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BOOK/철학-사상2018. 8. 3. 22:09


우선, '마르크스를 위하여'를 읽게 된건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그저 옛날 너무 쉽게 넘어갔던 마르크스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마르크스를 '전염병'처럼 취급했던 시절이 있었으니까, 그건 정말이지 뭣도 모르기도 했고,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무슨 큰일이 날 것마냥 뒤돌아서 휙 달아나버리는 것 외에는 다른 행동은 생각지도 못했던 그런 시절이기도 했다.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너무 길어지니까 거두절미.

 

우선 마르크스를 너무 잘 모르고 지냈다. 변증법적 유물론 외에 할말이 없다. 아는 것도 없고...하지만, 마르크스가 원래 그런사람이던가하면 너무 막 대한 느낌이 들 정도로 하찮은 인물이 아니란 점에서 좀 예의가 아닌듯 싶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이 나이를 먹고 마르크스를 읽는 것도 한참 늦긴했지만 궁금증에 나이가 별무소용..어찌됐든 2018년은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의 시기라고 하니 서점들의 가판대에 한참동안 마르크스 서적이 올라왔다. 선택하기 좋은 '읽기'가 될 수 있다.  

 

마르크스 책이야기를 하면 여기서 더 길어진다. 요약해보면,

마르크스를 알려면 원래 칸트와 헤겔에서부터 이야기가 등장하곤 한다.

특히 헤겔이야기가 나오고 나면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서 '이성'의 역할이 좀 더 강조되고, 그가 '역사는 이성이라는 정신적인 힘이 변증법적 자기전개를 해내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던 것을 보면 헤겔이 강조했던 정신적인 힘, 즉 이성의 중요성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정-반-합의 변증법이 나온다. 헤겔이 말했던 사회적 발전사를 보면 법지배 이후, 도덕, 인륜, 시민사회, 국가로 발전하고 최종 발전적 형태를 국가로 봤다. 이런 독일의 관념론 여파는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면 프랑스는 이미 혁명으로 앞서가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독일로서는 헤겔의 이런 강조가 뭔가 두근거리는 미래를 기대하게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청년헤겔학파의 '포이어바흐'가 등장했을 때, 종교적 비판이 기독교로 이어지고 헤겔의 철학에 '유적본질'과 '소외'라는 개념을 덧붙여서 '유물론'화 시키는 과정이 전개된다. 그러니까 인간이 종교를 만들고 그 종교가 인간을 지배하는 구조, 그리고 그 과정에서 유적본질이 소외당한다는 논리는 당시로서는 관념론적으로 헤겔을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서 유물론을 슬그머니 등장시키는 아주 좋은 흐름이었다. 마르크스는 이 포이어바흐를 이어받아 소외의 주동자를 '종교'로 보지 않고 '국가'로 대치시키고 국가해체가 되어야 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형성을 부르짓게 된다. 그리고 이 와중에 독일의 관념론을 탓한다. 관념론에 바로 '실천'이 없는 구조때문이었다.

 

'이성은 현실이고, 현실이 이성이다'라는 이야기에는 관념자체로 마무리가되는 그리고 변화를 주동할 엔진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는 논리. 그리고 변화는 관념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천'에 의해서 가능해지고 그러려면 프롤레타리아트같은 계급이 나서야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는 (알튀세르에 의하면) 여전히 관념론과 포이어바흐적 체계를 버리지 못햇는데 '변증법적 유물론' 즉, 역사를 이야기할 부분을 자신의 논리에 위치시키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범하고 만다. 그가 차용한건 포이어바흐의 '소외' 그가 아무리 국가와 노동으로 소회를 확장했어도 결국 사회를 설명하는 역사에 대한 논리를 펼칠수가 없었고, 이윽고 포이어바흐의 테제를 발표하면서 '사적유물론'을 말하기 시작한다.

 

이야기가 길었지만 이 과정까지 오면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가 인식론적인 단절이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청년기의 마르크스와 이후 완성형 마르크스가 서로 달랐음을 주장한다. (인식론적인 단절은 가스통 바슈라르의 이론이다. 변화가 일어나는 형태는 불연속적이며 단절의 형태로 발전한다는 주장) 그리고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의 경제적토대가 결정한다는 논리에서 '모순'이라는 지점을 알튀세르가 강조하고 모순이라는 형태가 마르크스주의의 사회를 진행하는 힘으로 간주했으며, 모순이라는 내부구조는 다양한 형태의 무순이 존재, 주된 모순과 그렇지 않은 모순간의 지배형태가 안에서 재설정되기도 한다는 구조론을 설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설명하기 쉽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으며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짧게 설명했다.

 

솔직히 마르크스를 위하여는 초심자용이 아니다. (잘 모르시는 분들은 이 책부터 덥석 잡지 않으시길 바란다.)

마르크스를 읽으려면 우선은 지식인 마을 시리즈로 나온 '헤겔&마르크스, 역사를 움직이는 힘'같은 책을 먼저 읽고 그리고 난 후 백승욱씨의 '생각하는 마르크스'같은 책이 더 좋은 루트다. 깊이있는 독서를 하겠다는 일념으로 루아 알튀세르의 책을 덜컥 잡아버리면 처음부터 변칙 마르크스 및 너무 앞서가는 마르크스 독해를 하는 길로 접어든다. 그리고 그 어려운 문장에 질려버려서 같은 자리를 뱅뱅 돌 수도 있다.

