고들지 않으며 회로에서 벗어나려고 하지않은 현대인들로서는 은근한 질투와 동경과 부러움이 느껴질 수 밖에 없는 삶이 아닐까. 아마도 대리만족이라도 하고 싶어서 하루키 에세이를 읽는 거겠지 싶다.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2-07-24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노르웨이의 숲』 『해변의 카프카』 등으로 폭넓은 사랑과 지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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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ewell
Review BOOK/에세이2013. 9. 12. 21:39


난, 하루키가 예전 무라카미 라디오에서 밝힌 브래지어 에피소드에서 (여권신장을 위해서 브래지어 소각 이벤트를 벌이는 걸 보고 '과연 입던 속옷일까'라는 의문을 가졌다고 밝힌 ..) 약간의 기이한 변태(?) 기질이 있다고 느꼈던 적이 있었다. 그 뒤로도 1Q84의 덴고와 후카에리의 판타지 퍼포먼스(?)도 그렇고, 이미 <노르웨이의 숲>에서 와타나베도 나오코와 미도리, 그리고 레이코와 자유분방함을 보여준바 있었으니까 (당시의 평론들을 보면 '학생들의 머리속에 온통 섹스밖에 없는게 놀랍다'라는 비스무리한 평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오해도 그런 오해가 없을거다라고 생각해도 역시 성적인 코드가 등장하면 그 아저씨 또 변태기질이 도지셨나봐 그런쪽으론 굉장히 기발한 하루키씨..라고 해도 뭐 딱히 할 말도 없다.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이란 제목도 약간은 그런 기질이 반영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쌍둥이 자매를 여자친구로 가지고 싶다는 에피소드에 달린 제목이었으니까. 어쩌자고 쌍둥이 자매를 여친으로 해서 뭐 . 언니인지 동생인지 일부러라도 헷갈리고 싶다는 거에요 뭐에요 하루키씨 !!! 라고 말이라도 하고 싶지만..사실은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역시 '이번엔 널 한번 써볼까?" "꺅 싫어요 거짓말이죠" 라고 이미 또 쓰셨으니  이 정도되면 기발한 상상력을 넘어서 주책이다 싶을 정도다. 사실 우리도 이보다 더한 상상력을 발휘해서 개개인의 본능속에서 더 엉뚱한 광경들을 만들어내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다. 더하면 더했지... 하루키의 매력은 꼭 소설속에서 '상실'과 '비관'만을 말하고 '본질'에 대한 탐구만으로 일목요연하게 달려가는 그런 형태 외에도 이런 엉뚱함과 유쾌함이 더 본질적인건 아닐까. 실제 삶과 더 관련이 있을테니까 말이다. 


기질적으로 보면 형식적인 부분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성격때문에 안티 시스템 히어로(Anti-System-hero)같은 작가 같다고 느낌도 종종 든다. 이 동네에서 이 정도의 아웃사이더 히어로는 '커트 보네거트'옹 하나만으로 충분하겠지만 하루키도 거참 나도 만만치 않아 제기랄 하고 속으로 외치지 않는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애초부터 그는 이사를 거주지변경따위의 개념으로 인식하지 않고 주기적인 휴지통 비우기로  이사의 필요성을 인식한 바 있고, 레이 파커 주니어의 'I Still Can't Get Over Loving you'보단 제목으로 'I Still 사랑해'가 더 낫다고 할 만큼 심플한면도 있다. 본인이 에세이에서 밝힌 것처럼 그저 '그런거지뭐'와 '그래서뭐'를 남발하면서 넉넉하고 무책임(?)하게 살고 싶어하는 쪽일 수도 있다. 물론 이 정도되면 일반 서민들도 바라마지 않는 편안하고 쾌적한 마인드일테지만 우리가 정작 부러워하는건  동심과 감성의 스파게티가 오밀조밀 잘 자리잡고 있는 특유의 정서지 싶다. 


종종 그의 글에서 선더버드를 탄 여인이 등장하곤했는데 이게 바로 영화 <청춘낙서>에서 '리차드 드레이퍼스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본 선더버드를 탄 꿈의 여자'the girl of a dream'를 잊지못해 밤새도록 찾아다니는 에피소드에서 연유한 거였다. 그리고도 그는 원래 사랑이란 이렇게 기존 시스템을 넘어선 행위라고 했드랬다. (난 지금도 그런 여인이 아무리 멋져도 밤새 찾아헤메고 싶은 마음같은 건 없지만) 세상의 끊임없는 고착화된 시스템과 고정관념들의 틈에서 분투하는 하루키씨라니...그러고 보니 문득 소설을 쓰는 이유로 '개인의 혼이 가진 존엄함을 드러내어 거기에 빛을 더하기 위해서..우리들의 혼이 시스템에 끌려들어가 멸시당하는 일이 없도록 항상 거기에 빛을 비추고 경종을 울리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보자면 소설이든 에세이든 그는 세상의 고정관념 따위는 내 알 바 아니다라고 지속적으로 은근히 글로 표현하고 있는거 아닌가. 



고정관념 같은 거야 그렇다쳐도 개인적으론 그의 정서적인 표현능력이 부러울 따름이다. <렉스턴의 유령>도 그렇고 <도쿄 기담집>외에도 로저 젤라즈니의 <고독한 시월의 밤>같은 고딕적인 뉘앙스를 좋아하는데.. 하루키에겐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상상력으로 충분히 이런 이미지들이 글로 아무렇지도 않게 재현되어지나보다. 찰스턴의 유령이라는 대목으로 그가 묘사한 문장들...


'해질 무렵 코블스톤이 깔린 찰스턴의 고즈넉한 거리를 걷다보면 화려하게 세공된 검은 철문 너머에 , 또는 뿌옇고 희미한 불빛에 드러난 차고 한구석에 무슨 이상한 그림자가 비친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밤의 정원은 적막하고 아름드리 떡갈나무가지에 털실처럼 늘어진 착생식물은 강바락에 흔들리고 백일홍 꽃이 저녁 어둠에 어스름하게 떠있다...모든 것이 고풍스럽고 조용하고 그리고 우아하다


라고 했다. 소설적 배경으로도 하나도 아쉬울 것 없는 밑그림들이다. 그래서 아마 감탄하고 찬탄하는 거겠지. 일부러 만들어보려고 해도 이미지화 시키기 힘든 것들은 수월찮게 글로 그려내는 재주라고나 할까. 그게 관찰력이었든 아니면 그가 가진 특유의 정서적 질감이든 간에 그런 부분은 부러울 수 밖에 없다. 내가 멈춰버린 시계를 보면서 '전지식 시계의 죽음에는 차갑고 무거운 어떤 것이 있어서 몇년에 한번 밖에 멈추지 않기 때문에 그 죽음에서 피할 수 없는 숙명의 도래'를 느끼기야 하겠는가. 강의에 들어갔는데 '휴강'이라고 써있어서 이 짜투리 시간이 마치 인생에 있어서 덤으로 주어진 캐러멜 같다고, '핀볼머신'을 보면서 왠지 멸종해가는 공룡같은 슬픔이 떠다닌다고 혼자서 감상에 젖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저 멍이나 때리면서 현상이 눈표피에서 뇌쪽으로 혹은 가슴으로 더 이상 진입하지 못하고 증발해버리는 거다. 그래서 이 에세이를 읽으며서 감정 회로사이에 끼인 고정관념의 콜레스테롤이 녹는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삶의 유쾌함 지수가 올라가는 느낌과 소소함으로 읽혀지는 소중함같은 것들을 뒤늦게 알게되는 기쁨...그런 것들이 에세이 전반에 구름 처럼 떠있다. 


