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BOOK/소설2014. 6. 9. 15:00


<노르웨이의 숲>(ノルウェイの森)을 읽을 때면 설명할 수 없는 우울함이 슬며시 내려앉곤 한다. 와타나베는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않지만 소설속 모든 불행에 대해서 모종의 책임을 스스로 지려고 애쓰고, 주변인들은 지인이랍시고 아웃사이더에 대한 배려를 보여주는 듯 하다가 느닷없이 생을 마감한다. 오래 머물렀던 장소에서 얼마간 떨어지는 일도 어색하고 애잔할텐데 말을 나누며 공감했으며 내심 친밀감이 오고갔던 사람들이야 오죽했을까. 키즈키는 자동차 배기관을 끼우고 자살했고 나오코는 달빛이 내리던 밤 조용히 스스로 생을 끝냈으며, 나츠키는 면도칼을 침묵속에서 오용했다. 이즈음되면 어떤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라고 할지라도 정체된 '혼란'과 '우울'의 정서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플랑드르파의 암울한 그림들이 하늘에 걸려있다라는 단순한 현실묘사로는 부족한 것이다. 함부르크에 내린 와타나베는 그 시점부터 흘러나오는 비틀즈의 '노르웨이 숲'을 들으며 겪는 트라우마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 얜 아직도 이모양 이꼴이야. 1992년 <상실의 시대>를 읽었을때도 이랬다. 와타나베는 아직도 현재에서 과거를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나보다. 벌써 20년 넘게 시간이 흘렀는데도 예나 지금이나 계속 노르웨의 숲 속 '홀로' 와타나베였다. 


솔직히 나오코가 자신이 불완전한 인간이라고 했을 때, 아 이 소설은 자아와 정체성에 대한 청년기의 방황을 정신병리학적으로 전개하려나보다 이러다가 어떤 의미에 다다르면 현실을 털고 일어서서 앞으로 질주하는 푸른 희망을 말하겠지라고 생각하긴 했다. 하루키가 추구했던 고도의 계산된 리얼리즘으로 이런 자기극복과 캠퍼스 러브스토리를 트랜디적인 풍으로 묘사했더라면 아마 노르웨이의 숲은 이런 컬러가 아니었을 것 같다. 좀더 찬란한 오렌지빛에 햇빛에 반사된 골드빛 보도블록 위로 미도리와 와타나베가 손을 잡고 '마음에 드는 프라이팬 세트'를 사러 마트로 가는 이야기쪽이 더 대중적이지 않았을까. <상실의 시대>버전 당시에는 미처 시대적인 분위기가 지면위로 내려앉아서 고단한 이념논쟁의 열기가 시들고 이젠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지 다들 어벙벙한 상태에서 맞닥드린 '자기 정체성의 숙고'처럼 생각하고, 이를 빌미로 현대 자본주의의 감각적이다못해 세련된 문화적 뉘앙스를 기막힌 무덤덤하면서도 단백한 문장으로 읽는다라는 대중적이 평이 있었드랬다. 


하루키가 아니었으면 누가 이런 평이나 소감을 달았을까. 더군다나 '온기가 필요해서' 마치 섹스를 한다는 와타나베에게 나츠키로부터 '그렇게 살면 안된다는 지적까지 스치듯 지나가고, 와타나베는 '소통을 위해서 매개체적 역할을 감내하는 무라키미 방식의 철저한 시작점이 되어 '파격적인 성적분방으로 읽혀질 가능성도 꽤 컸다. 왜냐고? 와타나베는 이미 나오코와 ..레이코, 상상속에서 미도리와도 적나라한 섹스를 벌였다. 예전 웹상에서는 이런 '노르웨이의 숲'을 두고 뭔 스무살짜리의 인생 다반사가 섹스 편력이 이토록 복잡하고 난잡하냐고 지적까지 댓글로 우수수 달릴 정도였으니까. <작가란 무엇인가>에서 하루키가 '섹스'가 자신의 작품에서 어떤 소통과 발현의 방식이라고 밝혔다고는 해도 1990년에 그 의미를 제대로 눈치챈기란 어려웠다. 우선 그때의 청춘들의 감각의 제국에서 살면서 깨지 않고 숨죽여있는 스팟들을 덕지덕지붙이고 살때였다. 아마 눈에 들어온 문장들은 '자극' 그 자체였을 것이다. 


반면 지면속에 잠자던 숨은 의도가 궁금했던 다수의 궁금이들은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였다. 이 책을 읽고 느낌이 어땠어. 정말 '상실'에 대한 이런 고민 따위를 이렇게 와타나베스럽게 해본 적이 있긴 한거야?  미도리가 와타나베를 구출해줬을까 그러지 않았다면 와타나베는 결국 사회 부적응자가 되어서 방황하다가 회사도 잘리고 함부르크 공항에서 가슴을 부여잡고 트라우마의 노예가 되지나 않았을까. 나오코는 만나지 말았어야 했고 우리들은 다 나가사와처럼 사는걸 당현하게 받아들여야 할까 뭐 등등 물어볼 건 수없이 많았다. 사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물어본다고 해도 딱히 그럴 듯하게 설명해주는 친구들이 있을리 없었을 것이다. 우리들의 판례는 뻔했다. 호밀밭의 홀든을 와타나베에게 이입하는 정도였을 것이고, 삶이란 어떤 것이라고 뭉뚱거려서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우리는 멈추지말고 나아가야한다'는 시덥지 않는 이야기들이 하고, 하다못해 자기는 나오코라든지 미도리라든지 하츠미, 레이코라도 만나서 연애라도 하고 섹스라도 해보지 않아서 실감이 안난다고 푸념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게 <노르웨이의 숲>이라면 너무 과대평가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가만히 보니 <노르웨이의 숲>에는 내 시절의 스무살이 별로 등장하지 않고 있었다. 일어났어야 했다면 어떻게든 소설적인 미장센들이 현실에서도 유사하게 등장했어야 하지만 비슷한 일도 일어난 적 없고, 유사 캐릭터들도 얼쩡 거리지도 않았고 그야말로 주변은 조용했으며, 쓸쓸했고 지루할 따름이었다. 스무살이 가진 막연히 불안한 감정 뒤편에 죄다 '와타나베'같은 혼란스러운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의뭉스러움을 맡긴 채,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더 그럴듯 했다.  와타나베는 비현실적 세계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불편해하는 그런 영역에서 방황하도록 놔두고 난 현실에서 적당하게 적응해가면서 산다는 정도 ?  그런걸 두고 다들 자기 정체성이라고 이름을 붙여두었지만 난 이게 뭔지 당시에 도무지 감도 잡지 못했다. 그렇게 1987년 이후 90년 초입을 거쳐 2000년을 걸어왔다. 다시 지금 <상실의 시대>를 <노르웨이의 숲>으로 읽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모종의 30년 시절에 대한 인생경험이, 혹은 어떤 숨겨진 진실을 보는 혜안이 있어서 그동안에 어설픈 청춘에 가려있었던 진면목을 보게 해줄 거라는 믿음으로 책을 다시 잡은 것도 있었다. 그때랑 지금은 난 좀 더 '모래폭풍'에서 피를 흘리며 견뎌낸 나만의 시절이 있었으니까 <노르웨이의 숲>이 다르게 읽힐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와타나베를 읽으며 '얜 20년이 넘어도 여전하구나'란 느낌만 강했다. 게다가 그를 둘러싼 모든 환경적인 스타일들도 바뀌지 않고 있었다. 하루키가 토로했던 것처럼 그때나 지금이나 통속적인 마케팅의 영향을 제외해버리면 디킨스와 단테와 조지프 콘래드와 업다이크, 챈들러, 카포티를 좋다고 열렬히 읽어대는 스무살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고 여전히 쾌락적인 자극의 시대에선 골동품은 계속 골동품이었다.  관심이 없는 영역은 '무지의 영역'이지 '참고'의 영역조차 될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말인데 하루키가 이 책에서 설정한 와타나베의 성향과 나가사와의 성향은 현대 30년을 아우르는 일반성이 내포되어있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와타나베는 스콧 피츠제럴드와 카포티와 챈들러를...나가사와는 단테와 발자크와 조지프 콘래드와 디킨즈를 읽는 캐릭터다. 그리고 그 나이의 대다수는 그게 뭔지 30년전이나 지금이나 잘 모른다. 이게 일반적인게 아니면 또 뭐가 일반적인 걸까. 모래폭풍을 지나왔어도 여전히 와타나베는 우울하고 나가사와는 재수 없었다.  


