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nilla Essay2014. 3. 17. 11:52

야마다 에이미<솔 뮤직 러버스 온리>,<120% Cool>을 읽고 김연수<사월의 미, 칠월의 솔>을 읽었더니  핑크색 컬러 선글라스를 쓴 채, 오렌지색 방안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두 작가가 비슷한 색채감을 우려낼만한 유사문체의 소유자도,  정서상의 데자뷰도 없긴 하다. 야마다 에이미는 38.9도 언저리에서 숨소리를 거칠게 뿜어내고 김연수는 18.4도 부근의 쌀쌀함을 매개로 코트 깃을 올려세우는 느낌이니까. 그렇긴 해도 두 작품을 양손에 들고 교대로 읽어버리면 에이미의 '유화'같은 스토리의 쓸쓸함도 김연수의 '팔월의 '라'로 읽힐지 모른다. 다 같은 감기지만 증상도 다르고 앓는 수준도 다른 뭐 그런 것들 아니겠는가.


예전에도 이런 경우가 있었다. 특히 레이먼드 카버존 치버가 그랬다. 둘의 소설을 한데 섞어 읽었던 시절이 많아서 치버의 단편작을 카버의 단편작으로 오독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는데,  중독된 팬과 매니아들이 아니 그걸 어떻게 헷갈려 카버는 카버고 치버는 치버지 어떻게 둘을 혼동한단 말인가 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읽는 시기가 비슷하면 카버의 다양성이 치버의 정체성을 침범하는 경우도 종종 일어나기도 하고 치버의 스토리 플러그를  카버의 콘셉트에 꽂을 수도 있는 거다. 읽는 이의 대전제가 위력적이란 말이 괜히 생긴게 아니지싶다. 혹시라도 착각해서 치버의 책을 펼쳤는데도 내가 카버의 소설이라고 단정해버린다면...그건 그 순간부터 의심스러우나 카버의 다양성으로 읽혀질 가능성은 충분할테니..  


대체로 이런 유사성에 대한 방비로 주로 택하는 해결책은 완전히 다른 질감의 책을 교대로 읽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야마다 에이미의 <120% COOL>을 읽고 조셉 콘래드<어둠의 심연>을 읽는 식이다. 다시 돌아가 이언 매큐언<암스테르담>을 집어들었다면 다음은  로버트 어윈 하워드<시메리아 연대기 : 코난 더 바바리안>을 읽어 버리는 거다. 아무렵 말로가 콩고에서 도덕성의 타락을 목격해가며 인간성 상실의 어쩌고를 느꼈다는 걸 동조했더라도('어둠의 심연') 다음 코난이 바나하임의 하임둘 머리를 날려버리고 아탈리를 덮치려는 스토리와 헷갈릴 리가 있을까. 하지만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문득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읽어버린다면 홀든의 생애는 와타나베로 이입되버린다. 이런 '케미'가 어떤 작가의 유사성을 꿰뚫어볼 수 있는 통찰력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나에게 와타나베는 와타나베로...홀든은 홀든으로 남는 쪽이 훨씬 좋다. 


최근 잭 런던의 단편선을 읽고 그 유명한 나스 키노코<공의 경계>를 읽었다. (가끔 타입문 소설도 읽고 라이트 노벨도 즐겨 읽을때가 있다.) 때론 버거에 치즈를 끼우는 방법으로는 이런 무자비함이 어울린다. 치즈와 치즈사이에는 반드시 뭔가가 들어가야 한다. 완전히 다르다면 더더욱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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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씨의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을 읽었다. 

후기에 저자가 써놓은 작가의 말........


'소설을 쓴다는 건 그게 야즈드의 불빛이라고 믿으며 어두운 도로를 따라 환한 지평선을 향해 천천히 내려가는 일과 같다' 고....그래 이게 무슨 말인지 대충을 알 것도 같다. 야즈드의 불빛이라.....그래도 암치료와 지하병동과 줄기차게 피워대는 담배와 무덤덤한 자기갈 길 가는 어머니와 인생은 실패였다고 말하던 아버지와 지하터널에서 들려야만 하는 어머니의 노래소리와 그래 그건 사랑이었다고 그래서 그 함석지붕 밑에서 퉁퉁거리며 튀기는 빗방울소리가 칠월에 솔까지 올라갔다고는 해도..


아름다워야만 한다고 했는데..

난 왜 다 읽고나서도 아름답다는 생각보다는 서글프다고 느끼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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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illa Essay2014. 3. 13. 17:45

오고가는 지하철에서 머무르는 시간만 따지자면 내 전세금의 일부분은 5678 지하철쪽으로 주는게 도리에 맞다. 이게 흔들리지도 않고 주기적으로 어수선하게 누가 왔다갔다하는 환경적인 인터럽트만 제외해준다면 어떤 점에서 하나의 생활공간이 아닐까 의심한 적도 많았으니까. 문이 열리고 난 들어오고 앉고 내 할 일을 하고 한참 후 다시 나간다. 집과 다른게 뭘까. 공간이 좀 좁다는 정도? 


어느날, 고개를 들고 지하철 객실을 스윽 보았는데 통로에 늘어선 사람들이 마치 가로등같다고 느껴졌다. 다들 손에다가 스맛폰 하나씩들고 얼굴에 광선을 맞아가며 제 역할을 하고 있노라니... 스맛폰의 화면이 좀더 크고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신경 좀 써주면 다들 액정을 통해서 이계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기능이라도 만들어 줄지 모른다. 그리하여 다들 지하철에 타자마자 스맛폰 액정을 통해서 4차원 공간으로 들어가는거지 거기서 게임과 액션을 즐겨하며 정신줄 놓고 목적지까지 가고 목적지에 다다를 때, 다들 액정에서 튀어나와 유유히 지하철 문을 열고 내리는거다.  뭉그레뭉그레 거리면서 영혼들이 화면으로 빨려들어가고 나오는걸  보는 재미라니..놓치고 싶지 않은 구경거리일텐데...  

  

다 이계공간으로 떠난 지하철에서 난 책을 혼자 꺼내 읽는거다. 다들 자리에는 스맛폰만 번쩍이고 깜빡이고 오프라인 올드보이들만 남아서 책이나 읽고 잠이나 쳐자고 그렇게 말이다. 그냥 책을 좀 편하게 읽었으면 해서 상상해본 쓸데없는 짓이었다. 실상에서 지하철이 책을 읽기에는 나쁘지 않은 장소이긴 한데 최적의 장소라고 격찬할 정도도 아니다. 리얼 월드에서는 위의 망상같은 판타지가 없기 때문에 쳐들어오는 승객들을 우선 다 받아내야 한다. 우라지게 오래되어 색깔조차 고풍스런 몇몇 호선은 그야말로 김말이에 부어진 알밥 알갱이들처럼 꾸역꾸역 쏟아져 들어온다. 지하철공사측에서는 '알갱이들 다 다 타셨어요. 당신들 부대끼다가 터져도 우린 책임지지 않습니다 준비되셨죠 문닫아요 라고 방송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와중에 난 자리에 후다닥 앉는다고 다음의 시련이 오지 않는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우선 현대인들의 다이어트 유행을 무시라도 한듯한 어깨들이 자신들의 어깨를 끼어 맞춘다. 레고도 사이즈가 안맞는걸 억지로 끼울순 없듯이 지하철 자리에도 어깨를 무조건 끼우는게 서로 친밀감을 상승시키지 않는다. 때로는 어깨가 끼워지고 나면 밀려들어간 내 어깨의 가로사이즈가 원망스럽기까지하다. 가방도 흘러내려서 짜증나는데 여기서도 밀려버리다니..책을 들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내 옆에 무뢰한은 내  책을 흘긋보고 우람한 근육으로 책따위는 치우시지 라고 무언의 협박을 하는 느낌이다.  


