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nilla Essay2014. 7. 3. 11:44

김승옥(金承鈺)과 하루키(村上春樹), 그리고 장마비가 오는 날.


-<언어의 정원>-


대낮에도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후드득소리를 내면서 무거운 비의 진탕질이 길바닥에 시작되면 언제나 드는 생각, 조용한 조명아래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 뿐이다. 하늘은 이미 야외의 축복이 없다고 단언하듯 시꺼먼 커텐을 쳐버렸고 땅에는 페인트 튀기듯 물난리가 벌어지면 거의 모든게 성가셔 진다. 남은 건 집구석에 쳐박혀 두터운 이야기의 세계로 들어가는 출입구만을 노리고...구석에 오렌지가 터져서 번진듯한 스탠드를 그윽하게 배경삼고, 적절하고도 눅눅함이 깃든 책한권을 손에 든 채  한장 한창 넘길 때, 이 보다 더 가슴 두근거리는 일은 아마도 없을 거라고...그렇게 혼자 중얼거린다. 사실은 그럴 수가 없을 뿐이지 세상에는 스스로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계기들이 수없이 존재한다. 다들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며,  약간 시니컬하게 말하자면 용기가 없어서 책읽기로 어수선함을 감내하기 어려울 뿐이다. 왜냐면 책을 읽는 동안은 자기가 현실을 도외시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얼마전,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다시 읽었다. 더불어 <서울 1964 겨울>도, <서울의 달빛 0章>도 같이 읽어버린 건 부수적인 행운이었지 아마 . 어쨋든 '60년대의 문학적 성찰'이라는 타이틀로도 이 묘한 기분을 갈음하기는 어렵다. 예나 지금이나 시대적인 소나기가 문장과 글에 내리고 그때였기 때문에 그렇게 감동적이지 않았을까라는 추측들은 다 별로였다. 이게 어디 60년대에 쓴 글이란 말인가 아무리 봐도 2014년 여름이 시작될 무렵에 썼다고해도 하나도 이상할게 없었다. 군더더기도 없고 단호한듯 하면서도 심플하고 그저 단촐한 풍경들이 이어지고 옅은듯 깊은 듯 감정의 도랑을 패이며 지나간다.  모종의 글쓰기 기술이란게 있다면, 아마 이런 문장들이 신의 축복이라고 했던 이유가 너무나도 분명해지는 순간이다. 아 이 분은 어쩌자고 이렇게 글을 잘쓰셔가지고 후대의 문학지망생들에게 두근거리는 도전의식을 심어주셨던가. 근 50년이 지나버렸는데도 아직 기력이 다하지 않은 이 생기발랄함은 뱀파이어 같을 정도다. 무섭기도 하고....평범해보이지만 정작 해보려고 하면 흉내도 내기 어려운 어떤 것들이 되버렸다. 


이렇게 유사한 느낌을 하루키의 글에서도 받았는데 김승옥과 하루키가 왜 비슷하게 느껴지는 거지라며 한참을 생각했다. 둘은 시대적인 연배도 다를 뿐이고 장르적 유사성도 없는데다가 추구하는 세계도 다르다. 그런데도 같은 악보에 있는 프레이징 같은 느낌이다. 혹시 김승옥이 이 글들을 쓰고..하루키가 어느날 챈들러를 읽다가 우연히 <무진기행>을 읽고 그리고 <노르웨이의 숲>을 쓰고....뭐 그러면서 어느날 읽다보니 한국에도 인상적인 소설이 있었어요..김승옥 상이라고...단편들을 쓰셨죠. 업다이크도 좋지만 김승옥씨의 글도 좋았어요. 한번 읽어보세요.....아마 이렇게 추천사를 썼었어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고 이상하지도 않았을 것만 같다. 둘 사이에는 시간의 교량이 있어서 장마비가 내리는 날에 통로가 연결되고 그 다리위에서 오며가며 같은 감정을 느끼고 둘이 혹시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오호라 당신도 나와 비슷한 부류 구료 서로 인사나 하시죠 라고 악수도 하고 ....그러지나 않을까....



비가 상상을 너무 부채질 한다. 



Posted by kewell
Book Pantry2014. 7. 1. 10:18


1. 

<쿠스쿠스 크레페 라비올리>. 아...개브리엘 해밀턴의 후속작인가 싶었는데 그냥 <피와 뼈 그리고 버터>의 리뉴얼 판이었다. 사실 <피와 뼈>쪽이 더 책 커버는 감칠맛이 났었는데 <쿠스쿠스>쪽은 책도 무겁거니와 뭔가 취지와 핀트가 엇나간 느낌이다. 해밀턴식의 묘사는 적나라하고 직설적이어서 흥미롭게 읽을만하고 무엇보다 자기 이야기인지라 치열한 삶의 지글거림이 책밖으로 들릴듯한게 장점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표지에서는 그런걸 느끼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차라리 빨간 스테이크에서 베어나온 듯한 선혈낭자한 이전 책표지가 더 그럴듯하지 않은가. 아무튼 책내용이야 변하게 없으니 여전히 재밌긴 하다. 나이젤 슬레이터<토스트>, 빌 버포트<앗, 뜨거워>도 다 비슷한 부류이긴한데 유독 <쿠스쿠스>쪽이 더 직접적인 이유는 주방이 좌절의 공간이자 노동의 공간인걸 인정하는 분위기 때문일거라고 문득 생각이 든다. <토스트>는 유년의 아름다웠떤 추억을 말하고 <앗뜨거워>는 저자의 탐구 정신쪽에 더 쏠려있고... 뭘 택하더라도 요리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겐 나쁘지 않은 기억일 될 듯싶다. 


2. 

무라카미 하루키의 80년대 키워드 에세이라고 불릴수 있는 <스크랩>을 스쳐지나가듯 읽었다. 마치 에스콰이어나 브루투스 잡지를 휙휙 넘기듯 주적주적 읽어내려갈만한 소담스러운 분량의 페이지 사이사이에서 알게 된 것들은, 그의 키워드가 완전히 외래적이라는 것 정도.. 애초에 그에게는 영미문학쪽의 향기가 늘 강해왔던 터라 새로울 것도 없긴 하지만 가끔가다가는 하루키가 토속적인 일본특유의 소설을 썼던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보곤 한다. 기껏해야 두부이야기나 도쿄의 번잡스러움이라든가 출판사와 둘러싼 일적인 에피소들 뿐인 에세이가 거의 다였던 것 같다. 사소하다고는 해도 커틀릿을 말하고 맥주이야기 정도만 들어도 그는 일본스럽지가 않다. 그게 장점인지 단점인지는 더 두고 봐야겠지만..