당시 여인네들이 열렬히 지지했던 <상실의 시대>는 '미도리'적인 감각과 와타나베스러운 진지함에 대한 경의 같은게 있었다. 쉬이 지나왔던 젊은 나날들을 돌아보며 자신을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세상과 어깨를 나란히 한채 발걸을 맞추어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정체된다는 느낌, 모조리 불운한 것들에 대해 막연한 죄책감을 가지는 행위들, 부조리와 시스템속에서 몸부림치다가 결국 자신도 나사로 끼워져 시스템이 되버리는 시절들을 맞이하면서 서서히 치열한 반항기도 누그러지고 경각심의 모퉁이도 모조리 깍였던 시절이었으니까. 모두가 이 책을 읽을 때면 스스로를 돌보지 않았음에 부끄러워하면서 와타나베의 배려심과 여린 감성에 동기화되어 위로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에 매몰되다보면 정말 키즈키처럼 그리고 하츠미처럼 자신의 가치를 하락시킨 채, 세상과 이별해야 할지도 몰랐을 거다. 대중들이 주목했던건 이런 이면의 불편함을 뒤로하고 약간이나마 현실적인 부분에서 위로를 찾으려고 했으리리고 본다. 이 책에서 그나마 현실적인 부분은 ? 떠오르는 건 미도리 뿐이었다. 지금에서야 하는 이야기지만 아 노르웨이의 숲에는 미도리가 있었어 라고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하루키특유의 음악적 장치와 음식의 묘사와 일상에서의 무덤덤한 행동반경을 다 제외한다면 이 책에서 기억에 남는 거라곤 나에게는 미도리의 대사뿐이었다. 왜 미도리는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기쁜, 덩달아 미소를 짓고 되바라지고 당돌하지만 왠지 자기의사가 분명한 쾌활함이 있었지 않은가 차라리 그런게 위로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미도리적인 표현에는 그런 것들이 많았다. 고등학교 1학년때 계란말이용 팬을 사고 싶어 브래지어 살돈으로 사버리고, 석달동안 브래지어 하나로만 살았던 이야기하며 세상의 슬픈일 가운데 덜 마른 브래지어를 하는 것보다 슬픈 것은 없을거라는 둥, 불이 나도 기어코 와타나베를 옆에다 앉혀두고 같이 죽어도 좋냐고 묻고.. 딸기쇼트케익의 예를 들어가며 '연인'으로서의 권리를 역설하며 '와타나베가 스스로 당나귀똥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등등.. 미도리야말로 우리세대의 발랄함이 될 수 있었다. 


솔직히 와타나베가 나오코에 허우적거리는 동안 통속적인 시트콤이었다면 미도리가 와타나베의 뒷덜미를 잡아서 '이래선 곤란하다고 와타나베. 내 딸기 쇼트케익을 내가 어제 던져버렸는데 넌 아직 다시 사올 기미도 없어. 그래선 안되는거야 넌 나의 소울메이트잖아. 내말을 들으라고 알았어? 라면서 다그치면서 데리고 왔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수많은 90세대의 젊은이들은 미도리의 이런 쾌활함이 <노르웨이의 숲>을 헤쳐나오는 유일한 돌파구라고 생각했을 거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우리는 이게 와타나베의 자유연애 소설일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나오코든 하츠미던 레이코든 결국에는 미도리에게 돌아와 난 이제 너에게 정착할께 다른 여자들은 다 나에게 쓸모없었어라고 씁쓸하게 웃고 마무리되는 소설로 갔어도 피식 웃고 그렇게 될줄 알았다고 생각하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이런게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했다. 어떻게 미스테리하고 난해한 나오코의 달밤 자살을 설명하고,  자동자 배기관을 창에 연결해 세상을 달리한 기츠키를 생각하며, 머리에서 나사가 펑하고 날아가버린 레이코를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이 소설에는 현실에 지지대를 박아놓은 캐릭터가 별로 없었다. 그나마 미도리 말고는 정말 없었다.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한다. 키즈키와 하츠미와 나오코의 죽음 이면에서 허우적대는 와타나베가 꽤나 정상적인 캐릭터인지도 몰라서 대개는 우리같이 현실에 달궈진 그럴듯하게 적응해버린 사람들에게 '당신은 언제부터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왔나요'라고 묻는게 아닐까라고 말이다. 결국, 와타나베는 세상과 어울지못한 채 생을 마감해버린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알수 없는 미안함을 느끼고 자신이 그들을 완벽히 이해해줘야만 하고 뭔가를 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할수 있는게 뭔지는 모르겠고 나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 곧 그들을 따라 갈것만 같다면 와타나베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이면에도 비슷한 뭔가가 있을 거라고..그래서 마음속으로 다들 불편했을지도 모른다. 와타나베여 굳이 아픈 곳을 들춰서 그게 바로 너라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텐데 ...세상속에서 그렇게 다들 살아가는걸 뭐....진즉, 쓸데없는 우산같은 건 버리고 두손으로 제대로 미도리를 안아줬어야하는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그런다. 친구들이 말하길, 철이 없는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와타나베와 미도리적인 관점에서만 이 소설이 보일거라고...그래서 말인데 소설 말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지 


'그래 나는 미도리를 사랑한다. 

 그건 오래 전 부터 분명히 알았다. 

 나는 다만 그 결론을 끌면서 회피했을 따름이다.'.......


이세상에서 너 말고 내가 바라는 건 없어. 라고 말했을때, 이 책은 할 일을 다한거다. 

가끔은 주변의 열렬한 노르웨이숲 신봉자들의 일장연설을 들을 때마다 따분하고 지리하고 뻔하고 너무 진지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무슨 미도리 이야기라도 할라치면 노르웨이의 숲에서 '미도리'는 그저 장신구일뿐 핵심 캐릭터가 아니라고 날 설득하고 와타나베의 심연과 나오코의 심리적 방화과 정신적 질병, 그리고 레이코의 트라우마를 끌고 오곤했다. 물론 그 이야기들이 꽤나 중요할 수도 있다. 단 개개인의 내밀한 관점에서 보자면 여러가지의 선택지가 있다고 볼 수도 있을테니..하루키가 어디선가 밝힌 바와 같이, 소설가란 다양한 가능성과 가설의 상황들을 독자에게 던지고 작가는 선택이란 걸 하지 않는 것이 맞다고..다양한 가설 속에서 유독 난 미도리와 와타나베만 보고 있는 거겠지 싶다. 


시간이 많이 지난 후, 세월의 풍화작용에 깍인건 와타나베가 미련퉁이였다는 사실과 미도리의 현실감각에 칭찬을 주는 정도였지만, 그게 다 일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여전히 난 도입부의 와타나베 트라우마를 읽으며 나 자신의 가슴에도 과거의 트라우마가, 추억이..기억이 몰려오는 걸 경험한다. 아 드디어 그 시절의 내가 오는군, 다시 또 그 시절의 다사하고도 다난했던 에피소드들이 쏟아지며 잠시나마 플랑드르파의 암울한 하늘묘사에 그럴듯한 내 그림을 걸어두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 책은 유독 젊은 시절의 한 단면을 그대로 가직한 느낌이다. 내가 이 책을 젊은 날에 읽었으니 앞으로도 나이를 먹고 기억이 헐거워지고 시야가 흐릿해지고 만사가 귀찮을때라도 이 책의 편린들만큼은 선명할 것이다. 


그런게 노르웨이의 숲이 가지는 몫이다. 더도말고 덜도말고 그렇게 한 귀퉁이에서 오래도록  자리잡고 청춘을 대변해주고 있다는 느낌..그게 얼마나 갈지는 더 두고 볼 일이지만서도...




노르웨이의 숲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3-09-02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한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현...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
Review BOOK/에세이2013. 9. 12. 21:39


난, 하루키가 예전 무라카미 라디오에서 밝힌 브래지어 에피소드에서 (여권신장을 위해서 브래지어 소각 이벤트를 벌이는 걸 보고 '과연 입던 속옷일까'라는 의문을 가졌다고 밝힌 ..) 약간의 기이한 변태(?) 기질이 있다고 느꼈던 적이 있었다. 그 뒤로도 1Q84의 덴고와 후카에리의 판타지 퍼포먼스(?)도 그렇고, 이미 <노르웨이의 숲>에서 와타나베도 나오코와 미도리, 그리고 레이코와 자유분방함을 보여준바 있었으니까 (당시의 평론들을 보면 '학생들의 머리속에 온통 섹스밖에 없는게 놀랍다'라는 비스무리한 평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오해도 그런 오해가 없을거다라고 생각해도 역시 성적인 코드가 등장하면 그 아저씨 또 변태기질이 도지셨나봐 그런쪽으론 굉장히 기발한 하루키씨..라고 해도 뭐 딱히 할 말도 없다.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이란 제목도 약간은 그런 기질이 반영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쌍둥이 자매를 여자친구로 가지고 싶다는 에피소드에 달린 제목이었으니까. 어쩌자고 쌍둥이 자매를 여친으로 해서 뭐 . 언니인지 동생인지 일부러라도 헷갈리고 싶다는 거에요 뭐에요 하루키씨 !!! 라고 말이라도 하고 싶지만..사실은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역시 '이번엔 널 한번 써볼까?" "꺅 싫어요 거짓말이죠" 라고 이미 또 쓰셨으니  이 정도되면 기발한 상상력을 넘어서 주책이다 싶을 정도다. 사실 우리도 이보다 더한 상상력을 발휘해서 개개인의 본능속에서 더 엉뚱한 광경들을 만들어내지 않았다는 보장은 없다. 더하면 더했지... 하루키의 매력은 꼭 소설속에서 '상실'과 '비관'만을 말하고 '본질'에 대한 탐구만으로 일목요연하게 달려가는 그런 형태 외에도 이런 엉뚱함과 유쾌함이 더 본질적인건 아닐까. 실제 삶과 더 관련이 있을테니까 말이다. 


