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스킨'같은 좁다란 노트에다가 뭘 그린다는 게 그리 익숙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그리려면 차라리 커다란 스케치북이 제격이지. 화이트색 광활한 공간이야 말로 생각의 여유를 불러일으키고 시행착오의 실수들을 충분히 수정해 줄만큼 아량이 넘쳐보이는 존재감의 스케치북 말이다. 하지만 스케치북을 들고 전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카페에 앉아서 펼쳐놓고 그리고 싶은 걸 그리려면 굉장히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하고 ,몇가지의 번잡스러움을 버텨낼 줄 알아야 한다. 큰 백팩도 필수겠지? 


편의성의 시대의 그런 번잡함이라니..낙서를 해도 우리는 뭔가를 갖추고 싶어한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제대로 된 아이디어 수첩이자 적당한 사이즈의 스케치북을 대용할만한 무엇인가를 찾게 되었다. 그리고 몰스킨이 두둥 등장한다. 사실 몰스킨의 역사를 보노라면 녹록치 않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걸 알게된다.  이런 역사를 이미 알았다고 해도 그 역사의 진중함에 감탄하고 아 그렇구나 이런 유서깊은 사연들이 있었어 그럼 내가 써줘야 겠어 멋지게 그림을 그려주고 그래야지 라고 생각하진 못한다. 그렇게 있었나보다 정도지. 


실제로 몰스킨이 유명해지는 건, 몰스킨을 이용해서 자신의 그림을 아주 멋지게 그려내는 몇몇의 예술가들, 일러스트레이터들로부터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그럴듯하면서도 탐나는 어떤 컨텐츠'로서의 그림들이 아담한 사이즈로 예쁘고도 오밀조밀하게 그려져있는 몰스킨이라니...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마티아스의 스케치북>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아주 좋은 몰스킨 스케치북 사용교본과도 같다. 


국내에도 몰스킨 사용성으로 이름을 날리신 '밥장'님이 계시긴 하지만 대개의 스케치 중독자들이 가지고 있는 패턴들은 몰스킨적이다. 끊임없이 그리고 또 상상하고 재빨리 옮기고 색칠하고 열심히 스케치북의 종이를 넘긴다. 빼곡히 채워진 상상속의 이미지들과 오밀조밀한 생각들의 향연, 그리고 스쳐가는 영감들을 걷어올리는 잠자리채가 되어서 기록을 남긴다는 것. 그게 매력적인 것지 싶다. <마티아스의 스케치북>에는 이런 상상의 편린들이 이미지로 빼곡히 자리잡고 있다. 이 스케치북은 활자가 그윽한 책이라기 보단 화보에 가까운 편이지만 난 이 몰스킨스러운 디자인의 책을 펼쳐놓고 일러스트레이트를 오랜 시간동안 응시하면서 시간보내는 걸 아까워하지 않는다.  글자도 없어서 읽을 구절이 없는데도 그림들을 그저 바라 볼 뿐인데도...귀퉁이에 자리잡은 조그만한 시그니쳐도 놓치지 않을 기세로 열심히 스캐닝한다. 


필체의 귀획과 연결부위의 마무리와 조그마한 사람들의 표정과 동네의 멋진 구도와 그로테스크한 패턴무늬, 디스토피아적인 환타지 요소들을 보면서 마티아스의 상상력을 쫓고, 그걸 이 스케치북에 옮겨온 걸 감탄하는 식이다. 물론 이 화보집을 읽고 나도 이렇게 해야지라든지 나도 그려보겠어라는 생각이 아니들 수는 없겠지만, 그것보다는 차라리 마티아스의 상상력이 실현되는 결과물로서 그림들을 보는 걸 더 즐긴다. 이렇게 해서 그의 머리속의 이미지들이 이렇게 간편한 형태로...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예술적으로 그려졌다는 것. 그런식으로 이렇게 한장한장이 채워진다는 것. 마티아스는 스스로 굉장히 뿌듯하고 풍요로움을 느낄지도 모른다고생각하는 것이다. 때로는 자신의 이미지가 갑자기 머리속에 번득 떠오르고 슬며시 부유하며 소리소문 없이 색체가 희미해질 무렵, 우리는 뭔가 소중한 것이 지나갔음을 느끼게 되고 그것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망각의 공간으로 사라졌다는 걸 알았을 때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는 스스로를 자책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마티아스의 이 스케치북이 주는 의미가 강렬하다. 




마티아스의 스케치북

저자
마티아스 아돌프슨 지음
출판사
한스미디어 | 2014-01-01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드로잉과 다시 사랑에 빠지다 마티아스는 뉴욕 타임스의 작업들과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
Book Pantry2014. 6. 14. 11:56

1. 

레이먼드 챈들러를 읽게 된 건, 완전히 무라카미 하루키의 영향이었지만, 사실 하루키가 극찬한다고 해서 내가 그걸 재미있게 읽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아무래도 난 무게감있고 진지하며 자아성찰적이면서 눅눅한 현실을 담담히 묘사해서 그럴듯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야말로 명작들에 대해서 그걸 인내심을 가지고 읽을 만한 '태도'를 갖추지 못한 독자쪽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스토리가 두근거릴정도로 재미있어야 하고, 문체는 재기발랄하면 더 좋고 구질구질하지 않으면서 암울한 불운의 스토리가 비엔나 쏘세지처럼 이어지지 않는 그야말로 뻔한 소설쪽이 더 어울린다. 실제로도 그런 쪽을 더 잘읽는다. 이건 피해갈 수 없는 진실이다. 그래서 내가 어디가서 잰체할 수 없고 뭔가를 안답시고 주절거릴 수가 없다. 좀만 아는 척해버리면 이윽고 들통 나버릴 수 있는 확률이 커질테니까. 그런 점에서 보면 챈들러의 소설은 좀 자유로운 편이다. 


'빅슬립'당시에 문장의 간격에서 벌어지는 왠지 모를 쿨함때문에 피식피식 웃음이 나버리고 쉽게 쉽게 사건이 요약되고 뭔가 위트가 사이사이에 치즈처럼 발라져 있다.   어느날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면도를 하고 맥주 하나를 까서 먹으면서 침대로 향하다가  누가 내목을 강하게 내려쳐서 정신을 잃었다라는 식의 전개가 무덤덤하게 전개된다 .주인공이 쓰러졌다라는 사실에 군더더기가 없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 빠르고도 전광석화같은 반전들이 일목요연하게 요약되는 와중에 주인공은 상황에 맞지 않는 시니컬한 농담이나 끄적이고 있고.....결국 문장 자체에서 이런 일목요연하면서 깔끔한 리듬을 느끼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지 싶다. 챈들러의 장기는 구구절절한 설명이 없다는 거였어. 그저 사건이 벌어지고 그 사건들이 짧게 묘사되는 동안 생각은 독자가 하고 필립말로우는 그걸 쿨하게 받아들이는 거지. 하드보일드적이란건 대체로 이런 거였나..혼자 상상하게 된다. 빅슬립이 완전히 흠뻑 빠질만큼 재밌다곤 할 수없었음에도 이런 매력때문에 '기나긴 이별'을 읽으려고 '호수의 여인'대신 고르게 되었다. 기나긴 이별쪽이 더 길고, 긴 만큼 이 여운을 더 즐길 수 있을 거라는 조삼모사식의 해석 때문이었다. 두고 보면 알겠지. 


2.

SS 밴다인의 '비숍 살인사건'을 최근 읽었다.  읽다가 보면 역시 추리소설의 중흥기는 1900년대 이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스 마플엘러리퀸필립 말로우마이크 해머,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이먼 템플러라든지 말이다. 물론 대다수의 독자들이 생각하는 탐정소설의 캐릭터는 '셜록'이다. 컴버배치의 씽크로 100%에 가까운 BBC 드라마만 해도 몰입도를 극대치로 키워줄 정도니까 이런 탐정물의 역사는 하루아침에 이루진 건 결코 아닌 셈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 추리소설은 죄다 일본 소설이나 스칸디나비아풍의 변종 소설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뭔가 지나치게 작위적인 느낌을 지울 길 없고 뭔가 드럽게 재미없다는 (매니아분들께는 죄송) 느낌이 반복되고 있다. 어떤 점에서는 참신함을 발굴하고자 기존 고전들의 따분함을 아예 거세해버리는 선택을 한 셈인데 이게 효용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팔리는걸 보면 이를 인정 안할 수도 없어서 그저 난 개인적으로 뒤쳐져버린 세대가 되버렸군이라는 생각만 든다. 난 아직도 브라운 신부의 스토리를 좋아하고 에퀼 포와로의 사색을 잊지 못한다.  아무리 베스트셀러에 올라가 있어도 히가시노의 갈릴레오는 내 추억의 캐릭터에 비교조차 안된다. 이게 진정한 고리타분함이라고도 할수 있겠다.