3. 

움베르트 에코가 <푸코의 진자>에서 '상징이 어렵고 애매할수록 의미와 힘을 얻는다'라고 했는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이 말의 위력이 가끔 실감이 난다. 내용이 텅비어 있는 프레임만의 상징들을 보면서 가슴이 두근거리고 흥미진진하다고 느끼고 뭔가 있을 것 같고, 숨겨진 신비감이 회오리치는 것같은 아슬아슬함을 매번 느끼게 된다. 최근에 이탈로 칼비노의 책들을 읽으면서  유독 이런 느낌이 강했던 것 같은데 다른 한편으로는 알수없는 애매함때문에 짜증이 밀려오기도 한다. 이건 해석의 문제라기 보다는 태도의 문제일 듯도 싶긴하지만 어찌됐든 간에 읽을 때의 묘한 기분만큼은 설명할 길이 없는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자르 사전>이 나온 것도 이런 애매함과 사전식의 광대함을 빌미로 독자들을 헷갈리게 하려고 한게 아닐까 싶기도 한다. 아무튼 구구절절한 쪽보다 의미와 내용을 감추고 타이틀만 있는 신비스러움이 끌릴 때도 있는 것 같다.



'Book Pant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Book Pantry - 8월 4주차  (0) 2014.09.22
Book Pantry - 7월 5주차  (0) 2014.08.04
Book Pantry - 6월 4주차  (0) 2014.06.26
Book Pantry - 6월 3주차  (0) 2014.06.24
Book Pantry - 6월 1주차  (0) 2014.06.14
Posted by kewell

갑자기 왜 다음뷰 버튼이 사라졌나했더니...

티스토리가 다음뷰 버튼 서비스 종료를 결정했다는...ㅠ.ㅠ 

대신 하트 모양의 공감버튼이 생기는 모양....


http://v.daum.net/closing


Posted by kewell
Book Pantry2014. 6. 26. 09:59

1. 

카프카<성>을 2/3 정도 읽었다. 처음에는 종교적인 이야기인걸로 생각했는데 다들 하나같이 '관료주의'와 '거대 사회에 저항하는 인간의 어쩌고 저쩌고 하는 소리를 듣다보니 그럴수도 있겠다 싶다. 뭐가 맞는지 사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긴 하다. 카프카가 이 소설을 미완성을 남겨놓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기도 하고..그 흔하디 흔한 인터뷰 내용조차 없어서 무슨 의미인지 각자 해석이 난무한다. 그런데도 이 소설이 이렇게 줄기차게 읽히는 이유는 마치 '성'을 대면하는 인간의 심리적 모양새가 세상을 살아가는 '나자신'과 너무나 흡사하다고 느끼는 부분일거라고 추측해 볼 뿐이다.  어떻게든 주류로 끼어들고 싶지만 기존 권력층을 상징하는 '성'의 입장에서는 거리감과 위압감을 가지려고 애쓰고,..거기에 편입되지 못한 하류층은 계속해서 눈치를 보며 언젠가는 '성'과 관계를 맺기를 원한다. 이게 그저 측량사 K의 고군분투 이야기가 될 수는 없는거지 나라도 그랬을 거다. 하지만 난 아말리아나 올가가 될 수 없고 K처럼 반항적이 될 수도 없다. 참으로 적나라한 소설이란 생각이 든다. 


2. 

<선과 모터싸이클 관리술-가치에 대한 탐구>를 방치하다가 소소하게 넘겨보고 있는 중이다. 가끔은 이렇게 내용이 진중하거나 철학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책들의 정체성을 두께에서 표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럼 이 사전처럼 두꺼운 이책을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복잡한 지하철에서 꺼내서 한손에 들고 서서 읽고 그래야 하는데 그건 좀 그렇다. 그럼 이런 책은 집에서 마냥 책상위에 펼쳐놓고 희귀한 단어를 검색하기 위해 꺼내놓은 사전같이 활용해야 할까. 그것도 좀 그렇다. 책이란 어디서든 읽을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책은 가치에 비해서 너무 육중해서 문제다. 읽기도 전에 이 두꺼운 무게를 어떻게든 의식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해보지만 정말 두껍긴 해 이래가지고서야 이 책을 들고 가볍게 친구를 만나러간다던지 하는건 좀 난처해진다. 


3. 

조이스<율리시스>읽다가 우연찮게 소설에 대한 혹평을 몇 개 보게 되었는데..사실 율리시스가 보통의 소설처럼 막 읽히고 대중적이었다면 이런 혹평은 차라리 무시라도 할 수 있겠지만, 아무리 읽어도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감도 못잡을땐, 그럴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닉혼비가 <런던스타일 책읽기>에서 밝힌 바 있지만, 펭귄 클래식따위를 재미도 없는데 옆에 끼고 보여주기식 읽기를 지향하고 그럴듯한 평판으로 포장한다면 그건 위선에 가까운거라는...율리시스도 그런 부류로 혐의가 짙다. 읽고 또 읽으면 모종의 수수께끼들이 수면위로 올라온다는 수많은 커뮤니티의 평들은 '자가 해석'적일 뿐, 정확하지도 않다. 어떤 점에서는 자기위안이고 자기만족일 뿐, 진실은 뭔지 모르는 상황일 수도 있는 셈이다. 어떤 어려운 책을 읽고 그 책을 읽는 성취감을 그 작품의 정체성으로 치환해버리는 사람들의 입장에선 율리시스가 그야말로 엄청난 자기만족이 될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재미를 못느끼는게 '힐난'의 대상이 될수는 없지 않은가. 그저 재미가 없을 따름이다. 


4. 

이번주는 책이 더럽게 안 읽힌다. 다 집어치우고 잠이나 쳐 자야 겠다. 끝. 