기질적으로 보면 형식적인 부분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성격때문에 안티 시스템 히어로(Anti-System-hero)같은 작가 같다고 느낌도 종종 든다. 이 동네에서 이 정도의 아웃사이더 히어로는 '커트 보네거트'옹 하나만으로 충분하겠지만 하루키도 거참 나도 만만치 않아 제기랄 하고 속으로 외치지 않는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을까. 애초부터 그는 이사를 거주지변경따위의 개념으로 인식하지 않고 주기적인 휴지통 비우기로  이사의 필요성을 인식한 바 있고, 레이 파커 주니어의 'I Still Can't Get Over Loving you'보단 제목으로 'I Still 사랑해'가 더 낫다고 할 만큼 심플한면도 있다. 본인이 에세이에서 밝힌 것처럼 그저 '그런거지뭐'와 '그래서뭐'를 남발하면서 넉넉하고 무책임(?)하게 살고 싶어하는 쪽일 수도 있다. 물론 이 정도되면 일반 서민들도 바라마지 않는 편안하고 쾌적한 마인드일테지만 우리가 정작 부러워하는건  동심과 감성의 스파게티가 오밀조밀 잘 자리잡고 있는 특유의 정서지 싶다. 


종종 그의 글에서 선더버드를 탄 여인이 등장하곤했는데 이게 바로 영화 <청춘낙서>에서 '리차드 드레이퍼스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본 선더버드를 탄 꿈의 여자'the girl of a dream'를 잊지못해 밤새도록 찾아다니는 에피소드에서 연유한 거였다. 그리고도 그는 원래 사랑이란 이렇게 기존 시스템을 넘어선 행위라고 했드랬다. (난 지금도 그런 여인이 아무리 멋져도 밤새 찾아헤메고 싶은 마음같은 건 없지만) 세상의 끊임없는 고착화된 시스템과 고정관념들의 틈에서 분투하는 하루키씨라니...그러고 보니 문득 소설을 쓰는 이유로 '개인의 혼이 가진 존엄함을 드러내어 거기에 빛을 더하기 위해서..우리들의 혼이 시스템에 끌려들어가 멸시당하는 일이 없도록 항상 거기에 빛을 비추고 경종을 울리는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보자면 소설이든 에세이든 그는 세상의 고정관념 따위는 내 알 바 아니다라고 지속적으로 은근히 글로 표현하고 있는거 아닌가. 



고정관념 같은 거야 그렇다쳐도 개인적으론 그의 정서적인 표현능력이 부러울 따름이다. <렉스턴의 유령>도 그렇고 <도쿄 기담집>외에도 로저 젤라즈니의 <고독한 시월의 밤>같은 고딕적인 뉘앙스를 좋아하는데.. 하루키에겐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상상력으로 충분히 이런 이미지들이 글로 아무렇지도 않게 재현되어지나보다. 찰스턴의 유령이라는 대목으로 그가 묘사한 문장들...


'해질 무렵 코블스톤이 깔린 찰스턴의 고즈넉한 거리를 걷다보면 화려하게 세공된 검은 철문 너머에 , 또는 뿌옇고 희미한 불빛에 드러난 차고 한구석에 무슨 이상한 그림자가 비친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밤의 정원은 적막하고 아름드리 떡갈나무가지에 털실처럼 늘어진 착생식물은 강바락에 흔들리고 백일홍 꽃이 저녁 어둠에 어스름하게 떠있다...모든 것이 고풍스럽고 조용하고 그리고 우아하다


라고 했다. 소설적 배경으로도 하나도 아쉬울 것 없는 밑그림들이다. 그래서 아마 감탄하고 찬탄하는 거겠지. 일부러 만들어보려고 해도 이미지화 시키기 힘든 것들은 수월찮게 글로 그려내는 재주라고나 할까. 그게 관찰력이었든 아니면 그가 가진 특유의 정서적 질감이든 간에 그런 부분은 부러울 수 밖에 없다. 내가 멈춰버린 시계를 보면서 '전지식 시계의 죽음에는 차갑고 무거운 어떤 것이 있어서 몇년에 한번 밖에 멈추지 않기 때문에 그 죽음에서 피할 수 없는 숙명의 도래'를 느끼기야 하겠는가. 강의에 들어갔는데 '휴강'이라고 써있어서 이 짜투리 시간이 마치 인생에 있어서 덤으로 주어진 캐러멜 같다고, '핀볼머신'을 보면서 왠지 멸종해가는 공룡같은 슬픔이 떠다닌다고 혼자서 감상에 젖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저 멍이나 때리면서 현상이 눈표피에서 뇌쪽으로 혹은 가슴으로 더 이상 진입하지 못하고 증발해버리는 거다. 그래서 이 에세이를 읽으며서 감정 회로사이에 끼인 고정관념의 콜레스테롤이 녹는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삶의 유쾌함 지수가 올라가는 느낌과 소소함으로 읽혀지는 소중함같은 것들을 뒤늦게 알게되는 기쁨...그런 것들이 에세이 전반에 구름 처럼 떠있다. 


'모든 면도기에도 철학이 있다'고 했으니 어쩌면 계속해서 무라카미의 에세이를 읽다가 보면 그 느낌들이 내몸에 맞는 옷처럼 편안하고 당연하게 느껴질 날도 있을거라고 생각한다. 그나저나 본인 말처럼 '자기를 둘러싼 호의와 악의의 총량을 양방향으로 , 그것도 비약적으로 확대된지 꽤 되셔서 (유명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 당시 에세이를 쓸 때처럼 자연스럽게 오가면서 편안히 뭔가를 하실 수 있을지 의문이다. 마라톤이라고 뛰려고 참가하면 갑자기 옆에서 '오..하루키씨 아니세요. 책 잘 봤구요. 사진보다 낫네요 라고 할 수도 있다. 이젠 그가 사진 찍는 걸 별로로 생각한다고 해도 이미 많은 스틸들이 퍼져나간지 꽤 됐다. 오히려 모르는 사람이 있는게 더 이상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지금의 하루키씨는 에세이에 뭘 쓰려고 해도 이젠 정말 귀찮아졌을수도 있다. 그냥 상상해봤다.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2-07-24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작가가 아닌 생활인 하루키, 젊은 하루키를 만난다 무라카미 하루...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
Review BOOK/에세이2013. 8. 13. 12:43


이렇게 된 이상 하루키의 에세이 연작들에 대해서 다 이야기해 볼 작정이다. 지금까지 나온 에세이들을 꽤 읽었으니까 몇 권 안남았다. 아마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양장본 에세이 시리즈 2권만 빼놓고는 다 읽었나보다. 비채가 시리즈로 낸 하루키 에세이는 <저녁무럽에 면도하기>,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이렇게 3권이다. 무라카미 라디오 연작으로 에세이 중, 가장 하루키스럽고 단백하다고 정평이 나있는 에세이들이기도 하다. (휘어지는 표지는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지만...)..굳이 소개하지 않았어도 하루키 매니아들은 손수 다 찾아 읽었을 것이고 나같이 하루키의 엉뚱하면서도 세련된 문장체가 좋아서 (마치 뇌의 안쓰던 부분을 쓰는 듯한 느낌) 무턱대고 읽었던 독자들로 꽤 있었을 것이다. 


최근 하루키의 에세이들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느낀 점이 있는데 그것은 이 아저씨가 '글은 정말 단백하고 깔끔하게 쓰신다' 였다. 부연과 전제가 질질 끌려서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장황함도 없고 지적이면서 동시에 허영기가 짙게 배인 '잘난척' 단어 나열도 좀 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이 분이 재즈 감상기를 쓰시게 되면 약간 어려운 말들이 등장하기는 한다.). 이렇게 절제와 간단명료를 문장에서 실현하시는 분들도 생각보다 만나기어려운 시절이다. 게다가 생각과 판단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은 대다수의 작가들이 가지지 못한 하루키 특유의 정체서이기도 하다. 많은 에세이들에는 지은이의 신념과 가치관들이 알게모르게 스며들어있기때문에 은근슬쩍 '주장'과 '단정', 그리고 '자기생각에 Sync를 맞춰주길 기대하거나 동의해주길 원한다. 그런 내용이 반복되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고서는 읽는 것자체가 부담스럽고 영 껄끄러워지는데 그런 상태에서는 읽기는 거의 '폭압적' 납득이 되거나 입에 맞지않는 음식을 꾸역꾸역 입에 넣는 것보다 더 괴로운 법이다.  