 

루이 알튀세르의 책이 이렇게 어려운 이유는 ? 바로 마르크스를 새롭게 해석하는 관점을 독특하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우선 간단히 표현해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과학의 영역'으로 끌고 오기 위해서 과학주의화 시킨 장본이기도 하며 굉장히 독특한 시각으로 마르크스를 다시 독해한 인물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사실 예전부터 여러가지의 논쟁거리를 가지고 들쑥날쑥했었는데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문제때문이었다.

 

1. 마르크스는 청년마르크스와 이후 마르크스가 다른 마르크스인가

2. 헤겔의 변증법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은 다른것인가.

3. 포이어바흐에서 제기된 헤겔청년주의의 핵심은 마르크스에 와서 어떻게 바뀌었는가

4. 마르크스는 인식론적인 단절이 있었는가

5. 마르크스는 초기에 정말 휴머니즘을 답습하고 있었는가

6. 상부구조를 결정짓는 하부구조의 경제적토대는 최종 심급인가

7. 모순은 구조적인가?

 

이야기를 하자면 너무 긴 이야기들이 난무한다.

하지만 알튀세르는 위의 논제들의 대부분을 굉장한 시각으로 설파했다.

알튀세르가 보여준 당시의 논고들에는 마르크스주의가 앞으로 어떻게 가야하는 지 미래상을 제시했다고 하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 알려졌고, 이 후로도 엄청난 논쟁을 양산했다. 그래도 결국 알튀세르는 한획을 그었다고 생각이 든다. 그가 마르크스주의를 어느정도는 구조주의의 영역으로 자의든타의든 끌고 왔고, 이를 통해서 정치적 철학과점외에 문화적으로도 시선을 제공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마르크스이론을 적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으니까.

 

 

이 블로그에서 알튀세르의 학문적인 내용을 요약하면 너무 과하다고 생각한다. 각자의 독서영역일 뿐이다. 

 

 

Posted by kewell
Review BOOK/철학-사상2014. 3. 7. 11:58


"우리는 어떤 편견의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말처럼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말도 드물다. 대개의 경우, 개개인의 실존적 관점을 강조하기 마련이고 주체적인 위치에서 능동적인 시선을 더 설득적으로 받아들이기 마련이니까. (당연하지 않은가 '초인'의 지위는 여전히 중독성이 있다.) 상징적 질서와 관련된 '무음'(無音)의 기제들 한복판에서, 인지하지 못했던 '무지'의 영역이 소리없이 '의식'의 영역으로 슬그머니 기어나오게 되면 실존적 자아란는 말이 왜 그렇게 현대의 즈음에서 무기력한지 이해하게 된다. 설령 모호하고 너무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논증으로 둘러쌓여 있다고 할지라도 은근한 무의식조차 '그럴지도 모른다'고 점령당할수 있을만큼의 참신성이 있다. 그걸 알게 될 때의 섬뜩함은 또 하나의 진실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런 이야기들이 어느날 뜬금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진 않았을거라는 추측도 하게 되고 이면의 계보를 쫓다보니 사상의 줄기를 성장해왔음을 알게도 된다. 


<구조주의>는 대중들에게 어려운 지위에 놓여있다. 헤겔과 마르크스가 지녀왔던 대중성은 어느정도의 일반화된 상식의 선에서 읽히지만 이후 소쉬르를 비롯하여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에 이르기까지는 '관심사'의 영역에서 읽히는 대상들이다. 제아무리 유명 철학자가 설파한 몇가지의 논제를 이해한다고해도 이 후의 컨셉을 붙들고 깊이 들어가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실패작이나 다름없던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오로지 참고적 측면에서 잠재의식이 거론될때만 등장하는..)이 라캉에 의해서 살아날때, 묘한 호기심이 일었다고 치더라도.., 슬라보예 지젝의 광풍과도 같은 아시안에서의 인기를 감안해도 여전히 그 난이도는 쉬이 내려갈수 없다. 그리하여 '구조주의'는 포스트모너니즘과 여타의 현대미술사를 비롯, 수많은 인문학자들의 '용어'로 남아서 쉴새없이 인용되며 위용을 자랑하는걸 넋놓고 바라만 보는게 일상이 되버린지 오래다. (물론 이건 일반 대중들의 시점이란 점에서..)  대중들은 그저 '그것이 어떤 무형질의 찰떡이라도 되는 것마냥 '그런것이려니'하며 받아들이고 은근히 이해할듯한 말듯한 태도를 유지하면서 스쳐지나갔을 확률도 꽤 크지 않았을까. 


어떤 인문학자들의 컬럼과 글들에서 바르트와 푸코의 핵심 명제들이 인용되면서 '현 상황'을 설명하는게 유행인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그 비유와 은유가 적절한지 알아채는 건 그렇게 쉽지 않다. 그건 무식의 범주에서 스스로가 그렇게 초라하지 않다는 걸 감추려고 애쓰는 관객들의 묵인과 맞물려서 부풀려지고,  도대체 이 분께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대개 뭐 이런 정도의 말을 하고 싶어서 비슷한 출처를 인용하는 것이겠지 하고 추측정도로 넘어가주신다.  그렇게 내용의 증명은 불가능하며 특히 원전의 타당성과 기본적 컨셉조차 캐치하는건 요원한 일이 된다.  구조주의 계열사에서 수없이 치고 빠지는 용어들의 향연에는 이런 '지적허세'가 과포화된 채 부유하며 평론가들에 의해 과용되어서 일반인으로선 그 범주로 들어갈 용기와 시간이 아쉬워진다고나 할까. 이래서야 또 하나의 지적인 허세 장벽이 세워지는 꼴이다. 뭐 당신은 몰라도 돼. 그런게 있어..정도나 될까? 업계의 전문가들조차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이 현상을 보면서 앨런소칼 처럼 '지적사기'를 내놓는 용기는 거의 혁명적인 일이지 싶다. 일반독서가들로서는 어림없는 수작으로 그들에게 비쳐질 것이다.  