3.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 재출간이 되자마자 그동안 중고사이트에서 폭등한 가격으로 흠칫 놀라게 만들었던 몇 몇의 중고상품들이 가격 하락을 겪고 있다. 올곶이 버티는 분들도 계시는데 그 분들은 아예 자신들이 등록한 대성당이 있었는지도 잊고 있는 양반들이거나 대성당 신판이 등장한 것을 아예 모르고 계시는 아주 바쁜 분들일 가능성이 크다. 아무튼 중고사이트에 등록되는 몇가지의 서적들에 대한 가격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제때 구입하지 못한 책에 대한 댓가가 제대로 돌아온다는 느낌이다. 그 때 구입했어야 하는건데 라는 후회는 사실 말짱 아무짝에 쓸모없는 후회일 뿐이지만, 어찌됐든 형편상 책을 구입하지 못하는 것도 운명적이 측면이 있다. 


어떤 책들은 생각조차 안했음에도 불현듯 구매해서 충동질의 결과로 남고, 어떤 책은 매번 갈때마다 집었다놨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그 자리에 모셔두고 그냥 오는 경우도 있다. 그런 책들의 운명은 내가 읽을 운명이 아닌 아이러니한 책들의 목록에 추가된 채, 인생 전체를 부유하게 된다. 내가 놓쳐버린 책, 읽었어야 하는 책..뭐 이런 타이틀이 붙은 채 말이다. 다만 훗날이라도 그 책을 찾아 해메일때 가격이 적당했으면 좋으련만, 흠칫 놀랄 정도의 가격표를 보노라면..이 책을 절판시킨 출판사를 원망하게 된다. 이 모든 가격폭등의 책임자는 출판사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렇게 대성당 처럼 신판이 나와주면 좋은 일이긴 하다. 가끔은 가격을 너무 터무니 없이 올려버린 중고서적들의 주인들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볼 때, 이런 신판은 '책의 정체성'을 교란시키는 배신행위처럼 비추어질 수도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운명은 절판의 운명이니까 이대로 둬. 세상의 몇권만 남은채 나를 부각시키고 싶단 말이야 ..뭐 이런..대성당은 그러기에는 대중의 욕구가 큰 소설이었지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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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ewell
카테고리 없음2014. 6. 14. 08:47

상암동 새로 생긴 스패뉴 이탈리안 파스타 가게...라기 보단 그냥 레스토랑....

인근의 파스타집이란 집은 다 가봤는데, 현재로선 제임스 키친, 그리고 몽촌토성역 근처의 코벤트 가든 외 괜찮은 집을 찾질 못했다. 상암동에도 파스타집이 있다면 있다. 대략 5군데 정도..그런데 인상적이게 맛있다는 느낌이 드는 가게는 별로 없었다는 느낌이어서 새롭게 파스타집이 생기면 속으로 트렌드를 반영해서 요리 상권을 형성하려는 이탈리안 가게들이 하나 또 늘었군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뭐 어찌됐든 의도는 별로 중요치 않다. 맛이 있으면 그만이니까..


스패뉴(SPANNEW) 레스토랑도 체인인 것으로 아는데 용산에도 있고 아이파크 몰에도 있고....거두절미하고 주문해서 먹어본 요리는 무조건 알리올리오, 그리고 아마트리치아나 두개 였다. 파스타만 주문하기 뭣해서 트로피칼 샐러드인가를 추가로 주문했지만 너무나도 늦게 나오는 바람에 메인을 먼저먹고 샐러드가 디저트가 되버렸다. (그냥 이건 과일샐러드위에 요구르트를 얹어놓은 거였다.) 


먼저, 알리올리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스패뉴의 알리올리오는 기름이 양이 과하다. 밑에 자작자작할만큼 출렁거릴만큼의 기름이 떠있고 마늘향이 죽어있어서 정확히 이야기하면 오일파스타는 맛긴한데 알리올리오 특유의 마늘향을 느끼기가 어렵다. 차라리 올리브를 조금 덜 넣고 마늘 슬라이스를 좀더 넣어줬으면 어땠을까한다. 알리올리오야 강렬한 간이 동반되기 어려운 파스타이기 때문에 맛이 거기서거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알리올리오 특유의 밑에서 깔려오는 맛이 있긴 있다. 이를테면 제임스키친의 알리올리오는 스패뉴보다 더 맛이 풍성하고 향도 좀 강한편, 스패뉴보단 제임스의 알리올리오가 좋은거였네..잠시동안 생각해보니 제임스 키친의 알리올리오보다 괜찮은 알리올리오를 만나지 못했다. 





반면 아마트리치아나의 경우에는 강렬한 소스덕분에 아주 매콤하리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칼칼한 맛은 죽어있어서 좀 아쉽긴 해도 알리올리오보단 나았다. ( 스패뉴는 차라리 알리올리오보단 아마트리치아나를 주력으로 삼는게 좋으리라는..) 그런데 이 아마트리치아나의 경우에도 다른 음식점에 그리 앞선 다고 말하기 어렵다. 제일 맛있었던 아마트리치아나는 몽촌토성역 근처의 코벤트 가든의 아마트리치아나다...코벤트 가든의 '아마트리'는 굉장히 맛이 강렬한데 먹고 나서도 한참동안 입안에 맛이 감돌만큼 인상적이고 기억에도 오래간다. 





하기사 알리올리오를 먹으러 제임스 키친으로 가고 아마트리치아나를 먹자고 코벤트 가든으로 가고..그럴순 없겠지만, 파스타라는 것이 개인적인 취향을 탈 수도 있다보니 영 한 가게에서 다양한 파스타가 좋게 나오는 경우를 구경하기 어렵다. 스패뉴는 게스트와 식사대접하러가기에는 나쁘지 않을 수 있겠지만, 상암점의 경우, 생긴지 얼마 안되다보니 정오의 주문량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주문을 하고 거의 35분이 넘어서야 음식이 나오고 그것도 동시에 3개가 나온게 아니라 하나씩 하나씩 차례대로 나오고 그마저 샐러드는 맨 나중에 나오다보니 12: 05분에 들어와서 음식이 다 도착한게 42분이 넘어서 였다. 그러니까 근처의 방송국 관계자들이 점점 불어나는 날에는 손님의 많음을 탓할 필요없이 어떻게든 대기시간 공지를 해주던지, 아니면 주문량에 대해서 좀더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출 필요가 있다. 


내가 앉은 테이블보다 더 늦게 온 테이블에 음식이 먼저 나오는걸 보는 기분이 썩 좋을리는 없으니까...



큰지도보기

스패뉴키친상암점 / -

주소
서울 마포구 상암동 2-45번지
전화
02-3152-8877
설명
-


Posted by kewell
Review BOOK/소설2014. 6. 9. 15:00


<노르웨이의 숲>(ノルウェイの森)을 읽을 때면 설명할 수 없는 우울함이 슬며시 내려앉곤 한다. 와타나베는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않지만 소설속 모든 불행에 대해서 모종의 책임을 스스로 지려고 애쓰고, 주변인들은 지인이랍시고 아웃사이더에 대한 배려를 보여주는 듯 하다가 느닷없이 생을 마감한다. 오래 머물렀던 장소에서 얼마간 떨어지는 일도 어색하고 애잔할텐데 말을 나누며 공감했으며 내심 친밀감이 오고갔던 사람들이야 오죽했을까. 키즈키는 자동차 배기관을 끼우고 자살했고 나오코는 달빛이 내리던 밤 조용히 스스로 생을 끝냈으며, 나츠키는 면도칼을 침묵속에서 오용했다. 이즈음되면 어떤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라고 할지라도 정체된 '혼란'과 '우울'의 정서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플랑드르파의 암울한 그림들이 하늘에 걸려있다라는 단순한 현실묘사로는 부족한 것이다. 함부르크에 내린 와타나베는 그 시점부터 흘러나오는 비틀즈의 '노르웨이 숲'을 들으며 겪는 트라우마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 얜 아직도 이모양 이꼴이야. 1992년 <상실의 시대>를 읽었을때도 이랬다. 와타나베는 아직도 현재에서 과거를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나보다. 벌써 20년 넘게 시간이 흘렀는데도 예나 지금이나 계속 노르웨의 숲 속 '홀로' 와타나베였다. 


솔직히 나오코가 자신이 불완전한 인간이라고 했을 때, 아 이 소설은 자아와 정체성에 대한 청년기의 방황을 정신병리학적으로 전개하려나보다 이러다가 어떤 의미에 다다르면 현실을 털고 일어서서 앞으로 질주하는 푸른 희망을 말하겠지라고 생각하긴 했다. 하루키가 추구했던 고도의 계산된 리얼리즘으로 이런 자기극복과 캠퍼스 러브스토리를 트랜디적인 풍으로 묘사했더라면 아마 노르웨이의 숲은 이런 컬러가 아니었을 것 같다. 좀더 찬란한 오렌지빛에 햇빛에 반사된 골드빛 보도블록 위로 미도리와 와타나베가 손을 잡고 '마음에 드는 프라이팬 세트'를 사러 마트로 가는 이야기쪽이 더 대중적이지 않았을까. <상실의 시대>버전 당시에는 미처 시대적인 분위기가 지면위로 내려앉아서 고단한 이념논쟁의 열기가 시들고 이젠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지 다들 어벙벙한 상태에서 맞닥드린 '자기 정체성의 숙고'처럼 생각하고, 이를 빌미로 현대 자본주의의 감각적이다못해 세련된 문화적 뉘앙스를 기막힌 무덤덤하면서도 단백한 문장으로 읽는다라는 대중적이 평이 있었드랬다. 