'에세이든 소설이든 문장을 쓸때 친절심은 중요하다. 상대가 읽기 쉬우면서도 서로 이해하기 쉽게 써야한다. 그런데 시도해보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P23)


하루키표 에세이에는 이런 자기 생각에의 강요가 별로 없다. (약간의 툴툴거림이나 시니컬한 요소들이 있긴 있다.) 이 모든 산물은  레이먼드 카버나 트루먼 커포티, 그리고 존 치버, 업다이크로부터 왔을 가능성 크지만, 사실 카버스럽다는 것도 그렇고, 커포티답다는 것도 쉽게 와닿는 그런 부분은 아니라서 딱히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도 뭣하다.  책을 읽었어도 애매하고 손에 잡힐듯 잡히지 않는 무형의 아이덴티티와 같은 느낌 같은 것일 뿐이다. 읽다가보면 어 이건 카포티와 비슷하고 저건 카버하고 유사한 느낌인데 라고 되뇌이게 된다고나 할까. 


하루키의 글에는 레이먼드 카버의 문장 단위의 생략에서 드러나는 은밀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암시들, 그리고 트루먼 커포티 특유의 오밀조밀한 디테일함, 이 두사람을 교묘히 이어서 균형감각을 가지고 주제를 적절히 녹이는 존 치버의 장점들이 복합적으로 녹아있다. 결국 하루키는 스스로가 '친절심'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스스로가 추구하는 문장에 대한 완성도에 대해선 자기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작가들의 재능을 대신 표출해주고 있다. (본인은 아니라고 우기지만 어쨋든 그가 글을 편하게 쓴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다보니 선대작가들의  영향력을 빼고서라면 그의 상상력이 어떨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 수많은 작가들을 오마쥬해서 스타일을 짜깁기했다고해도 하루키는 하루키인 것이니까..그의 발군 묘사실력은 기묘한 상상력, 그리고 세련된 그의 삶의 스타일에 기반한 것이 아닐까하는 것이다. 


 '섹스한 다음날 아침, 침대에는 아직 여자친구가 있고 남자가 티셔츠와 헐렁한 사각팬티 차림으로 주방에 서서 물을 끓여 커피를 준비한다. 그리고 시금치 오물렛을 준비하는 것이다. 가스불에 버터를 녹이고 오물렛을 만들고 여자친구는 스트라이프 면셔츠 바람으로 , 나른한 듯 침대에서 나오고...슈베르트의 아르페 지오네 소나타가 흘러나온다


시금치 오믈렛이니 스트라이프 셔츠니 아르페 지오네 소나타네 하는 것들이 일상에서 등장할 리가 없겠지만 하루키의 글에서는 이런 로맨스 물씬 풍기는 장면들이 영화처럼 자주 등장한다. 이유가 뭘까.  언젠가 평론가의 글에서 이런 대목을 읽었던 걸 기억한다. 하루키의 에세이나 소설에는 현대 자본주의 문화의 전형적인 스타일이 스며들어있다고....따라서 현대인들은 하루키의 글을 보면서 '그러한(?)생활을 은근히 동경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어있다고....나도 역시 마노아 레터스와 쿠라토마노, 쓴맛이 없는 마우이 어니언을 곁들이고 롤빵에 차가운 맥주면 더 이상 바랄게 없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가 이런 것일까. 하루키 아저씨처럼...뭘해도 참 분위기 있게 사시는 이 아저씨의 에세이는 그래서 동경할만 한 걸까. 나도 그렇게 살아볼 순 없는 걸까라고 생각했드랬다.  토니베넷의 <샌프란시스코에 두고온 내마음>을 들으면서 랄프샤론의 피아노 인트로가 연상되고 재즈클럽은 뉴욕의 '빌리지 뱅가드'가 최고라는 기억을 되살려 한번 즘 가볼 수 는 없을까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책장을 넘기다가 아주 공감할만한 에피소드를 하나 만났는데..'주유소 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하루키가 차를 몰고가다가 기름이 떨어져서 주유소까지 통을 들고가 기름을 담아와서 어려움을 벗어났다라는 단순한 이야기였는데 아마도 그때 하루키가 '혼자여서 다행이었다'라고 말한 대목 때문이었을것이다. 그 자리에 여친이 있었다면 '진짜 멍청하다니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이 사람하고 사귀는건 잘못된 선택일지도 몰라' 라고 말하게 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대목말이다. 나는 이대목에서 공감백배였다. 나도 역시 혼자다니는 이유중 하나였으니까... 여친이나 애인이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건 끔찍하니까..이 외에도 고등학생의 '헌욕수첩' 같은 황당한 에피소드도 좋아한다. 슬그머니 한마디 해줄 뿐이다. 이런 변태같으니라고...^^


'신주쿠역에서 '지금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라는 음성이 녹음되어있어서 원치 않는 전화를 적절하게 커팅하고 싶다고 했을때도 나는 끊임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데 아저씨 이런 기능은 진짜로 특허가 나와 있다는거 아세요? ^^) 소띠 산양좌 A형이라고 고백 할 때..어라 나도 소띠고 A형인데라며 웃었다. 이련 묘한 일치감이라니 하루키 아저씨도 기질적으로 나와 진배 없을거라는 대착각이 근거를 가지는 순간이었다. 다만 하루키가 언급했던 헤밍웨이의 진정한 남자되기 4가지는 동감하기 어렵다. 나무를 심고, 투우를 하고 책을 쓰고 아들을 낳는다라는 것들...이건 뭐 해밍웨이의 몰린 정서나 가치관 때문이지 남자되기와는 별 상관이 없었으니까..그런데도 역시 하루키는 이 부분에 대해 별말 없다. 다만 책을 쓴다는 점에 있어서는 자신도 남자라는 우쭐댐을 슬쩍 흘리고 싶어했으리라..


 '우리는 조류를 거스리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 가면서도 앞으로 계속 전진하는 것이다' 이 것은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구절이었고 ' 마지막 문을 닫아라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아라. 그저 바람을 생각해라'는 트루먼 커포티의 단편소설' 마지막 문을 닫아라'에 등장하는 말이었다. 그가 결국 삶속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있는 그대로를 두고 무덤덤하고도 쿨하게 저벅저벅 가는 것. 남들이 보고 들었던 수많은 고정관념들속에서 아마 '시스템에 붕괴되어가지 않도록 버티면서도 그 의식들이 거대토끼처럼 되지 않기였나보다. 그래서 독자들이 하루키 아저씨도 이젠 잔소리쟁이가 되버리셨어라고 되지 않기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언젠가 그가 자신이 글을 쓰는 목적에서 밝힌 바 있기도 하다.) 


읽으면서 기대했을 지도 모른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만큼이나 희귀하고 엉뚱하지만 생활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서 하루키 아저씨가 조근조근 계속 이야기해주기를...그렇게만 되면 점점 더 닮아갈지 어떨지 확신은 못해도 이 에세이들이 내 삶에서 벌어질수도 있다는 동질감은 유지되지 않을까 생각했나보다. 가끔은 나도 덤덤히 무던하고 쿨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치열하고 북적거리고 머리속에 범람하는 수많은 스트레스의 분량들은 내가 찌질하고 구차하게 살아서 생긴 침전물이 아닐까 의심해보게 된다. 좀더 쿨해지고 싶을 뿐이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비채 | 2013-05-04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오하시 아유미의 일러스트와 함께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오리지널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
Review BOOK/에세이2013. 8. 4. 19:00


빔벤더스<브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을 다시 보게 된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라이쿠더의 이야기는 추억속으로 잊혀진지 오래였을텐데하면서도 누구말처럼 '유락한 잠의 늪'처럼 빨려들고 몇개의 꿈을 거쳐서 특유의 멜로디에 절여져있었던게 아닌가싶을 정도로 옛기억이 되살아나버렸다. 당연히 이 영화를 다시보게 된 이유는 이 책때문이다. '몸전체로 영화를 이야기하게 되었다며 슬며시 언급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번째 무라카미라디오' '저녁무렵에 면도하기'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브에나비스타 소셜클럽' 에피소드가 잊혀진 꿈의 기억조각을 이어주었다면 다른 이야기들도 오래전 서점 한귀퉁이에서 감질나게 읽어대면서 분량 적음에 아쉬워했던 그 에피소드들이었다. 어투는 여전했고 에피소드들도 그 자리에 조용히 숨쉬면서 오랜 세월동안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나보다. 


사실 순서로 보자면 저녁무렵에 면도하기가 1탄이고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 순이다. 그러니까 에세이들 연달아 읽을 필요는 없어도 무라카미 라디오시절의 시간적 흐름에는 미묘한 에세이들의 질감 변화에 대한 추이를 살펴보려면 순서대로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쨋든 면밀히 읽으면 그런 변동이 중요한 저자의 심경변화나 가치관의 변화에 대한 힌트가 될 수 있다싶어 꼼꼼하게 읽었다. 의외로 하루키는 감정의 선을 폭군처럼 넘나들지도 파격도 저지르지 않는다고 느껴진다. 에세이에는 일종의 룰이 있는 것이 아닐까. (일전에도 에세이를 쓸때 몇가지 자기만의 규칙이 있다고는 했다.) 어쨋든 순서상으로는 얼추 맞게 읽으면서 '여전하시군 무라카미 하루키는...' 라고 혼자서 중얼거렸나보다. 