몇몇 정거장에서 들어오는 불청객들은 거대한 고기 공장에서 자신들이 화형식을 거행하고 왔다고 자랑질을 객실전체에 쩌렁쩌렁 자랑한다. 이게 무슨 법이 있어서 불쾌한 냄새 소유자는 탑승 금지 뭐 이런게 있는것도 아닌데 어쩌겠는가만은 온갖 고기냄새와 살냄새와 뜨거운 입김들과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개개인의 통화내용들을 완전 공개로 객실에 쏟아놓으면 책을 읽는건 정신병자들이나 하는 짓이란 생각이 강하게 들 뿐이다. 덮고 그냥 눈감고 이 세상이 잠시간 다른 세상이라고 여기면서 꿈을 꾸는게 더 좋다. 


지하철에 사람이 없기를 간혹 바란다. 

물론 아무도 없으면 공포영화가 생각나서 움찔움찔하지만..너무 빼곡하지만 않다면..

읽으려고 쌓아놓은 책들 몇 권은 이 익스프레스 라이브러리를 통해서 읽혀질텐데..읽고 나서도 노트귀퉁이에다가 몇호선 몇구간을 지나면서 완결이라고 끄적여 놓을수 있을텐데...


말같지도 않은 바램을 한번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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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illa Essay2014. 3. 12. 21:52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시오리코다자이 오사무<만년>에 불을 붙이는 쇼로 가사이를 충격에 빠뜨릴 때 가사이는 '시오리코가 결코 책에다가 불을 붙일 부류의 인간이 아니었음을 알았음에도 당황했었드랬다. 왜 그랬을까. 좋아하는 책이 소멸된다고 생각해서다. 앞뒤 가릴 것없이 그것만 눈에 들어오는 좁아진 시야를 보면서 한정판의 위력을 본다. 모든 한정판은 가슴을 뛰게 한다던 지인의 표현처럼 어떤 대상이든 그것이 제한적이거나 소멸의 과정에 있다면 남기고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게 마련이다. 책같은 경우에는 좀 다르다고는 생각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책이 불탄다고 상상하면 나도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는 결코 책에다가 불을 불일 수 없는 시오리코 같은 부류가 반드시 존재한다. 그 사람들은 책을 찢을 수도 구길 수도 그리고 불태울 수도 없는... 제 몸이 구겨지고 찢겨질 지언정 책은 보듬어 안고 언제까지나 깊은 자신들만의 서재에 꽂아두고 싶어 하는 쪽이다.  나는 그정도는 아니어서 영원한 소유를 꿈꾸지도 않지만 가끔 읽어야 할 책들이 내곁에 늘 있어서 읽고 싶을 때 언제든 집어들 수 있기를 기대한다. 기대하고 바라는게 죄는 아니지 않은가. 단순히 읽고 싶은 순간에 찾아도 찾아도 없는 경우가 문제인거지..가끔 읽었어야 했지만 여러가지 저간의 사정으로 읽지 못했던 회한의 책들을 다시 찾으면서 이번에는 읽어야지 이젠 여유도 있고 시간도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때가 무르익지 않았겠어 읽어야 할 때가 도래했으니 나는 읽어야만해 라고 마음먹고 당차게 서점사이트를 클릭하지만...온라인 책 검색결과에 쓰여있는 책의 정보 하단에는 덩그러니 '절판' '품절'이라는 글자가 두둥 하고 불길하게 등장한다. 제기랄 그러게 내가 뭐랬어 미리 사두자고 했잖아. 



오래전 짝사랑하던 연인으로 부터 차갑게 들었던 '거절'의 뉘앙스가 '품절'이라는 글자에 박혀있었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놓쳐버린 그리고 제때에 챙기지 못했을 괴이한 회한으로 자책질의 폭풍이 지나고 나면 현실적으로 이 책을 구할 방법이 없을까쪽으로 선회한다. 요즘은 온라인쪽이 많이 발전하여 어디서든 중고서적의 검색이 자유롭다. 지레 포기할 단계가 아닌 것이다. 우리의 '마술램프'와 '공원'사이트를 뒤지고 저명한 몇 개의 중고서적 사이트를 헤메다가 재고를 발견하게 되면 쾌재를 부르는 거고 그렇지 않아도 때를 모색하며 쥐죽은 듯 인내의 시간을 버티면 된다. 책이란 수요에 의해서 언젠가 다시 검색란에서 재등장할 날이 오니까..그러나 이런 과정을 거친다고 해도 세상에서 감쪽같이 모습을 감춘채 종적이 사라져버린 소멸의 책들도 있긴하다. 그 책은 내가 읽을 인연의 책이 아니었던 거다.


최근에 몇 권의 절판 및 품절 서적을 손에 넣었다. 라파엘 사바티니<스카라무슈>, 그리고 야마다 에이미<슈거 앤 스파이스>, 이언 매큐언<암스테르담>, 레이먼드 카버<대성당>이다. 사바티니의 저작들은 국내에 정말 제대로 등장한지 꽤 되었다. 스카라무슈라 그렇다쳐도 (옛날 고리짝시절 문고판으로 등장하긴 했었다), 불후의 명작 캡틴 블러드 따위는 아예 등장도 안한다. 어린 시절에 보물섬에서 보았던 이현세옹의 만화을 떠올리며 스카라무슈를 기억할 뿐이었다. 활극소설로 사바티니를 능가할 작가도 별로 없다고 보는데.. <스카라무슈> 몇 년전 등장했다가 휘리릭 사라져 주셨드랬다. 물론 중고 서적에 이 책이 등장하기는 했는데 가격대가 후덜덜해서 문제인거지 싶다. 3배 넘는 가격으로 등장해버려서 과연 내가 이 책을 이 가격에 읽어야만 할까로 한참 고민을 안겨주고 있었다. 최근 또 다른 서적상으로부터 적절한 가격으로 번개처럼 검색이 되었다. 후다닥 결제라인을 완료하고 나니 다시 품절로 가버리는 걸 보고 인연의 끝을 마지막에 잡은 느낌이라니...