'모든 면도기에도 철학이 있다'고 했으니 어쩌면 계속해서 무라카미의 에세이를 읽다가 보면 그 느낌들이 내몸에 맞는 옷처럼 편안하고 당연하게 느껴질 날도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그나저나 본인 말처럼 '자기를 둘러싼 호의와 악의의 총량을 양방향으로 , 그것도 비약적으로 확대된지 꽤 되셔서 (유명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 당시 에세이를 쓸 때처럼 자연스럽게 오가면서 편안히 뭔가를 하실 수 있을지 의문이다. 마라톤이라고 뛰려고 참가하면 갑자기 옆에서 '오..하루키씨 아니세요. 책 잘 봤구요. 사진보다 낫네요 라고 할 수도 있다. 이젠 그가 사진 찍는 걸 별로로 생각한다고 해도 이미 많은 스틸들이 퍼져나간지 꽤 됐다. 오히려 모르는 사람이 있는게 더 이상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지금의 하루키씨는 에세이에 뭘 쓰려고 해도 이젠 정말 귀찮아졌을수도 있다. 그냥 상상해봤다.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2-07-24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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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세이
책소개
작가가 아닌 생활인 하루키, 젊은 하루키를 만난다 무라카미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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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illa Essay2013. 9. 3. 08:41





<이미지 출처 : http://culturacolectiva.com/lo-surreal-en-murakami/>


 


'노르웨이의 숲'을 '상실의 시대'로 읽은 지 대략 이십여년이 흐른 듯 싶다. 그땐 하루키의 문체가 좋다느니 혹은 그의 스타일이 좋다느니 하는 열렬함이 있긴했는데 그렇다고 정서상의 '원심분리기'라는게 있어서 하루키 책을 넣고 스위치를 켜면 45 퍼센트의 우울함과 15 퍼센트의 로맨스, 5 퍼센트의 자기연민, 그리고 35 퍼센트의 재즈가 백그라운드로 깔려있는 연상녀와의 섹스로 구성되어있어요라고 딱 부러지게 말할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모호함과 개인적인 느낌이었을 뿐이다. 어찌됐든 당시 대중의 문학습득 분위기는 지루함을 무찔러라같은 느낌이었다고 기억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때는 바야흐로 밀레니엄을 맞이하며 세기말의 회색빛 암울함을 장식처럼 주렁주렁 매달고 누군가가 돗자리만 펴준다면 이 욕구들을 다  싸질러버리겠다고 마음먹었던 시절이었으니까..'희망'따위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됐고 일탈과 방황과 젊은시절의 타락정도로 질펀한 섹스를 묘사했어도 뭐 그정도 쯤이야라는 젊은층의 배려(?)가 있었드랬다. 


약물에 중독되서 그룹섹스를 벌이는 파격적인 내용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무라카미 류)를  모 당시 유명 작가는 '의미있다'며 자기 부인에게 읽어보라고 추천까지 했다고 들었는데, 사실 난 그 때 그 책을 읽으면서 이런 걸 읽고나서 누군가에 추천해준다는건 '나도 너와 이런걸 해보고 싶어'라고 은밀히 의사표시를 하고 있다는 오해를 피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었다. 욕구 탐닉의 위험수위라는게 이런게 아니면 뭘까라고 이견이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개인이 바라보는 문학의 질감들은 다 다르기에 나같은 속물적이면서도 대중 표피층에 살면서 정도껏 소비를 일삼은 범인들의 입장에선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의 의미를 안다고해도 내 삶은 더 투명해지지 않기를 바랬다.


당시에 읽었던 책들은 다 이런 류의 정서를 광고 카피로 가지고 있었다. 어쟀든 인기를 끌었고.. 시대를 풍미했고.. 살아남을 것들은 살아남고 사라져줄 것들은 침식되고 세월의 퇴적층으로 가라앉아주셨다. 그런데 묘하게 '정서'는 남았드랬다. 하루키 정서가 아직도 꿈틀거린다는 느낌, 이윽고 언론에서 인용한 하루키스러운 이디엄들을 나열했는데 피식 웃음이 나온다. 레이먼드 챈들러, 트루먼 카포티, 스콧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카버정도야 인정해줄만하지만 삿포르 맥주라디오헤드스탠게츠니 하는 것들은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어서다. 물론 그가 라디오 헤드를 듣고 게츠의 음악을 듣기야 했겠지만, 하루키가 '그럼 난 뭐 삿포르 맥주를 먹다가 라디오헤드를 듣고 스탠게츠로 레이블을 돌려가며 듣는 천편일률적인 인간인가'라고 한숨이라도 쉴 판이다.  


그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 핀볼'이래로 수없이 끄적였던 에세이 시리즈, (이를테면 무라카미 라디오)를 보다보면 영미 문학쪽의 조예가 남다르다는 것즈음은 짐작할 수 있으니까 그가 피츠제럴드의 개츠비 이야기를 자꾸 이야기하는 이유를 알게된다.(이 아저씨는 피츠 제럴드를 너무 좋아하긴 한다.) 예전 등단시절, 오에 겐자부로의 초기평에서는 하루키가 '너무 미국문학의 영향을 받아 개성이 없다'라는 평도 있었다. 챈들러를 칭찬하고 카버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며 카포티의 유려함을 감탄하는 정도는 그의 문학적 스타일로 볼 때, 어떤 모체가 될만한 스타일상의 '목표치'같은 것이었을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카버나 카포티가 되려고 노력했다는 건 아니다.  (가끔가다가 챈들러의 하드보일드가 슬쩍 엿보인다고는 할 수 있어도..) 다만 하루키의 문체가 어떤 독서를 통해서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해소해줄만 하다. 그래서 다들 챈들러니, 카버니 카포티니 찾아 읽는거겠지 싶다. 