하루키가 아니었으면 누가 이런 평이나 소감을 달았을까. 더군다나 '온기가 필요해서' 마치 섹스를 한다는 와타나베에게 나츠키로부터 '그렇게 살면 안된다는 지적까지 스치듯 지나가고, 와타나베는 '소통을 위해서 매개체적 역할을 감내하는 무라키미 방식의 철저한 시작점이 되어 '파격적인 성적분방으로 읽혀질 가능성도 꽤 컸다. 왜냐고? 와타나베는 이미 나오코와 ..레이코, 상상속에서 미도리와도 적나라한 섹스를 벌였다. 예전 웹상에서는 이런 '노르웨이의 숲'을 두고 뭔 스무살짜리의 인생 다반사가 섹스 편력이 이토록 복잡하고 난잡하냐고 지적까지 댓글로 우수수 달릴 정도였으니까. <작가란 무엇인가>에서 하루키가 '섹스'가 자신의 작품에서 어떤 소통과 발현의 방식이라고 밝혔다고는 해도 1990년에 그 의미를 제대로 눈치챈기란 어려웠다. 우선 그때의 청춘들의 감각의 제국에서 살면서 깨지 않고 숨죽여있는 스팟들을 덕지덕지붙이고 살때였다. 아마 눈에 들어온 문장들은 '자극' 그 자체였을 것이다. 


반면 지면속에 잠자던 숨은 의도가 궁금했던 다수의 궁금이들은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였다. 이 책을 읽고 느낌이 어땠어. 정말 '상실'에 대한 이런 고민 따위를 이렇게 와타나베스럽게 해본 적이 있긴 한거야?  미도리가 와타나베를 구출해줬을까 그러지 않았다면 와타나베는 결국 사회 부적응자가 되어서 방황하다가 회사도 잘리고 함부르크 공항에서 가슴을 부여잡고 트라우마의 노예가 되지나 않았을까. 나오코는 만나지 말았어야 했고 우리들은 다 나가사와처럼 사는걸 당현하게 받아들여야 할까 뭐 등등 물어볼 건 수없이 많았다. 사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물어본다고 해도 딱히 그럴 듯하게 설명해주는 친구들이 있을리 없었을 것이다. 우리들의 판례는 뻔했다. 호밀밭의 홀든을 와타나베에게 이입하는 정도였을 것이고, 삶이란 어떤 것이라고 뭉뚱거려서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우리는 멈추지말고 나아가야한다'는 시덥지 않는 이야기들이 하고, 하다못해 자기는 나오코라든지 미도리라든지 하츠미, 레이코라도 만나서 연애라도 하고 섹스라도 해보지 않아서 실감이 안난다고 푸념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게 <노르웨이의 숲>이라면 너무 과대평가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가만히 보니 <노르웨이의 숲>에는 내 시절의 스무살이 별로 등장하지 않고 있었다. 일어났어야 했다면 어떻게든 소설적인 미장센들이 현실에서도 유사하게 등장했어야 하지만 비슷한 일도 일어난 적 없고, 유사 캐릭터들도 얼쩡 거리지도 않았고 그야말로 주변은 조용했으며, 쓸쓸했고 지루할 따름이었다. 스무살이 가진 막연히 불안한 감정 뒤편에 죄다 '와타나베'같은 혼란스러운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의뭉스러움을 맡긴 채,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더 그럴듯 했다.  와타나베는 비현실적 세계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불편해하는 그런 영역에서 방황하도록 놔두고 난 현실에서 적당하게 적응해가면서 산다는 정도 ?  그런걸 두고 다들 자기 정체성이라고 이름을 붙여두었지만 난 이게 뭔지 당시에 도무지 감도 잡지 못했다. 그렇게 1987년 이후 90년 초입을 거쳐 2000년을 걸어왔다. 다시 지금 <상실의 시대>를 <노르웨이의 숲>으로 읽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모종의 30년 시절에 대한 인생경험이, 혹은 어떤 숨겨진 진실을 보는 혜안이 있어서 그동안에 어설픈 청춘에 가려있었던 진면목을 보게 해줄 거라는 믿음으로 책을 다시 잡은 것도 있었다. 그때랑 지금은 난 좀 더 '모래폭풍'에서 피를 흘리며 견뎌낸 나만의 시절이 있었으니까 <노르웨이의 숲>이 다르게 읽힐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와타나베를 읽으며 '얜 20년이 넘어도 여전하구나'란 느낌만 강했다. 게다가 그를 둘러싼 모든 환경적인 스타일들도 바뀌지 않고 있었다. 하루키가 토로했던 것처럼 그때나 지금이나 통속적인 마케팅의 영향을 제외해버리면 디킨스와 단테와 조지프 콘래드와 업다이크, 챈들러, 카포티를 좋다고 열렬히 읽어대는 스무살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고 여전히 쾌락적인 자극의 시대에선 골동품은 계속 골동품이었다.  관심이 없는 영역은 '무지의 영역'이지 '참고'의 영역조차 될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말인데 하루키가 이 책에서 설정한 와타나베의 성향과 나가사와의 성향은 현대 30년을 아우르는 일반성이 내포되어있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와타나베는 스콧 피츠제럴드와 카포티와 챈들러를...나가사와는 단테와 발자크와 조지프 콘래드와 디킨즈를 읽는 캐릭터다. 그리고 그 나이의 대다수는 그게 뭔지 30년전이나 지금이나 잘 모른다. 이게 일반적인게 아니면 또 뭐가 일반적인 걸까. 모래폭풍을 지나왔어도 여전히 와타나베는 우울하고 나가사와는 재수 없었다.  


당시 여인네들이 열렬히 지지했던 <상실의 시대>는 '미도리'적인 감각과 와타나베스러운 진지함에 대한 경의 같은게 있었다. 쉬이 지나왔던 젊은 나날들을 돌아보며 자신을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세상과 어깨를 나란히 한채 발걸을 맞추어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정체된다는 느낌, 모조리 불운한 것들에 대해 막연한 죄책감을 가지는 행위들, 부조리와 시스템속에서 몸부림치다가 결국 자신도 나사로 끼워져 시스템이 되버리는 시절들을 맞이하면서 서서히 치열한 반항기도 누그러지고 경각심의 모퉁이도 모조리 깍였던 시절이었으니까. 모두가 이 책을 읽을 때면 스스로를 돌보지 않았음에 부끄러워하면서 와타나베의 배려심과 여린 감성에 동기화되어 위로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에 매몰되다보면 정말 키즈키처럼 그리고 하츠미처럼 자신의 가치를 하락시킨 채, 세상과 이별해야 할지도 몰랐을 거다. 대중들이 주목했던건 이런 이면의 불편함을 뒤로하고 약간이나마 현실적인 부분에서 위로를 찾으려고 했으리리고 본다. 이 책에서 그나마 현실적인 부분은 ? 떠오르는 건 미도리 뿐이었다. 지금에서야 하는 이야기지만 아 노르웨이의 숲에는 미도리가 있었어 라고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하루키특유의 음악적 장치와 음식의 묘사와 일상에서의 무덤덤한 행동반경을 다 제외한다면 이 책에서 기억에 남는 거라곤 나에게는 미도리의 대사뿐이었다. 왜 미도리는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기쁜, 덩달아 미소를 짓고 되바라지고 당돌하지만 왠지 자기의사가 분명한 쾌활함이 있었지 않은가 차라리 그런게 위로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미도리적인 표현에는 그런 것들이 많았다. 고등학교 1학년때 계란말이용 팬을 사고 싶어 브래지어 살돈으로 사버리고, 석달동안 브래지어 하나로만 살았던 이야기하며 세상의 슬픈일 가운데 덜 마른 브래지어를 하는 것보다 슬픈 것은 없을거라는 둥, 불이 나도 기어코 와타나베를 옆에다 앉혀두고 같이 죽어도 좋냐고 묻고.. 딸기쇼트케익의 예를 들어가며 '연인'으로서의 권리를 역설하며 '와타나베가 스스로 당나귀똥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등등.. 미도리야말로 우리세대의 발랄함이 될 수 있었다. 


