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BOOK/소설2014. 6. 18. 17:01


  

이언 매큐언이 전작들에서 악명이 높았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엽기'적인 소재를 이용해서 파격적인 이야기를 소설로 썼기 때문이다. 좀처럼 일부러 찾아보려고 해도 이런 류의 소설은 보기가 어려울수 밖에 없다. 방부 처리된 성기가 등장하는 <입체 기하학>라든지..극장에서 실제 정사를 벌이는 <극장의 코커씨>라든지..이외에도 강간을 비롯해서 근친상간같은 꺼려지는 소재를 아무렇지도 않게 연작 시리즈처럼 써버리면 독자가 생각하는 매큐언의 이미지는 뻔하다. 이런 경우, 매큐언의 소설이 개성있어서 좋다고는 해도 환영할만한 대중적 팬층을 확보하기는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원래 작가들은 자신들이 쓰고자 하는 것들을 쓰고 싶어하는 욕망때문에 상업성이라든가 대중성같은 것들을 등한시 하는 우를 범하기도 하지만, 내심 자신의 글들이 두루두루 읽히길 바란다는 측면은 아이러니하게도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보자면 매큐언은 아예 사람들이 터부시하고 거부하는 지점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길을 가는 엽기호러의 매니악스러운 작가로 아예 대놓고 공표하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암스테르담>이 등장하고, <속죄>가 등장 한다. 알다시피 암스테르담은 부커상, 속죄는 독자들의 찬탄을 불러일으키며 매큐언이 쓴 소설의 최고작이라고까지하는 극찬을 받는다. 암스테르담과 속죄만 놓고 보면, 그가 <시멘트 가든>작품을 썼다는게 믿겨지지가 않을 때가 있다. 마치 하루키가 태엽감는 새니, 양을 쫓는 모험이라든지, 1Q84를 쓰다가 알고보니 <노르웨이의 숲>을 썼다고 생각해보면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는 것처럼 매큐언이 통념을 일부러 쫓지 않았다는 전작들이 일종의 쇼맨쉽이 아니었을까하는 추측마저 들 정도다. 나도 충분히 리얼리즘적이고 평이한 일상을 노래할 수 있다는 의사표현일수도 있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소설들이 이 지점에 이르러서야 대중들의 선택을 받았다는 점이다. (평론가들의 측면은 사실 잘모르겠다.) 


속죄는 워낙 유명해서 나중에 논외로 처야겠지만, 부커상의 빛나는 <암스테르담>을 읽고 있노라면 뭔가 중간에 몰리레인이 클라이브와 엽기적인 행위를 벌이고, 그와중에 버넌과 이중적인 섹스를 즐기고, 가머니와 중간에 변태적인 행각을 하는 팜므파탈의 여성으로 그려졌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런 매큐언씨 다시 시작하셨군 그럼 몰리는 클라이브버넌의 주도아래 가머니가 살해하고 시체를 절단하고 암스테르담으로 옮기고 셋다 몰리의 죽음을 놓고 옥신각신하다가 서로 총질을 하고 셋다 사망한다는 황당한 결말의 소설이 된다고 해도 충분히 매큐언표 소설로 충분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몰리가 불치의 병으로 죽었는데 과거의 남자와 애인이 서로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비교해가며 자존심 싸움을 하고 도덕적인 논쟁을 펼치고 서로를 경시하고 질투하다가 치부를 발견하고 스스로의 본성을 넘어서는 추악함을 보여주니 어 매큐언씨가 대중적인 블랙코미디를 표방한 스토리소설로 노선변경을 한 것같은 느낌이다. 