무라카미 라디오를 굉장히 잘쓴 에세이의 교본이라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하고 있는 편인데 그것은 그가 유명작가여서라기 보다는 일상사를 화려한 과장이나 지나친 생략없이 담담히 줄줄 써내려가는 대범함이 좋아서였다. 어떤 가식도 없고 변명도 없고 자기학대적이지도 않다. 하물며 트위터나 페북에서 늘상 하는 은근슬쩍 신념과 가치관 강습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아님말고'식의 고집이 있긴해도 오버페이스하지 않고 선을 유지하면서 긴거리를 조근조근 달리는 마라토너같다고나 할까. 소설은 안그런데 말이다. 소설과 다른 에세이의 하루키는 '슈퍼맨'같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왜 있잖은가 평범한 사람들은 도대체 생각할거리조차 되지 않는 것들도 슈퍼맨 눈 광선처럼 그의 눈을 관통하면 조용한 일상에서 엉뚱하고도 기발한 이야기들로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버리는 그런 느낌 때문이다. 1960년 '브래지어 소각사건'을 보다가 하루키는 변태라고 읇조렸던 친구가 있었지만 리스토란테에서 테이블 한가운데 페로몬을 머금은 안개가 자욱히 떠있는 광경을 묘사하다가 쩝쩝거리는 소리때문에 산통다 깨버린 이야기를 두고는 정말 별거아닌 이야기를 미소짓게 만들만큼 잘쓴다고 동의했던 적도 있으니까 그는 천상 이야기꾼인 것이다. 


그가 썼던 표현 중 장어를 먹으면서 '높은 칼로리에 대한 자책감'이야기하고 '오일드 사딘'(올리브오일에 담겨있는 정어리 통조림)통조림같은 깡통비행기를 타고가다가 프로펠러가 멈춰버리면 '자신이 투명해지다가 끝내 육체를 잃고 오감만 남아 잔업처리하듯 세상을 마지막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고 했을때, 과연 이런 느낌의 모호한 느낌을 이렇게 묘사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거라고 감탄했던 적이 있었다. 아무튼 에세이는 저자의 삶을 거울처럼 반영한다고 볼때, 에피소드와 이야기들에 그의 정서적 리듬이 그의 생활적 패턴과 모종의 연결을 도모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한다. 어떤 식으로든 일상사을 배제한 에세이는 있을수가 없으니까. 게다가 그는 솔직하지 않은가. 나서기는 싫어하지만 속내를 글로 쓰는 것만큼은 과감하고 직설적이면도 있다. 


하루키도 갑자기 젊은 시절로 돌아가는것을 원치 않으며 ('그런 무서운 짓을 두번 다시 하고 싶지 않다'라고 한바 있다.) 음악에 깊이 관여된 묘한 관점으로 '후렴구가 없는 인간'을 '함께 할 수 없어 묘한...말한마디한마디는 얼핏 옳아보이지만 전체적인 전개에 깊이가 없는 인간'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또 파스타를 이탈리아에서 먹는 것과 국내에서 먹는 것의 차이가 생기는 이유를 '음식이란 공기포함'이란 고개 끄덕일만한 이야기도, 그리고 '현실에서 간과할 수 없는 주머니속에서 3주전 깜박하고 빨지않은 테니스양말을 꺼낸 것처럼..' 이라며 당혹스럽고도 아이러니한 삶의 일면을 단 몇줄로 요약해주기도했다. 아마 그런 그의 시선과 감성이 좋았을 거다. 독자들은 아무래도 안일한 스토리라인에 매몰된 채 깊이라곤 별로 없는 '해설서'같은 것들에 너무 많이 둘러쌓여 있다보면 그리운 감성같은게 있기 마련이다. 


하루키의 이 에세이는 유독 친 생활적인 에피소드를 넘어서 감성적인 단락들이 존재하는데 이걸 읽고 있으면 그 광경이 그대로 옆에 다가와 있는 느낌이다. 게다가 그는 보이지 않는 감수성의 편린들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책속에 박어넣는다. 아마 이런 감수성 미장센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꼼꼼함을 자랑하시고 계시다. "카우아이의 섬읜 노스쇼어는 노을이 너무나 멋있고 아름다웠다. 선명한 오렌지색 덩어리가 산등성이 너머로 지금 막 숨으려고 하고 바다도 구름도 같은 색으로 물들어있다. 석양을 배경으로 정처없이 차를 몰고 브라이언 윌슨의 '캐롤라인노'가 흐른다. " 이 대목을 읽으면서 잠시 광경을 떠올려버렸다. 그리고 그가 묘사한 '따듯한 나이프로 버터를 자를때처럼 부드러웠다는' 수동변속기의 감촉이 그리워 어느날 친구의 오랜차에 앉아서 둑둑거려보기도 했다. 물론 다 쓸데없는 짓이긴하지만 역시 그의 말처럼 글쓰기에는 '감정의 기억'이 중요한 것 아닌가. 그의 감정기억이 유달랐다는 건 인정할수 밖에 없는 셈이다. 


이런 책들은 문학의 탈을 패스트푸드라고 레플러 여사가 힐난했던 모양이다. 하루키의 저작들말이다. 그런 평가에 초연한듯 싶다가다도 에전 읽었던 하루키 전기를 관통하는 그의 시니컬한 뒷끝을 알고 있는터라 어떻게든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만의 길을 갈것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의 영향력이 근자에 이르러 아주 원숙해진 느낌인데 서점에 갔더니 '스콧피츠제럴드포크너, 카포티, 챈들러, 레이먼드 커버' 한쪽 코너에서 '하루키가 좋아하는저작들'이란 타이을을 건채 진열되어 있었드랬다. 그랬던 거다. 그동안 굉장히 연기잘하기로 유명했지만 대중들이 미처 원숙함을 알기도전에 포기했던 배우를 '대세배우'가 몇번 언급해서 다시 세상에 나오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정서에 동기화되고 싶은 독자들이 많다는 뜻이겠지 싶다. 




cf. 

그나저나 하루키는 왜 '사랑하기 좋은 나이'를 16~21 라고 말했을까. 생각해보고 있는데 답이 별로 없다. 그저 상대적으로 고민이 적고 상상력이 풍부한 나이여서 그런가. 글라스에 얼음, 보드카와 토마토쥬스를 섞고 리앤페인 우스터소스 한방울과 레모을 가볍게 짠 블러드 메리를 들고 있는 '포켓 트랜지스터 글래머 걸'은 죄다 그 연령대외에는 없을까? 





저녁 무렵에 면도하기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비채 | 2013-05-20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무라카미 하루키식 해피 라이프를 엿보다!《채소의 기분, 바다표범...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
Review BOOK/소설2013. 7. 9. 18:07






서른여섯 살, 다자키 쓰쿠루는 철도 회사에서 역을 설계한다. 역을 만든다는 행위는 그에게 세상과의 연결을 뜻한다. 과거의 상실을 덮어 두고 묵묵히 살아가는 그에게 어느 날, 처음으로 사랑이 찾아온다. 그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은 두 살 연상의 여행사 직원 기모토 사라는 고등학교 시절, 다자키 쓰쿠루가 속한 완벽한 공동체(여기서 공통체란 아카,아오,시로,구로,그리고 쓰쿠루로 이루어진 친구들모임을 의미한다.)와 그 결말(어느날 갑자기 친구4명이 쓰쿠루를 외면해버림)에 대해 듣고 불현듯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한 순례의 여정을 제안하는데... 



'대학교 2학년 7월부터 다음해 1월에 걸쳐 다자키 쓰쿠루는 거의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때라면 삶과 죽음을 가르는 문지방을 넘어서는 일 따위 날달걀 하나 들이키는 것보다 간단했는데...'



'1Q84'가 광풍처럼 불어닥친지 얼마되지 않은 듯 싶은데, 어느덧 '공백기를 깨고 질풍처럼 등장한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타이틀이 다시 이곳저곳에 나부낀다. 이 센세이셔널한 인기야말로 굳이 나서서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지 않아도 될 만한 거장들이 가지는 퀄리티 이팩트겠지만 어찌됐든 하루키가 한국에서만큼은 인기작가라는 사실은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여름휴가때 읽어야 할 추천도서'항목에 이 신작이 자리해주시고 계셨다. 과히 이번 여름은 '진격의 소설계'라고 불러야 할 판이다. 


하루키의 이 신작은 1Q84 이후 느닷없긴 했다. 나름대로는 과거작들을 계속해서 re-reading하고 있는터라 개인적인 공백을 느낄 사이가 별로 없었다. (엊그제 1Q84가 나온 듯 싶었는데..) 반가운 쪽이 더 크다는 점에서는 나도 팬의 몫을 다하고 있는 느낌은 든다. 마음속은 늘 하루키를 읽고 있었다고 아부라도 할 만큼.....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도 그렇고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빵가게 재습격, 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 해변의 카프카 같은걸 계속해서 읽는 건 싫지 않은 경험이다. 읽은걸 또 읽었다니 대단한 광팬이로군 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그것 보다는 그저 읽었던 시절의 기억이 가물가물해지는게 싫어서였다고 보는게 더 정확하다.  다시 읽어보고 그때 못느꼈던 새로운 뭔가를 발견할 수 도 있지 않을까하는....그 와중에 에세이들도 꽤 많이 출간되어서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재출간이다.) 무라카미 라디오라든지 다수의 잡지들에 연재되었던 것을 연작으로 묶었던 책들도 꽤 많이 읽게되었다. 좋은 시절이다. 구하기 어려웠던 에세이들도 죄다 모아서 출간해주다니... 그러다가 덜컥 <색체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이하 색체없는쓰쿠루)가 나와줬다.  