그런데 왜 이런 것들이 관심거리가 될까 궁금증이 생긴다. 그가 브룩스브라더스의 자켓을 걸치던 윈드 브레이커를 즐겨입던 뭐 특출난 건 아니지 않나 싶다. ...그럼 아침에 조깅을 하고 가끔가다가 커틀릿을 만들어먹고 거품많은 맥주에  튀긴 두부를 한 모이상 먹으면서, 마일스 데이비스와 빌리 할리데이 음악을 잔잔히 듣고, 진구구장 뒤에 누워 푸른하늘을 보면서 '네가 응원하는게 저팀이야'라는 핀잔도 여친으로부터 들어야 하루키를 닮아가는건가라는 생각도 들어버린다. 이런걸 해보면 하루키의 감정상태가 묘한 리듬을 타고 정서에 와서 콱 박히기로 한단 뜻인가... 문학의 싸구려티를 내기위해서라면 주저없이 하루키를 읽어라라고 비아냥 거렸던 비평가들의 입장에서는 이거야말로 무턱대고 추종하는 하루키빠들의 무지함아닌가라고 지적할지도 모르겠다. 


상실의 시대를 읽으면서 옳다구나 카포티도 나왔고 챈들러도 나왔어..카버도 나오고 피츠 제럴드에 개츠비도 나왔으니 이젠 뭐 또 되새김질할만한 하루키적 특성들이 반복되는게 눈에 보인다고 이젠 하루키는 끝장난거라고 밑천이 드러난 교활한 자기복제의 증거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고 의미심장하게 미소라도 짓는다면 이거야말로 오해하는거 아닌가. 개인적으론 최근의 다자키 쓰쿠루 건도 그렇고 업계가 인기매몰의 포커스가 하루키에게 다 쏠리는걸 못마땅해한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상실의 시대를 읽었던 세대가 현재의 사회주류층이기 때문이라는 부분에 생각이 미치면 이해못할 것도 없다.  어차피 지나가는 세대고 흐르고 나면 다시금 기억하려고해야 생각나는 이미지들에 불과하다. 하루키가 아니었어도 조정래의 정글만리나 히가시노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 알랭드 보통의 세대가 온다. 다만 하루키적 정서라는것도 알고 보면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나 그리스인 조르바와 같은 대중성을 갖지 말란 법이 없으니 좀더 족적을 남기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나쁠 건 없지 않을까. 아무리 그래도 그의 스타일상 하루키가 뭘 했다고 해서 그걸 따라하거나 그게 그의 스타일이라고 하는건 좀 웃음이 나온다. 



cf. 하루키는 삿포르 맥주보다는 거품이 많은 맥주라면 뭐라도 좋다고 했고, 특별히 스탠게츠보단 두루두루 재즈음악을 좋아하며 라디오헤드외에도 역시 레드핫칠리페퍼등도 많이 등장한다. 블레이저 코트야 그렇다치지만 슬리퍼에 가벼운 차림으로 나다니는 걸 좋아하고 다만 야쿠르트 스왈로즈를 선호하긴한다. 이 정도는 각자 다 있는 취미들이다. 이게 하루키여서 생겨난 뭔가 스타일리쉬한건 아니지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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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BOOK/에세이2013. 8. 13. 12:43


이렇게 된 이상 하루키의 에세이 연작들에 대해서 다 이야기해 볼 작정이다. 지금까지 나온 에세이들을 꽤 읽었으니까 몇 권 안남았다. 아마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양장본 에세이 시리즈 2권만 빼놓고는 다 읽었나보다. 비채가 시리즈로 낸 하루키 에세이는 <저녁무럽에 면도하기>,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이렇게 3권이다. 무라카미 라디오 연작으로 에세이 중, 가장 하루키스럽고 단백하다고 정평이 나있는 에세이들이기도 하다. (휘어지는 표지는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지만...)..굳이 소개하지 않았어도 하루키 매니아들은 손수 다 찾아 읽었을 것이고 나같이 하루키의 엉뚱하면서도 세련된 문장체가 좋아서 (마치 뇌의 안쓰던 부분을 쓰는 듯한 느낌) 무턱대고 읽었던 독자들로 꽤 있었을 것이다. 


최근 하루키의 에세이들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느낀 점이 있는데 그것은 이 아저씨가 '글은 정말 단백하고 깔끔하게 쓰신다' 였다. 부연과 전제가 질질 끌려서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장황함도 없고 지적이면서 동시에 허영기가 짙게 배인 '잘난척' 단어 나열도 좀 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이 분이 재즈 감상기를 쓰시게 되면 약간 어려운 말들이 등장하기는 한다.). 이렇게 절제와 간단명료를 문장에서 실현하시는 분들도 생각보다 만나기어려운 시절이다. 게다가 생각과 판단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은 대다수의 작가들이 가지지 못한 하루키 특유의 정체서이기도 하다. 많은 에세이들에는 지은이의 신념과 가치관들이 알게모르게 스며들어있기때문에 은근슬쩍 '주장'과 '단정', 그리고 '자기생각에 Sync를 맞춰주길 기대하거나 동의해주길 원한다. 그런 내용이 반복되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고서는 읽는 것자체가 부담스럽고 영 껄끄러워지는데 그런 상태에서는 읽기는 거의 '폭압적' 납득이 되거나 입에 맞지않는 음식을 꾸역꾸역 입에 넣는 것보다 더 괴로운 법이다.  


'에세이든 소설이든 문장을 쓸때 친절심은 중요하다. 상대가 읽기 쉬우면서도 서로 이해하기 쉽게 써야한다. 그런데 시도해보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P23)


하루키표 에세이에는 이런 자기 생각에의 강요가 별로 없다. (약간의 툴툴거림이나 시니컬한 요소들이 있긴 있다.) 이 모든 산물은  레이먼드 카버나 트루먼 커포티, 그리고 존 치버, 업다이크로부터 왔을 가능성 크지만, 사실 카버스럽다는 것도 그렇고, 커포티답다는 것도 쉽게 와닿는 그런 부분은 아니라서 딱히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도 뭣하다.  책을 읽었어도 애매하고 손에 잡힐듯 잡히지 않는 무형의 아이덴티티와 같은 느낌 같은 것일 뿐이다. 읽다가보면 어 이건 카포티와 비슷하고 저건 카버하고 유사한 느낌인데 라고 되뇌이게 된다고나 할까. 


하루키의 글에는 레이먼드 카버의 문장 단위의 생략에서 드러나는 은밀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암시들, 그리고 트루먼 커포티 특유의 오밀조밀한 디테일함, 이 두사람을 교묘히 이어서 균형감각을 가지고 주제를 적절히 녹이는 존 치버의 장점들이 복합적으로 녹아있다. 결국 하루키는 스스로가 '친절심'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스스로가 추구하는 문장에 대한 완성도에 대해선 자기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작가들의 재능을 대신 표출해주고 있다. (본인은 아니라고 우기지만 어쨋든 그가 글을 편하게 쓴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다보니 선대작가들의  영향력을 빼고서라면 그의 상상력이 어떨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 수많은 작가들을 오마쥬해서 스타일을 짜깁기했다고해도 하루키는 하루키인 것이니까..그의 발군 묘사실력은 기묘한 상상력, 그리고 세련된 그의 삶의 스타일에 기반한 것이 아닐까하는 것이다. 