철학서인건 인문학서이건 그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쓰여졌는지를 가늠하는 시금석은 등장하는 '예시'의 질을 보면 안다고 했다. 난해함을 해독하는 길은 저자를 의도를 알고 그것을 이해한 다음 쉽게 풀어서 일반이들의 일상에서 보여지는 실제 상황에 붙여볼 수 있어야 한다. 철학은 더더욱 그런 연관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말인데 학자들의 시선에는 그런 예제는 비효율적 낭비라고 인식되어져서 등장한 용어의 재반복에 더 할애하는 경향들이 보이곤 한다. 책들은 어렵고 원전이랍시고 풀어놓은 소개서조차 이걸 읽어도 모르는데 이 분은 제대로 이해하고 쓴 걸까라는 의구심을 지울길이 없다. 역시 별개 아니라는 걸 간파하려면 아주 쉽게 설명해보시오라는 물음을 저자들에게 던져줘야 한다. 그래놓고 제대로 설명하는지 가만히 들어보면 그 저자의 진면목을 알수 있다. 그래서 이 책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는 정말 괜찮은 책이라고 불릴 수 있겠다. 


뜬금없는 소쉬르의 언어학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지도 않고 그나마 익숙한 헤겔마르크스 이야기를 먼저꺼내주고, 대개의 교과과정에서 들었을 '계급'에 대한 이해와 '노동'으로 인한 존재인식의 차이점, 고지식해보이는 프로이드의 억압 메커니즘을 쉽게 설명해주고 우리는 결코 우리를 이해할 수 없다던 '니체'의 철학을 알기쉽게 연결시켜준다음 소쉬르와 푸코의 단계로 전이 시켜준다. 왜 푸코가 평론가들의 기준점이 되었는가를 알수 있는 몇가지의 깨달음도 등장했고 (근대사회에서 인간의 '표준화'를 목표로 삼았다는 부분을 읽어보면 인식의 기준점이 탈중심화되어가는 과정을 알수 있다.) 바르트의 텍스트이론으로 야기된 비평의 기본 원리도 슬며시 생각하게 해준다. 물론 일반인들로서는 약간 축약적으로 설명된 레비스트로스의 이항대립의 조합이야긴 어렵지만 대개의 경우 많은 사람들의 생각속에는 반드시 레비스트로스적인 추측이 남아있다. "인간이 사회구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가 인간을 만든다' 라는 지적같은 것 말이다.  


라캉에 이르러서도 커뮤니케이션으로 이어지는 부분을 세밀하게 잘 설명해주었다. 라캉은 좀 논란의 대상이다. 이미 수없이 많은 저작들의 난해함과 앞서 이야기했던 지적사기 사건을 통해서 '과학적 논증'의 오류부분을 들먹여 평가절하하더라도 어쩔수 없긴하다. 다만 논증적 방법부분은 제쳐놓고서라도 그의 이론을 슬며시 들어보는건 나쁘지 않는 선택이라고 본다. 이 책의 목적은 아무래도 '구조주의의 쉬운 이해'였다는 점을 볼 때, 일반독자에게 충분한 설명을 간략하고 쉽게 해주었다고 볼 수 있다. 만약에 이 분야에서 더 관심을 가져보리라 마음을 먹었다면 이런 책에서 출발하는게 굉장히 효율적일 것이라고 믿는다. 비록 얇고 너무 성의없어 보일런지는 모르겠지만 대개 이념과 사조, 그리고 철학의 이면에는 과용량의 논술보다는 쉽게 설명된 얇은 가이드 정도로도 의욕에는 부담이 없다. 그래서 말인데 실력자분들께서는 이런 서적을 남발해주시는게 더 낫다. 그래야 지적허세질이 습관이 된 일부 사기꾼들의 허풍들을 알 수 있게되고 그 과정에서 '생각'의 통찰이 생길 것이라고 믿는다.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저자
우치다 타치루 지음
출판사
갈라파고스 | 2010-10-0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2002년 출간 이래 증쇄를 거듭하며 단 한 번도 스테디셀러의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
Review BOOK/철학-사상2013. 9. 28. 09:24


이 책의 원제가 '셜록홈즈로 보는 스토리텔링의 모든기술'(on Conan Doyle: Or, The Whole of Art of Storytelling)이다보니 약간의 오해의 소지가 생길 수도 있겠다. 아마 대다수의 독자는 제목의 뉘앙스로부터 분명 '<셜록홈즈를 읽는 밤>을 기대했거나 <코난도일의 글쓰기 방법>이라던지 이것도 아니면 <코난도일은 셜록흠즈를 어떻게 썼을까>정도의 내용을 기대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이 책의 진실은 '코난도일이 저작했던 책들에 대한 소개'쪽이 오히려 더 가까운 것 같다. 