상세보기


결론적으로 봐서 초반부를 읽다가 아...이 분께서 또 이원화된 세계를 오가면서 다소 몽환적이면서도 미스테리하게 그리고 흥미진진하게 엮어보실려나보다라고 생각했드랬다. 쓰쿠루가 친했던 친구들로부터 이유도 모를 배척을 당하게 되고 홀로 동떨어지면서 미스테리하게 전개되고 이윽고 친구들이 밝힌 쓰쿠루를 친구들의 모임에서 몰아내게 된 원인을 이야기할 때, 그 기대치가 절정을 치고 올라가고 있었다.  자기도 모르는 '자신의 등장'으로 인해서 유즈가 강간을 당하게 되고 이 세계에는 자신과 다른 똑같은 자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미심장한 쓰쿠루의 의구심과 맞물리면서 점점 '두개의 달'이라도 떠있는 이질적 공간으로 향하는 문이라도 등장하지 싶었는데 그만 모든걸 접고 쓰쿠루가 다 혼자 망상하는 걸로 매조지하셨다. 또는 이렇게 이야기해야겠다. 현실적인 성찰로 돌아서버리셨다고... 아무래도 이 책이 단행본으로 끝나게 된 원인이 이거 때문이었을까. 상중하로 출간되었다면 분명히 고속도로에 등장하는 계단이든, 섹스를 통한 이공간의 접속이라던지하는 특유의 기발한 상상력이 나왔을 지도 모르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하루키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와 '해변의 카프카',  그리고 '1Q84'로 오면서 더 적확하고 명료한 리얼리티를 추구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원더랜드쪽이 의식을 또 하나의 세계로..그리고 해변의 카프카와 1Q84를 구분하기 어려운 두 사건의 교묘한 접합점에 판타지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를 꾸려가는게 무라카미 스타일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신작도 그럴 것이라는 추측을 피할 수 없는 것일테지만...그래서 쓰쿠루가 원인도 모르고 고등학교 시절 친했던 친구들 무리에서 떨어져나오고 나중에 여자친구 사라에 의해서 다시 과거를 돌아가보기로 했다는 지점에서부터 판타지는 다시 시작될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히려 쓰쿠루이야기는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처럼 전개되었다. 주인공의 무덤덤한 허무주의에 가까운 태도하며 굳이 관계회복을 위해서 애쓰려하지 않는 모습도 그렇고... 그런데도 막판에 가면 쓰쿠루는 굉장히 긍정적이고 의미심장한 표현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를테면 아래와 같은 대목들...


"그렇지만 그것은 올바른 가슴아픔이며 올바른 숨막힘이었다. 그것은 그가 확실히 느끼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앞으로 그 차가운 중심부를 스스로의 힘으로 조금씩 녹여내야 한다.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동토를 녹이기 위해서 쓰쿠루는 다른 누군가의 온기를 필요로 했다. 자신의 체온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일단 도쿄로 돌아가자. 그것이 첫걸음이다 " (p388) 


"인생은 복잡한 악보같다고 쓰쿠루는 생각했다. 16분 음표와 32분음표, 기묘한 수많은 기호, 의미를 알수 없는 표시들로 가득차 있다. 그것을 올바르게 해독하는 것도 참으로 어려운 일이고, 설령 올바르게 해독했다하더라도, 또 올바른 음으로 바꿔냈다하더라도 거기에 내포된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평가해주리란 보장이 없다. 사람의 행위는 왜 그렇게 복잡하게 엉켜야만 하는 걸까 " (p404) 


"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수 있는 자기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 " (p437) 


그리하여 쓰쿠루는 오랜시절 겪었던 방황으로부터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려고 애쓴다. 물론 중간에 등장해버린 하이다와 미도리카와 에피소드때문에 굉장히 혼란스럽긴 했다. (이 즈음에서 기묘한 판타지로의 장치라고 여기지 않았다면 하루키 팬이라고 할 수 없지 않나싶다.) 그건 어쩌면 그가 방황하고 충격적으로 버림받았던 과거로부터 연유한 죽음성찰이었나보다. 그래서 스스로 표현했던 것처럼 '근본적인 문제를 끌어안고 있는 지도 모를...정신의 자연스런 흐름이 장애물을 만나 어딘가에서 멈추고 그때문에 자기라는 인간이 뒤틀리게 되었다고' 생각한 그 지점에서 돌파구를 찾았던 게 아닐까.  아카, 아오, 시로, 구로 사이에서 벌어졌던 묘한 절제와 균형의 관계들...결국 이런 이상적인 관계가 언제인가는 깨질것이라는 두려움은 쓰쿠루를 희생양삼아서 터져버렸지만 쓰쿠루는 원망도 억울함도 없이 대신 '죽음'을 생각하며 지내왔다. 그리고 모든 걸 받아들이고 다시 자신을 버렸던 친구 4명을 만나고자 도쿄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것들이 전부 다 사라져버릴 그런 '마음'들이 아니었을거라고' 읎조리며 서서히 과거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다. 아마도 그래서 하루키의 이 작품이 '노르웨이의 숲'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적어도 여기엔 현실이 붕괴되어서 의식의 세상으로 불사의 세상으로 가버리는 판타지도...두개의 달이 교차하는 이세계의 조직으로부터 쫓기는 스팩타클도 없었지만 '냉정하면서도 언제나 쿨하게 자신의 페이스를 지키는' 나의 모습이 녹아져있었으니까, 쓰쿠루는 나였고 나는 쓰쿠루같은 측면이 있었으니까..동질감이란 이런 것 아닐까.


과거의 상처로부터 태연하려고 애쓰고 관계지향적이고 밀접한 소중한 무엇인가로부터의 박탈을 의식하지 않으려고 하는 본능적인 보호감을 감춘채 사는 현대인들은 많다. 다자키 쓰쿠루적이 아니었다고 항변할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어느순간에는 정말 쓰쿠루적이었던 시절이 있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순례의 해 소곡집의 제 1년 스위스에 들어있는 프란츠 리스트의 <르 말뒤페이>에 '전원풍경이 사람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영문모를 슬픔'이 일상이던 시절. 슬픔은 나를 지배하고 있었고 잠시동안의 암울함과 끊임없는 어두운 터널을 터벅터벅 걷고 있는 자신을 상상한다.  이 정도되면 나 조차도 다자키 쓰쿠루였던 적이 없었다고 감히 말을 못할 지경이다. 책을 다 읽고 느낀건 하루키스럽지 않아서 오는 허망함보다 나도 쓰쿠루처럼 그랬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라는 기시감이 더 강했드랬다. 묘한 느낌이지 않나..과거에 두고온 들추고 싶지 않은 기억들. 추억들..


그나저나 기모토 사라로부터의 전화는 어떤 내용이었을까. 쓰쿠루는 사라로부터 수요일에 원하던 대답을 들었을까.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3-07-0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지금, 당신은 어느 역에 서 있습니까?모든 것이 완벽했던 스무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
Vanilla Essay2013. 7. 9. 15:05

어차피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리뷰를 하다가 나올 소리긴 한데 유독 하루키 작품들을 읽으면서 듣는 음악엔 재즈가 제격이란 생각이다. 물론 하루키가 재즈 전문가이기도 하고 작품 곳곳에다가 음악이야기를 써놓아서 연상되지 않는게 더 이상할지도 모른다. 몇 번은 일부러라도 찾아 듣기도 해봤지만 항상 기대만큼 훌륭했던 것도 아닌터라 그저 글은 글이고 작가의 감성은 독자의 완벽한 전유물로 바뀔수 없다는 것만 깨닫긴 했다. 그래도 하루키 작품들에게서 음악을 빼놓을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히나 그가 쓴 '무라키미 라디오'시절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재즈음악을 듣는건 굉장히 좋은 앙상블이다. 얼마전에는 무라카미 라디오 제3탄격인 '샐러드를 좋아하는 사자'를 읽으면서 야신타의 Autumn leaves도 을 들었다. 'And The Angels sing'을 듣고 연달아 Midnight sun, 그리고 'Moon River' , 'Here's to life'까지 주욱 달렸다. 그 사이에 그 얇디얇은 에세이가 끝나버려서 다행이었다. 


어떻게 보면 하루키는 자신의 작품들속에 몇몇의 특유감성들을 음악들로 대체하는 듯 싶다. 이럴땐 이 음악을 깔아주면 아마 독자가 이해해줄거야 라고 생각할른지 안할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에 그대로 따라하는 호기심많은 독자들로서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음악이란 그렇게 의도를 알고 분위기를 알고 소개받게 되면 그 때에는 또 다른 감성을 느낄 수 있을테니까. 그러고 보니 최근 글렌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를 들으면서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를 읽은 기억이 난다. 그 책에는 굴드의 음반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지만 어째 나쁘지 않았던 듯 싶다. 그렇게 보자면 하루키의 작품들은 민숭맨숭 읽어대는 것보단 음악을 잔잔히 깔아놓고 읽는게 정말 좋은 것 같다. 시끄러운 왁자지껄 소음속에서 그의 작품을 읽게 되면 그 특유의 담담하고 정갈한듯한 쉬운 문체가 지루하고도 무미건조하게 느껴져버린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음악을 켜두고 읽는 게 좋다. 재즈면 더더욱 좋고...