 '섹스한 다음날 아침, 침대에는 아직 여자친구가 있고 남자가 티셔츠와 헐렁한 사각팬티 차림으로 주방에 서서 물을 끓여 커피를 준비한다. 그리고 시금치 오물렛을 준비하는 것이다. 가스불에 버터를 녹이고 오물렛을 만들고 여자친구는 스트라이프 면셔츠 바람으로 , 나른한 듯 침대에서 나오고...슈베르트의 아르페 지오네 소나타가 흘러나온다


시금치 오믈렛이니 스트라이프 셔츠니 아르페 지오네 소나타네 하는 것들이 일상에서 등장할 리가 없겠지만 하루키의 글에서는 이런 로맨스 물씬 풍기는 장면들이 영화처럼 자주 등장한다. 이유가 뭘까.  언젠가 평론가의 글에서 이런 대목을 읽었던 걸 기억한다. 하루키의 에세이나 소설에는 현대 자본주의 문화의 전형적인 스타일이 스며들어있다고....따라서 현대인들은 하루키의 글을 보면서 '그러한(?)생활을 은근히 동경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어있다고....나도 역시 마노아 레터스와 쿠라토마노, 쓴맛이 없는 마우이 어니언을 곁들이고 롤빵에 차가운 맥주면 더 이상 바랄게 없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가 이런 것일까. 하루키 아저씨처럼...뭘해도 참 분위기 있게 사시는 이 아저씨의 에세이는 그래서 동경할만 한 걸까. 나도 그렇게 살아볼 순 없는 걸까라고 생각했드랬다.  토니베넷의 <샌프란시스코에 두고온 내마음>을 들으면서 랄프샤론의 피아노 인트로가 연상되고 재즈클럽은 뉴욕의 '빌리지 뱅가드'가 최고라는 기억을 되살려 한번 즘 가볼 수 는 없을까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책장을 넘기다가 아주 공감할만한 에피소드를 하나 만났는데..'주유소 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하루키가 차를 몰고가다가 기름이 떨어져서 주유소까지 통을 들고가 기름을 담아와서 어려움을 벗어났다라는 단순한 이야기였는데 아마도 그때 하루키가 '혼자여서 다행이었다'라고 말한 대목 때문이었을것이다. 그 자리에 여친이 있었다면 '진짜 멍청하다니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이 사람하고 사귀는건 잘못된 선택일지도 몰라' 라고 말하게 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대목말이다. 나는 이대목에서 공감백배였다. 나도 역시 혼자다니는 이유중 하나였으니까... 여친이나 애인이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건 끔찍하니까..이 외에도 고등학생의 '헌욕수첩' 같은 황당한 에피소드도 좋아한다. 슬그머니 한마디 해줄 뿐이다. 이런 변태같으니라고...^^


'신주쿠역에서 '지금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라는 음성이 녹음되어있어서 원치 않는 전화를 적절하게 커팅하고 싶다고 했을때도 나는 끊임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데 아저씨 이런 기능은 진짜로 특허가 나와 있다는거 아세요? ^^) 소띠 산양좌 A형이라고 고백 할 때..어라 나도 소띠고 A형인데라며 웃었다. 이련 묘한 일치감이라니 하루키 아저씨도 기질적으로 나와 진배 없을거라는 대착각이 근거를 가지는 순간이었다. 다만 하루키가 언급했던 헤밍웨이의 진정한 남자되기 4가지는 동감하기 어렵다. 나무를 심고, 투우를 하고 책을 쓰고 아들을 낳는다라는 것들...이건 뭐 해밍웨이의 몰린 정서나 가치관 때문이지 남자되기와는 별 상관이 없었으니까..그런데도 역시 하루키는 이 부분에 대해 별말 없다. 다만 책을 쓴다는 점에 있어서는 자신도 남자라는 우쭐댐을 슬쩍 흘리고 싶어했으리라..


 '우리는 조류를 거스리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앞으로 계속 전진하는 것이다' 이 것은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구절이었고 ' 마지막 문을 닫아라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아라. 그저 바람을 생각해라'는 트루먼 커포티의 단편소설' 마지막 문을 닫아라'에 등장하는 말이었다. 그가 결국 삶속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있는 그대로를 두고 무덤덤하고도 쿨하게 저벅저벅 가는 것. 남들이 보고 들었던 수많은 고정관념들속에서 아마 '시스템에 붕괴되어가지 않도록 버티면서도 그 의식들이 거대토끼처럼 되지 않기였나보다. 그래서 독자들이 하루키 아저씨도 이젠 잔소리쟁이가 되버리셨어라고 되지 않기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언젠가 그가 자신이 글을 쓰는 목적에서 밝힌 바 있기도 하다.) 


읽으면서 기대했을 지도 모른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만큼이나 희귀하고 엉뚱하지만 생활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하루키 아저씨가 조근조근 계속 이야기해주기를...그렇게만 되면 점점 더 닮아갈지 어떨지 확신은 못해도 이 에세이들이 내 삶에서 벌어질수도 있다는 동질감은 유지되지 않을까 생각했나보다. 가끔은 나도 덤덤히 무던하고 쿨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치열하고 북적거리고 머리속에 범람하는 수많은 스트레스의 분량들은 내가 찌질하고 구차하게 살아서 생긴 침전물이 아닐까 의심해보게 된다. 좀더 쿨해지고 싶을 뿐이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비채 | 2013-05-04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오하시 아유미의 일러스트와 함께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오리지널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
Vanilla Essay2013. 8. 8. 20:45


챈들러

레인먼드 챈들러, 무라카미 하루키, 스콧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카버, 트루먼 커포티, 존 치버, 그리고 업다이크까지..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는 특별한 이유로 위 작가들의 작품을 읽었다. 슬쩍 눈치빠른 분들은 아셨을 것이다. 선택과 순서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람은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라는 걸... 그가 어디 작품 한 귀퉁이에서라도 이 작가들을 언급안하고 넘어갔던 적이 있었던가. 그는 위의 작가들을 사랑했고 또 열렬히 추종하기도 했었다. 그리하여 하루키를 읽었던 대다수의 독자들에게는 한가지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실마리를 이 작품들에게서 찾게된다. 그는 어떻게 이렇게 군더더기 없으며 세련된 문장들을 구사할 수있는가에 대한 궁금증말이다.  