코난도일을 생각하면 '셜록 홈즈'(Sherlock Holmes)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데 이는 그의 다른 작품세계를 생각할 때, 축복이자 불행이었다. 셜록의 정체성을 벗어나기 그만큼 어려웠다는 이야기가 될테니까. 그렇지만 코난도일을 소개하겠다고 <잃어버린 세계>나 <마이커 클라크>, <백색용병단>이야기를 해봐도 독자가 과연 들어줄까 과연 셜록만큼 책종이가 뚫어져라 몰입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엄밀히 말해 저자도 '셜록을 읽는 밤'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마치 골수 셜로키언이 '셜록'을 이야기하고 싶어 언저리의 이야기를 밑밥으로 깔아놓고 틈을 엿보면서 미소짓고 있는 장면처럼 말이다.  


아마 더다(이 책의 저자 : Michael Dirda)가 서두에 인용했던 그레이엄 그린의 '나이가 든 다음 우리는 어떤 책을 존중하고, 거기서 즐거움을 얻고 , 또 이미 품고 있던 선입견을 교정하는 기회를 가지며 책을 통해서 이미 마음속에 존재하고 있던 확신을 재발견하는' 그런 경험을 고백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최소한 폭풍이 몰아치고 쇠덩어리같은 회색의 오후에 코난도일의 소설을 읽어던 유년을 추억했던 것이겠지 싶다. '위어드 테일스', '블랙마스크' '섀도', '스릴링 원더스토리즈'같은 잡지들에 대한 추억을 알길 없는 국내의 독자로서는 이런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에 그리 크게 동화되진 않겠지만 어차피 유년으로 치자면 '소년중앙' '새소년' '어깨동무' 정도의 잡지에서 홈즈이야기를 우리도 몇번이고 접했을테니 비슷하게는 그 심정을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결국, 이야기의 포커스가 셜록홈즈가 아니라면 코난도일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지루하고 따분할 수도 있다. 솔직히 이 책에 등장하는 코난도일의 다른 작품들은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생경한 작품들 투성이다. <마이커 클라크>(1889)도 썼고 <백색용병단>도 그렇다. <잃어버린 세계>같은 경우에는 비록 조지 에드워드 챌린져 교수가 히어로적 설정이 아님에도 어드벤쳐라는 특징과 맞물려서 꽤 알려지기도 했었다.(최근에 영화로까지..) 그래도 도일의 자랑스러운 작품들 이력들에서 '셜록'이외에 다른 아무런 기억조차 떠오르지 않을땐 한가지만 선명해질 뿐이다. '지지리도 재미없는 소설' 아니었으면 '셜록홈즈'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범작들이라고 ..그래서 인지불가능의 영역에서 세월의 먼지를 얹으며 잊혀져가는 것이겠지. 그게 우리의 잘못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다 코난도일 탓이지뭐..


셜록을 좋아한다고 해서 '코난도일'의 다른 작품들도 같은 선상에서 좋아해주면 좋겠지만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코난도일의 정체성과 가치관, 그리고 성격, 글쓰는 스타일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들을 알게되는 부수적인 재미가 따라붙을 뿐이다. 덕분에 저자도 밝힌 바와 같이 약간은 인종차별적이고 '심령주의'에 물든 코난도일의 일면들이 드러나고 '명예주의자'이자 '대영제국의 식민주의'정책에 딱히 비판적 시각을 갖고 있지 않는 보수적 성향도 알게된다. 맹신적이고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 되기에는 여전히 하자많은 작가로서의 모습에 실망감이 밀려오는 팬들도 있겠으나 어쩌면 그가 추구했던 것은 '셜록'만의 세계가 아닌 '모험'의 세계 전체를 꿈꾸는 순수성을 감안하면 여전히 그는 활력넘치는 작가였던 것으로 보인다. 어쨋든 작가는 코난도일의 셜록그림자를 지우지 못하고 몇번의 토로를 거쳐서 '홈즈'를 썼다는 점을 설득력있게 밝혀준다.


 '최고의 문학이란 독서이후 더 나은 사람이 될수 있는 작품을 뜻한다. 셜록홈즈를 읽는 사람은 물론 더 즐거운 시간을 보냈겠지만 아주 높은 차원에서 예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가능성은 없다...중략...셜록홈즈는 절대로 고귀한 문학이 될 수 없다'


동감이지만 셜로키언의 입장에선 약간의 쓸쓸함을 느낄수 있지 않을까. 어차피 홈즈를 통해서 무슨 문학적 카타르시스를 느끼기 위해서 읽지 않는다는 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도일의 가치가 좀 더 '문학'적인 부분에 치중되어 있기때문에 셜록홈즈가 폄하되는 듯한 뉘앙스가 보인다는 건 실망스러운 일로 비쳐질수 있겠다. 코난 도일은 솔직했고 이런 점에서는 '셜록 홈즈'를 통해서는 '재미만을 느껴라'라고 이야기한다고 단언해도 무리가 없지만 사실 논리적 전개나 치밀한 구성에서 왠지 머리속의 뇌 한귀퉁이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활성화되면 '굉장히 셜록스러운 상태'가 되는 것에 은밀한 쾌감을 느끼지 않았던 독자들이 얼마나 될까. 우리의 뇌는 '셜록홈즈'의 일면처럼 되고 싶다는 굉장히 지적인 욕구들이 있었으므로 '기여'없다곤 말하기 어려우며 더더우기 '영향'이 없었다곤 이야기하기 힘들다.  