암스테르담을 읽으면 예전 리처드기어, 샤론스톤 주연의 <마지막 연인>이 생각난다. 두여자를 놓고 혼수상태에 빠져버린 주인공 남자이야기. 남자로부터 누가 진정한 사랑을 받았는가에 대한 각자의 시각, 그리고 서로에 대한 배려같은 것들. 암스테르담은 이 영화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된다. 리처드 기어는 몰리 레인이 맡고, 샤론스톤과 다도비치는 클라이브와 버넌이 되는 식이다. 여기에 가머니가 맡을 역이 부족하지만 어쨋든 모양새는 비슷하다. 다만 스토리상 영화말미에 보여줬던 서로를 향한 미덕같은 건 없다. 대신 파국을 향해 질주하는 추한 세남자의 적나라한 모습만이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다. 소설의 제목이 암스테르담인 이유는 소설 말미에도 밝혀지지만, 이 세남자의 최종 결말을 아우르는 상징적인 장소여서 그런 듯 싶다. 처음 읽기시작할 때는 블랙코미디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점점 수위가 올라가더니 마치 지기싫어하는 남정네들의 자존심과 되먹지 못한 도덕관념 논쟁에다가 정치적인 불순함, 가족에 대한 무책임, 그리고 몰락해가는 추한 모습을 바라보는 서로간의 생각들이 엉켜서 속내가 복잡해진다. 


왜 불편하냐면, 이런 극단의 모습들이 나를 비롯한 누군가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기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던 어떤 연인으로 부터 선택을 받지 못하고 그 연인이 나에 대한 많은 비밀을 간직한채 다른 사람에게 가버렸을 즈음에는 사소하게나마 소소한 광기는 애교수준이다. 평상시 고고한 척해도 불현듯 밀려오는 모멸감때문에 드잡이질을 할 수도 있고, 냉철함은 온데간데 없고 광폭하고도 극단적인 언쟁을 소리높여 아무렇지도 않게 배설할 수도 있다. 왜냐면 우리 모두 인간이니까..그래서 <암스테르담>이 인간본성의 추악함이라고 평을 내리는 듯 싶다. 소설 초입에서 몰리레인은 죽은 채다. (아마도 표지 여인이 몰리 레인일듯.) 이미 핵심 인물이 죽은 상황에서 남겨진 3명이 남자는 묘한 경쟁을 벌이는데 이것들은 다 각자의 위치에서 결함이라고 불리우고 약점이라고 여겨질만한 구석에서 점차 퍼져나간다. 클라이브는 '예술적 자부심' (예술적 성취를 위해서 도덕적 의무감을 져버릴수도 있다는 부분), 그리고 버넌은 언론인으로서의 공정하고도 냉혹한 직설적 비평 (기사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인권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부분), 가머니는 올바르고 청렴하고 능력이 있는 정치인으로서의 생존본능 (실제로는 '고위직 개새끼'이자 '밤의황제'라고 불리우는 타락함)이 바로 그것들이다. 


서서히 이 세사람은 서로의 약점을 향해 몰리레인을 매개체로 찌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렇게 찔림을 당한 측은 이에 대한 당혹감과 모멸감으로 상대방에게 더 강도높은 가해를 시작한다. 그리고나선 폭주하는 거다. 그리고 같이 멸망. 이게 암스테르담의 주된 플롯이자 스토리라인이다. 여기서 세세하게 그 과정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이야기하는건 스포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기타 여백은 독자들이 읽으면서 채워야 하겠지만, 어쨋든 중요한건, 클라이브던, 버넌이든, 가머니이든 ..결국 다 우리들의 한 측면이라는 점, 그래서 나도 클라이브처럼 행동하고 버넌처럼 생각하고 가머니처럼 움직일수 있다는 지점이 독자들이 느끼는 <암스테르담>의 느낌이 된다. 