'Book Pant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Book Pantry - 7월 5주차  (0) 2014.08.04
Book Pantry - 6월 5주차  (0) 2014.07.01
Book Pantry - 6월 3주차  (0) 2014.06.24
Book Pantry - 6월 1주차  (0) 2014.06.14
Pantry Slot - 5월 5주차  (0) 2014.05.27
Posted by kewell
Book Pantry2014. 6. 24. 15:41

1. 

구스타프 마이링크<골렘>을 읽었는데 묘한 느낌이 드는 소설이었다. 판타지로서의 골렘을 떠올리면 라이트 노벨스러워도 충분히 이해할만했는데 의외로 정신적 세계와 환상문학을 방풀케하는 기묘한 정신 세계라니....이윽고 말미에서는 지루한 정신탐구의 영역을 벗어나서 스토리적인 반전도 보여줬다. 그러고 보니 보르헤스나 알베르토 망구엘이나 마이링크나 '카발라'적 정서를 물씬 느낀다. 영혼의 천착하는 이런 류의 이야기들은 읽고나면 힘이 주욱 빠져버린다. 종교적으로는 거부감이 들지만, 문학적인 관점에서는 생각해볼만하긴 하다.  그나저나 중간에 골렘이 페르나트고 페르나트가 잿빛 모래로 부숴져 내려앉는 상상을 혼자 하고 있었다. 너무 만화를 많이 봤나 


2. 

하루동안의 외출 때문에 급히 들고 나간 책, 이노우에 아레노<양배추 볶음에 바치다>였다. 일본 소설적이란 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말하긴 어렵지만, 소소하며 인생을 돌아보는 듯한 성찰적인 깨달음이 늘 비치되어있곤 한다. 영화쪽도 마찬가지였다. <카모메 식당>도 그렇고 <지금 만나러 갑니다>도 그랬다. 일본소설의 잔잔함을 그리워할때도 있긴 한데 어떤 점에서는 시트콤 처럼 한회나 두회분량으로 인생을 정리하고 요약하는 것 같아서 우화적이고 동화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감정 과잉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사실 삶에서 어떤 종결이나 결말을 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차라리 카프카적인 결론이 더 흔하지 않나. <성>도 그렇고 <소송>처럼 말이다. 대개 우리는 현실에서 결말을 보기 어렵다. 여전히 엔딩은 요원하고 뭔가 혼란 진행 중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3. 

앞서 이야기했던 <양배추 볶음에 바치다>말고 기자라 이즈미<어젯밤 카레, 내일의 빵>도 연달아 읽었다. 뭔가 소소해보이는 가게가 있고 거기에는 숨겨진 에피소드가 있고, 그 에피소드의 전말은 '절망'을 겪고 낙담해버린 등장인물이 어떤 음식과 사물이 매개체가 되어 치유의 시간을 가지게 된다는...어떻게 보면 뻔한 이야기들이다. 그러니까. 양배추 볶음이던, 우동이던, 카레던 뭐든지 일단 이런 류의 소설에서는 초입에서 '절망'을 겪어버린 주인공들에 대해 직접적인 대면을 피하고 캐릭터는 딴청을 부린다. 나 상처받지 않는 인간이야 언제나 즐거워 하하하 그러나 알고 보면 지독히도 슬픈 사람이고 상처가 아물지도 않는 사람이란걸 알게 된다. 대략 30페이지 남짓 지나면 음울한 분위기가 캐릭터에 둥둥 떠나닌다.  모리사키 서점은 애인으로부터 '결혼해'라는 충격적인 통보를 받고, 양배추 볶음에서는 남편으로 부터 이혼을 통보받고, 어젯밤의 카레에서는 남편이 황망하게 떠나버린다. 분명 일본사람들은 가슴속에 미처 표출하지 못한 절망감과 슬픔을 안고 삭히며 일상적인 것들로 치유를 받는 이런 스토리를 선호하는 듯 싶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도 힐링된다고 생각하면 그럴수도 있다. 


4. 

카프카의 <성>을 다시 한번 읽고 있다. 어렸을 땐, 이 책으로부터 어떤 것도 느끼기 어려웠다. 굳이 실존적인 게 뭔지 알지 않았어도 성을 대면하는 K의 심정이 느껴진다. 그런 점에서 세상의 모든 샐러리맨들은 '성'이란 조직사회에 있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틀린 소리는 아니겠지. 공직사회에 있었다던 카프카는 아마 그런 부조리와 고리타분함을 그 '시스템'(?)에서 느꼈던 것 같다. 묘하게도 안티시스템적이었던 하루키의 심정이 토로된 글에서는 카프카의 성을 인용할 만큼 반항적이다. 성이나 소송은 나이가 좀 들어서 읽을 수록 더 절절하지 않을까. 하루키도 시스템화 되버린 세상에 반감을 품고 글을 쓴다고 했으니까...성에 들어가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K의 심정이라면 우리들도 그에 못지 않을만큼의 관료사회적 마인드를 품고 있는거다. K가 말미에 '너네들 따위에 굳이 승인을 받을 필요없지 나는 나만의 길을 가겠어 라고 떠나버렸다면 이렇게 까지 유명해졌을까. 


5. 

혼자서 러브 크래프트의 <인스머스의 그림자>를 읽고 그만 생선요리를 못먹었다. 비린내가 나지도 않는데 그 비늘과 눈동자라니...내 겨드랑이에서 비늘이 돋는 느낌이다. 이게 만약 랜돌프 카터였다면 픽맨들의 도움을 받아 생선괴물들을 다 무찔러 버렸을텐데.