여타의 기사와 사설과 평론을 몇개 찾아보니까 나같은 경우가 적지 않았나 보다. 죄다 하루키 팬이랍시고 줄줄히 피츠제럴드, 카버, 커포티를 찾아서 읽었다고 고백들을 하고 계셨으니까.. 평론가들은 왠지 그런 하루키팬들에게 거봐 하루키가 소개해주지 않았으면 찾아보지도 않았을텐데 용케 좁은 소양으로 운좋게 명작들을 찾아 읽으셨네라며 은근슬쩍 비아냥거렸다. (지금도 이 현상은 진행 중이라고 본다.) 어찌됐든 좋은 명작이야 두루두루 읽히면 좋다. 아무리 좋은 작품들도 시간에 한번 매몰되면 어떤 계기가 벌어지기전까지는 '무덤속 신세'면할 길 없으니까. 이상한 나라 앨리스도 그랬고 위대한 개츠비도 그랬으며 '그리스인 조르바'도 모두 무덤속 신세들이었다. 


스콧 피츠제럴드

행여 갑자기 조인성이나 소지섭이 나와서 한 손에 <폭풍의 언덕>을 들고 커피한잔들고 읽으면서 혼자 '왜 너는 괴로우면 안되니'라고 읇조리며 연인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이라도 날린다면 그 다음날 서점가에는 에밀리 브론테의 이름이 박힌 책들의 탑을 보게 될 수도 있다. 그게 무슨 죄라고. 민망해야 할 꺼리도 못된다. 찬밥되었던 고전들을 평상시 알아보지 못해서? 어차피 되새김질은 소만 하는 것도 아니고 그 소조차도 과거에 소화불량이었던 시절을 생각하며 다시 억센 풀을 뜯어먹을 절호의 기회가 생긴다고 생각하면  이 보다 더 흥미진진한 모험도 없다. 그래서 다시 읽는 건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가끔 여러 문학계의 글들을 접하다보면 일상에서 김치드시듯 늘 고전을 탐독하지 않으면 당신은 독서가의 자격이 없는거야라고 나무라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다. 고전 문학소설을 삼면에 켜켜히 쌓아두고 고전의 숲에 파묻혀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러지 못했다고 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고전명작 몇 권 다시 드는 것도 꽤 의미심장한 일이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닐테니..


트루먼 커포티

어찌되었든 언급한 책들을 주욱 돌아보다가 미처 읽지 못했던 몇 권의 책들을 발견했다. 어..그런데 읽었던 책도 책장을 넘기다보니 이게 또 새로운 거다. 기억도 하나도 안나는데다가 줄거리조차 새롭다고 느껴질 때는 혹시나 오래전 책 사재기만 하고 읽지도 않았던 비운의 책들이 아니었을까 곰곰히 생각하게 된다. 역시 기록이 없으면... 그리고 적용과 응용이 없으면 전부 휘발되어 날아가버리는 걸까. 내 과거의 책탐독의 결과는 실온에 나온 드라이아이스만도 못한 수명이었나보다. 그렇다고 시디나 DVD같은 기억력을 바랬던 것은 아니었는데 이토록 생경하다니..이래서야 책을 읽었다고 할수나있나 푸념만 나왔다. 


아마도 당시에는 미사여구와 화려한 만연체 난무하는 고전소설의 페이지속에서 지루함을 이기는 방편으로 그저 '읽기'만 했으리라. 미션 클리어처럼 앞으로 돌진하면서 한 줄 한 줄 해치우는 심정으로...그 의미와 행간의 뜻따위는 어떻게되도 좋다고 생각했겠지 그러다가 맨 뒤쪽 표지로부터 몇 십장 안쪽에 다다르면 아 대충 이렇게 결말이 되는구나라고 신속히 덮어버리고  치워버렸을 게다. 그래서말인데 누가 카버의 단편을 이야기하거나 커포티의 세련된 문장을 인용하거나 하면 속으로 '그런걸 다 기억한단 말이야?' 엄청 감동적이었나보네라며 놀라워했다. 소설의 편린을 기억한다는 건 두고두고 그 사람의 인생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다. 물론 그 대상이 되는 문장이 독을 품고 있을지 아니면 아름다운 로망을 이야기일지 선택하는 독자의 몫이겠지만 책 귀퉁이 아니 메모지 짜투리에 끄적여쓴 글귀조차도 어느날 문득 발견하게 되면 고구마 넝쿨캐듯 당시의 감흥들까지 부록으로 얻을 수 있다. 추억이든 영향이든 이런 것들이 가능하려면 적어도 뭔가를 기억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레이먼드 카버

아쉽게도 그런 기억의 파편 및 짜투라기 끄적임조차 보이지 않는 내 독서인생이라니..좀 한심스럽고 허무했다. 최근 들어서는 한 권을 읽으면 조그만한 페이지에 단순하게라도 써둔다.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자만 그래도 쓴다. 그렇다고 뭘 어떻게 활용하겠다는 거창한 생각같은 건 없다. 그저 써둘 뿐이다. 억울하니까. 뭔가 현재의 생생함이 잠재의식으로 가버리는건 너무 매정하고 무책임스러워 보여서다. 뇌는 너무 매정하고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으니 안간힘을 쓰면서 무엇이든 써서 남겨야 겠다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어제 그렇게 많이 읽었다고 자부했던 커포티의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또 다시 읽었고 카버의 단편집 '사랑을 말할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을 다시 꺼냈다. 읽다가 보니 언저리 비슷한 처지의 책들을 죄다 다시 읽고 싶어졌다. 이를 어쩌지 시간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고 먹고는 살아야 하는데 이 충동적이고도 무책임한 의욕이라니..


존 치버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독서가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가치있을까라고 ..명사들의 서슬퍼런 꾸짖음이 귓가에 들리는 듯 하지만 사실 내가 책을 몇 권 더 읽는다고 해서 내 삶이 윤택해질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경험적으로 보면 감성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좀 더 사색적이 되는건 맞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스타일에 대한 구성요소지 경제적인 구성요소로 작용하진 않는다.  매정하게 이야기해서 내가 고전 몇 권을 더 읽어도 마이너스 통장에 뭔가 입금되는 건 아니다.  무형의 자산. 좋은 소리다. 마음의 양식이 되고 깊어가는 내면의 성찰도 좋고 다양한 인간군상의 간접경험도 사는데 도움이 될테지 그런데도 이 독서가 죽고 못하는 어떤 거만스러움이 될 때가 있다. 가난하고 우울해도 정신적으로 좀 더 깊어질거라는 늘러붙은 자존심마냥 하염없이 비현실적인 어떤 고리타분함 같을 때가 있다. 그런데도 이런 책들을 읽게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존 업다이크