야마다 에이미의 작품들은 약간 논란이 있긴 한데 왠지 여성들이 읽는 책이란 선입관과 너무 에로적이고 적나라하다는 속성때문에 대중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칭찬하는 부류는 아니었을 거다. 이렇게 보수적인 나라에서 섹스장면이 부지기수로 등장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묘사해대는 과감함은 또 다른 오해를 부르기 딱 좋지 않은가. <설국>도 그렇게 매도된지 오래다. 대중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책을 읽는 사람들의 수준 운운하는 모양인데 요시모토 바나나쿠니 가오리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으면서 야마다 에이미를 은근슬쩍 꺼려하는건 이율 배반적이지 않은가. 난 개인적으로 야마다 에이미의 소설을 맹렬히 좋아하진 않았어도 나쁘지 않게 읽는 편이다. <풍장의 교실>같은 건 드물게 정서를 침참시켜서 절구통에 삐죽삐죽한 짜증덩어리를 넣고 돌려대는 느낌이다. 너의 정서란 세상의 그저 한 부스러기일 뿐이야 라고 책망받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에이미의 저작들도 초기작들은 왠간에서 구하기가 어렵다. <슈거 앤 스파이스>가 아마도 나쁘지 않은 작품일텐데도 제대로 읽어볼 기회조차 오질 않았다니...희한하긴 희한하다. 아무튼 이 책도 중고서적에서 건져냈다. 


이언 매큐언<암스테르담>은 사실 주변의 지인들이 열렬히 찾던 책이다. 이 책은 온라인에서 검색해서 구할 수 있긴 한데 역시나 가격이 문제다. 두배이상으로 뻥튀기 되어있기 때문에 약간 망설여지는데 어차피 읽어야 할 책이라면 그냥 마음 편하게 확 구매해서 읽으면 그만이긴 하다. 그나저나 <암스테르담>이 재판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없다. <토요일>은 아직도 버젓이 유명 서점에 꽂여 있는데 <암스테르담>의 어떤 점이 절판의 블랙홀로 이끌었는지 감지조차 되지 않을 뿐이다. (하기사 토요일에 비할바가 아니지..매큐언의 소설도 어쩌면 대중적이어야만 했을 거다.)


 마지막으로 카버의 <대성당>. 이건 정말이지 할 말이 많은데, 문학동네측에도 문의했던 데로 아마 이 책은 신판 문학시리즈의 하나로 재출간되긴 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이지 질리게도 시간을 오래끌고 지지리도 진척이 없어서 문제다.  문의한게 작년인데 아직도 나오지 않는다. 대성당의 가격이 미친x 머리칼 나부끼듯 폭주하는걸 보면서 혹시 저 책의 특정 페이지에 카버의 유서라도 들어있는건가 의심하곤 했다. 하지마 이 책은 우연찮게 지나던 중고 서점에서 구했다. 물론 제 가격에...


이런 걸 보면 책이란건 정말 인연이란게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된다. 읽으려고 읽으려고 애써도 손에 안들어오는 책이 있는가하면...한참을 잊고 있었어도 결국에는 손에 들어와 읽히는 책들이 있다. 그 책들과 나와 어떤 운명적인 실타래가 있는지 알수 없다. 때로는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던 책들이 오랜 시간 후에 내 손에서 읽히는 날도 많았으니까..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을 순 없다는 걸 안다. 그래도 최소한 눈에 걸리는데로 읽어야 겠다고 다짐한 책들의 일부분 만이라도 나와 같이 숨쉬며 생존해 있기를 바라고 잠시 기억에서 사라졌더라도 언제고 다시 나타나 주길 꿈속에서라도 기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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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illa Essay2014. 3. 11. 11:39

나는 책들에도 무늬가 있다고 생각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종이에 인쇄된 글자 이면의 문장들에 배어있는 모종의 커넥트비티, 뉘앙스, 그리고 농담흐린 감정의 먹선이 적셔져 있어서 그 선을 보는 사람들을 따라 취사선택 되어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결국 책들의 운명이란 그렇게 결정되어 지지 않을까. 어떤 책들은 운좋게 자신의 무늬를 봐준 독자의 손을 따라 읽혀지게 될 것이나 그렇지 못한 책들은 범용의 숲에 무늬가 드러나지 않은 채 세월을 감내하다가 빛을 잃어간다. 


어느날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자기는 OO작가의 책은 도저히 읽어주지 못하겠노라고, 완벽하게 다른 감성적 패턴을 가지고 있어서 한장 한장 넘기는게 고역이라고..그렇다면 집어치우고 네가 좋아하는 다른 작가꺼나 읽으라고 말해줬지만 사실 이런 현상이 그 친구한테만 일어나는 희귀 질병 같은건 아니다. 엄연히 책들의 무늬는 어울리는 배경들이 존재하니까. 자신의 배경에 그 무늬는 영 어울리지 않아서 마치 시대착오적스럽게 느껴지는 불협화음은 일부러라도 겪고 싶지 않을 뿐이다. 


더구나 어디에도 이런 책들이 드물다고 할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더 넘쳐나는 세상이다. 저기 세상의 책들이 모여있는 서재가 있어요 당신의 마음에 쏙 드는 책이 일천구백사십팔만오천이백삽십몇개의 더미 밑 42번째에 꽂혀 있는게 보이시나요 그렇다면 가서 그 책을 뽑아서 보시지요. 보이지 않으신다구요 그렇다면 하는수 없죠 당신은 그 책을 읽을 운명이 아닌거예요. 이렇게 누가 나를 설득한다면 난 기꺼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아마 아마존 닷컴의 이름이 아마존인 이유는 완벽하게 가려진 무늬 속 내 책을 찾기 어렵다는 걸 은유적으로 표현한게 아닐까.



최근에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의 저작들 몇 개와 <풍장의 교실>,<솔뮤직 러버스 온리>의 야마다 에이미(山田詠美), 코맥 맥카시(Cormac McCarthy)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카운슬러>, 그리고 김연수의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을 읽었다. 개중에는 무늬가 생경해서 영 아니올시다라고 느껴진 작품이 있기야 한데 눅눅히 지면을 돌파하는 감내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의외로 낯선 무늬도 수용가능한 숲이 되줄수 있겠다라는 느낌도 든다.  선입견 같은게 딱히 있는건 아니다. 물론 코맥 맥카시는 별종의 피칠을 벽에 덕지덕지 발라가며 스타카토식으로만 스토리를 전개시키는 아웃사이더가 아니며, 야마다 에이미는 로맨스를 빙자한 노골적인 성애주의자도 아닐 뿐더러  스토리 위를 부유하는 감성적 문장들 탓에 우울함만 더해가는 김연수가 아니란 것 정도는 나도 안다. 


작가들의 편린은 작품이겠지만 어디 복잡다단한  이야기의 몫은 사실 오롯이 작가만의 것이 아닌지 오래되었기에 느끼는 감수성에 동조하지 않을 독자들이 어디 한 둘일까.  수없이 열광하는 독자들에 의해 이미 다반사되고 수많은 블로그들에다가 자신들의 무늬로 적절히 편광시켜 놓은 흔적들을 본다. 모두 다 나와 같을 수 없겠지 무늬는 한개의 태양이라도 천개의 모양을 만들어 낼 테니...그나저나 손발 오그라드는 추종 독자들의 감상평은 정말이지 뭐라 표현하기 힘든 겸연쩍음 같은게 있다. 읽을 수록 웃음이 나온다. ^^

Posted by kewell
Vanilla Essay2014. 3. 10. 10:59

건담매니아들이 넘쳐나고 애니메이션 오덕들의 천국이라 불릴만한 일본에서 이런 설문조사가 있었드랬다. 10~~30대 여성들에게 최악의 남자들은 누구인가라는...그리고 결과에 떡하니 이런게 있었다. 비활동적이고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조용한 성격의 남자.!!! 여기에 몇가지 덧붙여 프라모델 건프라에 빠져사는 남자들. 게임기 붙들고 사는 히키코모리. 줄줄히 언급되는 남자들의 정체에 대해서 크게 반감없이 수긍하며 그렇게 사는 남자들은 문제가 있다라고 여성전체가 손가락질하는 분위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건프라와 게임과 애니오덕들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자신이 여자들을 만나면서 건담MG조립을 포기할리 없고 새로 등장한 LOL캐릭을 방치해둘 생각이 없으며 할렘물의 여주들이 프린팅된 베개를 껴안고 싶지 않을리 없기 때문에 별시덥지 않은 여자들이라고 치부하면 그만일 것이다. 