난 우연찮게도 T.S 엘리엇<주머니쥐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지혜로운 고양이 이야기> '숨겨진 발톱' 별명을 가진 '범죄의 나폴레옹'을 알고 있었고 그 고양이가 '모리아티'의 현신인 것도 알아채렸다. 역시 케네스 그레이엄의 명작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에서 사냥모자를 쓴 물쥐 래트가 몰이 무엇인가에 걸려넘어지고 은밀한 조사끝네 '정말 이게 뭘 뜻하는지 모르겠어? 이 아둔한 친구야'라고 말할때의 그 장면이 홈즈와 왓슨을 패러디한 것이라는 것도 눈치채고 있었다. 이런 패러디는 도처에 깔려있다. 홈즈 편린에 대한 반가움을 논하자면 끝이 없겠지만 (다만 저자가 이야기한 움베르크 에코의 '세사람의 서명 : 뒤팽, 홈즈, 퍼스 같은건 취향적으로 별로다. 그건 오버이자 쇼같은 허세라고 생각할 뿐이다.) 어쨋든 이 후 홈즈 패러디가 우후 죽순으로 등장하는 역사적 흔적들에서 굉장한 반가움을 느낀다.


작가는 이 책에서 그래도 셜록을 최대한 절체해가면 전반부를 버텼다. 이윽고 굉장히 폭력적으로 글을 써댔던 코난도일의 엄청난 체력과 열정도 소개했고 (그는 근 한달내 보헤미아 스캔들, 신랑의 정체, 빨강머리 연맹, 보스컴 계곡사건을 써내려갔다.) 코난도일이 말했던 '자신 스스로의 관심을 끌지 않는 줄거리나 사건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절대 홈즈 이야기를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부분에서도 셜록홈즈의 지향점을 얼핏 보여줬다. 이로써 코난도일이 셜록홈즈를 써내려갈때의 심정과 상황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된다. 특별하지만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이질적이지도 않는 도일의 이런 이야기들은 '셜록'매니아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도 있겠고 너무나 평이로와서 '기대에 못미치는 셜록창조자'로서 실망감을 느낄수도 있겠다. 그래도 코난도일의 '셜록'에 대한 열정만큼은 부인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겠다. 


최근 몇 년사이에 '셜록홈즈'(Sherlock Holmes)의 저작권 시효만료로 인하여 우후죽순처럼 소설 출판이 이루어졌드랬다. (시공사와 황금가지를 비롯한 여러군데서 기다렸다는 듯이 출판 시작함. 어떤 출판사가 낫다고 말하기에는 곤란함.) 이윽고 당대의 매력적인 캐릭터 홈즈가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Sherlock으로 BBC방송으로 등장한 최근에는 홈즈에 대한 매력도가 최고 피크치까지 치솟은 느낌이다. (그야말로 홈즈가 환생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는...) 물론 BBC의 Sherlock이 아니었어도 홈즈의 재래는 여러형태로 등장했던 게 사실이다. 미드  '하우스'(House)그레고리 하우스 조차도 홈즈 캐릭터의 차용이었으니까...뭐 굳이 그가 CSI 마냥 경찰노릇이나 탐정노릇을 하지않아도 그가 홈즈였다고 추정할만한 증거들은 꽤 많다. 바이코딘 중독에 아파트주소는 221B, 시즌2에서는 총으로 쏜 인물의 이름조차 잭 모리아티(Jack Moriaty)다. 하우스뿐일까. 세상에 등장했던 수많은 캐릭터들의 이면에는 '셜록'스러운 뉘앙스의 피쳐들이 슬쩍슬쩍 등장했다. 그야말로 홈즈는 불사의 캐릭터처럼 현대에도 충분히 숨쉬고 있는 셈이다.




개인적으로는 셜록 시리즈의 리바이벌이 저자가 후반부에 밝힌 '베이커가 특공대'처럼 잊혀져가는 이벤트처럼 인식되길 원치는 않는다. 그리고 그런 이벤트들은 '순수하게 셜로키언'으로서의 희열과 희극처럼 번져가는 '쇼맨쉽'에 가까운 재미들이었으므로 때로는 그런 퍼포먼스들이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해서 굉장히 재밌고 흥미롭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덧없다고 생각하면 모를까


적어도 셜로키언이라면 '캠퍼벨 독극물 사건', '모페르튀 남작의 어마어마한 음모', '그라이스 패터슨 일가가 우파섬에서 겪은 기이한 사건', '아마추어 탁발승 협회', '비숍게이트 보석 사건' 같은 에피소드들을 창의적으로 지어내 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코넌도일이 마무리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그만의 형식을 빌어서 철저히 셜록스럽게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해줬으면 하는 것이다. 아직도 코넌도일만큼 재밌게 쓴 후속 작가들을 만나지 못했고 작가가 이야기한 도둑맞은 담배케이스나 랑데일 파이크 사건같은 것으로 그런 허기를 채우기에는 모자르다. 적어도 제대로된 단편 정도는 책 후반부에 실어줬으면 했는데..작가의 희열을 독자에게 강요시키는 퍼포먼스에 속은 느낌이다.


차라리 BBC의 셜록에서 약간 가능성을 보곤하는데 모리아티 사건이후에도 에피소드를 나열해야한다면 이런 미공개 사건들에 대한 에피소드작업을 이어가면 아주 그럴듯해보이지 않을까. 