난 아무래도 아무생각없이 그냥 읽나보다. 그래서 오래도록 곁에 두고 읽고 또 읽고..좀 바보스럽고 무의미한듯 하지만 왠지 이야기들이 나와 너무도 달라서 황당해서 그런걸까 것도 아니면 언젠가 경험했었던 유사감정의 기시감때문이었을까.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겠고 어떻게든 좀 공유해보려고해도 누구랑 말해야할지 모르는 막막한 그런 상태에서 맞닥드린 공감대 같은 것들...? 이도저도 아니면 챈들러나 커포티나 카버, 피츠제럴드가 일정부분 추억을 점거하고 있어서일수도 있겠다. 그들이 없었으면 내 청춘의 초상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거라는 .....뭐...비스무리한 착각같은 것들인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 모든 작가들을 사랑한 덕에 그를 읽었던 대다수의 팬들도 이 작가들의 작품을 따라 읽었다. 어떤 점에 있어서는 그냥 찾아읽었어도 좋았겠지싶다.  우연찮게 도서관을 뒤지다가 문득 '달려라 토끼'를 읽고 '그게 누구였는지 말해봐'를 읽고 '빅슬립'을 발견하고 '위대한 개츠비'를 집어들고 하는 일들이 운명처럼 일어나는것도 흥미진진한 일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고 한들..즉 하루키 아저씨가 소설에 언급하고 에세이에서 칭찬하고 개인적으로 너무좋다 어쨌다고 몇 줄 써놓은걸 보고 호기심에 찾아 읽었다고  한들 그게 부끄러운 책읽기가 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책을 어떻게든 읽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렇게 된 이상 이 후 스토리는 읽은 사람의 몫으로 남겨질 뿐이다. 읽었으니 좋은 것이고 좋았다면 더 기쁜일이다. 그게 비록 하루키덕이었지만..그게 아주 친한 친구를 통해서 또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속으로 쾌재를 부를 일이다. 쾌재를 부를 일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무라카미 하루키



Posted by kewell
Review BOOK/에세이2013. 8. 4. 19:00


빔벤더스<브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을 다시 보게 된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라이쿠더의 이야기는 추억속으로 잊혀진지 오래였을텐데하면서도 누구말처럼 '유락한 잠의 늪'처럼 빨려들고 몇개의 꿈을 거쳐서 특유의 멜로디에 절여져있었던게 아닌가싶을 정도로 옛기억이 되살아나버렸다. 당연히 이 영화를 다시보게 된 이유는 이 책때문이다. '몸전체로 영화를 이야기하게 되었다며 슬며시 언급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번째 무라카미라디오' '저녁무렵에 면도하기'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브에나비스타 소셜클럽' 에피소드가 잊혀진 꿈의 기억조각을 이어주었다면 다른 이야기들도 오래전 서점 한귀퉁이에서 감질나게 읽어대면서 분량 적음에 아쉬워했던 그 에피소드들이었다. 어투는 여전했고 에피소드들도 그 자리에 조용히 숨쉬면서 오랜 세월동안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나보다. 


사실 순서로 보자면 저녁무렵에 면도하기가 1탄이고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순이다. 그러니까 에세이들 연달아 읽을 필요는 없어도 무라카미 라디오시절의 시간적 흐름에는 미묘한 에세이들의 질감 변화에 대한 추이를 살펴보려면 순서대로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쨋든 면밀히 읽으면 그런 변동이 중요한 저자의 심경변화나 가치관의 변화에 대한 힌트가 될 수 있다싶어 꼼꼼하게 읽었다. 의외로 하루키는 감정의 선을 폭군처럼 넘나들지도 파격도 저지르지 않는다고 느껴진다. 에세이에는 일종의 룰이 있는 것이 아닐까. (일전에도 에세이를 쓸때 몇가지 자기만의 규칙이 있다고는 했다.) 어쨋든 순서상으로는 얼추 맞게 읽으면서 '여전하시군 무라카미 하루키는...' 라고 혼자서 중얼거렸나보다. 


무라카미 라디오를 굉장히 잘쓴 에세이의 교본이라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하고 있는 편인데 그것은 그가 유명작가여서라기 보다는 일상사를 화려한 과장이나 지나친 생략없이 담담히 줄줄 써내려가는 대범함이 좋아서였다. 어떤 가식도 없고 변명도 없고 자기학대적이지도 않다. 하물며 트위터나 페북에서 늘상 하는 은근슬쩍 신념과 가치관 강습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아님말고'식의 고집이 있긴해도 오버페이스하지 않고 선을 유지하면서 긴거리를 조근조근 달리는 마라토너같다고나 할까. 소설은 안그런데 말이다. 소설과 다른 에세이의 하루키는 '슈퍼맨'같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왜 있잖은가 평범한 사람들은 도대체 생각할거리조차 되지 않는 것들도 슈퍼맨 눈 광선처럼 그의 눈을 관통하면 조용한 일상에서 엉뚱하고도 기발한 이야기들로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버리는 그런 느낌 때문이다. 1960년 '브래지어 소각사건'을 보다가 하루키는 변태라고 읇조렸던 친구가 있었지만 리스토란테에서 테이블 한가운데 페로몬을 머금은 안개가 자욱히 떠있는 광경을 묘사하다가 쩝쩝거리는 소리때문에 산통다 깨버린 이야기를 두고는 정말 별거아닌 이야기를 미소짓게 만들만큼 잘쓴다고 동의했던 적도 있으니까 그는 천상 이야기꾼인 것이다. 


그가 썼던 표현 중 장어를 먹으면서 '높은 칼로리에 대한 자책감'이야기하고 '오일드 사딘'(올리브오일에 담겨있는 정어리 통조림)통조림같은 깡통비행기를 타고가다가 프로펠러가 멈춰버리면 '자신이 투명해지다가 끝내 육체를 잃고 오감만 남아 잔업처리하듯 세상을 마지막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고 했을때, 과연 이런 느낌의 모호한 느낌을 이렇게 묘사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거라고 감탄했던 적이 있었다. 아무튼 에세이는 저자의 삶을 거울처럼 반영한다고 볼때, 에피소드와 이야기들에 그의 정서적 리듬이 그의 생활적 패턴과 모종의 연결을 도모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한다. 어떤 식으로든 일상사을 배제한 에세이는 있을수가 없으니까. 게다가 그는 솔직하지 않은가. 나서기는 싫어하지만 속내를 글로 쓰는 것만큼은 과감하고 직설적이면도 있다. 


하루키도 갑자기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것을 원치 않으며 ('그런 무서운 짓을 두번 다시 하고 싶지 않다'라고 한바 있다.) 음악에 깊이 관여된 묘한 관점으로 '후렴구가 없는 인간'을 '함께 할 수 없어 묘한...말한마디한마디는 얼핏 옳아보이지만 전체적인 전개에 깊이가 없는 인간'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또 파스타를 이탈리아에서 먹는 것과 국내에서 먹는 것의 차이가 생기는 이유를 '음식이란 공기포함'이란 고개 끄덕일만한 이야기도, 그리고 '현실에서 간과할 수 없는 주머니속에서 3주전 깜박하고 빨지않은 테니스양말을 꺼낸 것처럼..' 이라며 당혹스럽고도 아이러니한 삶의 일면을 단 몇줄로 요약해주기도했다. 아마 그런 그의 시선과 감성이 좋았을 거다. 독자들은 아무래도 안일한 스토리라인에 매몰된 채 깊이라곤 별로 없는 '해설서'같은 것들에 너무 많이 둘러쌓여 있다보면 그리운 감성같은게 있기 마련이다. 