'Book Pantry' 카테고리의 다른 글

Book Pantry - 6월 5주차  (0) 2014.07.01
Book Pantry - 6월 4주차  (0) 2014.06.26
Book Pantry - 6월 1주차  (0) 2014.06.14
Pantry Slot - 5월 5주차  (0) 2014.05.27
Pantry Slot - 5월 4주차  (0) 2014.05.21
Posted by kewell
Review BOOK/소설2014. 6. 24. 11:10



이 책의 제목 이야기부터 해보면, 원제는 <The Sense of an Ending>인 반면, 번역 제목은 영 엉뚱하게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되어있다.  이 두 제목 사이에 어떤 화학적 변형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지만, 굳이 짐작해보자면 엔딩의 역설적인 부분을 강조하다보니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라고 막연히 짐작해 볼 따름이다.  그냥 원제 그대로 썼어도 좋았을텐데.......... '엔딩의 느낌' 내지는 '센스 오브 엔딩'이라고 발음나는데로 쓰던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고 하니 뭔가 화자가 줄거리 중 끊임없이 암시를 받았을런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토니는 영 분위기파악 못하고 예감은 커녕 돌아가는 상황도 잘 이해못하는 멍 한 캐릭터여서 독자들은 의아해한다. 어쩌면 예감은 틀리지 않다고 느낀건 독자였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제목만 생각하면 장르소설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탓에 여타의 추리소설적인 즐거움을 떠올리는 독자가 많았을 텐데, 저자인 줄리언 반스를 생각하면 이 책의 정체성이 추리소설적 즐거움이 된다는게 영 어울리지 않기도 한다.  전작이었던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처럼 읽을 독자는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득히 스토리를 감내하는 것과 의도하지 않았어도 호기심을 따라 물흐르듯 문장을 보내는건 완전히 다른 일이므로 <예감>쪽은 어쩌면 전형적인 통속소설이자 대중소설이고 <플로베르의 앵무새>는 문학을 빙자한 철학소설로 보는 사람들도 꽤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두소설은 완전히 다른 소설처럼 느껴진다. 플로베르 앵무새를 읽다가 아 도저히 재미없어서 못 읽겠어 이게 도대체 무슨소리지 라고 하품하던 독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예감쪽은 아주 재밌게 읽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결과가 어떻든 줄리언 반스는 대중적으로는 좀더 독자들에게 근접해간 느낌이다. 쉽게 문장을 따라가고 스토리를 흡수했으며, 중간에 의미심장한 부스러기를 충분히 줏어먹으면서 작자가 의도했던 길로 하염없이 가기만 하면 된다.  설마설마하는 마음을 가지고 조마조마하는 아슬아슬함을 여분의 연료로 사용하면서 엔딩으로 드라이브 하는 기분은 '일반적'이고 '대중적'이며 모험적이다. 먼저 줄거리를 대략 요약해보면 이 책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토니 웹스터는 학창시절에 콜린, 마셜, 앨릭스와 어울리며 새로 전학온 애이드리언을 만나게 된다. 그러다가 토니가 베로니카라는 여학생과 사귀고, 그녀의 집에 놀러가고 나중에 헤어지고 , 에이드리언이 베로니카와 사귀게 되고...얼마 후 에이드리언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토니는 영문을 몰라한 채 무슨일이 벌어진 건지 도무지 이해를 못하지만, 에이드리언이 자신에게 남겼다는 편지를 쫓아 과거를 거슬러간다. 


이 과정이 이 소설의 메인 뼈대다. 마치 일상적이고 너무나 평범한 사건들이 벌어졌지만, 그 이면에 담겨있는 비밀이 무엇이며, 결과가 어떤 식으로 벌어졌는지에 대해서 개인의 시각으로 쫓아간다는 것을 조건으로 아주 평범하게 독자의 시각으로 사건을 차근차근 밟아간다. 토니의 시각과 생각이 독자의 견해가 되는 건 당연하다. 이를 통해서 화자는 늘 '객관적이고 공정한 정보'를 독자에게 줄 것이라고 전제해놓고 스토리를 바라보지만, 이 책의 반전은 '진실이 꼭 화자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부분에 일정부분 할애되어 있다보니 뒷부분에서의 여파가 참신하게 느껴진다. 뒤에서 맞닥드리는 진실의 모습을 두고 독자들은 대개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토니는 틀렸고 실수했으며 망각했고 무책임한 인물이었다고..그리고 드러나는 진실에 대해서 줄리언 반스가 어떤 힌트와 암시를 배치했는지 앞부분으로 다시 가서 읽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어쩌다가 사건이 이렇게 된거지 분명히 내가 놓친 모종의 복선들이 놓쳤어..너무 많이 놓친게 틀림없어 라고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언젠가 이동진 기자의 <빨간 책방>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책을 읽고 난 후 들어봤음) 이 소설은 치밀하게 구성된 한편의 정교한 조각처럼 구석구석이 짜여져있다. 에이드리언이 언듯언듯 내비치는 자신의 생각이 소설 주제 전반을 건드리고, 등장인물들이 내뱉는 대사와 상황들 속에서 은근한 암시를 뿜어내준다. 토니는 과거의 학창시절 역사수업시간에 역사를 두고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라고 했고, 콜린은 약간 웃기게도 '역사는 생양파 샌드위치'라고 했으며, 에이드리언은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고 언급했다. 영민한 독자라면 느닷없이 역사토론을 벌이는 이 대목에서 과거 기억들의 모습들이 어떤 식으로 진실을 찾아가는지에 대한 미묘한 감정들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결국 에이드리언이 말한 '모든 역사적 사건에 대해 진실되게 말할 수 있는 말은 '뭔가 일어났다'는 것 뿐이라고 하는 대목에서 우리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느끼는 파편들에 대해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게 된다. 혹시 내가 잘못 기억하는 건 아닐까?  


과연 나의 기억이 올바른 것일까. 어떤 왜곡된 표피에만 머물러 상황을 호도하고 중요한 어떤 부분들이 생략됨으로써 진정한 진실의 영역에 가까이 가지못한 오해의 역사가 진행되버린건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줄리언 반스는 이 책에서 사건의 면모를 완전히 파헤져 주지 않는다. 어느 정도에 이르면 자살의 직접적 동기와 베로니카와 있었던 일들과 포드부인를 비롯한 베로니카 집안에 묘하게 풍겨지는 이면의 숨겨진 이야기들도 완벽히 드러나지 않은채 이야기가 매조지 된다. 왜 오백파운드를 유산으로 남긴건지 에이드리언이 썼다는 편지의 내용이 어떤 내용인지도 말해주지 않았다. 답답해서 미칠 노릇이지만 이 책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사건의 전모가 아니라 어쩌면 이 상황이 벌어지게 된 '오해'의 역사, 그리고 개인의 감정적 행동이 벌여놓은 배설같은 후폭풍이다. 이윽고 망각의 세월로 흩어져버린 스스로의 오욕의 기억들은 '책임'보다는 '생각하기 싫은 어떤 추억'이 되버리고 적당히 미화되어 기억에 자리잡았다라는 것.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 이라고 종료되는 이유가 뭔지 알 듯도 싶다. 