코난 도일을 읽는 밤

저자
마이클 더다 지음
출판사
을유문화사 | 2013-08-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추리 소설 학교에 코난 도일 학과가 있다면 공통 필수 교재가 될...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
Review BOOK/철학-사상2013. 9. 6. 22:41


간혹, 아주 두터운 두께의 고전이나 오랜 문학소설, 그리고 이해하기 어려운 현대 문학들을 접하게 될 때, 테크놀로지적인 습득장치가 마련되어서 코인을 넣고 머리에 뭔가를 연결하고 '스팍'하고 번쩍이면 머리의 기억장소에 정확하게 내용과 핵심들이 저장되면 정말 편할거야라고 황당한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 (아마 키아누 리브스가 코드명 J에서 비슷한 걸 했었지싶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 싶지만 그만큼 세월을 감내한 마스터 피스 일수록 왠지 모를 거대 지루함은 견디기 힘들고,  암연과도 같은 혼란의 미로속에서 헤맬 만큼의 얕은 이해력을 생각하면 상상이라도 이랬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왜 그렇게 책 읽기가 어려운 건지.... 술술 읽히고 머리속에서 갈갈히 용해되고 지독히도 다양한 문장의 치즈들이 덕지덕지 발려져 꾸역꾸역 뇌로 들어오면 이를 재빨리 녹여줄 콜라같은 '이해력'이 있었으면 하는데 하지만 그런게 있을 턱이 있나 세상은  출중한 독서가를 많이 등장시켰어도 절대로 '훌륭한 독서가'가 되는 기발한 방법같은 건 알려주지 않는 법이다. 이게 다 진득히 뭔가를 읽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서일 수도 있고 뭔가를 진득히 읽고 생각하기를 세상이 원하지 않아서 일 수도 있다.  그래서 책 다이제스트도 생겨났다고 믿는다. 책 내용을 친절히 풀어서 설명해주고 핵심이 뭔지도 가르쳐주고 개인적인 평도 덧붙여주고 그러면서 그 험난한 '독서생활'이 없을지라도 유사 그럴듯한 독서가 행세를 할 수 있지 않은가. 그야말로 편한 세상인 것이다.  


이런게 다 나쁘다는건 아니다. 솔직히 언제 읽을 지 알수도 없는 수없이 많은 고전들과 듣도 보지 못한 소설들이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져나오게 되면 여기서 뭘 골라낸다는 것 자체가 노동이다. 이렇게되면 읽는 능력외에도 '골라잡는' 능력도 필요하게 되고  골라잡으려면 '모니터링'을 잘해야 하고 이 모든 걸 다 감안하면 거대한 시간 놀음 속에서 점점 침몰되어가는 자신을 볼 수도 있다. 어떻게든 좋은 책을 골라는 잡아야겠지만 이런 걸 누가 가르쳐줄까..그리하여 책을 읽고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책을 다시 골라잡게 된다. 아마도 MD추천이니 하는걸 믿고 책을 잡았다가 지적허세질에 당했다고 부르르 떨면서 책을 놓아버렸던 경험이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래도 다행인건 알려진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이런 책을 내게 되면 적어도 그 책 속에서 언급했던 비평과 이야기들에 신뢰감을 가지고 받아들이게 된다는 점이다. 


서평도 그렇고 책읽기에 대한 책들도 그렇고 교습적인 강요투의 문장만 무더기로 반복되지 않는다면 해가 될 이유가 없다. 어차피 다들 참고이상으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고 개인적인 취사선택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을테니까 책을 읽는 시점에서는 아 그래 이 책이 그런 책이야 한번 고려해보도록하지 라고 스스로 모종의 체크만 해둘 뿐이다. 나중에 한번 그 책에 대한 저자의 평을 떠올리며 슬쩍 몇장 넘겨보다보면 책의 저자가 말한 뉘앙스가 맞는지 어떤지 알게 되고 그러다가 보면 저자가 책을 읽고 감회를 밝혔던 그 책의 가치를 알게 된다. 그정도면 훌륭하다. 그런데 여기에 몇가지 더 보너스로 추가한다면 이런게 있다. 



닉 혼비


책에 대한 평을 쓰면서 자기만의 스타일과 격조있는 문장과 그럴듯한 비유와 기발한 표현들을 버무려서 독자가 책을 읽지도 않았는데 마치 이제 막 읽은 것처럼 감정을 전달해줄 때, 옆에서 친한 친구가 어제 읽었던 책 이야기를 도란도란 이야기해주는 것 같을 때가 있다. 그리고 자꾸 이 친구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지는거다. 어떤 재미난 이야기를 해줄까 오늘은 또 어떤 책을 읽고 유머있는 이야기를 해줄까. 번뜩이는 재기와 신랄한 지적질과 솔직한 표현들을 기대하며 기대한다. 그렇게 즐거움을 가지고 책에 대한 책을 읽는 것. 그 속에서 저자의 아이덴티티까지 덤으로 획득되어지면 단순히 책정보를 전달해주는 것 이상의 에세이를 만나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 책이 바로 이 <런던 스타일 책읽기>다.  