원래 취미란 이런 것이다. 누가뭐라고 해도 나는 내 갈길을 간다라는 분위기. 손가락질과 지탄이 난무해도 본인은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올 생각은 전혀 없다. 이유인즉슨, 그런 취미활동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재미가 있으면 어떤 사회적 분위기에도 이겨낼 용기같은 걸 막 생산해낸다. 게다가 이런 종류의 쾌감들은 반복적인 패턴을 가지고 있어서 '중독'이라는 레벨로 옮겨가게 된다. 여친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차마시고 심지어 AV유사스런 행동을 하는 스케줄이 동일선상에 존재한다해도 매니아들의 입장에선 부차적인 순위로 밀려날 뿐이다. 


독서도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얼마전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남녀 직장인들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직장인들의 독서량이 한달에 한 권이 안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하루 중 책읽는 시간이 약 30분, 그리고 책을 고르는 기준은 '유명한 사람의 에세이/자기계발서' 순이었다. 이런 조사가 '취업포탈'에서 조사된건 왜 일까. 이 프레임에 근간에는 사람의 능력과 무형스펙에서 '독서'가 차지하는 얼마간의 포션이 있거나 사회전체가 기대하는 '지적기준'의 항목에 독서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거대 출판사가 이런 통계를 들먹이며 '여러분들 너무 책을 안읽으시는군요. 이렇게 안 읽으시면 저희 망해요라고 푸념하는게 더 자연스럽겠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취업 포탈이 독서량을 지적하다니...,이 사회가 '책읽기'를 따분하고 도달하기 힘들면서도 반드시 하는게 좋을 법한 어떤 정형적인 프로세스로 인식하는 듯한 뉘앙스다. 


왜 읽고 싶지 않다는데도 사회는 독서포기의 자유에 대해 달가워하지 않는걸까. 대다수의 직장인들이 책읽기를 관두는 데에는 그들 자신이 무식해지고 싶어서도 그리고 책에 환멸을 느껴서도 아니다. 그저 책을 읽으려고 전진하는 의지에 너무나도 많고도 다양한 유사 선택지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책을 읽는 재미'보다 더 재미있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학업 지상주의에 파묻힌 어떤 고상한 선생님들의 부류에서는 '왜 책 읽기가 재미없냐'고 힐난하거나 '재미가 없어도 읽어야하는게 독서'라고 강하게 어필할 수도 있겠지만 그걸두고 수긍할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사람은 '어떤 재미가 느껴지지 않으면 억지로 무엇인가를 하는데 익숙치 않은 동물이다. 의지라는 것은 한도가 있고 그것도 언젠가는 닳고 없어지게 되어 있기때문이다. 그럼 독서가들의 대개는 강한 의지의 소유자란 말인가?  


1년에 책을 몇 권 읽는지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우려를 금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직장인들이 책을 너무 안 읽는데..한달에 한 권도 안 읽는다는데 나라도 이번달에는 읽어줘야겠어 라고 책을 사서 득달같이 읽는게 더 이상하다. 이 독서의 목적은 누구를 위한 걸까. 독서가들이 착각하는 몇가지의 생각들이 있는데 '책을 좋아서 읽는 사람'과 '책 읽는걸 과시하고 싶어서 읽는 사람'의 독서 유익성에 관한 부분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후자의 케이스를 우러러보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독서는 개인적인 영역이기때문에 그 사람이 무엇을 느꼈든 그 사람안에서 벌어지는 일일 뿐이다. 굳이 양적인 독서에 우러러볼 '권력지향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독서에 목적이 있기보단 자기의 독서과정에서 체득된 지식축적을 과시하고 싶은 일종의 '권력욕'일 뿐이다. 


결론을 내리자면 '책읽기'는 개인적인 것이며 그건 재미가 있어야 한다. 사회적 분위기에 끌려갈 필요도 없으며 읽기도 싫은걸 억지로 읽을 필요도 없다. 그렇게 강제로 읽어서 어떤 걸 알게되었고 깨닫게 된 사람으로부터 우리는 '독서'에 대한 또하나의 강박적 관점을 본다. '독서는 고귀하지만 어렵고 유익하지만 고통스럽다'는 괴이한 견해를 보며 후대들에게 이상한 독서 공포증과 형벌에 가까운 '과제'를 부과하고 있다. 그래서 말인데 다른 관점에서 독서쟁이들을 비웃을 필요도 없지 않은가. 그딴거 읽어서 뭐하느냐고 책을 읽으면 돈이 나오냐고 내 월급에 몇 푼을 더 보태줄 수 있냐고...그럴 필요가 역시 없다. 세상의 치열한 어떤게 존재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먹고, 자고, 똥싸고 섹스를 한다. 본능적인 것도 어떤 점에서는 자연스럽고 덜 고통스럽고 편안해지기 위해서 진행된다. 독서도 결국에는 재미있어 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읽는 사람은 읽는거고 읽기 싫어하는 사람은 안 읽으면 그만이다. 여기에는 어떤 고상한 논리가 있어서 책을 읽어야만 사람답게 사는 것도 아니며 책을 통해 지식을 축적해야먄 참지식이 되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깨달음의 루트가 있다.


물론 내가 감명깊게 읽은 책들이 어떤 사람에게 지루하고 졸릴 뿐이라는 사실이 가끔 실망스럽긴 하지만, 나역시 어떤 시끄러운 환경에서 춤을 추고 왁자지껄 대화를 나누는 걸 싫어하지 않은가. 붕어빵같은 케이팝도 싫은데 왜 싫으냐고 사람들에게 신경질적으로 묻지 않는 것처럼 독서도 결국에는 개인의 취향적인 부분일 뿐이다. 굳이 사회적 문제시 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 이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압적으로 책이라도 읽힐 속셈인가. 인생의 선배된 입장에서 독서의 유익함을 위해서 강압적이 프로세스라도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다면 방법이 있긴하다. 대개의 독서습관은 '환경'에 좌지우지되니까 그런 습관을 들여주기 위해서라면 본인이 책을 많이 읽는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 자식들과 책을 읽고 차를 마시고 서로 대화하고 독서하고 글을 쓰고 읽어주고 하면 된다. 그게 재미있다면 성공할 것이다. 그러나 그게 고통스럽다면 자기도 고통스러운걸 왜 후대에 기대하는 걸까. 자기는 책하나 집어들지 못하면서 자식들에게 '책을 읽어야 한다'고 윽박지르는건 너무 웃기지 않은가. 대대로 고통을 물려주는 꼴이다. 결국, 세상의 기발한 콘텐츠 못지 않게 '책읽기'가 재밌다는 사실들을 깨닫게 되는 어떤 환경에 답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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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BOOK/철학-사상2014. 3. 7. 11:58