솔직히 와타나베가 나오코에 허우적거리는 동안 통속적인 시트콤이었다면 미도리가 와타나베의 뒷덜미를 잡아서 '이래선 곤란하다고 와타나베. 내 딸기 쇼트케익을 내가 어제 던져버렸는데 넌 아직 다시 사올 기미도 없어. 그래선 안되는거야 넌 나의 소울메이트잖아. 내말을 들으라고 알았어? 라면서 다그치면서 데리고 왔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수많은 90세대의 젊은이들은 미도리의 이런 쾌활함이 <노르웨이의 숲>을 헤쳐나오는 유일한 돌파구라고 생각했을 거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우리는 이게 와타나베의 자유연애 소설일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나오코든 하츠미던 레이코든 결국에는 미도리에게 돌아와 난 이제 너에게 정착할께 다른 여자들은 다 나에게 쓸모없었어라고 씁쓸하게 웃고 마무리되는 소설로 갔어도 피식 웃고 그렇게 될줄 알았다고 생각하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이런게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했다. 어떻게 미스테리하고 난해한 나오코의 달밤 자살을 설명하고,  자동자 배기관을 창에 연결해 세상을 달리한 기츠키를 생각하며, 머리에서 나사가 펑하고 날아가버린 레이코를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이 소설에는 현실에 지지대를 박아놓은 캐릭터가 별로 없었다. 그나마 미도리 말고는 정말 없었다.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한다. 키즈키와 하츠미와 나오코의 죽음 이면에서 허우적대는 와타나베가 꽤나 정상적인 캐릭터인지도 몰라서 대개는 우리같이 현실에 달궈진 그럴듯하게 적응해버린 사람들에게 '당신은 언제부터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왔나요'라고 묻는게 아닐까라고 말이다. 결국, 와타나베는 세상과 어울지못한 채 생을 마감해버린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알수 없는 미안함을 느끼고 자신이 그들을 완벽히 이해해줘야만 하고 뭔가를 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할수 있는게 뭔지는 모르겠고 나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 곧 그들을 따라 갈것만 같다면 와타나베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이면에도 비슷한 뭔가가 있을 거라고..그래서 마음속으로 다들 불편했을지도 모른다. 와타나베여 굳이 아픈 곳을 들춰서 그게 바로 너라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텐데 ...세상속에서 그렇게 다들 살아가는걸 뭐....진즉, 쓸데없는 우산같은 건 버리고 두손으로 제대로 미도리를 안아줬어야하는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그런다. 친구들이 말하길, 철이 없는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와타나베와 미도리적인 관점에서만 이 소설이 보일거라고...그래서 말인데 소설 말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지 


'그래 나는 미도리를 사랑한다. 

 그건 오래 전 부터 분명히 알았다. 

 나는 다만 그 결론을 끌면서 회피했을 따름이다.'.......


이세상에서 너 말고 내가 바라는 건 없어. 라고 말했을때, 이 책은 할 일을 다한거다. 

가끔은 주변의 열렬한 노르웨이숲 신봉자들의 일장연설을 들을 때마다 따분하고 지리하고 뻔하고 너무 진지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무슨 미도리 이야기라도 할라치면 노르웨이의 숲에서 '미도리'는 그저 장신구일뿐 핵심 캐릭터가 아니라고 날 설득하고 와타나베의 심연과 나오코의 심리적 방화과 정신적 질병, 그리고 레이코의 트라우마를 끌고 오곤했다. 물론 그 이야기들이 꽤나 중요할 수도 있다. 단 개개인의 내밀한 관점에서 보자면 여러가지의 선택지가 있다고 볼 수도 있을테니..하루키가 어디선가 밝힌 바와 같이, 소설가란 다양한 가능성과 가설의 상황들을 독자에게 던지고 작가는 선택이란 걸 하지 않는 것이 맞다고..다양한 가설 속에서 유독 난 미도리와 와타나베만 보고 있는 거겠지 싶다. 


시간이 많이 지난 후, 세월의 풍화작용에 깍인건 와타나베가 미련퉁이였다는 사실과 미도리의 현실감각에 칭찬을 주는 정도였지만, 그게 다 일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여전히 난 도입부의 와타나베 트라우마를 읽으며 나 자신의 가슴에도 과거의 트라우마가, 추억이..기억이 몰려오는 걸 경험한다. 아 드디어 그 시절의 내가 오는군, 다시 또 그 시절의 다사하고도 다난했던 에피소드들이 쏟아지며 잠시나마 플랑드르파의 암울한 하늘묘사에 그럴듯한 내 그림을 걸어두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 책은 유독 젊은 시절의 한 단면을 그대로 가직한 느낌이다. 내가 이 책을 젊은 날에 읽었으니 앞으로도 나이를 먹고 기억이 헐거워지고 시야가 흐릿해지고 만사가 귀찮을때라도 이 책의 편린들만큼은 선명할 것이다. 


그런게 노르웨이의 숲이 가지는 몫이다. 더도말고 덜도말고 그렇게 한 귀퉁이에서 오래도록  자리잡고 청춘을 대변해주고 있다는 느낌..그게 얼마나 갈지는 더 두고 볼 일이지만서도...




노르웨이의 숲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3-09-02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한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현...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
Book Pantry2014. 5. 27. 10:46

1.

백년의 고독을 읽고 있다. 1권은 그럭저럭 잘 넘어갔는데 갑자기 여기도 호세, 저기도 호세, 여기도 아우렐리아노 저기도 아우렐리아노, 여기도 부엔디아 저기도 부엔디아. 이러고 있다. 내가 아무리 워킹메모리가 1M 수준이라지만 이정도면 나를 농락하다못해 희롱하는 수준이다. 앞에 떡하니 가계도를 붙여놓긴 했는데 읽다가 느닷없이 앞으로 펼쳐서 이 아르카디오가 어떤 아르카디오였는지 확인해봐야하는 닭 같은 짓을 해야하는게 약간 불쌍하다. 공부도 못했는데 책을 읽을 때도 이모양이라니...


2.

'작가란 무엇인가'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랬다. 다들 미도리를 택할 거라고, 실제 와타나베가 미도리를 택하기도 했고..그래 난 특이한게 아니라 주류였던 거다. 짐짓 나오코와의 비현실적인 의식 침몰에 포커스를 두는 채하고 미도리의 조크에 빨려든 것이겠지. 아무튼 하루키는 아예 대놓고 전략적으로 '노르웨이의 숲'을 썼다고 밝혔드랬다. 그래놓고 자기 글은 읽기쉽고 유머도 있고 페이지가 잘 넘어가고 균형을 잘지키며..어쩌고.. 블라블라 하셨다. 이 분 스스로는 소설가는 판단을 유보하고 독자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게 제 역할이라고 해놓고 자기 글에는 어떤 식이라고 잘도 결론을 내리신다.ㅎㅎ. 생각외로 하루키는 유별난게 아니라 그냥 심플한 거라고 생각되어진다. 이게 아쿠타카와라든지 나오키상에 대한 인터뷰였다면 분명 하루키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거다. 어 그렇게 신경쓰지 않았는데도 이런 상을 받게 되다니 어떨떨하네요. 저도 제 책을 많이들 읽어주시는 이유를 잘 알지못해요. 전 그저 쓸 뿐인거죠. 상을 받았다고해서 제가 어떻게 달라질 것도 아니구요. 아무튼 감사해요어쩌고...겸손한듯 이렇게 인터뷰했을 텐데, 느닷없이 파리 리뷰에서 본색을 드러내주시다니...^^ 스스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단 뜻. 어쩌면 하루키는 몸속에 천마리의 고양이를 키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양이 대마왕 하루키..


3.

내가 아끼는 아주 어린 후배에게 물었다. 넌 요즘 무슨 책을 읽니. 책 읽을 시간이 별로 없어서..뭐..그다지..읽진 않는데요 요즘 책을 읽기에는 할 일이 너무나 많아요. 할 일 뭐. 음 연애도 해야하고 놀러도 가야하고 스샷질에 카톡도 열심히 해야하죠 소셜 라이프인셈이죠. 제기랄소셜라이프같으니라구..  카톡과 페북과 트위터는 넘실넘실대는 감각으로 철철 넘치는데 페이퍼에 밝힌 글자들은 시간을 잡아먹는 머신이라도 되나보다. 다들 정색들을 하신다. 이게 요새 젊은이들의 특질인거다. 온라인소셜라이프~ 터치질과 책의 3분의 1사이즈 영역에 시선을 맞추는 아주 고된 일을 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캘리브레이팅 라이프인 것이다. 여기서 고전 문학을 읽어야 한다 어쩌고 내가 그래버리면 그때부터 난 꼰데가 되는거다. 책을 읽고 안읽고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의지와 마음이니 여기서 멈춘다. 잘 참았다. 언제고 때가되면 풍경이 책을 부르고, 음악이 장면이 묘사된 구절을 떠올리게 하고 그러겠지. 요즘 애들의 삶에는 모험같은게 없으려나.  아..그러고 보니 최근 책에서도 유명 저자가 그랬다. 요즘 누가 '모비딕'을 읽냐고..이제 책이 사람들을 선별하는 계절이 왔고 그 계절은 바뀔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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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ewell
Review BOOK/소설2014. 5. 23. 16:49


아르투르 페레즈 레베르테의 작품들의 기저에는  '쉬운 문학'을 지향하겠다는 일념같은 것들이 엿보인다. 그렇다고해서 마냥 무협지처럼 읽기 편하고 쉽게 눈동자가 흐르는데로 마구 뇌속으로 이입되는 스폰지 같다는 느낌은 아니다. 그저 표현력에 있어서 한번 정도 곱씹어볼 만한 문학적 색채감이 약간 옅다는 정도, 그리고 고전문학계에서 늘 써왔던 '인간탐구'에 대한 진지한 고찰같은 겉만 번드르한 주제에 탐닉하지 않았다는 정도다. 사실 그것만 해도 독자가 가지는 부담감은 훨씬 준다. 대개의 독자들은 작가로부터 한여름 습기눅눅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연설같은 '해설과 담론'을 브리핑받고 싶지 않을테니까. 우리는 단지 이야기만 좋아할 뿐이라는 고백을 알기라도 하듯 레베르테의 소설은 드러내놓고 '내 소설은 쉬운 소설이야' 고 말하고 있었다. 