하루키의 이 에세이는 유독 친 생활적인 에피소드를 넘어서 감성적인 단락들이 존재하는데 이걸 읽고 있으면 그 광경이 그대로 옆에 다가와 있는 느낌이다. 게다가 그는 보이지 않는 감수성의 편린들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책속에 박어넣는다. 아마 이런 감수성 미장센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꼼꼼함을 자랑하시고 계시다. "카우아이의 섬읜 노스쇼어는 노을이 너무나 멋있고 아름다웠다. 선명한 오렌지색 덩어리가 산등성이 너머로 지금 막 숨으려고 하고 바다도 구름도 같은 색으로 물들어있다. 석양을 배경으로 정처없이 차를 몰고 브라이언 윌슨의 '캐롤라인노'가 흐른다. " 이 대목을 읽으면서 잠시 광경을 떠올려버렸다. 그리고 그가 묘사한 '따듯한 나이프로 버터를 자를때처럼 부드러웠다는' 수동변속기의 감촉이 그리워 어느날 친구의 오랜차에 앉아서 둑둑거려보기도 했다. 물론 다 쓸데없는 짓이긴하지만 역시 그의 말처럼 글쓰기에는 '감정의 기억'이 중요한 것 아닌가. 그의 감정기억이 유달랐다는 건 인정할수 밖에 없는 셈이다. 


이런 책들은 문학의 탈을 패스트푸드라고 레플러 여사가 힐난했던 모양이다. 하루키의 저작들말이다. 그런 평가에 초연한듯 싶다가다도 에전 읽었던 하루키 전기를 관통하는 그의 시니컬한 뒷끝을 알고 있는터라 어떻게든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만의 길을 갈것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의 영향력이 근자에 이르러 아주 원숙해진 느낌인데 서점에 갔더니 '스콧피츠제럴드포크너, 카포티, 챈들러, 레이먼드 커버' 한쪽 코너에서 '하루키가 좋아하는저작들'이란 타이을을 건채 진열되어 있었드랬다. 그랬던 거다. 그동안 굉장히 연기잘하기로 유명했지만 대중들이 미처 원숙함을 알기도전에 포기했던 배우를 '대세배우'가 몇번 언급해서 다시 세상에 나오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정서에 동기화되고 싶은 독자들이 많다는 뜻이겠지 싶다. 




cf. 

그나저나 하루키는 왜 '사랑하기 좋은 나이'를 16~21 라고 말했을까. 생각해보고 있는데 답이 별로 없다. 그저 상대적으로 고민이 적고 상상력이 풍부한 나이여서 그런가. 글라스에 얼음, 보드카와 토마토쥬스를 섞고 리앤페인 우스터소스 한방울과 레모을 가볍게 짠 블러드 메리를 들고 있는 '포켓 트랜지스터 글래머 걸'은 죄다 그 연령대외에는 없을까?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비채 | 2013-05-2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무라카미 하루키식 해피 라이프를 엿보다!《채소의 기분, 바다표범...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
Vanilla Essay2013. 7. 26. 15:20

1. 러브크래프트 전집 1권 -크툴루 신화-(황금가지) : '크툴루의 부름' 편까지 읽음

2.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동네) : 다 읽었음

3. 저녁무렵에 면도하기 -무라카미 하루키- (비채) : 다 읽었음.

4. 커피점 탈레랑의 사건수첩 -오카자키 타쿠마-(소미 미디어) : 30p 정도 읽는 중

5.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시오리코 시와-  (디엔씨 미디어) : 20p 정도 읽는 중.

6. 머니볼 -마이클 루이스 (비즈니스맵) 약 반정도 읽음.




이러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들을 다 읽을 듯 싶다. 하루키의 책을 열렬히 좋아해서 반드시 안읽고는 못배기겠다라는 마음가짐은 없는데도 그냥 읽게 된다. 매일 아무생각없이 삼키는 캡슐 비타민처럼 말이다. 아마도 젠체하지 않는 특유의 담백한 문체가 좋아서일수도 있고 정서적으로 환기되는 휴식같은 즐거움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물론 에세이에 한해서지만...(소설은 다른 이야기다.) 문학동네에서 내 준 에세이 시리즈는 검은 하드커버로 그럴듯하게 나와줘서 예전에 시리즈로 구입을 해놓은걸 차례차례 하나씩 조각케익 꺼내먹듯 읽고 있다.  문학동네판 에세이는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그리고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이렇게 2권 읽었고, 비채에서 내놓은 또 다른 에세이 시리즈 3권은 다 읽었다. (저녁무렵의 면도하기,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에세이 8권, 그리고 재즈 리뷰 2권인가 그렇고 단편소설들까지 더하면 꽤나 읽은 건 사실이다.  


레이시 이야기를 다읽고, 하루키 에세이도 다 읽고나니 소설과 에세이가 지루해져서 예전에 읽다가 잠시 둔 마이클 루이스의 '머니볼' 한 챕터를 읽었다. 4장 무지의 필드편인데 의외로 잘 읽혀져서 당황했다는...이유인즉슨, 지난번 읽을 때, 굉장히 따분하고 지루해서 한장 한장넘기는 게 고역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이번엔 굉장히 잘읽혔다. 아마 빌리빈의 천재적인 안목을 반영한 영화적 감동을 이 책에서 기대했었나보다. 그러기에는 너무 다큐멘터리 comment 같아서 (가끔 읽다가 '서프라이즈'의 이야기를 해설하는 걸 글자로 듣는 기분이었다.) 드라마틱한 반전같은 걸 기대하기는 어려웠는데 소설을 읽고난 뒤라 그런지 덤덤한 문체뒤에 기이한 동감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한편, 책을 중간중간 사두는 편인데 라이트 노벨은 왠간해서 집어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비스무리한 두권의 책을 쌓아두었다. (순전히 불량식품 하나 빨아보자라는 불순한 의도였다.) 하나는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 수첩, 그리고 이번에 신규 등장해주신 커피점 탈레랑의 사건수첩. 뭐 이렇게 제목들에수첩들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라며 시니컬거렸는데도 (아마도 일본특유의 라이트소설 네이밍이 아닐까. 판에 박혀버린 일종의 습관성 제목붙이기의 희생양 정도..? ) 의외로 두권의 책들이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두개의 책이 좀 질감이 다른데 하나는 그야말로 호기심을 당기는 라이트 노벨속성, 그리고 탈레랑은 묘하게 문학적 냄새가 슬쩍 풍겨서 놀랐다는...번역을 보아하니 '양윤옥' 여사시다. (1Q84의 그 분...)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전담 번역가인걸로 기억.... 탈레랑도 맡겼나보다. 이 두권은 좀더 읽어봐야 진면목이든 뭐든 알 수 있겠다. 