"우리는 어떤 편견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말처럼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말도 드물다. 대개의 경우, 개개인의 실존적 관점을 강조하기 마련이고 주체적인 위치에서 능동적인 시선을 더 설득적으로 받아들이기 마련이니까. (당연하지 않은가 '초인'의 지위는 여전히 중독성이 있다.) 상징적 질서와 관련된 '무음'(無音)의 기제들 한복판에서, 인지하지 못했던 '무지'의 영역이 소리없이 '의식'의 영역으로 슬그머니 기어나오게 되면 실존적 자아란는 말이 왜 그렇게 현대의 즈음에서 무기력한지 이해하게 된다. 설령 모호하고 너무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논증으로 둘러쌓여 있다고 할지라도 은근한 무의식조차 '그럴지도 모른다'고 점령당할수 있을만큼의 참신성이 있다. 그걸 알게 될 때의 섬뜩함은 또 하나의 진실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런 이야기들이 어느날 뜬금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진 않았을거라는 추측도 하게 되고 이면의 계보를 쫓다보니 사상의 줄기를 성장해왔음을 알게도 된다. 


<구조주의>는 대중들에게 어려운 지위에 놓여있다. 헤겔과 마르크스가 지녀왔던 대중성은 어느정도의 일반화된 상식의 선에서 읽히지만 이후 소쉬르를 비롯하여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에 이르기까지는 '관심사'의 영역에서 읽히는 대상들이다. 제아무리 유명 철학자가 설파한 몇가지의 논제를 이해한다고해도 이 후의 컨셉을 붙들고 깊이 들어가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실패작이나 다름없던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오로지 참고적 측면에서 잠재의식이 거론될때만 등장하는..)이 라캉에 의해서 살아날때, 묘한 호기심이 일었다고 치더라도.., 슬라보예 지젝의 광풍과도 같은 아시안에서의 인기를 감안해도 여전히 그 난이도는 쉬이 내려갈수 없다. 그리하여 '구조주의'는 포스트모너니즘과 여타의 현대미술사를 비롯, 수많은 인문학자들의 '용어'로 남아서 쉴새없이 인용되며 위용을 자랑하는걸 넋놓고 바라만 보는게 일상이 되버린지 오래다. (물론 이건 일반 대중들의 시점이란 점에서..)  대중들은 그저 '그것이 어떤 무형질의 찰떡이라도 되는 것마냥 '그런것이려니'하며 받아들이고 은근히 이해할듯한 말듯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스쳐지나갔을 확률도 꽤 크지 않았을까. 


어떤 인문학자들의 컬럼과 글들에서 바르트와 푸코의 핵심 명제들이 인용되면서 '현 상황'을 설명하는게 유행인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그 비유와 은유가 적절한지 알아채는 건 그렇게 쉽지 않다. 그건 무식의 범주에서 스스로가 그렇게 초라하지 않다는 걸 감추려고 애쓰는 관객들의 묵인과 맞물려서 부풀려지고,  도대체 이 분께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대개 뭐 이런 정도의 말을 하고 싶어서 비슷한 출처를 인용하는 것이겠지 하고 추측정도로 넘어가주신다.  그렇게 내용의 증명은 불가능하며 특히 원전의 타당성과 기본적 컨셉조차 캐치하는건 요원한 일이 된다.  구조주의 계열사에서 수없이 치고 빠지는 용어들의 향연에는 이런 '지적허세'가 과포화된 채 부유하며 평론가들에 의해 과용되어서 일반인으로선 그 범주로 들어갈 용기와 시간이 아쉬워진다고나 할까. 이래서야 또 하나의 지적인 허세 장벽이 세워지는 꼴이다. 뭐 당신은 몰라도 돼. 그런게 있어..정도나 될까? 업계의 전문가들조차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이 현상을 보면서 앨런소칼 처럼 '지적사기'를 내놓는 용기는 거의 혁명적인 일이지 싶다. 일반독서가들로서는 어림없는 수작으로 그들에게 비쳐질 것이다.  


철학서인건 인문학서이건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쓰여졌는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은 등장하는 '예시'의 질을 보면 안다고 했다. 난해함을 해독하는 길은 저자를 의도를 알고 그것을 이해한 다음 쉽게 풀어서 일반이들의 일상에서 보여지는 실제 상황에 붙여볼 수 있어야 한다. 철학은 더더욱 그런 연관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말인데 학자들의 시선에는 그런 예제는 비효율적 낭비라고 인식되어져서 등장한 용어의 재반복에 더 할애하는 경향들이 보이곤 한다. 책들은 어렵고 원전이랍시고 풀어놓은 소개서조차 이걸 읽어도 모르는데 이 분은 제대로 이해하고 쓴 걸까라는 의구심을 지울길이 없다. 역시 별개 아니라는 걸 간파하려면 아주 쉽게 설명해보시오라는 물음을 저자들에게 던져줘야 한다. 그래놓고 제대로 설명하는지 가만히 들어보면 그 저자의 진면목을 알수 있다. 그래서 이 책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는 정말 괜찮은 책이라고 불릴 수 있겠다. 


뜬금없는 소쉬르의 언어학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지도 않고 그나마 익숙한 헤겔마르크스 이야기를 먼저꺼내주고, 대개의 교과과정에서 들었을 '계급'에 대한 이해와 '노동'으로 인한 존재인식의 차이점, 고지식해보이는 프로이드의 억압 메커니즘을 쉽게 설명해주고 우리는 결코 우리를 이해할 수 없다던 '니체'의 철학을 알기쉽게 연결시켜준다음 소쉬르와 푸코의 단계로 전이 시켜준다. 왜 푸코가 평론가들의 기준점이 되었는가를 알수 있는 몇가지의 깨달음도 등장했고 (근대사회에서 인간의 '표준화'를 목표로 삼았다는 부분을 읽어보면 인식의 기준점이 탈중심화되어가는 과정을 알수 있다.) 바르트의 텍스트이론으로 야기된 비평의 기본 원리도 슬며시 생각하게 해준다. 물론 일반인들로서는 약간 축약적으로 설명된 레비스트로스의 이항대립의 조합이야긴 어렵지만 대개의 경우 많은 사람들의 생각속에는 반드시 레비스트로스적인 추측이 남아있다. "인간이 사회구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가 인간을 만든다' 라는 지적같은 것 말이다.  