자신의 과거가 설명하기에는 어려운 어떤 복잡한 미로에서 여전히 오리무중일거라는 묘한 느낌이 남는다. 어떤 것들이 일어나긴 했지만 그에 대해서 정확히 알기란 어려우며, 그저 일어났다는 정도만해도 최대한 알수 있는 모든 것일 수 있다는 그런 막연함이 휘몰아치고 슬며시 자기에게 유리하게 편집되 버리는 '자기위안' 장치에 당혹감을 느끼는 식이다.  혹시나 내 기억은 내가 재조립한 가짜의 모습, 왜곡된 거울같은 환영으로 남아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저자
줄리언 반스 지음
출판사
다산책방 | 2012-03-2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2011 영연방 최고의 문학상 맨부커상 수상작!2011 영연방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
Review BOOK/소설2014. 6. 18. 17:01


  

이언 매큐언이 전작들에서 악명이 높았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엽기'적인 소재를 이용해서 파격적인 이야기를 소설로 썼기 때문이다. 좀처럼 일부러 찾아보려고 해도 이런 류의 소설은 보기가 어려울수 밖에 없다. 방부 처리된 성기가 등장하는 <입체 기하학>라든지..극장에서 실제 정사를 벌이는 <극장의 코커씨>라든지..이외에도 강간을 비롯해서 근친상간같은 꺼려지는 소재를 아무렇지도 않게 연작 시리즈처럼 써버리면 독자가 생각하는 매큐언의 이미지는 뻔하다. 이런 경우, 매큐언의 소설이 개성있어서 좋다고는 해도 환영할만한 대중적 팬층을 확보하기는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원래 작가들은 자신들이 쓰고자 하는 것들을 쓰고 싶어하는 욕망때문에 상업성이라든가 대중성같은 것들을 등한시 하는 우를 범하기도 하지만, 내심 자신의 글들이 두루두루 읽히길 바란다는 측면은 아이러니하게도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보자면 매큐언은 아예 사람들이 터부시하고 거부하는 지점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길을 가는 엽기호러의 매니악스러운 작가로 아예 대놓고 공표하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암스테르담>이 등장하고, <속죄>가 등장 한다. 알다시피 암스테르담은 부커상, 속죄는 독자들의 찬탄을 불러일으키며 매큐언이 쓴 소설의 최고작이라고까지하는 극찬을 받는다. 암스테르담과 속죄만 놓고 보면, 그가 <시멘트 가든>작품을 썼다는게 믿겨지지가 않을 때가 있다. 마치 하루키가 태엽감는 새니, 양을 쫓는 모험이라든지, 1Q84를 쓰다가 알고보니 <노르웨이의 숲>을 썼다고 생각해보면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는 것처럼 매큐언이 통념을 일부러 쫓지 않았다는 전작들이 일종의 쇼맨쉽이 아니었을까하는 추측마저 들 정도다. 나도 충분히 리얼리즘적이고 평이한 일상을 노래할 수 있다는 의사표현일수도 있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소설들이 이 지점에 이르러서야 대중들의 선택을 받았다는 점이다. (평론가들의 측면은 사실 잘모르겠다.) 


속죄는 워낙 유명해서 나중에 논외로 처야겠지만, 부커상의 빛나는 <암스테르담>을 읽고 있노라면 뭔가 중간에 몰리레인이 클라이브와 엽기적인 행위를 벌이고, 그와중에 버넌과 이중적인 섹스를 즐기고, 가머니와 중간에 변태적인 행각을 하는 팜므파탈의 여성으로 그려졌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런 매큐언씨 다시 시작하셨군 그럼 몰리는 클라이브버넌의 주도아래 가머니가 살해하고 시체를 절단하고 암스테르담으로 옮기고 셋다 몰리의 죽음을 놓고 옥신각신하다가 서로 총질을 하고 셋다 사망한다는 황당한 결말의 소설이 된다고 해도 충분히 매큐언표 소설로 충분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몰리가 불치의 병으로 죽었는데 과거의 남자와 애인이 서로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비교해가며 자존심 싸움을 하고 도덕적인 논쟁을 펼치고 서로를 경시하고 질투하다가 치부를 발견하고 스스로의 본성을 넘어서는 추악함을 보여주니 어 매큐언씨가 대중적인 블랙코미디를 표방한 스토리소설로 노선변경을 한 것같은 느낌이다. 


암스테르담을 읽으면 예전 리처드기어, 샤론스톤 주연의 <마지막 연인>이 생각난다. 두여자를 놓고 혼수상태에 빠져버린 주인공 남자이야기. 남자로부터 누가 진정한 사랑을 받았는가에 대한 각자의 시각, 그리고 서로에 대한 배려같은 것들. 암스테르담은 이 영화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된다. 리처드 기어는 몰리 레인이 맡고, 샤론스톤과 다도비치는 클라이브와 버넌이 되는 식이다. 여기에 가머니가 맡을 역이 부족하지만 어쨋든 모양새는 비슷하다. 다만 스토리상 영화말미에 보여줬던 서로를 향한 미덕같은 건 없다. 대신 파국을 향해 질주하는 추한 세남자의 적나라한 모습만이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다. 소설의 제목이 암스테르담인 이유는 소설 말미에도 밝혀지지만, 이 세남자의 최종 결말을 아우르는 상징적인 장소여서 그런 듯 싶다. 처음 읽기시작할 때는 블랙코미디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점점 수위가 올라가더니 마치 지기싫어하는 남정네들의 자존심과 되먹지 못한 도덕관념 논쟁에다가 정치적인 불순함, 가족에 대한 무책임, 그리고 몰락해가는 추한 모습을 바라보는 서로간의 생각들이 엉켜서 속내가 복잡해진다. 