러브크래프트 전집은 사다놓고 읽지 않아서 큰 맘먹고 읽기 시작한 책이다. 대략 크툴루의 부름까지 읽었는데 플롯은 포기하고 오히려 기괴한 네이밍들이 매력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레이트 원이 나오고 크툴루가 주문으로 불려나오며, 네크로미콘, 미스캐토닉이 등장하면 정신이 바짝 조여드는 기분이다. 사실 로저 젤라즈니의 '고독한 시월의 밤'에서 듣게된 '미지의 카다스를 향한 몽환의 추적'이 궁금해서 크래프트저작들을 읽게 된건데 의외로 그 세계가 깊어서 놀랍고 생생한 묘사가 그럴듯해서 다시한번 감탄하게 된다. 도대체 이런 상상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에드가 엘런 포도 정신착란에 시달렸는데 혹시 러브 크래프트도 기괴한 상상력이 그의 정신을 갉아 먹었던 건 아닌지....





Posted by kewell
Vanilla Essay2013. 7. 21. 17:14

2013.07.21(일)

1.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무라카미 하루키.

2. 도둑맞은 편지 - 에드가 엘런 포

3. 런던스타일 책 읽기 - 닉혼비. 



가끔 이런 날씨에서는 책읽기 만큼 좋은 '시간보내기'가 없다고 생각한다. 책읽기의 단점이라면 '이걸 누구와 함께 하는 뭐 공유의 활동'이라고 말하기 힘들다는 것과 오래도록 시간을 보내고 나서도 더 읽고 싶은 것들이 많다는 점 정도다. 그렇다고 해서 책을 마냥 읽기만 하고 몇 권 연속으로 읽었다고 해서 내 삶이 윤택해진다던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책을 읽는 건 그저 읽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준다고 스스로 위로하지 않는 편이다. 책은 책일 뿐이니까. 물론 교훈도 좋고 정보도 좋지만, 대개의 경우에는 그냥 읽음으로써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고 새로운 모험을 한다고 생가하는 정도다. 


최근 책을 구입하는데 약간 인색해졌는데 그 이유는 '좋아하는 책'들을 이미 꽤 많이 사 놓았기 때문이다. 읽지 않는 책들이 대략 10권 남짓 되니까 굳이 새로운 책을 구입해서 거기에 더 보탤 필요성이 없다. 그런데도 책이란 묘해서 서점에가면 아직 읽지 않는 '의무감'비스무리한 것들이 vol 1. vol. 2 ... 처럼 구비되어있어도 자꾸 더 사게 되는 묘한 구석이 있다. 생각해보면 약 20권 안밖에서 이 읽는게 다 바닥나지 않도록 무의식중에 조절한다고나 할까. 


하루키의 수필집은 여전히 꾸준히 읽는 책이다. 최근 '저녁무렵에 면도하기'를 비롯한 무라카미 라디오 연작 시리즈는 3권다 재미있게 읽었다. 문학동네에서 내놓은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발렌타인 데이의 무말랭이',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해뜨는 나라의 공장'그리고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같은 에세이들도 우후죽순처럼 새발간되었드랬다. 시간이 좀 되긴 했는데 다자키 쓰쿠루 이야기를 듣는 것 보다는 차라리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는게 더 편하고 더 친근감있고 더 담백하고 더 산뜻한 측면이 있다. 그래서 소설보다는 에세이가 더 인기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하루키의 에세이는 감각을 담아서 넘기는 활자많은 잡지 정도의 가벼움이 있어서 부담이 없고 공감도 간다. 아마도 '강요'가 없고 '고집'이 없어서 그런가. 


그리고 에드가 엘런포의 '도둑맞은 편지'는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중 1권으로 보르헤스의 '픽션들'을 읽다가 불현듯 충동에 이끌려 바벨 도서관 시리즈를 무턱대고 다 읽어보리라 맘먹어서 사둔 책이었다. 선구적인 포의 스토리 라인과 정서가 이젠 무감각하리만큼 일상적인듯 되버렸지만 여전히 활자로 읽을 때 느끼는 새로움이란게 있다. 그래서 더 좋다. 어디선가 '우울과 몽상'에 대한 포의 정신분석학적인 내용의 분석서를 본 적이 있었는데 사실 그런 성향이나 배경 따위를 읽으면서 아 그렇구나 그래서 포가 이런 소설들을 쓴 거였어라고 할 필요가 별로 없다. 그저 그의 작품들을 읽으면서 그가 뿜어내는 기묘한 이야기의 매력만으로도 그의 정체성을 대변할 수 있다. 아무튼 포를 비롯한 바벨도서관 시리즈를 줄기차게 읽어볼 작정이다. 얼마나 읽을 지 알 수 없지만...


닉혼비의 런던스타일 책읽기는 그동안 사리라 마음 먹었던 책이었는데도 시간을 미루다가 못샀던 책이었드랬다. 그래서 큰맘이랄것도 없는 굳은 의지를 동원해서 기어코 이 책을 집어들고 집으로 오는 내내 읽었다. 사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책들에서 내가 무슨 편린을 얻는다던지 아니면 책 목록따위를 만들어서 나도 '런던스타일'로 책을 읽어봐야지라고 마음을 다잡는 계기로 삼으려는건 아니다. 그저 닉 혼비가 글을 쓰면서 슬슬 드러내는 그만의 독특한 시각과 책에 대한 마인드..특히나 재미없는 책, 고상한척하면서 읽기도 싫은 두꺼운 책들 폼으로 읽고 다니시는 그런 가식이 없어서 좋다. 다 집어치우고 좋은 책을 읽으라는 그의 권유가 꽤 솔직하다. 책을 읽으면서 자아성찰이니 혹은 내면성숙이라던지 하는 조건부 설정으로 책을 사드는건 좀 아니지 않나싶기도 하고...


아직 다 읽지는 않았지만, 재미도 쏠쏠하다. 3권을 읽고 나면 또 뭘 읽을 지 고민 좀 해봐야겠다. 올해 읽으려고 나두었던 책들 목록에도 있지만, 이걸 알파벳 순으로 읽는다던지 하는 우를 범하고 싶진 않다. 때에 따라서 읽고 싶은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들 뿐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책을 읽는 건 노동이 될테니까...책을 노동으로 읽는건 처럼 바보스러운 일이 또 있을까. 

Posted by kew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