라캉에 이르러서도 커뮤니케이션으로 이어지는 부분을 세밀하게 잘 설명해주었다. 라캉은 좀 논란의 대상이다. 이미 수없이 많은 저작들의 난해함과 앞서 이야기했던 지적사기 사건을 통해서 '과학적 논증'의 오류부분을 들먹여 평가절하하더라도 어쩔수 없긴하다. 다만 논증적 방법부분은 제쳐놓고서라도 그의 이론을 슬며시 들어보는건 나쁘지 않는 선택이라고 본다. 이 책의 목적은 아무래도 '구조주의의 쉬운 이해'였다는 점을 볼 때, 일반독자에게 충분한 설명을 간략하고 쉽게 해주었다고 볼 수 있다. 만약에 이 분야에서 더 관심을 가져보리라 마음을 먹었다면 이런 책에서 출발하는게 굉장히 효율적일 것이라고 믿는다. 비록 얇고 너무 성의없어 보일런지는 모르겠지만 대개 이념과 사조, 그리고 철학의 이면에는 과용량의 논술보다는 쉽게 설명된 얇은 가이드 정도로도 의욕에는 부담이 없다. 그래서 말인데 실력자분들께서는 이런 서적을 남발해주시는게 더 낫다. 그래야 지적허세질이 습관이 된 일부 사기꾼들의 허풍들을 알 수 있게되고 그 과정에서 '생각'의 통찰이 생길 것이라고 믿는다.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저자
우치다 타치루 지음
출판사
갈라파고스 | 2010-10-0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2002년 출간 이래 증쇄를 거듭하며 단 한 번도 스테디셀러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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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ewell
Vanilla Essay2014. 2. 2. 23:35

경쟁의 시대에서 난관을 헤쳐나갈 전략적인 도식과 수식들의 틈바구니에서 경영사가들이 찾아낸 또 하나의 전가의 보도가 있었다고 보이는데 그게 바로 요즘 들먹이는 '인문학'이다. 여타의 어려운 상황들이 카운터처럼 양 뺨따구를 사정없이 후려치고 복부에 커다랗고도 묵직한 한방을 맞아 그로기상태에 빠져버린 유명 기업들 조차도 '우리에겐 인문학을 기본으로 한 경영철학이 없었다'라고 토로할 정도니까 이젠 인문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대세에 뒤떨어진 무엇이 되고 마는 느낌이 되버렸다. 


마르크스가 인간이 드러나는 결정적인 면모는 계급이니어쩌고 했을때에도, 그리고 헤겔이 노동을 언급했을 때에도 사람들이 자아중심주의적 사고에서 '구조주의'적인 사조로 가고 있는 줄 눈치채지 못했 듯, 인문학이란 것도 대개는 두부모를 자르듯 그렇게 구획하시키고 절단낸 다음 조각 케이크처럼 여기 인문학 두접시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떤 점에서 보자면 대중이 보기좋아하고 두루두루 인용해야하며 적당하고도 적확한 예제가 되어줄 수 있는 그럴듯한 장르 카테고리라면 모를까.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읽는 것'자체에 재미를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수많은 지식들의 파편들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독서가들의 만족도는 내용 그 자체의 활용을 최종목적으로 여기지않고 뜻밖에도 자신들이 읽는 행위에만 그저 의미를 두고 만족해한다는 이야기, 그 틈에서 읽어지는 컨텐츠들에 대한 무의식적인 '의미부여' 소리없이 난무하는 느낌이다. 인문학이란 이런 의미부여라는 스티커를 이곳저곳에 붙이기 딱 좋은 대상이다. 사람은 역사, 문화, 교양, 신화, 문학 등등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며 어떠한 산출물도 이 카테고리를 벗어나기 어려운데도 마치 오늘날 이 인문학을 세상사람들이 잊고 살았다며 힐난하고 부족한 점은 인문학이었다고 지적들을 해대는건 좀 이상하지 않은가. 마치 이제껏 관심조차 같지 않고 읽기에만 몰두하던 독서가들조차도 '자신들이 읽었던' 뭔가에 대해 의미를 과하게 부여하려고 한다. 읽은 노력에 대한 사회적 인정같은 걸 원하는 걸까.


이 사기꾼들을 어떡하지 싶다가도 서가에 꽂혀있는 인문학에 대한 책들을 슬쩍슬쩍 보면 취지가 뭔지는 알듯 해서 약간은 좀 씁쓸하고 또 한편으론 뭐 이렇게라도 다방면에 관심을 가져준다면 좋은 거지라고 억지 추임새를 짓고 말았다. 먹고 살기 바쁜 수많은 샐러리맨들과 생계와 평안을 위해서 불철주야 고민하는 현대인들에게 '원전 책을 숙독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뭔가 깨달음을 얻고 머리에 차곡차곡 정리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일전에 2013년 한 해동안 600권의 책을 읽은 '독서가'의 블로그 댓글을 본적이 있었는데 각 책마다 5줄의 요약과 더불어 별점까지 매긴 그 포스트를 보며 이 분께서는 이 책들을 다 정독하면서 저자의 진의도 다 이해하며 내밀함을 샅샅히 분해라도 하셨던 걸까라고 시기심어린 의구심을 가졌었다. 


그렇게 책을 좋아하고 일상에서 페이퍼를 놓기 싫어하는 사람이 일반적이라면 서가의 인문학 서적들이 그렇게 팔릴리가 없었을 것이다. 인문학으로 유명한 저자는 수없이 많은 철학책을 독파하면서도 오히려 나이가들어 읽었던 책은 '고전문학'이었다고 거기에서 진정한 철학적 진면목과 삶에서 우러나오는 통찰력을 발견했다고 말했던 고백을 기억한다. 어떤 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깨달음을 얻는 그 대상의 다양성은 한두가지의 길은 결코 아님에도 유독 다이제스트식의 요약본이나 정리된 해설서에 의존하는 경향들이 짙다. 시간부족에다가 리소스의 한계를 보자면 '요약본'이라도 집어들어야 하는건 상식인데 왜 우리는 요약본 없이는 중요한 개념과 이데올로기와 역사와 문화를 비타민처럼 흡수하지 못하는가라는 궁금증이 든다.


이거 이런 식이면 시중에 나와있는 인문학의 지식들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여야 하고 그렇게 한다고 가정했을때 우리가 가지는 지식들의 편린들을 모아보면 어마어마하다. 철학의 흐름들과 역사의 대소사들, 그리고 중국고전들의 고어향연, 그리고 신화들의 숨겨진의미, 문학소설들에서 슬쩍슬쩍 들어나는 인간본성의 탐구, 그리고 문학적 감수성이 뭍어나는 문장들의 기묘하고 찬탄할만한 묘사들, 이게 왜 다이제스트로 친절하게 떠먹여야 '인문학'적 사고의 궁극적 완성이 되는 건지 아직까지도 헷갈린다. 왜 사람들은 제대로된 오리지널 원전같은 걸 읽지도 않으면서 해설서를 읽어서 그 사조와 경향을 이해해야 세상을 사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때가 되면 사람들은 여태 자신들이 알아왔던 지식의 두께가 빈약함을 깨닫는다고 한다. 그리고 나면 이 허기진 지적탐구의 본성이 허영으로 변질되고 그틈에서 그 허영을 채워줄 또 하나의 나열시 책읽기가 등장한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여태 인문학 외적인 삶을 결코 세상사람들이 살지도 않았는데도 갑자기 인문학이 모든 세상사의 기본이 된다라고 믿는 이 트렌드에는 약간의 뻥끼가 있는 것이다. 진작에 삼국시대와 조선시대 500년을 이미 알고 있고 그 틈에서 유럽사와 각종 철학들과 생물학적 지식, 사회, 도덕을 비롯한 수많은 상식들의 틈에서 살아왔는데 특별나게 당신이 미술사의 중대한 시기를 이해하고 르네상스 이면의 사회조짐의 큰 의미를 이해해서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다만 이런 건 세상사에서 조그만한 예시가 역사에 존재했을지도 모른다는 궁금증과 순수한 지식의 탐구욕에서는 가능한 이야기들이 될 수도 있다. 