만약 이 책을 읽으면서 불편함을 느낀다면 '당신의 종착역은 '암스테르담'이야' 라고 마음속에 확 다가올지도 모른다. 소설말미에서 세명의 남자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협잡꾼'일수도 있으며, '창의성하나도 없는 구제할 길없는 단조로운 재능의 소유자'이며, '더러운 타락의 결론으로 가족을 침몰'시킬수도 있는 사람이란걸 일깨워준다.  물론 소설을 읽으면서 뭔가를 깨달아야지만 가치가 있는건 아니다. 다만 매큐언이 시종일관 견지했던 자신의 소설의 정체성은 본성의 추악함이 바로 우리곁에 있다라는 부분이 아니었을까. 그런게 소설속에 베어나와 가슴을 자극하면 과거가 부끄럽게 떠오른다. 결국 <암스테르담>을 읽으면서 '당신도 알고보면 그리 깨끗한 인간은 아니라오'라고 지적당한다. 좀 찝찝하고, 좀 적나라하며, 많이 부끄러워진다. 나도 구차함을 빙자해서 누군가가 내 생명을 끝내줄 모종의 장치가 있는 암스테르담으로 가야만 하나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버린다. 약간 코미디적이지만 일절 부인하기에는 솔직하지도 못하고 위선적이고 파렴치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암스테르담'은 추악함의 종점처럼 비춰진다. 




암스테르담

저자
이언 매큐언 지음
출판사
MEDIA2.0 | 2008-01-08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한 여자를 사랑한 두 남자, 그들이 암스테르담에 간 까닭은?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


<암스테르담>을 다시 읽었다. 그냥 꾸리꾸리한 날씨탓에 뭐든 하기 싫어서 잠깐 읽어보는게 나쁠 건 없다는 생각에 집었는데 테잎의 FF를 너무 과하게 누른 것처럼 태반을 읽어버렸다. 중고 책방에서 삐져나온 더렵혀진 지폐를 발견하듯 집어온게 엊그제인데 이걸 벌써 두번이나 읽게 되다니.... 그렇다고 해서 내가 뭐 매큐언의 광팬이어서 지면의 활자가 머리에 새겨질 때까지 읽어서 다 갈아마셔줄테다라고 다짐할 정도는 아니다. 그냥 읽게 된거고 거기엔 명확한 인과관계란 없다. 이런 먹물 엎질러진 날에 암스테르담이라니..항상 엔딩에서 느끼는건데, 까짓 망신 좀 당하고 살 수도 있는거지..뭘...그렇게나 라는 생각만 부질없이 든다.  


인과관계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예전에 사놓았던 줄리언 반스(Julian Barnes)<예감은 틀리지 않는다>(The sense of an Ending)도 얼결에 읽어버렸다. 이동진 기자의 '빨간 책방'에서도 역시 언급된 바 있었던 이 책을 읽으면서 '장르소설처럼 읽는' 실수를 피하라고 했던 걸 기억하는데 2부의 스피디함에 타놓은 저자의 약빨에 그만 나도 모르게 장르소설 읽듯이 그러고 있었다. 이렇게 미스테리함을 부추기면 독자들은 1부의 호기당당하게 적셔진 토니의 관점을 곱씹어볼만한 여유를 가지기 어렵다. 베로니카는 여전히 답답한 말을 하고(중간에 이런 대사는 오직 여자만이 할 수있다고 생각했드랬다.) 아직도 모르겠냐고 그러고 토니는 영문을 몰라하고 그리고 말그대로 '그건 그저 벌어질 뿐이고' 이렇게 되면 장르소설처럼 읽을 수 밖에 없다. 궁금증이 도지니까...어떻게든 실체를 알아야겠다는 일념이 다른 묘사들을 다 제껴버린다. 이거 혹시 내공의 문제인지도 몰라 이런 책의 유혹에서 견딜만한 관조적인 시선 같은 것들 말이야 수많은 궁금증과 호기심을 굳건히 견뎌내고 네가 그래서 말하고 싶은건 정작 뭐야 라는 말로 단번에 제압하는 냉정한 Reader 처럼...굳건한 의지를 가진채 독파하는 혈혈단신의 고수처럼 말이다.