왜 불편하냐면, 이런 극단의 모습들이 나를 비롯한 누군가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기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던 어떤 연인으로 부터 선택을 받지 못하고 그 연인이 나에 대한 많은 비밀을 간직한채 다른 사람에게 가버렸을 즈음에는 사소하게나마 소소한 광기는 애교수준이다. 평상시 고고한 척해도 불현듯 밀려오는 모멸감때문에 드잡이질을 할 수도 있고, 냉철함은 온데간데 없고 광폭하고도 극단적인 언쟁을 소리높여 아무렇지도 않게 배설할 수도 있다. 왜냐면 우리 모두 인간이니까..그래서 <암스테르담>이 인간본성의 추악함이라고 평을 내리는 듯 싶다. 소설 초입에서 몰리레인은 죽은 채다. (아마도 표지 여인이 몰리 레인일듯.) 이미 핵심 인물이 죽은 상황에서 남겨진 3명이 남자는 묘한 경쟁을 벌이는데 이것들은 다 각자의 위치에서 결함이라고 불리우고 약점이라고 여겨질만한 구석에서 점차 퍼져나간다. 클라이브는 '예술적 자부심' (예술적 성취를 위해서 도덕적 의무감을 져버릴수도 있다는 부분), 그리고 버넌은 언론인으로서의 공정하고도 냉혹한 직설적 비평 (기사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인권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부분), 가머니는 올바르고 청렴하고 능력이 있는 정치인으로서의 생존본능 (실제로는 '고위직 개새끼'이자 '밤의황제'라고 불리우는 타락함)이 바로 그것들이다. 


서서히 이 세사람은 서로의 약점을 향해 몰리레인을 매개체로 찌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렇게 찔림을 당한 측은 이에 대한 당혹감과 모멸감으로 상대방에게 더 강도높은 가해를 시작한다. 그리고나선 폭주하는 거다. 그리고 같이 멸망. 이게 암스테르담의 주된 플롯이자 스토리라인이다. 여기서 세세하게 그 과정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이야기하는건 스포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기타 여백은 독자들이 읽으면서 채워야 하겠지만, 어쨋든 중요한건, 클라이브던, 버넌이든, 가머니이든 ..결국 다 우리들의 한 측면이라는 점, 그래서 나도 클라이브처럼 행동하고 버넌처럼 생각하고 가머니처럼 움직일수 있다는 지점이 독자들이 느끼는 <암스테르담>의 느낌이 된다. 


만약 이 책을 읽으면서 불편함을 느낀다면 '당신의 종착역은 '암스테르담'이야' 라고 마음속에 확 다가올지도 모른다. 소설말미에서 세명의 남자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협잡꾼'일수도 있으며, '창의성하나도 없는 구제할 길없는 단조로운 재능의 소유자'이며, '더러운 타락의 결론으로 가족을 침몰'시킬수도 있는 사람이란걸 일깨워준다.  물론 소설을 읽으면서 뭔가를 깨달아야지만 가치가 있는건 아니다. 다만 매큐언이 시종일관 견지했던 자신의 소설의 정체성은 본성의 추악함이 바로 우리곁에 있다라는 부분이 아니었을까. 그런게 소설속에 베어나와 가슴을 자극하면 과거가 부끄럽게 떠오른다. 결국 <암스테르담>을 읽으면서 '당신도 알고보면 그리 깨끗한 인간은 아니라오'라고 지적당한다. 좀 찝찝하고, 좀 적나라하며, 많이 부끄러워진다. 나도 구차함을 빙자해서 누군가가 내 생명을 끝내줄 모종의 장치가 있는 암스테르담으로 가야만 하나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버린다. 약간 코미디적이지만 일절 부인하기에는 솔직하지도 못하고 위선적이고 파렴치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암스테르담'은 추악함의 종점처럼 비춰진다. 




암스테르담

저자
이언 매큐언 지음
출판사
MEDIA2.0 | 2008-01-08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한 여자를 사랑한 두 남자, 그들이 암스테르담에 간 까닭은?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
카테고리 없음2014. 6. 16. 14:01




입구가 어디있는지 잠시 혼란을 겪었던 상암동 우연이란 일식집. 일식집 특유의 고급스러운 것들(?)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대개의 일식집은 고급을 빙자해서 인터리어 비용을 고객들로 부터 받아내겠다는 일념으로 후덜덜한 가격표를 붙여놓거나 아예 대놓고 '애들은 가라'식의 요정풍 인테리어를 표방해서 뭔가 답답하고 폐쇄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곤 했다. 진짜 일식집이 그렇진 않다. 도쿄에서도 그렇고 편안하고도 고즈넉한 식당들이 도처에 널렸는데 왜 국내만 들어오면 죄다 일식집은 별로 였다. 


메인 디쉬전 나오는 두부튀김. 이걸 뭐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얼마전 읽었던 <양배추 볶음에 바치다>(이노우에 아레노 작)에 나오는 군침돌던 두부튀김과 비슷할지도....




메인으로는 가게 타이틀을 걸어놓은 우동을 먹어봐야 했기에 우연 우동을 주문하였다.  자작한 소스에 우동면빨이 살아있는 듯 탱탱하고 곁들어진 신선한 튀김이 올려져있다. 일반적인 우동이라면 면이야 그렇다치고 특유의 감칠맛이 도는 국물이 핵심일텐데..우동이란 영화를 봐도 그렇고 국물이라고 할 수도 없는 소량의 소스가 면과 어우러져 비벼먹는 우동도 적지 않았드랬다. 아마도 그런 우동이었을 것이다. 







큰지도보기

우연 / -

주소
서울 마포구 상암동 3-5번지
전화
070-7532-3158
설명
-



Posted by kewell
Review culture/Movie2014. 6. 14. 14:01



2003년 4월 1일, 홍콩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에서 그가 투신하였다고 매체에서 떠들어댔어도 당시엔 잠시동안이나마 다들 믿지 않는 눈치였다. 게다가 그날은 만우절이기도 했고... 일부러라도 그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믿어야했다면  그건 유머라곤 전혀없는, 그래서 만우절의 유쾌함을 감당해낼 수 없는, 지지리도 따분하고 진지한 사람들의 몫이었을 것이다. 이윽고 정말 그가 영영 떠났다는걸 알게 되었다. 장국영(張國榮)이 그렇게 떠난지 어언 11년이 지나고 있다.  거짓말처럼 그가  떠난 직 후,  오래도록 이어져온 청춘의 일기장 귀퉁이를 접고, 이제 그만 로망의 시절을 끝났다며 글쓰기를 멈춰버린 한 친구와 생전에 그가 출연했던 영화를 몇 주동안이나 보면서 퉁퉁부은 눈으로 나타난 동기 여자 아이들처럼 다들 소리없는 울음 바다속에서 기억을 침잠시키며 그렇게 지냈다. 그가 그냥 자살 정도로 떠난게 아니라 추억의 일면을 통째로 할퀴고, 기억의 포스터를 갈기갈기 찟어놓고 떠나갔기에 쉽게 잊혀질 수는 없었다. 오래도록 기억의 잔영들은 부유하기 마련이고 그러다보면 언제고 다시 수면위로 불현듯 떠오를 때가 있다. 너무나 황급하고 불현듯 떠나버린 '장국영'이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장국영에 대한 이미지들이 로망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건 1987년 즈음이었다. 1987년과 세상을 떠난 2003년 사이의 간격은 내 삶의 '가시광선' 대역 정도여서, 보이는 것들로만으로도 충분히 삶을 다반사 시킬 만큼의 화려한 스펙트럼 사이사이에 모종의 스타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열렬하게 지지하고픈 스타들이 더 많을 수록 좋았으니까.. 모두가 책받침에 홍콩 스타들을 끼워놓았고 3류 동시 상영관에서 아침부터 오후 늦도록 반복해서 느와르와 무협을 보았으며 하이틴 스타들이 출현하는 드라마를 신문 편성표를 봐가며 쫓던 때이기도 했다.   