<뒤마클럽>은 철저히 설정으로서의 역사적 배경을 이용하고 그 이면에 숨겨져있는 미스테리한 에피소드, 그리고 상상력에 의해서 발휘된 '악마 이야기'를 적절히 섞으면서 흥미진진함을 자극하면서 시작한다. 거기에서 실제 알렉산드르 뒤마에 대한 평전에 가까운 견해들이 등장인물들의 토론에 의해서 드러나게 되는데  뒤마는 흥청망청의 쾌락주의자였고, 역사적 사실의 변형을 밥멋듯이 하는 사기꾼에다가 , 음흉한 동료의 글 가로채기, 이윽고 '난 역사를 위조했지만 창의력만큼은 발군이야'라고 궤변을 놓았다고 비평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시 뒤마의 고백이 인용되는데 '그렇지만 자신의 문학은 쉬운 문학이다'라는 것이었다.  앞서이야기했던 레베르테의 취지. 즉 뒤마가 지향했던 '쉬운 문학'으로서의 가치를 <뒤마클럽>에 오마쥬하면서 자신도 '쉬운 문학을 지향하고 있음'을 은근히 주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동안 <검의 대가>,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을 통해 형성된 팬층에 의해 명성을 얻기시작한 아르투로 페레즈 레베르테는 <뒤마클럽>을 통해서 스페인의 '움베르트 에코'라는 별칭이 붙어버렸다. (이건 '장미의 이름' 번역가인 이윤기씨의 추천평도 어느정도 영향이 있다.) 하지만 대중들의 치밀한 탐독과 구체적인 정황분석에 의해서 '수준미달'의 유사작이란 의심을 받곤 했다. (지금도 갑론을박 중이시다.) 읽어도 별 도움도 안되는 정서함양에 도움조차 되기 어려운 통속소설에 불과한 레베르테의 소설이 어떻게 에코의 걸작들과 비교될 수 있다는 거냐는 비아냥들이 난무하고 있었던 것이다. 레베르테가 <뒤마클럽>이야기를 하면서 움베르트 에코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는 지점이 의심스러운 의도로 호도되고 있었나보다. 정작 레베르테는 '쉬운 문학'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공교롭게도 독자층이 바라보는 시점은 지적유희가 판을 치는 움베르트 에코적 분위기가 오버랩되어 있는데 무슨소리냐라고 항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움베르트 에코'적이란게 도대체 뭘까.  움베르트 에코는 <장미의 이름>에서 자신의 소설적 정체성을 드러냈드랬다. 그러니까 플롯자체는 미스테리 추리소설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과정에서 수많은 담론과 역사절 사실을 통한 갖가지 충돌식 토론과 의견을 지면위에 펼쳐놓음으로써 자신의 지적인 두께를 꽤 자랑했다. 독자들의 상당수는 한 인간이 두뇌에 담을 수 있는 지식총량의 무게에 이런 정도의 분량도 들어있을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면서 움베르트 에코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일반독자의 취향적 선택으로 보았을때,  추리소설로서 '장미의 이름'은 '잘못된 선택'으로 판단했을 가능성도 있다. 너무 길고, 너무 장황하고 그리고 너무나도 심취된 담론들의 연속이었으니까..취향이 죄는 아닐 것인데 에코스럽다에 너무 경의를 표할 건 없을테니 '장미의 이름'을 중도포기해도 충분히 납득할 만했다.  


어찌되었든 섬세하고 지적이며 현학적인 지식들을 백과사전식으로 펼쳐놓으며 역사적 사실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기술이란 왠만한 소양가지고는 어림없는 일이긴 하다. 우리는 상상력의 한계를 알고 있다.  적어도 '에코'적일 수 있으려면 몇가지의 조건들이 뒷받침되주어야 하고 그런 것들이 다 펼쳐지고 나서도 그 '케미'가 결론에 다다렀을때 얼마나 가슴이 공감해주는지도 기준으로 작용한다. 뒤마를 끌어들이고 '쉬운 문학'과 '정통문학'의 담론들 사이에서 보리스 발칸루카스 코르소를 대비시킨 채 격론 이끄는 정도로는 에코적이다라고 판단하기 어려웠을 것이나, 애초부터 레베르테는 그럴 마음조차 없지 않았을까. 자신은 '움베르트 에코'의 어려운 문학과 서술을 할 의도가 없었으니까. 그저 뒤마처럼 통속적이고 흥미위주의 쉬운문학이지만 자신의 창작성을 충분히 들러낼만한 내러티브였다고 <뒤마클럽>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데 방법적으로 에코의 서술적 스타일을 이용했다는 느낌은 강하게 든다. 


주로 독자들이 오해했던 건 <뒤마클럽>에서 발휘된 레베르테의 독서편력과 방대한 지식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역사절 사실 이면에 감춰진 미스테리한 설정들과 에피소드들. 팩션(Faction) 창조자였던  움베르트 에코 파트2가 되려면 이런 배경 없이는 불가능하다. 사실 이 유사성이 <뒤마클럽>의 매력이기도 하다. 우리는 초반부터 뒤마의 <앙주의 포도주>에 얽혀있는 이면 스토리에 집중할 것이고, 이윽고 병렬 대두된 아리스티테 토르키아의 17세기 델로멜라니콘의 삽화가 들어간 "어둠의 왕국에 있는 아홉번째 문'에 완전 몰입할 수 있다.레베르테가 쳐놓은 역사적 사실과 슬며시 틀어놓은 상상력의 설정의 늪에서 서서히 함몰되어가는 거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특유의 독서편력이 껴들고 갖가지 인용문과 상징이 결합되면서 장대한 '에코적 월드'를 은근슬쩍 그려놓았으니 혐의는 이제 충분하다.  

라파엘 사바티니를 소개하면서 <스카라무슈><캡틴블러드>를 소개하고 아예 초장에 주인공 루카스 코르소에게 캡틴 블러드보다 '스카라무슈'쪽이 더 사바티니의 경전에 가깝다는 의견을 슬쩍 비추고,  '아르멩골의 자식들' '고서와 사서학에 관한 호기심들', '페르실레스' '카스티야 왕국의 법전',  즈바코의 '호걸들', 폴페발의 작품들, 갈도스 번역의 디킨스의 '피크위크'등을 북 컬렉터들의 로망으로 묘사했고,  외젠느쉬의 '파리의 미스테리' 샤르니 백작부인, 두 다이아나총사들, 40권의 몬테크리스토 백작, 메리메'암노루의 복수' 등을 뒤마 그림자로 치장했으며,  베네딕토 카시아노 '악마사전', 피에르 크레스페의 '사탄의 증오' , 트리테미오 '스테가노르라피아' , 폰티아노'세기말에 대해'. 파올로 데스테 '에술에 관한 3권의 책' , 베르나르도 트레비사노의 '불가사의와 상형문자에 관한 엉뚱한 해석' , 붉은 집의 신사, 검은 튜을립등을 미스테리하게 창조, 인용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쉽사리 접해보지 못했던 몇몇 작품들의 나열에 기가눌리고 호기심과 그로테스크한 미심쩍음이 회오리칠 무렵, 이 <뒤마클럽>의 핵심이 되는 토르키오의 <어둠의 왕국에 있는 아홉번째 문>을 등장시켜 최고조로 긴장감을 증폭시켰다. 


자..독자들은 이 레베르테의 기가막힌 지적유희적 설정에서 얼마나 많은 내용을 캡쳐해낼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사실적 근거와 상상력의 산물을 구별해 낼 수 있는 것인가. 책사냥꾼의 코르소가 자기경험적 지적반항을 보르하나 보리스발칸에게 뿜어내는 것에 어느정도 공감하고 동의할 수 있는가. 책을 사랑하다못해 집착하는 책과 관련된 탐닉주의자들의 심리적 모양과 허세는 그럴듯했고 고딕적인 나인스게이트(조니뎁 주연의 동명 영화 : 실제 뒤마클럽을 원작으로 했다.)는 미스테리의 한 축을 증폭해 단독화될만큼 영향력 있었다. 뒤마클럽의 두 스토리축이 말미에 가서 허무하게 '아무관련 없음'으로 결론 지어질때, 신비로움의 연쇄반응이 응고되어 가라앉아버렸다는 실망이 문제였던 거지. 과정자체는 흥미진진했지 않은가. 그래서 서평의 기대에 못미친 아쉬운 작품이라는 평가들이 먼지처럼 떠도는 거다. 