오늘은 햇살이 쨍한데, 가즈오 이시구로(石黒一雄 /Kazuo Ishiguro)<남아있는 나날>을 읽겠다고 가방에 쳐넣고 왔다. 요즘은 고전이든 현대든 문학쪽을 읽게 되는데 특히나 가즈오 이시구로를 읽으면서 정말 맘에 든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를 보내지마>도 역시 그랬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도 가끔 친구놈들은 '일본 특유의 정서가 베어있긴 하지'라는 별 같잖은 말을 무식하게 여전히 한다. 굳이 여기에 야 이시구로는 영국애에 가까워 너 걔 이력을 본 적이나 있어 걘 7살이후로 일본에 없었다니까. 이렇게 이야기해주면 걔가 아 그래 몰랐네 라고 대답하고 겸연쩍어하고 하는 이런 광경이 일어날리 없다. 왜냐면 읽지 않고서도 그렇게 이야기한다는 건 나 요즘 바쁘니까 그런 책 이야기는 하지말지 그래? 라고 말하는 은유적 표현이니까. 그냥 그러려니하고 다음 화제로 넘어가면 된다. 


싸질러놓은 책들이 너무 많다. 마음속으로 서점에 갈 때마다 스스로 주지시키는 다짐들이 있는데 이런 것들이다. '이미 사놓은 책들이나 다 읽고 서점에 오지그래?' 라든지 '이 책을 읽는다고 해서 네 삶이 더 나아질 확률은 없어 알고나 있는거야?' 라든지 '책을 무책임하게 구매하면 그 여파는 현실로 너를 괴롭힐 거라고... 아무래도 넌 가난하니까' 라는 등등이다. 그러니까 내가 내 경제적 형편을 무시하고 책을 구매하는 이 무책임한 처사는 일종의 중독증같은 거다. 온라인 게임 중독자를 욕할건 없고 스맛폰의 카톡 연동 게임의 아이템질을 비웃을 필요조차 없다. 이거야 말로 취향과 장르의 문제아니겠는가. 중요한건 적자라는거고 먹고 살아야 하니까 적당히 작작 좀 사라는 자조섞인 한숨들이다. 


정말 작작 좀 사야 겠다. 너무 터무니 없어...


cf. 그나저나 제목으로 '남아있는 나날'은 너무 멋진데..'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괴이할 정도다. 이거 왜 이렇게 지은 걸까. 

어떻게봐도 The sense of an Ending이 멋지잖아.  



Posted by kewell
Vanilla Essay2014. 3. 12. 21:52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시오리코다자이 오사무<만년>에 불을 붙이는 쇼로 가사이를 충격에 빠뜨릴 때 가사이는 '시오리코가 결코 책에다가 불을 붙일 부류의 인간이 아니었음을 알았음에도 당황했었드랬다. 왜 그랬을까. 좋아하는 책이 소멸된다고 생각해서다. 앞뒤 가릴 것없이 그것만 눈에 들어오는 좁아진 시야를 보면서 한정판의 위력을 본다. 모든 한정판은 가슴을 뛰게 한다던 지인의 표현처럼 어떤 대상이든 그것이 제한적이거나 소멸의 과정에 있다면 남기고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게 마련이다. 책같은 경우에는 좀 다르다고는 생각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책이 불탄다고 상상하면 나도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는 결코 책에다가 불을 불일 수 없는 시오리코 같은 부류가 반드시 존재한다. 그 사람들은 책을 찢을 수도 구길 수도 그리고 불태울 수도 없는... 제 몸이 구겨지고 찢겨질 지언정 책은 보듬어 안고 언제까지나 깊은 자신들만의 서재에 꽂아두고 싶어 하는 쪽이다.  나는 그정도는 아니어서 영원한 소유를 꿈꾸지도 않지만 가끔 읽어야 할 책들이 내곁에 늘 있어서 읽고 싶을 때 언제든 집어들 수 있기를 기대한다. 기대하고 바라는게 죄는 아니지 않은가. 단순히 읽고 싶은 순간에 찾아도 찾아도 없는 경우가 문제인거지..가끔 읽었어야 했지만 여러가지 저간의 사정으로 읽지 못했던 회한의 책들을 다시 찾으면서 이번에는 읽어야지 이젠 여유도 있고 시간도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때가 무르익지 않았겠어 읽어야 할 때가 도래했으니 나는 읽어야만해 라고 마음먹고 당차게 서점사이트를 클릭하지만...온라인 책 검색결과에 쓰여있는 책의 정보 하단에는 덩그러니 '절판' '품절'이라는 글자가 두둥 하고 불길하게 등장한다. 제기랄 그러게 내가 뭐랬어 미리 사두자고 했잖아. 