며칠 전 친구놈이 나에게 마누엘 푸익(Juan Manuel Puig)<부에노스 아이레스 어페어>(The Buenos Aires Affair,1973)를 빌려달라고 했었는데, 나는 그 이유를 짐짓 알고 있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어페어>는 마누엘의 푸익의 또 다른 역작, <거미여인의 키스>(El beso de la mujer araña)를 읽고 난 뒤, 푸익의 서적들을 죄다 읽어봐야겠다고 다짐한 이래 뒤지고 뒤져 찾아낸 책이다.(현재 품절 상태.) 구하기도 어렵고 남들에게 빌려주기도 싫고 해서 티내지 않았었는데 어쩌다가 그만 친구의 눈에 포착되었던 듯 싶다. 아마도 친구놈은 <해피투게더/춘광사설>(春光乍洩: Happy Together, 1997)를 봤을 것이다. 장국영의 기일이 오고, 추억이 살아오고, 그러다가 <해피투게더>를 보고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떠올리면, 나라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빈티지 하늘빛'을 묘사해둔 어떤 것이라도 찾아봤을 것이다. 이미지의 편린들은 종종 기억속에서 드리운 낚시대를 기다린 채 숨죽여 세월의 심연속에서 노니다가 '부에노스 아이레스'같은 미끼에 응답하는 거다. 굳이 봐야 했다면 난 <아비정전> (阿飛正傳, Days of Being Wild-1990) 쪽이었을 거다. 그게 더 효과적인 미끼였지 싶다..나에겐..


그 친구와 나는 학창시절에 같이 <쳔녀유혼>(倩女幽魂,-1987)을 본 죽마고우다. 그래맞아 천녀유혼. 그러고 보니 오랜간만에 떠올려보는 '로망(Roman) 키워드'다. 절절히 기억했던건 <아비정전>쪽이었지만 사실 유명세는 <천녀유혼>쪽이 맞지 굉장했으니까. 당시로선 슬쩍 문이 열리면서 등장하는 머리칼 날리는 왕조현에 다들 넋을 놓고 빠져버려서 정말 섭소천이 유혹하려고 했던 남정네가 영채신인지 우리였는지 가늠이 안될 정도였다.  연약한 서생 영채신(장국영)과 난약사의 귀신 '섭소천'(왕조현)의 로맨스를 스토리로 한 영화. 영화 초반부 난약사에서 공중으로 쏟구치며 연적하하우형이 검술을 펼치고 난 뒤 두 칼끝이 장국영을 겨냥했을 때부터 우린 동시에 이 유약한 서생이  우리들의 '왕조현'(王祖賢)과 엮이게 될 것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고, 실제로 이 착한 청년은 아름다운 귀신 섭소천(왕조현)과 사랑을 하게 되었다. 이때엔 나뿐 아니라 주변의 친구들도 그랬고 하나들 같이 실제 장국영이 왕조현과 연인이 되기를 은근히 기대했었다.  우리가 그렇게 기대했다고 해서 장국영이 어느날 왕조현에게 우리 팬들도 원하는데 한번 사귀어 봅시다라며 영채신처럼 고백할 리 없겠지만 현실의 우리들은 판타지의 두 커플이 현실이 되는 것만큼 멋진 것은 없을 거라고 여기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커플케미로 보자면 역대급이라고 본다.) 



내 기억속의 장국영은 그렇게 해서 전면으로 등장했다. 천녀유혼의 히트덕에 <영웅본색>(英雄本色-1986)도 따라 봤고, 연이어 느와르에 중독되고 베레타의 총소리에 익숙해지며, 덕택에 아주 낯간지러운 '강호의 의리가 땅에 떨어졌다'는 유치절정의 문구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굉장히 오그라드는 문구들이었다.)  영웅본색의 장국영을 기억하고서도,  비디오 샵에서는 장국영의 인기를 이어가고자 우후죽순처럼 과거작들을 내놓았는데 <위니종정>((爲你鍾情-1985)이라든지 <우연>(偶然-1986)같은 걸 빌려야 한다고 극성을 부리던 누나들 틈에서 장국영의 존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장국영의 당시 이미지는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여린 청년의 이미지였다. 유약하고 뭔가 시류에 흔들거리고 마음속 깊이 간직해놓은 비밀이 있으며 남모를 고뇌에 시달리며 우울해하는 이미지로 화해가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비정전>에서도 그렇고 이후 대중들이 좋아라 했던 무협물 <백발마녀전>에서도 그렇고, 그 그늘은 쉽게 걷혀지지 않았다.    


그리고선 장국영이 <동사서독>에서 서독으로 분했을 때, 차라리 본인을 위해서도 좋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서독이야말로 현실 감각적이고 생을 우울하게 바라볼 지언정 한탄하지 않으며 비열해질 수 있는 캐릭터였으니까, 어떤 슬픔을 머금고 그것을 속에 감추고 비뚤어진 시선으로 세상을 종횡한다는 그런 느낌의 캐릭터로 변해간다면 분출구로서 장국영은 좀더 현실적이 되어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암흑가의 협박이네뭐네 하면서 은퇴소동을 일으켰던 장국영의 입지와 애정전선은 대중들이 기대했던 그림으로 그려지지 않은 채 점점 괴이한 시간들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가 <이동공간>에서도 그렇고 <해피투게더>에서도 그렇고 왠지 자신의 실제 이야기를 영화를 통해서 하고 있다고 느낄 무렵, 일이 벌어졌다. 