왜 억지로 인문학 관련서적을 읽어야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인문학은 천편일률적으로 다 독후감들이 되어서 저자의 가이드처럼 찍혀져 나와야 하는건지도 이상하다. 그저 어느날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산티아고의 풍경이 떠올라 짐을 꾸려 떠나 현지에서 보고 이런게 내가 상상했던 그런거구나라고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던 내 지인의 경험만도 못한 책읽기들이다. 우리가 집어드는 인문학 서적들에는 수없이 많은 '식당메뉴'들이 등장한다. 각자가 입맛에 맞는 메뉴를 고르긴 골라야 하는데 이게 뭔지 알수도 없으니 옆에 붙어있는 간략한 설명을 읽어보고 그런가보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 난 이 레퍼런스를 참조했으니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해서 일단 먹어본다. 


먹고나서도 영 찜찜하다. 먹긴 먹었는데 이게 뭔지는 아직도 모르겠고, 나랑 별 관계도 없는 것 같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무 비싸다. 내 노력도 들어가고 내 시간도 들어가고 대체비용은 뭔가 명확하지 않은 애매한 경험담외에 별로 없는 것 같다. 요즘의 인문학이란 대개 이런 것들이다. 상식을 많이 알아야해서 언론사 시험을 대비하기 위해서 Q&A 문답집을 외우는 것과 뭐가 다를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중요한건 이런게 뭐 나쁘다는 게 아니고 다 해볼만한 일이고 나름 의미있 일이란 것을 부인하는게 아니다. 문제는 이렇게 해서 우리가 어떤 포장지를 다 외었다고 하면 그게 무슨 경쟁력에 도움이 된단 것일까. 그게 무슨 세상을 살아가는데 큰 통찰력을 준단 걸까. 


혹시, 다들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책을 읽고 책에서 인용된 책들을 한번씨 다 읽어보라는 취지였다고....

것도 아니라면 바쁘니까 대신 요약해준거라고...


그렇게 해서 읽어 뭔가를 알게된 인문학의 대가들은 또 어떤 형태의 크리에이티브를 상징하게 되는가.

생각할수록 시대와 계절이 만들어낸 뽕끼다분한 허세와 허영기가 짙에 드리워져 있다. 인문학에는.....




Posted by kewell
Review BOOK/에세이2014. 1. 23. 22:55


한동안 이것저것 먹고살기위해 두리번거리는 통에 책 모양 비슷한 뭐라도 읽긴 읽어야겠는데라고만 생각했다. 뭐 세상일이란게 그런거지 때론 어느날 정신차려보니 내 키보다 더 자라있었다는 남쪽나라의 대나무보다도 소리없이 쌓여가는 책들의 탑 높이에 놀라곤 했다. 햐 언제이렇게 쌓였어 읽어야 할 책들의 바벨탑이로군... 시간을 한탄하는 것도 여유가 있을 때다. 대부분은 세상의 시계는 다른 방법으로 초침을 움직이니까. 인지할 틈도 그리고 깨달을 틈도 주지않고 무조건 달리게만 한다. 풀려버린 두루마리 휴지를 꼬랑지에 매달고 뛰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뭔가 큰 실수를 했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느낌이라니... 나도 풀린 휴지를 끊어버리고 그 자리에 앉아서 빨리 모아놓은 책들을 읽어야했는데라는 생각정도는 한다. 핑계가 너무 많아서 문제인거지. 


어쨋든 요즘에는 책을 미션수행하듯 해치우듯 읽는건 사절이다. 그렇게 읽는건 읽는 행위 이상의 무엇도 남겨주지 않더라. 쫓기듯 읽고 표지를 덮고 책장에 쑤셔넣으면 '무협지 마지막권 말미에 붙어있는 '완결'이라는 단어를 읽어버린 것만큼 허무하다. 읽다가 도중에 아무런 깃발이 들려지지 않는다면 (잠시 생각하게 되는 걸 난 '깃발을 든다'고 사용한다.) 그저 똥만 싼 것과 같을 뿐이다. 내 피와 위장과 뇌에 어떤 영양소를 공급했는지 알길이 없다. 내 독서의 질량에 어떤 질감의 살이 붙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똥만 싼거지..게다가 이런 읽기에는 아무런 추억도 기억도 공간을 할애해 주지 않는다. 그러고보면 뇌라는건,...아님 감성이라는건 굉장히 이기적이지 않나 마음에 드는 몇개의 문장과 상상속에서 스물거리듯 올라왔던 이미지들 몇 장면에게만 저장소를 허락한다. 그리고 나머진 다 너저분한 잡스러운 것들이라 다 잊어버려주겠다고 통보한다. 그렇게 해서 잊혀진 책들이 몇 권인가...이런게 리얼 비효율라 말할 수 있는거다. . 어찌됐든 개인적으로 책읽기란 '해치우듯' 읽어선 곤란하다는 말 하려고 이렇게 길게 주절거렸다.


그런 점에서 요 며칠간 눅눅히 읽어갔던 이 책은 정말이지 뭔가를 푸짐하게 먹고 제대로 소화시킨 느낌이다. 바로  빌 버포드앗뜨거워-'Heat' 이다. 여기에는 저자가 갑자기 뉴요커의 삶을 살다가 마리오 바탈리(뉴욕에서 밥보라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유명한 요리사)를 만나면서 '요리사'의 삶으로 자신의 삶을 바꾸는 희한한 모험담이 등장한다. 이게 소설이냐고? 그랬으면 위트와 농담으로 뒤섞인 그의 문학적 감수성을 높히 평가하면서 '갈등구조'의 적재적소를 비판적으로 저미듯 노려봤을 것이다. 이래가지고 재미가 있겠어 여기서 한번 주방을 엎어버려야지..앞건물에 경쟁자 레스토랑이 등장하고 새로운 요리개발에 매진하고 경연대회에서 일등먹고 ..등등...그렇게 나갔어야 했겠지...그런데 이건 공교롭게도 소설이 아니라 실제 있었던 체험기다. 진짜로 요리사의 삶을 경험해보려고 주방으로 뛰어든 기자가 자기란 이야기다. 


뭐 자세한 이야기야 나중에 리뷰라도 쓰면서 절절히 써볼 작정이지만, 슬쩍 끄적여두는 이유는 책을 읽은 요 며칠간의 경험이 적어두지 않으면 휘발되어버릴까봐다. 어디서든 치열한 삶이 있고 언제든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이벤트들이 도처에 널려있을 것이나 실제로 이걸 해볼려고 발을 떼는 인간들은 극소수다. 가히 이정도의 모험담은 일생을 두고 한번쯤 해볼만한 치열함이 아닌가... 나도 내 현실의  프레임의 골조를 절단해 줄 전기톱같은 결단력이 있었으면 했는데도 그렇게 안되던데...... 이 아저씨는 그야말로 폭풍처럼 자발적으로 주방으로 처들어가 온몸에 요리흔적을 생채기처럼 새겨댄다,  그야말로 놀랄 지경이다. 400페이지가 넘어가는 책두께가 쉴새없이 넘어가고 요리와 음식의 즐거움이 오후 한창 때의 식당처럼 부산스럽게 쏟아진다. 