오래전 짝사랑하던 연인으로 부터 차갑게 들었던 '거절'의 뉘앙스가 '품절'이라는 글자에 박혀있었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놓쳐버린 그리고 제때에 챙기지 못했을 괴이한 회한으로 자책질의 폭풍이 지나고 나면 현실적으로 이 책을 구할 방법이 없을까쪽으로 선회한다. 요즘은 온라인쪽이 많이 발전하여 어디서든 중고서적의 검색이 자유롭다. 지레 포기할 단계가 아닌 것이다. 우리의 '마술램프'와 '공원'사이트를 뒤지고 저명한 몇 개의 중고서적 사이트를 헤메다가 재고를 발견하게 되면 쾌재를 부르는 거고 그렇지 않아도 때를 모색하며 쥐죽은 듯 인내의 시간을 버티면 된다. 책이란 수요에 의해서 언젠가 다시 검색란에서 재등장할 날이 오니까..그러나 이런 과정을 거친다고 해도 세상에서 감쪽같이 모습을 감춘채 종적이 사라져버린 소멸의 책들도 있긴하다. 그 책은 내가 읽을 인연의 책이 아니었던 거다.


최근에 몇 권의 절판 및 품절 서적을 손에 넣었다. 라파엘 사바티니<스카라무슈>, 그리고 야마다 에이미<슈거 앤 스파이스>, 이언 매큐언<암스테르담>, 레이먼드 카버<대성당>이다. 사바티니의 저작들은 국내에 정말 제대로 등장한지 꽤 되었다. 스카라무슈라 그렇다쳐도 (옛날 고리짝시절 문고판으로 등장하긴 했었다), 불후의 명작 캡틴 블러드 따위는 아예 등장도 안한다. 어린 시절에 보물섬에서 보았던 이현세옹의 만화을 떠올리며 스카라무슈를 기억할 뿐이었다. 활극소설로 사바티니를 능가할 작가도 별로 없다고 보는데.. <스카라무슈> 몇 년전 등장했다가 휘리릭 사라져 주셨드랬다. 물론 중고 서적에 이 책이 등장하기는 했는데 가격대가 후덜덜해서 문제인거지 싶다. 3배 넘는 가격으로 등장해버려서 과연 내가 이 책을 이 가격에 읽어야만 할까로 한참 고민을 안겨주고 있었다. 최근 또 다른 서적상으로부터 적절한 가격으로 번개처럼 검색이 되었다. 후다닥 결제라인을 완료하고 나니 다시 품절로 가버리는 걸 보고 인연의 끝을 마지막에 잡은 느낌이라니...



