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nilla Essay2014. 3. 17. 11:52

야마다 에이미<솔 뮤직 러버스 온리>,<120% Cool>을 읽고 김연수<사월의 미, 칠월의 솔>을 읽었더니  핑크색 컬러 선글라스를 쓴 채, 오렌지색 방안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두 작가가 비슷한 색채감을 우려낼만한 유사문체의 소유자도,  정서상의 데자뷰도 없긴 하다. 야마다 에이미는 38.9도 언저리에서 숨소리를 거칠게 뿜어내고 김연수는 18.4도 부근의 쌀쌀함을 매개로 코트 깃을 올려세우는 느낌이니까. 그렇긴 해도 두 작품을 양손에 들고 교대로 읽어버리면 에이미의 '유화'같은 스토리의 쓸쓸함도 김연수의 '팔월의 '라'로 읽힐지 모른다. 다 같은 감기지만 증상도 다르고 앓는 수준도 다른 뭐 그런 것들 아니겠는가.


예전에도 이런 경우가 있었다. 특히 레이먼드 카버존 치버가 그랬다. 둘의 소설을 한데 섞어 읽었던 시절이 많아서 치버의 단편작을 카버의 단편작으로 오독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는데,  중독된 팬과 매니아들이 아니 그걸 어떻게 헷갈려 카버는 카버고 치버는 치버지 어떻게 둘을 혼동한단 말인가 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읽는 시기가 비슷하면 카버의 다양성이 치버의 정체성을 침범하는 경우도 종종 일어나기도 하고 치버의 스토리 플러그를  카버의 콘셉트에 꽂을 수도 있는 거다. 읽는 이의 대전제가 위력적이란 말이 괜히 생긴게 아니지싶다. 혹시라도 착각해서 치버의 책을 펼쳤는데도 내가 카버의 소설이라고 단정해버린다면...그건 그 순간부터 의심스러우나 카버의 다양성으로 읽혀질 가능성은 충분할테니..  


대체로 이런 유사성에 대한 방비로 주로 택하는 해결책은 완전히 다른 질감의 책을 교대로 읽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야마다 에이미의 <120% COOL>을 읽고 조셉 콘래드<어둠의 심연>을 읽는 식이다. 다시 돌아가 이언 매큐언<암스테르담>을 집어들었다면 다음은  로버트 어윈 하워드<시메리아 연대기 : 코난 더 바바리안>을 읽어 버리는 거다. 아무렵 말로가 콩고에서 도덕성의 타락을 목격해가며 인간성 상실의 어쩌고를 느꼈다는 걸 동조했더라도('어둠의 심연') 다음 코난이 바나하임의 하임둘 머리를 날려버리고 아탈리를 덮치려는 스토리와 헷갈릴 리가 있을까. 하지만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문득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읽어버린다면 홀든의 생애는 와타나베로 이입되버린다. 이런 '케미'가 어떤 작가의 유사성을 꿰뚫어볼 수 있는 통찰력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나에게 와타나베는 와타나베로...홀든은 홀든으로 남는 쪽이 훨씬 좋다. 


최근 잭 런던의 단편선을 읽고 그 유명한 나스 키노코<공의 경계>를 읽었다. (가끔 타입문 소설도 읽고 라이트 노벨도 즐겨 읽을때가 있다.) 때론 버거에 치즈를 끼우는 방법으로는 이런 무자비함이 어울린다. 치즈와 치즈사이에는 반드시 뭔가가 들어가야 한다. 완전히 다르다면 더더욱 좋지 않을까.



Posted by kew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