물론 알베르토 망구엘 할아버지가 이걸 봤으면 이런 허접한 독자들을 봤나. 내가 그랬지 않나 책을 읽을때 낱낱히 문장을 해부하고 그 이면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완전한 번역가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어라고 신랄하게 뭐라고 하시겠지만 설사 그렇다고해도 우리는 책에 대해 대작해주는 작가를 믿을 수 밖에 없다. 그는 나보다 더 지적우위에 있고 사리를 분별할줄 알고 가치기준의 명확함과 대중들에 대한 개인적인 판단이 어느정도 인정되어있으니까..그렇지 않았으면 내가 닉혼비의 소설을 읽었을 이유가 없고 이 책을 굳이 들고 닉혼비 특유의 재치를 읽으며 미소를 지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닉은 책에 대해 훌륭한 자세를 가지고 있다. 그는 '돈을 받지 않았어도 했을일, 즉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쓴 글에 대해서 돈을 받을 셈이었다고 솔직히 고백했고, '우리는 스스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이미 읽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책을 읽는 경우가 많다고 짐짓 아픈 곳을 찌른다. 그렇다. 이런 허세질이 없으면 우리가 괜히 뜬금없이 날도 더운데 혹은 스산해질때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이해도 안가는 고리타분한 고전문학을 집어들겠는가. 스스로를 속이는 또 하나의 기묘한 지적놀이로 독서를 택해도 개멋 부린다고 뭐라 하지 않는다. 다만 닉혼비의 이 글을 접하게 되면 등짝을 손바닥으로 짝하고 맞은 기분일 거다. 


그런 재미없는 책을 읽으면 지루해지고, 지루해지면 성격이 더러워지고 그렇게 되지 않기란 너무 쉬운 방법, 재밌는 책을 찾아서 읽으시라는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그리고 솔직한 권유야말로 가식없는 '독서가'로서 진솔한 모습이 아닌가. 닉혼비여서가 아니라 어느누구라도 이렇게 말해줬어야하는데 다들 청소년 권장도서 100선이니 뭐니 하는 항목에다가 읽기도 싫은 무지막지한 목록을 나열해주면 어떡하란 말인가. 이런걸 접하면 개인적으론 다들 독서의 적들 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더 읽고 더 배우신 양반들이 추천해주는 책이란 것들이 지나칠 정도의 개인적이라는 건 뭔가 이기적이란 생각이 든다. 그럼 결국 닉이 말한 '책은 어려워야 하고 어렵지 않으면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박혀있는 그런 분들 뿐인거다. 


사방팔방에서 이런 공격들로 버티려면 이 책을 읽으면서 닉혼비가 종횡무진 펼치는 쾌도난마를 구경하면 된다. 정치인 전기따위를 읽으면서 하품하지 않고 좀 더티하지만 3류소설을 읽으면서도 피식 피식 웃는게 더 유익하다는 무언의 공감대가 문장을 통해 드러난다.  이 책에서 언급한 책들의 대개는 국내에 출판되지도 않은 듣도보지 못한 책들도 부지기수지만 그 책들이 가지는 진정한 요약본을 바란건 아니었으니 애초에 별 문제는 없다. 하지만 그가 어떤 책에는 기막힌 칭찬을 ...그리고 어떤 책은 도저히 좋은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책제목도 표기할 수 없다고 솔직히 써주었을 땐, 닉 혼비는 믿어도 된다고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 <런던스타일 책읽기>의 서평스타일을 본받으려는 MD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화려한 책편력의 이면에서 미친듯이 읽어야 하고 미친듯이 책을 구매해야하는  필수부가결한 삶이 따라붙어야만 가능하다고 느낄즈음 , 닉혼비의 이 책이 시리즈로 나와줬으면 어떨까하는 기대를 하게 된다. VOL.1 VOL.2 이런식으로..정말 재밌지 않을까. 수없이 쌓인 책더미에서...무한히 반복되는 바벨의 도서관에서 책장의 한칸씩을 먹어치우는 신출귀몰한 책벌레를 보는 재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자 즐거움이다. 




닉 혼비 런던스타일 책읽기

저자
닉 혼비 지음
출판사
청어람미디어 | 2009-05-18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19세기 찰스 디킨스, 체호프의 고전부터 21세기의 최신소설,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
Review BOOK/철학-사상2013. 1. 23. 16:00

 

서두에 밝혀둔 에세이로서의 역할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진중권씨가 문화,사회적으로 많은 현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정도는 대개 알고 있다. 아마도 그가 학술적인 견해로서의 글과 가벼원 문화적 탐방이나 소견에 관한 소소한 글로써의 역할을 릴렉스하고 싶어서 일종의 장치로서 언급했을 수도 있겠다. 워낙에 달변가이고 논리와 담론에서 노니시는 분이라 이 에세이의 기준은 아마도 '탐색'을 넘어선 '숙고'나 '사색'의 파편들이 될 가능성도 컸고.... 그리고 현상에 대해서 그가 진리라고 믿는 것들이 결국 체계적이어야 한다는 헤겔의 말을 좀더 실천에 옮겨볼 작정으로 글을 썼을 것이다라는 섯부른 판단도 스쳐갔다.(아니면 말고)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이 책의 주요 포인트는 대중들이 접하기 힘들었던 '전문학술'분야의 용어들을 은유적으로 사용하여 현재 벌어지는 현상을 자기방식대로 요약했다는 정도가 아닐까 싶다. 달리보면 '현학적 허세'처럼 느껴질수도 있겠지만 어찌됐든 용어자체는 있어왔던 분명한 명제이고 (그가 예를 들었던 비트겐슈타인의 의심할 바 없는 진리의 원자적 확신과도 같이 사용됐다.) 그 용어들은 지금에 와서 의미를 가질만큼 멋들어지게 인용되었다. '타이포 라이팅의 응용편'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용어들은 그 자체로서 아우라를 가지는 측면이 있지 않은가.. 다만 부작용으로서의 어색함이 불시에 닥칠 수도 있다. 내재된 뜻이 모호해지면 우리는 용어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기 마련이고 수많은 억측과 추측, 그리고 확대가 이뤄질 것이며 결국 진리의 근처에 있다는 생각이 전혀들지 않게될테니까 말이다.