야마다 에이미의 작품들은 약간 논란이 있긴 한데 왠지 여성들이 읽는 책이란 선입관과 너무 에로적이고 적나라하다는 속성때문에 대중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칭찬하는 부류는 아니었을 거다. 이렇게 보수적인 나라에서 섹스장면이 부지기수로 등장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묘사해대는 과감함은 또 다른 오해를 부르기 딱 좋지 않은가. <설국>도 그렇게 매도된지 오래다. 대중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책을 읽는 사람들의 수준 운운하는 모양인데 요시모토 바나나쿠니 가오리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으면서 야마다 에이미를 은근슬쩍 꺼려하는건 이율 배반적이지 않은가. 난 개인적으로 야마다 에이미의 소설을 맹렬히 좋아하진 않았어도 나쁘지 않게 읽는 편이다. <풍장의 교실>같은 건 드물게 정서를 침참시켜서 절구통에 삐죽삐죽한 짜증덩어리를 넣고 돌려대는 느낌이다. 너의 정서란 세상의 그저 한 부스러기일 뿐이야 라고 책망받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에이미의 저작들도 초기작들은 왠간에서 구하기가 어렵다. <슈거 앤 스파이스>가 아마도 나쁘지 않은 작품일텐데도 제대로 읽어볼 기회조차 오질 않았다니...희한하긴 희한하다. 아무튼 이 책도 중고서적에서 건져냈다. 


이언 매큐언<암스테르담>은 사실 주변의 지인들이 열렬히 찾던 책이다. 이 책은 온라인에서 검색해서 구할 수 있긴 한데 역시나 가격이 문제다. 두배이상으로 뻥튀기 되어있기 때문에 약간 망설여지는데 어차피 읽어야 할 책이라면 그냥 마음 편하게 확 구매해서 읽으면 그만이긴 하다. 그나저나 <암스테르담>이 재판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없다. <토요일>은 아직도 버젓이 유명 서점에 꽂여 있는데 <암스테르담>의 어떤 점이 절판의 블랙홀로 이끌었는지 감지조차 되지 않을 뿐이다. (하기사 토요일에 비할바가 아니지..매큐언의 소설도 어쩌면 대중적이어야만 했을 거다.)


 마지막으로 카버의 <대성당>. 이건 정말이지 할 말이 많은데, 문학동네측에도 문의했던 데로 아마 이 책은 신판 문학시리즈의 하나로 재출간되긴 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이지 질리게도 시간을 오래끌고 지지리도 진척이 없어서 문제다.  문의한게 작년인데 아직도 나오지 않는다. 대성당의 가격이 미친x 머리칼 나부끼듯 폭주하는걸 보면서 혹시 저 책의 특정 페이지에 카버의 유서라도 들어있는건가 의심하곤 했다. 하지마 이 책은 우연찮게 지나던 중고 서점에서 구했다. 물론 제 가격에...


이런 걸 보면 책이란건 정말 인연이란게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된다. 읽으려고 읽으려고 애써도 손에 안들어오는 책이 있는가하면...한참을 잊고 있었어도 결국에는 손에 들어와 읽히는 책들이 있다. 그 책들과 나와 어떤 운명적인 실타래가 있는지 알수 없다. 때로는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던 책들이 오랜 시간 후에 내 손에서 읽히는 날도 많았으니까..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을 순 없다는 걸 안다. 그래도 최소한 눈에 걸리는데로 읽어야 겠다고 다짐한 책들의 일부분 만이라도 나와 같이 숨쉬며 생존해 있기를 바라고 잠시 기억에서 사라졌더라도 언제고 다시 나타나 주길 꿈속에서라도 기대할 것이다. 


   

Posted by kewell
Vanilla Essay2013. 10. 17. 17:36


펭귄 클래식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다가 '거울나라의 앨리스'까지 읽지 않으면 도저히 안되겠다는 막연하고도 충동적인 느낌때문에 서점을 뒤졌다. 문제는 '거울나라의 앨리스'가 절판의 경지에 다다렀다는 점이다. 교보에도 절판중이시고 (현재까지는..) 반디앤루니스에서도 약 2권 남짓만 남아있는 상태고 어느 서점에서도 유독 '거울나라의 앨리스'만 집착적으로 많이 팔려주셨다. 괴이하기도 하지만 어쩔수 없겠다싶어 발품을 팔고 종로타워지점까지 가서 북셀프로 '거울나라의 앨리스'을 질렀다. 속이 다 후련하지만 책을 이렇게 충동적으로 사가지고 온 적이 어디 한 두번도 아니고 매번 이럴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혼자 자책하는 시나리오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내 책장의 책들은 다 이런 식으로 구매된 랜덤과 무작위와 충동적인 감정의 산물들이었으니 숙명적으로 습관과의 평생 전쟁을 치룰 조짐들이라는....