Posted by kewell


최근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간이 등장하면서 '하루키의 작품을 읽는것인가. 하루키를 읽는 것인가' 라는 칼럼을 본 적이 있다. 요지는 하루키 알고 보면 별로.. 문학적인 가치도 생각하는 것 이하로 변변치 않고 문학계에서는 수준낮게 여긴다라는 그런 이야기였드랬다. 컬럼 내용을 들여다보다보니 그렇기도 하겠다 싶었다. 어떻게 보자면 대중들은 하루키라는 브랜드를 선호하고 선택하는 측면이 없다고는 못할테니까. 


문학계에서 진득히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글을 써왔다는 많은 작가들의 입장에서는 마치 현대 스타일리즘에 묘한 단어적 색체감과 세련된 문화생활의 편린으로 포장한 하루키로부터 반감을 가지는게 어쩌면 인지상정인지도 모른다. 심혈을 기울인 문장들과 이야기의 구조같은 이해하기 어려운 영역으로 독자들을 설득시킨다는 것도 마뜩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떡하겠는가 대중들은 각자의 기호와 성향에 따라 읽는 것도 제각기다. 결국 이 모든 건 작가들의 받아야 할 몫이다. 어떤 작가들은 자기만의 세계에서 고고한 글쓰기를 계속 할테고 어떤 이들은 3류 소설같은 판타지 읍조리며 대중들의 구미를 어떻게 하면 만족시킬까 고민할 것이다. 그게 선과 악의 문제라곤 생각치 않는다. 옳고 그름의 영역도 물론 아니다. 다만 대중성에 의한 유행에 항변하는 정통주의자로서는 고깝지 않다는 문학계를 보면 그냥 피식 웃음이 나온다. 


어쩌면 책도 일종의 패션같은 것인가라고 생각이 들어버린다. 올리브그린의 치노바지에 폴로에서 블레이저코트, 그리고 구찌넥타이라도 메고 그리고 갈색 구두라도 신고 보란듯이 늦은 아침에 걸어나가 고즈넉한 카페에서 브런치라도 먹어야만 스타일이 살아주시는 일종의 라이프패턴이 되버렸을 수도 있다. 책을 읽는다 것도 시선의식, 그리고 동종평가. 세간의 이미지를 대체하는 퓨전 악세사리처럼 공감대100% 스타일을 연출해줘야만 그럴듯하다는 소리인가. 


점점 읽으면 읽을수록 잠잠히 욕구를 침잠시킨다는건 쉽지 않다. 오히려 읽으면 읽을수록 공유와 공감요구가 스물스물 저녁나절 향긋한 음식냄새처럼 소리없이 의식을 지배한다. 근질근질하면서도 안절부절할 만큼..... 그런 확산이야말로 완벽한 '읽는 목적'에 부합하는 거다. 어떤 이에게는 이 모든게 자기의식의 과잉과도 같은 '자랑질'이 하고 싶어 미칠 것 같은데 현실이 따라주지 못해 속에 갈무리한채 끙끙대고 있다. 고고하고도 멋진 캐슬의 안쪽 어디 고풍스럽고 엔틱스러운 의자에 앉아서 문장들의 향기에 취해서 자기만족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 분들은 그렇게 살면 된다. 그게 뭐 어떻다고...


뭐 어찌되었든 최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나쁘지 않았다. 너무 허황되지도 않고 판타지스러울려나 싶다가도 현실적으로 매듭지워진게 약간 의외이긴 하지만...(양이 등장하지 않은 것만 해도 그게 어딘가..) 무라카미의 책들을 꽤나 읽었나보다. 하루키같은 걸 왜 읽어라고 친구들이 흰소리들을 해대지만...수긍이 가고 공감만 된다면 한편의 좋은 책으로는 족하다. 스콧피츠제럴드, 존 치버, 핀천, 챈들러..그리고 레이먼드 카버 같은 걸 굳이 읽으면서 수준있는 채 할수도 없는 노릇이고...(하루키책들을 읽으면서 이렇게 분기치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부득이 읽어야 할 순간이 되면 어떻게든 읽게 되겠지. 마음이 바쁜 와중에 한 권이라도 읽는게 어딘가. 나중에 리뷰라도 한자락 써봐야 겠다. 그나저나 날씨가 하루키를 읽기에 아주 그럴듯한 날씨다..^^

Posted by kewell
Review BOOK/에세이2013. 2. 13. 14:30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무라카미 하루키(Murakami, Haruki / 村上春樹)/ 문학동네.

 

 

 

" 커피는 어둠처럼 검고, 재즈 선율처럼 따뜻했다. 내가 그 조그만 세계를 음미할 때, 풍경은 나를 축복했다 "

 

 

 

또. 하루키의 에세이다. 그야말로 하루키 에세이가 아니면 읽지도 않는다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겠지만, 사실 하루키 에세이이외에 그럴듯한 에세이를 만나보지 못한 것도 이유라면 이유다. 게다가 한여름 갑작스레 길거리 한복판에서 만난 소나기마냥 느닷없고 충동적으로 에세이 연작시리즈를 모조리 사가지고 집으로 오지 않았던가. 지나고보면 이게 다 느닷없는 충동질에 대한 책임감과도 엮여있다고 볼 수 있다. 책장이 다 떨어지도록 읽어라라는 외침이 가슴한구석에서 계속 메아리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무라카미 에세이 시리즈는 사실 희귀하다고 말하긴 힘들다.  이미 오래전부터 여러 갈래로 서점에 앞다투어 등장했었지만 희한하게도 '문학동네'측에서 정식계약에 의해 제대로 된 삽화와 이력(?)을 타이틀로 세트로 구성해서 내놓았다는 점이 특이할 뿐이다. 이를테면 두둥!!, 리뉴얼판 신작시리즈 하루키 에세이 세트 등장이라고 해야할 판이다. 구성은 다음과 같다.

 

1.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2. 발랜타이데이의 무말랭이.
3. 세일러복을 입은 연필.
4.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5. 해뜨는 나라의 공장.


이 묵직한 5권세트(거북이 등짝이 새로생긴 것마냥 무겁게..)를 짋어지고 결국 난 공사판의 혈기왕성한 청년처럼 의기양양하게 옮겨놓았드랬다. 아무튼 후회는 별로 하지 않는다. 잘 샀고, 또 잘 읽고 있으니까. 우선 1편격에 해당하는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는 5권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에세이집이다.  이미 읽었던 내용도 간간히 있기는 해서 낯설지도 않고 안지 미즈마루의 삽화같은건 일종의 쉼터역할을 해서 에세이로서의 여백도 나름 괜찮다고 생각되기는 한다. 하지만 지면에는 활자가 그득하게 좋아서 여분의 페이지에 그림들로 상당수 채워진건 살짝 불만이다. 그럴려면 그냥 얇게 만들어줘도 좋겠는데,...뭐 나쁘지는 않다.


하루키 표현대로 젊은시절 '존 업다이크'의 책을 구름낀 희뿌연 봄날의 조용한 저녁나절에 '일주일전에 산 바게트빵'같은 철제침대에 누워 읽어야만 했다면 역시 하루키 에세이도 비슷하게 읽어야 하지 않을까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존업다이크를 읽기위한, 존 치버를 읽기위한 장소같은게 분명히 존재할 것만 같다고 하지 않았나. 하루키의 에세이를 읽을만한 적당한 장소가 분명 이 세계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에세이는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다.  여전히 정서적 올컬러로 형형색색 퀼트모직처럼 엮여있다.  '임스의 라운지체어', 'AR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텔레만' '로스맥도널드의 죽음, 스니커즈 이야기, 스윙재즈들. 테리힐 밴드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캡캘러웨이, 초콜릿 댄디스, 퀴퀴한 냄새가 나는 따뜻하고 흥분된 가게의 공기들',그리고 질레트의 '트로피컬 코코넛' 쉐이빙 크림에 관한 소소한 이야기, NICE BOX 1384에 담긴 위험한 발언(?)까지 포함하면 무라카미는 역시 무라카미답다.