초반부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용어구들과 용어들의 나열속에서는 '지식에 대한 소개'의지를 담은 진중권씨의 노력이 보이는데 아마도 씨네21에 에세이로서 등장했기에 이건 설명이 된다.  아무래도 대중들을 위한 '문화설명서'가 될 필요가 있었으니까... 너무 어려운 용어나 메타포가 남발되면  '너무나도 잘난척'하는 모양새로 비춰지는 부작용을 뒤로하고 꿋꿋하게 낭창낭창하게 죽죽 밀고 나갔다. 보헤미즘과 댄디즘 정도야 친근감을 느낄정도의 타이포지만  옴파로스에서 신들이 인간에 준 '신탁'(Oracle)에서  스토이시즘, 헬레니즘의 라오콘상, 칼로카가디아로 부터 유래된 미적가치와 윤리적가치의 혼합성, 빙켈만이 등장하여 파렌티르시스를 언급하면서 '감정과잉의 오류'등까지 읽다가보면 담아두기 벅찬 굉장한 함의의 용어들이 대량 등장한다. '우와...이런 용어들은 다 뭐지' 하는 느낌?   일반 대중으로선 굉장하고도 빈번한 타이포에 질려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타이포를 아무런 적대감없이 받아들이려면 '뭐 그런게 있나봐' 정도의 태도를 가지고 '그럼 이제부터 제대로 알아보자'라는 의지가 필요할 수도 있다.
 

부수적인 재미도 있다. 견해를 펼치는 지점에서 화려한 언변술과 설명은 저자의 독특한 논리적 체계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파타피직스를 언급하면서 '허구인줄 알지만 사실인척 해주기'라는 부분은 슬쩍 '나꼼수'를 바라보는 그의 찰나적 견해를 예상할 수 있다던지..모든 매체는 편향적이다라는 명제를 언급하면서 편향성의 극복이 문명의 발전을 결정한다는 지점 역시 언론 매체의 권력 지향성과 정치적 영향에 대한 묘한 시기적 데자뷰를 느낄수 있다. (결국 문명의 퇴보가 벌어지고 있다고 항변하는 느낌도..) 그리고 저자는 아무래도 귄터 안더스보다 보드리야르의 '미디어가 만들어낸 가상세계'쪽에 더 치우쳐있는게 아닐까란 생각도 슬쩍 들었드랬다. 결코 변하기 어려운 진실이 아닌 세계에 살고 있는게 아닐까하는 부정적인 시각같은게 어렴풋이 느껴지기도 해서 그렇다.


6부까지는 철학적 함의를 친근하게 풀어서 설명하는 느낌이고 7부 미의 정치성, '존재에서 생성으로',..이윽고 '예술의 진리',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미학학자로서의 본분에 충실한 느낌이다. 나도 가끔은 아는 만큼 보이는 심미안적인 견해의 소유자이고 싶을때가 있다. 하지만 이 책을 읽다가보니 역시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사물에 담겨있는 함의와 철학적 견해는 다차원적이고 난해하다는 느낌이 든다. 좀더 솔직히 말하자면 그가 인용했던 용어들에 대한 빈약한 지식이 민망스럽기도 하고 그에 반해 인용하는 표현들이 익숙치않아서 어떤 논문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후자의 우려를 이미 서두에서 밝혀주긴 했는데 막상 닥치고 보면 수많은 인용들에 대한 명확한 이해나 사려깊은 추가액션이 필요한게 아닐까하는 측면도 많다. 혼자서 다 찾아서 관련부분을 읽어봐야 한다는 강박관념 비스무리한 것들...그래도 나쁘지 않은 건 이런 '생각의 지도'에서 분명하고도 명확한 개성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이고 그 논리가 설득력있다는 부분정도..그래서 이 책에 대한 느낌이 좋았던 것같다.


비슷하게 미학시리즈로 비슷한 패턴을 보여주기도 하셨는데, 대중적인 측면에서 더 한층 다가온듯한 이 친철한 설명은 이 책만의 장점이 될 듯 싶다. 생각의 지도 2가 나올른지 어떨지는 모르겠는데 이런 식이라면 저자는 더 할 말이 많을 것이다. 크로스에서도 이미 경험한 바 있고 굉장한 스피드로 분야를 퀼트처럼 꿰매어 독특한 문양을 만들어내는 해석방식, 견해등은 참조할 만하다. 세상의 모든 견해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때론 과정과 설명에서 동감과 공감을 얻을 수도 있을테니까. 생각의 지도에서 좀더 여러가지 길을 그려볼 수 있다는 정도만 되도 꽤 괜찮은 경험이다.

 


생각의 지도

저자
진중권 지음
출판사
천년의상상 | 2012-09-1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세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라!진중권 철학 에세이『생각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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