솔직히 코르소의 빈정거리는 듯한 지적유희에 가까운 대화체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으로는 책중독자들의 구미를 충족시킬수 없었다. 진짜 원했던 건, 리아나 타이예페르가 밀레이디 환생으로 비쳐지고 돌아가는 상황이 루카스 코르소를 달탸냥으로, 그리고 로쉬포르가 생명을 위협한 채 '앙주의 포도주' 이면에 숨겨진 현실의 판타지화였을 것이다. 보리스 발칸이 수없이 떠벌이다시피한 '카를로스 데 바츠 카스텔모로'의 정체나 아르만도 드 쉴레그, 앙리드 아라미츠, 이삭 드 포르토와 같은 역사적 사실이 얼마나 삼총사와 밀접한지는 그저 장식에 불과하다. 그런 내용과 해설을 읽을 수록 느껴지는 건, '알았다구, 그러니까 도대체 지금의 상황과 그 총사들의 사건이 얼마나 신비스럽게 연결되어있는지 이제 그만 비밀을 밝혀줘' 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태연자약스럽게 보헤미안 스캔들의 '이레네 아들레르'가 등장하고 그만 '황량하고 비탄에 잠긴 분위기가 감도는 왕국에서 혼자 앉아있는 단조로운 모습'으로 루시퍼를 묘사한 코르소를 사랑하는 스토리가 등장해버렸다. 


하나도 힘든데 두가지가 얽혀있다니, 그렇다면 리슐리에는 연금술사이고 악마주의에 사로잡힌 고에시아(Goecia)를 연구한 역사적 인물이기라도 했다는 건가. 그리고 뒤마는 그걸 알아채리고 '앙주의 포도주'에 그 비밀을 숨기고  '어둠의 마왕을 불러내는 책' 델로멜라니콘의 열쇠가 되는 키워드를 '친필' 원작 원고에 숨겨놓아서 코르소가 이지경 이모양으로 생고생을 하면서 이리저리 사건을 겪게 되는 건가라고 상상하게 된다. 파르가스나 파리의 웅게른 재단의 컬렉터들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건 컬렉터의 허무한 삶, 그리고 악마주의 탐닉자의 허접스러운 옹호였다. 세속적인 플라비오 라 폰테와 낸터것의 포경사 클럽은 조크에 불과했고 결정적으로 리아나의 밀레디 오버연출은 섹슈얼한 에피소드를 무리하게 끼워넣다가 아무것도 아닌 이상한 설정이 되버렸다. 차라리 폴란스키의 나인스게이트가 그쪽으론 일관되었던 게 아닌가. 

나인스 게이트(Ninth gate)는 '앙주의 포도주'를 초장부터 거세하고 '어둠의 왕국으로 가는 아홉개의 문'에만 할애했다. 조니뎁에게 연결되는 리아나 타이예페르는 악마를 신봉하는 은밀한 조직원이었고 보리스발칸은 보르하와 합체해서 루시퍼를 만나고 싶어하는 그야말로 악마추종자로 화했으며 이레네 보들레르는 델로멜로니콘의 아홉번째 삽화의 여자로 연출되어 코르소를 나이스 게이트로 '인도'해주는 진정한 루시퍼의 대리인으로 나왔다. 약간 우습지만 영화와의 이 괴리감 중에도 여전히 리아나 타이예페르가 코르소와 책을 댓가로 섹스를 나누고 리아나가 따귀를 날리며, 이레네와 몽환적인 라스트 섹스신을 원작처럼 연출했다는 점이다. 가히 플롯의 주요 이벤트를 살리며서 '앙주의 포두주'만 들어냈던 셈이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조차 '뒤마클럽'의 '앙주 포도주' 미스테리는 극적 긴장감을 한번에 무너뜨리는 허망한 설정이었음을 눈치챈게 아니었을까. 약간이나마 총사들의 이야기에 나이스게이트가 연결이라도 되었다면 거대한 '얼음과 불에 대한 노래' 미니시리즈에 필적할만한 미니시리즈로 연출되었을 수도 있을텐데 그만 뒤마클럽의 조직적인 게임놀이에 놀아난 코르소라니...그러고도 보르하는 영화의 발칸처럼 부르짖다가 허망하게 끝난다. 코르소가 이레네를 통해서 나인스게이트로 갔다는 이야기는 원작에 없다. 그저 아홉번째 삽화가 잘못된 것이었다는 의미심장함만 남겨둔 채..시니컬하게 마무리되었을 뿐이다. 다만 뒤마클럽의 몰입도를 증가시키는 몇가지는 영화 나인스게이트를 먼저 본 탓에 완변한 코르소의 조니뎁을 상상했다는 것과 (Corso가 해적을 가리킨다고 하니 '캐리비안의 해적' 잭스패로우의 조니뎁이 나이스게이트를 선택한 건 숙명적인 결과가 아니었나하는 생각마저 든다.)앙주의 포도주스토리가 너무 허무해서 너무 기대했던 부담감이 격감된 것이다. 


개인적으론 영화도 좋긴 하지만 여전히 레베르테의 <뒤마클럽>이 좋다. 작위적이긴해도 코르소는 책을 정말 사랑하는 캐릭터이자 비열함느껴지는 세상때 물씬 묻은 사랑스러운 캐릭터고 이레네와 리아나는 충분히 자극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콘스탄스와 밀레이디였다고 느껴지니까. 게다가 난 뒤마의 <삼총사>에 대한 로망이 그득하니 <뒤마클럽>이 주는 뉘앙스가 그다지 나쁘지 않았던 셈이다. 두고 두고 읽을 지는 모르겠지만 흥미롭기로는 아르투로 페레즈 레베르테의 이력 중에서 제일 낫다고 본다.   





뒤마클럽

저자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출판사
시공사 | 2002-02-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210개의 역주, 2년여에 걸친 지난한 번역 작업 『뒤마클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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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ewell
Review BOOK/소설2014. 5. 23. 16:48


앙드레 지드<야간비행> 서평을 통해서 '리비에르의 숭고함'을 칭찬할 때, 이성과 정신의 강조를 통해서 작품이력을 넓혀온 앙드레 지드라면 냉혹하리만치 차갑고도 일관된 그리고 초인간적인 미덕을 가진 리비에르에게 마음을 빼앗기는게 당연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드랬다. 만약 야간비행이 '리비에르'의 이야기라면 여태 우리는 밤하늘에 고고하게 자신만의 차원과 세계를 회복하고, 고독하기 짝이없는 조종사를 로망으로 결코 읽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기엔 <야간비행>의 스토리가 너무 한가한 경치놀음으로 비추어질테니까....<야간비행>에서 결국 독자들이 기억하는 건 뭘까.    


비지니스 경영서적과 달성해야 할 인간적 정신력을 주제로 한 인문학의 세계에서라면 리비에르는 <야간비행>에서 온전하고도 확고한 '지휘자'의 롤모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조종사가 파타고니아 어디에 처박히던, 혹은 천킬로미터의 폭풍 구름 융단 위에서 오도가도 못할지라도 여전히 조종사를 하늘로 올려보내야만 하는 강력한 의지의 소유자라니...반면, 이것을 숭고하게 바라보고 자기초월적 의지의 순수성을 본다고 경탄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아마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리비에르는 완전한 덕목의 소유자였으리라. 단호하지만 갈등하고 괴로워하고 걱정하는데다가 겉으론 내색조차하지 않는 '상관'으로서 '야간비행'은 그저 뚫고 나가야할 목표이자 성과이기 때문이다. 난 그런데 리비에르의 강력한 카리스마앞에서도 동조의 시선조차 할애 하지 않고 있었다.


앙드레 지드의 서평을 읽으면서 동감하기 힘들었다는 건 이런 걸 두고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싶다. '우리가 보고 싶은게 의지의 순전힘으로 휙득할 수 있는 자기초월'이라고 하는 구절을 읽으며 속으로 누가 그런 걸 기대하고 야간비행과 남방 우편기를 본단 말인가라고 투덜대고 있었다. (물론 앙드레지드의 서평 정도면 굉장히 훌륭한 서평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대다수의 일반 독자는 야간 비행의 첫서두에 등장하는 몇 줄의 풍광 묘사을 따뜻하게 기억한다. '벌써 황금빛 석양속으로 구릉의 그림자가 짙어져 밭고랑을 지듯 펼쳐졌고 들판은 오래도록 스러지지 않을 빛으로 환하게 밝았다. 이 지방에서는 기울어가는 겨울에도 하얀 눈이 남아있듯 대지의 황금빛 저녁놀이 늦도록 불타올랐다'는 대목 말이다. 오히려 '야간비행'에서 이런 서정과 로망의 정서를 기대하고 기억하는 쪽일 것이다.  콘크리트같은 숭고한 의지를 기대하기보단 파비앵과 베르니스의 고독한 비행, 프로펠러 뒤로 펄럭이듯 사라져가는 마을과 항구와 산등성의 풍경들, 그리고 생을 정리하기도 부족한 황급한 순간들에서야 생각나버린 과거로부터이어진 회한들, 결국 묵묵히 "하강함, 구름속으로 들어감"을 무전치며 쓸쓸히 무전국 백지위에 유령같은 글자들이 찍힐 때, 마음 가득히 안타까움을 뭍고 조종사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신을 느낀다. 마치 '삶이란 풍경을 바라보고 음미하듯 그저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슬쩍 비춰질때 리비에르의 존재감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밤은 어두운 연기처럼 피어올라 계곡을 매우고, 벌써 불을 밝혀 별자리처럼 반짝임으로 서로인사를 나누고 조종사도 거기에 화답하듯 손가락을 튕겨 날개등을 깜박인다. 이윽고 등대가 바다를 향해 불을 밝히듯 집들이 저마다 광대한 밤을 향해 자신의 별을 밝히자 대지는 반짝이는 호출신호가 점점히 박힌듯 펼쳐지는 가운데, 인간의 삶을 감싸는 모든 것이 이미 반짝이고 있었다.