가끔은 장국영이 미로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그만 힘이 다해 버렸다식으로 생각한다. 그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미스테리하지만 그렇다고 영화와 현실의 우울한 정서가 그를 '자실'로 끌고 갔다고 생각하기 쉽지 않다. 아직까지 어떤 것들이 진실이었는지도 모르겠고...다만 팬의 입장에서 한가지 분명한건 그가 여타의 홍콩 느와르 스타 답지 않게 올곶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면서 작품을 선택해 왔다는 것과 어떻게든 스스로 그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애써왔다는 사실 같은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인기 작품들보다 '동사서독'과 '해피 투게더'와 '패왕별희' 등등의 작품을 눈여겨 보게 된다. 


로망은 로맨스의 캐릭터인데도 그가 그만 로맨스에 실연을 겪고 어떻게 나는 살아야지라고 방황할 무렵, 팬들은 그에게 그만 진지한 구석을 발견하고 아..장국영은 그랬던 건가라고 생각한다는 것. 그게 장국영이 나름의 삶속에서 성숙해가고 있었다는 방증이 아니었을까. 그렇긴 해도 역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는건 왕조현을 지긋이 바라보던 <천녀유혼>의 서생, 쪽빛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부에노스적 풍광이 어우러진 <해피 투게더>, 사막의 모래바람속에서 옷깃을 여미며 쓸쓸히 내뱉던 깊은 인상의 장면들이 떠오를 뿐이다. 그렇게 보면 관객들은 배우들에게서 자기가 보고 싶어하는 부분만을 볼 뿐이다. 배운 본인이야 어찌되었던 간에 우리는 추억속의 로망을 기억하면서 그 배우가 그렇게 살아주길 기대한다. 



장국영이 작금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이유는...그의 과거가 내 추억과 결합되어 늘러붙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미 합선되버린 전기회로처럼 이미 터져서 붙어서 이젠 떼어낼수 조차 없게 되버렸다. 영원히 그 부위는 그대로 스파크가 터질것이고 현실의 전기 콘센트가 꽂히는 날에는 내 마음의 전기충격이 가해질 테지. 그가 좀더 살았더라면 온전히 유지된 채 소소하고도 잔잔한 배경음악이 되어 주었을 텐데..이젠 피해갈길 없는 아쉬움이 되버렸다. 그래서 말인데 요즘에서는 장국영같은 배우를 보기도 어렵고 등장히지도 않는다. 우리는 서서히 대중의 욕구를 쫓아 어울리지도 않는 괴이한 CG가 난무하는 새로운 풍의 중국 영화를 보게 되고 거기에서 온라인 캐릭터같은 배우들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대륙의 배우들은 돈은 많이 벌 거야..

저 정도로도 괜찮은 걸까.


장국영 같은 배우들도 한때 있었는데....

세상이 어떻게 된거야? 정말 거짓말이라도 장국영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채, 혼자 어느 지방 산간에서 자신이 찍은 영화를 보며 슬며시 미소짓고 있기를 허황된 마음으로 바란다. 아마 내 세대가 끝나면 기억조차 안나는 배우가 되겠지만 서도....




'Review culture > Movi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사서독(東邪西毒 : Ashes of Time) - Redux version  (4) 2013.09.15
Posted by kewell
카테고리 없음2014. 6. 14. 13:53

나는 커피번, 혹은 모카번을 좋아한다. 

커피번에는 특유의 커피향이 담겨있기도 하지만, 겉이 살짝 딱딱하고 속은 말랑말랑한 이 구조야 말로 출줄할 때 최고란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커피번의 약점은 누가뭐래도 만들어진 후 얼마 후에 먹느냐에 따라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를테면 만든 직후에 먹는게 가장 최선. 그리고 1시간 후, 3시간 후, 반 나절후, 이윽고 다음날까지 이어지면 서서히 표피의 의연한 단단함이 서서히 그 힘을 잃고 나중에는 전혀 표피층의 무덤덤하고도 의연한 무엇이 느껴지지 않은 채 자포자기의 형태로 뭉그러지게 된다. 나를 이런 실온에 오래두면 난 공기중에 떠도는 모든 수분을 먹고 물먹는 하마처럼 축 늘어져버릴거라고 ..모카번은 그렇게 원망하게 된다. 그리하여 커피번은 만들어진 직후에 먹어야 제 맛이다. 


대개의 모카번이 제과점 오전에 테이블에 놓이고 약간의 시간 동안 다 팔려나가는 이유가 설명이 된다. 적어도 제빵사가 만든 '번'들은 재빨리 사가서 먹어줘야 하는 것이다. 한번은 모카번을 만들어보고자 스스로 시도해 본 적이 있다. 바로 아래 사진이 처음 만들었을때의 모카번인데 그럴듯하게 나와 준 듯 싶지만, 사실 저건 사진의 마술일 뿐이고 속이 영 꽝이었다. 푸석푸석해서 맛도 별로 없었고 부드러운 촉감이 거의 없다시피해서 표피만 뜯어먹고 싶을 정도였다. 


좀더 노력해서 '번' 다운 '번'을 만들어와봐야 할텐데, 다들 마카롱도 그렇고 번도 그렇고 제과에 관련한 곳에 발을 디디면 정말 스트레스 받는다는 말들을 이곳저곳에서 하는 탓에 공포감이 들어버렸다. 언제고 번과 마카롱과 쇼콜라 케익들의 푸념과 욕설이 들릴지 모른다. 이렇게 만들어서는 아무도 안먹는다고 나를 이렇게 만든건 비극이야 내 정체성을 돌려줬으면 좋겠어 라고 모카번과 마카롱이 컴컴한 자정이 지난 어느 순간에 푸념들을 털어놓을런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만드는 것이야 자유롭지만 만든후에 남아버린 '빵'으로서의 역할에 이르면 왠지 모를 '책임감'이 들곤한다. 


이럴땐 이 모든 빵을 만든 내가 꾸역꾸역 먹는 것외엔 도리가 없겠지. 




Posted by kew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