언제나 충동적인건 아니지만 간혹 제대로 걸리는 날들이 있다.  지금도 이언매큐언의 '암스테르담' 그리고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 그리고 커트보네거트의 '타이탄의 미녀'같은 책들은 언제나 '충동구매'의 영역안에 산다. 서점 책장 어디 한 귀퉁이에 꽂혀있기라도 하다면 그야말로 심마니 산삼보듯 쾌재를 불러줄텐데 요즘 같은 시절에는 결코 벌어지지 않는 꿈같은 이야기다.  온라인에서 절판이라는 딱지가 붙어버린면 오프라인으로 구매하는 것도 힘들긴 매한가지니까.. 구하기가 어려워서 중고서적을 기웃거려도 보지만 예전 중급의 중고서적을 받아들었던 기억으로 볼 때 그 볼품없는 타인의 흔적때문에 실망한 적이 하도 많아서 별로 내키지도 않는다. 중고는 나름대로는 어느정도 대안이 될 수있지만 여전히 아니다싶은 구석도 많다. 책을 읽을때 나아닌 다른 사람의 자취를 대면한다는 건 그리 좋은 기분이 아니고.... 어찌됐든 서점을 오고가다 보면 충동적인 구매의 향연을 벌일 때가 있다. 일전에도 아르투르 페레즈 레베르테의 '뒤마클럽'을 봤는데 얼마전까지 절판으로 구하기가 어려워서 헤맸던 책이었다. 경제적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질러볼까하다가 그동안 저지른 충동의 통장내역이 한심스러워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던 적이 있었다.  


다자이 오사무 전집도 충동적으로 질렀고, 레이먼드 챈들러의 절판 작품들도 혈안이 되서 찾곤 했었다. 그리하여 현재 읽어제끼는 책들보다 읽어야할 책들이 책상에 쌓여간다. 키는 점점 높아져서 이윽고 모니터 높이를 넘어서고 그리고 책장의 두칸정도높이로 솟구쳐올라 굉장한 기세로 말한다. 도대체 언제 읽을거냐고...그래도 시간이 흘러 그 책들을 구하지 못하게 되는건 너무나도 쓰라리다. 일단 구해놓으면 언제고 읽게 되니까. 벌이가 한심스러워서 책구매에 돈지출을 매조지해버리지 않는 이상 이런 투자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곤 했다. 친구말마따나 내가 이런 책의 탑에서 한권씩 한권씩 읽어 해치워 나간다고 해서 내 소양이 배가되고 인문학적 통찰력이 레벨업 되고 그럴거라고 기대하진 않는다. 


뭐라고 할까. 식신로드 중 만나는 별미를 놓치기 어려운 매니아적, 취향적인 식탐과 유사할까. 뭐하여튼 그런 느낌이다. 그냥 책속의 내용을 탐닉하고 그 작가를 읽어야만 하는 운명적인 데자뷰 같은 것들. 그리고 단 몇줄의 문장만 덩그러니남아 노트귀퉁이에서 조용히 말할 때, 그저 읽어버린 책 이상의 아우라들이 있게 된다. 어쩌면 코난도일의 말이나 망구엘 할아버지 표현대로 글쓰기를 위한 굉장히 효율적인 보물창고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일부러 그럴듯하게 보이려고 퀼트처럼 명문을 갖다 붙이는 작위적인 의도는 꿈도 꾸지 않는다. 대개의 경우는 문장보단 감정이 남게되고 그런 감흥의 뒤에선 뭔가 스물거리는 삶의 묘미를 느낄 뿐이다. 아이러니하고 때론 우여곡절끝에 다다르는 간만의 정서적 안도감 정도면 그럴듯하다고 생각한다. 



Posted by kew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