비행기 날개의 강철 소골부분을 쓸어보며 오백마력엔진이 이 물체에 아주 부드러운 전류를 흐르게 하여 얼음처럼 차가운 강철을 벨벳처럼 부드러운 살로 변하게 했다던 파비행을 보면서 우리는 축복같은 비행의 헤택이 그를 더 감성스럽고  로망스럽게 만들었다고 믿게 된다. 이윽고 야간비행이 가져다 주는 마음속의 정경과 이미지가 온통 이러한 쓸쓸하지만 동화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탄식과 독백으로 마음속에 그려졌음을 인지한다. 야간비행의 추억은 이런 명문장들의 차지가 되버렸다. 독자들은 이 야간비행을 읽으면서 서서히 서정적이고도 운명적인 조종사 좌석에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리라  다만  인생이 그렇듯 이런 로망뒤에는 숙명적인 갈등과 절망이 몸을 구기고 숨죽이고 있는 것을 불안하게나마 눈치채면서 설마라는 단어를 동시에 떠올리면서...





살다가보면 결국 파비앵의 폭풍을 나도 만나는구나라고 생각되어질 때가 있다. 이제는 죽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되어지는 생애의 마지막에서나 겪는 암흑같은 절망감,  별탈 없을 거라고 근거없이 믿고 살았어도 늘 이 불안감이 없지는 않았는데 막상 닥치면 그냥 현실이 너무 비현실적이다.  그러기 앞서  '죽음을 부르는 미끼처럼 반짝이는 별 몇개를 따라 비상' 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인거다. 그런데도 삶이란 묘해서 죽을 만큼 힘이들고 괴로우면 그것이 '한번 별을 따라 올라가면 더이상 내려올 수 없어서 별을 깨물며 머물게 된다'는 결말을  알면서도 삶의 조종간을 당기고 싶어진다. 나도 파비앵도  결국 죽음을 부르는 미끼같은 별을 따라 하늘로 쏫구친건 아닐까 . 이 잠시간의 평안함이 일생동안 마지막으로 주어진 찰나적 안락함이 아닐까.  


리비에르의 진심은 사람들의 진심과 별반 다를게 없다. 절망을 바라보는 일반 시민들, 그저 아직 절망이 불행이..불운이 닥치지 않은 그 사람들의 입장인 것이다.  '우리는 영원하기를 바라는게 아니야. 행위와 사물이 갑자기 그 의미를 상실하는 모습을 보지 않으려는 것이지. 그렇게 되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공허가 나타나거든..' 다들 공허함이 두렵고 그 처지가 너무 운명적이어서 받아들이기 어렵고 미칠 것 같은 절박함이 바닥을 드러내게 되면 사람들은 냉혹한 현실의 룰을 하나씩 더 추가할 뿐이다. 엔진 1,900 회이상 회전금지.....삶에 딱히 해결책이 없으며 전진하는 힘만이 있을뿐이라고 결론지으면서 일상으로 돌아가도 우리는 뭐라고 할 수 없다. 그냥 쓸쓸함이 감돌지만 운명에 순응하고 상처받지 않기위해 규칙과 룰에 집착하고 부속같고 영향력 없는 한 인간의 무력감이 지면 위에 덩그라니 남았을 뿐,


그에 비하면 <남방우편기>에서 기억나는건 단 하나 뿐이다. 주느비에브를 데리고 비오는 날 호텔을 전전하면서 겪는 현실적인 어려움들..(주인공 베르니스는 불행해진 과거연인 주느비에브를 다시 자신의 곁으로 데리고 올 생각을 한다.) 과거의 연인이 자신을 데리고 가달라는 판타지스러운 로망이 있을지라도 결국에는 차가운 현실의 벽을 만나게 될거라는 대중적인 추측은 별로 어긋남이 없는 법이다. 그저 차가운 현실이 있음을 인지하면서도 그런 전제 아래에서 한없은 풍경속을 날아가며 초월하려고하는 욕구같은 것들이 비행에 스며든 것 뿐이지.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기 주위에 지속되는 현실이 필요하고, 부조리하다든가 부당하다는 건 그저 말뿐이고, 베르니스가 데려가 주느비에브는 더이상의 주느비에브가 아닐거라는 친구의 조언은 너무 통찰력이 있어서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여기선 베르니스의 희망찬 독백이 더 어줍잖고 비현실적이더라도 '남방 우편기'스러웠는데 ...그러고보면 생텍쥐페리는 몽상가라기보단 지독한 현실주의자가 아니었을까 의심스럽다. 


베르니스와 주느비에브를 보면 '정말 내가 꿈꾸었던 어떤 만남과 연인과 그리고 어떻게 일이 이렇게밖에 돌아갈수가 없는거지라고 푸념했던 불운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꼬여버린 '지금'을 만나면 연인들은 자신들의 선택을 의심하고 '인연이 아니었음'을 떠올린다. '주느비에브, 이 밤이 이 비가 우리의 신뢰를 망치고 있는거야. 라고 읍조리며 불치병같은 현실을 의심했던 베르니스와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런 징그러울 만큼 흡사한 과거가 한번 정도는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대중들이 몇가지 가설을 진리처럼 믿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성숙되지 않은 시절의 사랑들은 다 '미완성'이 될 운명이라고..첫사랑은 이뤄질리 없고 그 사람은 떠날것이고 나는 훗날 더 단련이 되고서야 제대로 된 사랑을 만날 것이라고...   


'나의 여름은 덥고 짧고 우울하고 행복하다' 

...............................

포르테티엔 16시 45분 출발.

세네갈의 생루이 도착소식 없음.

자그 베르니스 프랑스기지 불시착 

이후 행방불명. 


풍경만으로 기억하기에는 너무 애절한 '남방 우편기'였지 아마.....


우리는 밤속으로 들어간다. 한개비의 담뱃불을 신호등 삼아..그러면 세계는 자신의 진짜 차원을 회복한다.'




야간 비행 남방 우편기

저자
생텍쥐페리 지음
출판사
웅진씽크빅 | 2008-09-3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찬란하게 빛나는 밤의 구름바다 위를 헤매고 있지만 저 아래 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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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ewell
Review BOOK/소설2014. 5. 23. 16:44


아주 오래전에 '폭풍의 언덕'과 '모비딕'을 읽었었다. 그러니까 이런 고전따위는 유년들의 삶에서 좀처럼 자발적으로 읽히기 힘든 어떤 지루함의 정서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건 내가 '문학'적으로 조금이나마 관심이 있었던 감성적 부류가 아니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때로는 친구들 중에는 캐서린 언쇼를 지긋한 눈빛으로 이해한다고도 했고 에이허브의 광기어린 하얀고래 집착증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본다고도 했드랬다. 나보다 다들 성숙해 있었던 걸 보면  그 나이, 그 시절, 내 정서의 함량을 넘어서는 퀄리티적인 괴리감이 그 친구들에게 있었던 것 같다. 당시의 나에게는 정신착란의 캐서린, 돌아버린 미치광이 에이허브였을 뿐이었으니까. 


그리하여 멜빌의 다큐같은 '모비딕'을 다시 차근차근 읽어보리라고 책장을 넘겼다. 무수한 세월들의 폭풍우가 가져다준 내 소양의 흔적들은 프랑스 척탄병같다던 피쿼드호을 완벽히 감싸안을 만큼 보호무늬가 되어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과연 나는 지리하게 이어지는 고래 해설서와 같은 대목들을 묵묵히 읽으며 지나갈만큼 동화되어 있었고 무덤덤해져 있었드랬다. 까짓거 2절판 운운하며 참고래와 향유고래 특성을 백과사전처럼 읇조려준다고 해도 난 이게 피쿼드의 생애와 사실적으로 여떻게든 연결되어있어서 갑판위에 이슈메일 뿐 아니라 스타벅스터브, 퀴퀘그에게 모종의 '지식'(?)이 되어줄거라는 착각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그리고 괴이하다고 느꼈던 크레타 문양의 형형색핵 문신을 가진 작살잡이 퀴퀘그를 비롯한 타슈테고와 다구의 투창병들 곁에서 작살날을 빼서 면도라도 하고..경건한 작살잡이는 한푼의 가치도 없다고해서 일부러라도 스스로를 흉포한척 하는 시늉이라도 할 뻔했다. 