 

 

한때, 하루키의 글을 읽으면서 그가 표현했다시피 '그것들은 '그것들'일 뿐이다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같은 패턴과 같은 이미지, 그리고 버무리는 특유의 스타일리쉬한 타이포라이팅. 마치 롤빵에 발라진 버터와 찌그러진 캔맥주, 챙이있는 야구모자와 빨간 뿔테안경을 쓰고, 올이 성긴 다갈색 원피스에 하얀 테니스화를 신은 소녀가 코끼리 공장에 나타나서 수없이 많은 계단을 통해 달이 두개인 '그 세계'로 갈것만 같은 느낌이 에세이에서도 간당간당 느껴질 정도면 말 다한거 아닌가. 반복적이란 건 그래서 위험하다. 지루해지기 십상이니까.  하지만 범상치 않아서 좋았고 판타지적이어서 질리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에세이에서도 그런 자취는 여전하다. 다만 그가 에세이에서 언급했다시피 '두다리로 직접 마을과 하나하나돌다보면, 하나하나의 장소에 사람들의 정념이 미세한 비늘처럼 들러부터있는 것을 알수 있다는 것처럼, 그의 에세이에도 그의 비늘이 지면에 돋아나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슬그머니 지면에서 한장한장 넘길때 정서적으로 느껴지는 그 감촉들이 아마도 하루키 에세이이 진면목이리라.


오랜세월동안 하루키의 에세이가 내 인생의 여백에 차츰차츰 엔트로피의 증대처럼 쌓였다고 생각한다. (207p에 이 표현이 등장한다.^^) 마치 하루키가 살고있는 판타지의 소굴속을 살금살금 기어들어가 몰래 엿보는 이런 쾌감은 쉽게 얻을수 있는게 아니다. 이원화된 세계와 상실된 자아를 찾기위한 주인공의 몸부림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다라고 생각하고 에세이를 뒤적거렸던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결국 그속에서 의외의 편안함과 그리고 일상사에서 만나보기 힘든 하루키의 또 다른 일면을 본 것 같다. 그 정도면 소설못지 않은 감흥과 즐거움이 있는거라고..뭘 또 바라냐고 피식피식 웃곤 한다. 두번째 에세이도...3번째 에세이도 그렇겠지. 그리고 잔잔하고 쿨하고 덤덤하면서도 소리없이 피는 진달래처럼 봄날에 읽기에는 딱 좋은 에세이일거라 믿는다.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2-07-24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센티멘털리즘 가득한 문장과 컬러풀한 일러스트가 연주하는 하모니!...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
Review BOOK/에세이2013. 1. 8. 11:30

 

하루키의 에세이들 중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건 <무라카미 라디오>였다. 담백하고 간결하면서도 무미건조하지 않는데다가 다른 책들에서 보지 못한 그 만의 분위기가 베어있었으니까. 사실 그건 흉내내려고 해도 쉽게 되는 그런 부류의 재능들이 아니란 점이 안타깝지만, 읽는 것 만큼이야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영역이니까 열렬히 읽고는 있다.

 

아무튼 마치 에피타이저를 즐기듯 최근 합본으로 엮어주신 에세이 시리즈 5권도 거부감없이 주야장창 읽던 중, 그 사이에 그만 최신작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가 나와버렸다. (실제 발매된건 2012.6월 ㅠ.ㅠ )이름도 무라카미답게 (그는 제목이든 뭐든 실생활에서 전혀 쓰이지 않거나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 단어의 배치에 재능이 있어보인다.) 그야말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1Q84' 이후 지쳐버린 자신을 달래고자 '무라카미 라디오'의 2nd 타이틀로 카메오처럼 , 날카롭고 역습적으로 등장해주셨다.... 이 뜬금포는 그야말로 의외였다. '이봐이봐.. 에세이를 적당히 쓰라고..' 라고 말해주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무작위의 주제도 그렇고 그의 표현처럼 '비방'도 '잘난척'도 '시사적'이지도 않은 채,(책속에서 에세이를 쓰는 자신만의 기준으로 언급함)  자기가 하고싶은 이야기를 듣거나 말거나식으로 하염없이 써내려갔다. 아마도 이런 걸 두고 '내맘대로 쓰는 생활 에세이'라고 해야 겠지만 막 썼다고 보기엔 교묘하고 장치적인 구석들이 좀 있긴하다. 구마모토 굴과 차가운 샤블리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굴튀김이 먹고 싶어졌다라는 엉뚱함은 소소하나 유리집에 사는 사람은 함부러 돌을 던지지 말아야 한다 (Those who live in glass houses shouldn't throw stones')는 교훈적인 이야기를 할 때 살짝 진지해졌다가  '탈구축 시저샐러드'에 대한 엉뚱한 에피소드에서 릴랙스 한 후 , '꿈을 쫓지 않는 인생이란 채소와 같다'라고 말했던 <세상에서 가장빠른 인디언>앤서니 홉킨즈를 언급할 때, 묘하고도 다양한 정서적 컬러에 감탄을 느끼는 식이다. 어쨋든 좋다. 이 무라카미식 리듬감에는 현대사회의 세련된 문화적 시각, 독립되고도 일관된 가치관, 감수성 짙은 정서의 담백함같은게 있어왔다고 느껴왔으니까..역시 하루키 답다라고 생각했드랬다.


이 에세이를 읽다가 보니 하루키의 정신세계가 슬쩍 그려진다. 물론 독자가 이런 책 몇 권읽는다고 그 사람의 깊이있는 속내를 그대로 알수 있다는 망상은 금물이지만, 사물에 대한 관점과 현상에 대한 감흥들에서는 '취향'정도는 베어나오기 마련이고 간혹가다의 진지함속에서는 어떤 타이틀롤이 그의 가치관에 걸려있는지 얼핏 보일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쉬운 관점에서 본다면 내가 하루키 에세이에 대해서 좋아하는 점은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들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가볍고 담백하게 눅눅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듯한 문장들이다. 솔직히 말해서 '햄버거를 먹기위해서 1 달러만 주세요' 라고 말하는 거리의 부랑자가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했다고 해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1달러를 달라고 요구하는 사람은 처음이다'라고 감탄하는 하루키가 더 난 감탄스럽다. 사람들의 일상은 대개 별의미 없는 것 투성이다. 의미없는 것들 속에서 쏠쏠히 의미를 옹골차게 찾아낸다는 것도 쉬운일이 아니어서..때론 그의 머리속이 궁금하기도 하다. 예전 무라카미 라디오에서도 '브래지어'를 가지고 한참동안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써내려갔었는데 막판에 문득 이런생각이 들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지?' 라고..사실 의미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의 위트있는 관찰력과 감수성이 탐났을 뿐인 게지...


대체로 그의 문장들을 분해해보면 단어선택에 있어서 묘한 정서적 컬러가 숨겨있다는 걸 느끼곤 한다. 이를테면'샴고양이', '피노누아르', '밤바다', '실크시폰드레스', '호박색반달'이 합쳐진 복합이미지가 문장으로 완성되어서 독자들의 감정회로에 이입되고  독자들만의 상상력이 동원되어 이미지화되는게 아닐까라고 생각된다. 판타지스럽기도 하고 때론 미스테리하며 하루키 특유의 소설적 우화적 배경들에 대한 근거가 혹시 에세이에서 드러나는게 아닐까하고 잠시 몽상에 빠진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도 작가이다보니 그렇게 의도적이진 않았을 듯 싶고, 에세이에 대한 부담감을 토로하기도 하고 (도대체 뭘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다라고 언급함) '문학에서는 자연스러움 역시 사명감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의미심장한 언급을 하기도 한다. 가벼우나 변속기어처럼 상황에 따라 진지함을 오가는 그의 리드미컬한 질주에는 '일관성'이 있어왔다는 점은 좋다. 변하지 않는 그만이 가진 표현력정도...


삶의 RPM이 과열할 지경이면 잠시동안 정서의 마음가짐을 '중립'에 놓고 이런 에세이를 보기도한다. 큰 의미가 없는 '읽기'는 피하라고 친구가 옹골차게 말했었는데, 오히려 난 담론에 취한채 격렬한 자의식 자랑놀이 하는 그 친구가 더 의미없고 지루하긴 마찬가지 아닌가싶다.  책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는 서른을 넘었고, 대 부분 그 옛날의 지루한 멍청이 어른이 되었다. 자신이 있던 자리에서는 전혀 바보같지 않았다. All you need is love를 노래했고 낭랑하게 트렘펫이 울렸다' …… 그럴 듯하지 않은가. 아마도 다들 어릴 때 그토록 고리타분하다고 여겼던 '지루한 멍청이 어른'들이 되어가는건 아닐까싶기도 하고... 고집이 세지면 세질수록, 뭔가 깨달으면 깨달을수록..오히려 더 무시무시한 바벨탑이 둘러치고 그 안에서 볼 수 있는 하늘은 좁아지는 뭐 그런 독야청청의 외곬수. 이걸 다른 말로 '엄청나게 지루한 어른되기'라고 이름을 붙여버렸다. 옛날 읽었던 '무라카미 라디오'에서 느꼈던 그 덤덤함이 여전히 지금도 이어지고 있었고 아직도 그의 날서린 표현력은 줄지 않았다.  나도 신선한 로메인 상추에 크루통, 계란노른자를 올리고 파마산 치즈를 뿌린 다음 올리브유,, 다진마늘, 소금, 후추약간, 레몬 뿌려주고 우스터 소스와 와인 비네가를 곁드린 시저스 샐러드를 먹어야 겠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의 늦은 감흥은 시저스샐러드로 달래야 제격이다.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비채 | 2012-06-27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소소한 일상을 특별하게 만드는 하루키의 에세이!세계적인 작가 무...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