우리는 요리와 음식에서 레시피적인 가이드만을 원하곤 한다. 내가 마늘을 세워서 칼로 저밀때 어느 각도로 내려야 하는지에 대해서 애매하게 고민하거나 달궈진 플레이트위에서 뜨거운 열기를 맞아가면서 이렇게 고단스러운 폭풍 점심의 손님들을 감당해낸다는 그 느낌이 어떤지 내가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이런 것들은 대다수의 독자들이 원하는 요리책의 본분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에서 문학적 감수성을 원했겠는가. 에세이정도의 소소함만을 목표로 하기에는 그냥 딱봐도 거대 사이즈의 사전 정체성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다.  보기만해도 '이건 패착이야 이렇게해선 에세이로서 성공할수 없겠어'라는 소리나 들을 테지..이유야 가져다가 붙이면 널렸지만 정작 난 이 책을 진득히 읽을수록 '패착'이란 단어따윈 꺼낼 엄두도 나지 않았다.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만한 경험을 한 것만 같은 그런 현실감과 동조의 감정들. 그리고 마치 양념이 베어나올 것만 같은 책장을 넘기며 나도 그 자리에 있다고 생각했던 셈이다. 다 읽고 나니 든 생각인데 요리에 관한 책조차도 굳이 메뉴얼적으로 써대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다. 요리책에는 생뚱맞게도 문화와 개인적인 대소사가 머릿말로 등장하고 뒤 이어 계량적인 이야기로 본격 다큐가 되곤 했다. 그러지말고도 너무 위트있고 너무 절절하고 웃음이 날만한 일들이 음식의 세계에는 있다. 간만에 즐거운 경험이었던 것 같다. 굳이 요리사가 되고 싶지 않은 사람도 한번 정도 읽어보면 삶의 경험을 다른 브랜치에서 느껴본 것만 같은 기분좋은 착각을 느낄수 있을 것이다. 




앗 뜨거워(Heat)

저자
빌 버포드 지음
출판사
해냄출판사 | 2007-01-30 출간
카테고리
요리
책소개
지지고 볶고 튀기고 썰고 찢고! 인생에서 배워야 할 모든 것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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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ewell

2013년이 스치듯 지나가버렸다. 마치 서울에서 경기도로 넘어갈때 정신차려보니 이미 경기도였다고 느낄만큼 순식간에 경계선을 휙 하고 지나버린 느낌이다. 안녕이라고 말도 못했는데 잘있으라고 안부겸 축복도 미적미적거리다가 다 놓쳐버렸다. 매년 연말에 등장하는 키워드에 '아쉬움'이니 '후회'라느니하는 단어들이 등장하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그냥 형식적인 느낌으로 스스로를 반성해보시지라는 의식적인 통과의례를 떠올리게 한다. 언제는 아쉬움을 안느꼈던 적이 있었던가. 언제는 후회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나하며 반쯤은 비아냥과 조소속에서 피식거리면서 스스로를 솔직하게 돌아다 보고 있다. 그냥 치사하고 졸렬한거지..그러고 마무리하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고 다시 연말이 오면 뭐 비슷한 패턴으로 갈거면서 유별나게 무슨 반성과 되새김질이라니....위선적인 느낌도 든다. 그러고보면 경계니 스치듯 지나갔다더니 하는 것들은 다 핑계고 변명이고 너저분한 자기위안의 교묘한 위장일 뿐이다.


100권 읽기는 물건너갔다. 2013년에 읽은 책의 권수는 대략 70권 남짓이고, 블로그에 쓴 리뷰로 보자면 40권 안밖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게을러터져가지고 뭘 제대로 했다고 보기도 힘든 2013년이었단 소리다. 하기사 내가 100권을 읽는다고 뭐 새로운 떡밥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굉장한 뭔가를 깨닫게 되어서 정서가 함양되고 것도 아니고,,, 엄청난 책탐과 수집질에 만족감을 느끼거나 하는 그런 부수적인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읽으면 읽는거고 못읽으면 못읽는것일 뿐인게지..100권이라함은 그냥 상징적인 목표일 뿐. 이걸 이뤄냄으로써 거대한 인생의 어떤 성과물이 되는게 아닌데도 목표라는 단어하나땜에 집착하고 매달리게 되었드랬다. 어찌됐든 2013년에 읽었던 책들에 대한 후회는 별로 없다. 정말 재밌던 책도 있었고, 지루해서 미쳐버릴뻔한 책들도 있었고..... 그래도 다행이었던 건, 좀 정신차려가며 책을 읽고 요약을 하고 정리도 하면서 한권씩 읽어갔다는 점이었다. 그 정도만 해도 악습관을 많이 버렸다. (책읽고 그냥 던저버리거나 쳐박아두기. 읽은 책 기억못하기 등등..) 


2013년 몰스킨 북저널 한권을 뒤에 2페이지 남기고 다 썼다. 지난주에 교보에 들려서 북저널을 한권 더 사면서 느낀건데 난 1년에 한권의 북저널을 소비하는 속도로 책을 읽는 것 같다.  1년에 1권의 북저널이라.....뭐 그정도면 생계에 지장을 줄만큼 책탐닉도 아니고 적절한 수준의 책읽기아닌가. 나도 미친듯이 여러권의 책들을 닥치는대로 읽고 싶지만 그렇게 숫자에 집착하면서 읽어댈수는 없는 노릇이다. 독서를 하는 목적, 그리고 남겨진 느낌과 의견. 스스로 생각해보는 시간들. 현재에 어떻게 반영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등을 놓고 보자면 읽는 것으로 끝나는게 아니었는데도 한권한권 읽어해치운다는 느낌으로 읽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읽은 책들은 다 망각의 늪으로 사라져주신지 오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책상위에 쌓아놓은 책더미가 눈에 들어온다. 읽겠다고 했는데 못읽고 있는 책들의 탑이다. 2014년 초에는 이 책들을 읽으며 보내야겠지. 


언제고 늘 서점을 지나면서 들었던 생각들...책은 그 시절, 그 시점, 그 순간에 읽고 싶을때 읽어야 한다는 점...그러다보니 충동구매가 너무 심해지곤 한다.  매번 서점을 지날때면 사고 싶은 책들이 대략 10권씩 늘어간다. 하지만 그렇게 10권을 매번 구매하게 되면 내가 방에서 발디딜 공간도 없이 괴이한 책더미속에서 살아야 하는데 난 그정도의 책 탐닉자는 아니시다. 난 적절한 수준의 독서쟁이일 뿐이고 무엇보다 구매력에 한계가 그런 욕구를 나무란다. 능력되는 한도에서 책도 읽으라고 멍청아....라고.. 누가 나에게 규칙적으로 책을 공짜로 준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경제적 고려을 감안해서 책의 수급에는 굴곡이 있기 마련. 그리하여 14년의 초입부에서는 13년 못다이룬 100권 후보작들에 대한 독서부터 시작해야겠다. 어쨋든 사놓은 책이고...어차피 읽어야 할 책들이니까..저정도의 책더미라면 적어도 3월까지는 어렵지 않게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올해는 100권의 목표같은건 없다. 그저 읽어야 할 목록들을 업데이트하고 차근차근 읽으면서 생각 좀 해보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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