이정도면 예전의 모비딕이 아닌거다. 135장 넘는 항해 일지같은 해설서를 관통하는 동안 어디 서고에 보관되어있는 기록지들의 몇 십년 연대사를 추적하고, 중간중간에 있었던 비밀스럽고도 은밀한 비화들을 숨죽여 읽던 후대 기록자의 마음으로 항로를 따라간다는 것, 이슈메일의 묘사대로 고래를 해체하고 작살던지기에 대해서 숙독하며, 기름통에 파묻혀 열병을 앓다가 살아난 퀴퀘그의 관을 옆에서 같이 만들었을 것 같고,  용연향 가로채기같은 고래강탈의 현장에서 같이 낄낄대고 있었던 것 같은 현실감, 다 모비딕을 다시 읽었을 때 생겨났던 보기드문 경험들이었다. 그러고보면 지리하게 서술된 고래에 관련된...바다와 관련된 수많은 백과사전식 해제들은 소설적 스토리와는 별개로 피쿼드호의 리얼리즘, 그리고 다큐적인 현실감들은 '시간의 세례'에 의해서나 드러나는 모종의 비밀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도 읽었지만 그땐 흰고래를 쫓는 광기어린 에이허브말고는 떠오르는 어떠한 이미지도 없었으니까..


낸터컷물보라 여인숙, 피터코핀에 걸려있는 성난고래가 선채를 뛰어넘다가 돛대머리에 꿰인 그림이나...,  광택이 나는 상아목걸이를 목에 건 야만적인 에티오피아 황제처럼, 적들의 뼈에 돋을 무늬를 새겨서 화려하게 몸치장을 한 솜씨좋은 식인종의 이미지를 뿜어냈다던 피쿼드호의 묘사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고 퀴퀘그의 '요조'는 이제서야 그 존재를 눈치챘다고 한다면 가히 '모비딕'을 읽었다는 표식은 좀 더 레벨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한 3 레벨 정도 되려나..요즘으로 치차면 잡설을 위한 잡설일지도 모르는 멜빌의 이런 묘사들은 '광경'에 대한 상상을 부추기고 감정에 대한 풍경을 그리게 된다. 나도 고래잡이를 더럽고 냄새나고 비위생적이고 기껏해야 도살업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었다. 도살업을 즐기면서 그저 흰색이 주는 순결함을 어떻게든 더럽혀보자는 잔인한 뱃사람들의 무모한 도전기가 모비딕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나보다.  



몇몇의 독자들은 피쿼드가 모비딕을 만나기전까지 수많은 여정들이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로망의 해양탐험소설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나. 캄비세스 카이사르, 그리고 티모르 잭이라도 만나고 일본왕 모르콴과 칠레고래 돈 미겔을 보면서 고래 수족관에 온 구경꾼마냥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관람하고 열대해역의 문지방으로 들어가 그곳을 영원히 지배하고 있는 키토의 화창한 봄빛 속을 달리면서 향기롭고 넘칠듯한 풍족한 낮시간을  장미향수를 뿌린 눈으로 만든 페르시아 빙과를 수북히 쌓은 수정그릇에 비유할 줄 안다면 잠시나마 모비딕은 로망소설일 거다. 게다가 에이허브는 선원들에게 듣기에도 애매한 고고한 자신의 은유와 비유를 설파하지 않는가. 듣고 있으면 마치 바다를 향해서 자신의 자아를 어떤식으로든 그럴듯하게 포장하려는 고집센 철학자같으니... 고래잡아 죽이기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소설치고는 너무 낭만적인 것이다. 


'나를 모욕한다면 태양이라도 공격하겠어' 대충은 에이허브가 어떤 캐릭터인지 알듯한 구절은 이 구절하나만은 아니다. 물그러미 바다를 내려보면서 '나에게 달아나는거지'라고 미친노인이 지금까지 보여준 것보다 훨씬 깊고 절망적인 슬픔을 띠고 있었다고 했는데 이즈음되면 이 포경스토리가 기어코 해피엔딩으로 가는 일은 배제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듣기에 따라서는 에이허브가 모비딕을 잡던 말던 책의 중간이상을 넘어가면 모종의 안도감같은 것들이 감돈다. 하이델베르그의 술통에 빠져서 생을 달리할 뻔했던 타슈테고와 그를 살려낸 퀴퀘그, 그리고 바다에 자신의 자아를 두고 정신이 나가버린 피핀, 요나와 잡힌 고래와 놓친고래에 대한 작가의 진지한 고찰.. 비록 스쳐지나가듯 정답없는 몇가지의 상념들이었을 지도 모르지만 배위에 있거나 지면위에 있거나 다들 비슷한 생각들을 하면서 살아간다고 보면 이 소설도 나름대로 역할을 다하고 있는 셈이다. 


퍼스를 얽어매고 치솟아오른 모비딕이 데리고 사라진 피쿼드의 영혼들틈에서 살아남은 이슈메일의 엔딩이 너무 단촐해서 시간에 쫓긴 블럭버스터의 가위질이 생각나지만 미친듯한 엔진과열음이 들리다가 기어코 어느순간 엔진은 멈추고 고요가 찾아오면 그때야 말로 꼭대기까지 삼켜진 피쿼드호 처럼 모든게 끝난다고 깨끗이 털어버릴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하여 수많은 여정끝에서 며칠간의 추적, 그리고 모비딕과의 해후끝에는 피쿼드에 실려 같이 항해를 했던 독자들의 지친 고단함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이슈메일이 구조되고 다시 낸터컷으로 돌아오면....잠시동안의 장례식대열을 쫓아가다가 물보라 여인숙으로 아니간다고 장담할 수 잇을까. 다시 퀴퀘그를 만나고 상아 장식의 식인종같은 피쿼드 같은 배에 다시 탑승하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이건 다 모비딕이 남긴 후유증이자 향수다. 

.


모비딕

저자
허먼 멜빌 지음
출판사
작가정신 | 2013-08-0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포경선을 탄 경험이 있는 특이한 이력의 작가 허먼 멜빌이 격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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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ewell
Book Pantry2014. 5. 21. 13:24

1.

어렴풋이 짐작했던 것이기도 했지만, 책을 읽었다고 해서 책안의 모든 내용을 다 기억 할 수 있는건 결코 아니라는 걸 다시한번 절감하게 되었다.  지인이 어떤 대목을 말하며 '그 부분을 난 이해할 수 없어 넌 어때'라고 불현듯 물을 때, 아 그래 그 대목 나도 이해가 안가..라고 말하면서 바로 맞장구 칠만큼 신속하게 기억에서 팝되었으면 좋겠는데 이건 그야말로 희망사항 일 뿐이다. 몇 초간의 탐색질 끝에 내 머리속에서 '띵'하고 경고 팝업이 뜨듯 슬며시 말한다. '기억에 없음..' 뭐라고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나도 뭐라고 이야기해줘야 할 지 모르겠네' 라고 얼버무려 버렸다. 이건 책을 읽었다고, 그렇다고 안읽었다고 말하기도 뭣하다.


2. 

가브리엘 마르케스가 생을 달리하셨다. 갑자기 검색어에 '백년동안의 고독'이 '삶의 고독'을 대표하듯 캐치프레이즈처럼 나부끼고, 블로그들에도 느닷없는 찬사와 추억 되새김질과 사후 찬미의 루틴한 호응이 벌어지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백년동안의 고독'을 읽으면서 난 마술적 리얼리즘이 뭔지 감도 잡지 못했다. 그저 아르카디오의 피가 흘러흘러 층계를 지나 바닥 복도를 지나 대문을 지나 그리고 또 어쩌고 저쩌고 해서 드디어 죽음이 전달되는 과정을 읽고, 멜키아데스의 유체이탈된 삶도 읽고, 주전자가 끓어 뚜겅을 열어보니 구더기가 드글드글 하고 뭐 이런 비현실적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현실적으로 묘하는게 '마술적 리얼리즘'인가보다 했다. 어찌되었든 개인적으로 기억나는건 그냥 '백년'의 서사가 아니라 '고독'의 느낌이었드랬다. 아우렐리아노나 우르슬라나 아르카디오나 레메디오스나 레베카나 다들 외롭고 '고독'하며 쓸쓸하다는 느낌..마콘도가 그냥 처음의 부엔디아의 안중에서 에덴처럼 유지되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상상만 들곤 한다. 한번 다시 읽어볼까 고민 중이다. 


3.

알베르트 망구엘의 <책 읽는 사람들>을 드디어 2 챕터 정도만 남기고 다 읽어간다. 오랫동안 음미하듯 읽었는데 어떤 경우에는 한 단락도 이해가 잘 안되서 넘어가질 못하고 디제잉 판 튀기듯 앵무새처럼 반복해서 단락을 와따리가따리 하셨다. 그런다고 해서 이해되지 않는게 갑자기 이해될 리는 만무하겠지만,  여러번 읽는 다는 건 뇌에게 '야 제대로 이해 좀 부탁해. 이건 중요한 거니까 반드시 이해해야만 하거든' 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자꾸 자꾸 읽는 것 외에는 딱히 방법이 없는 셈이었다. 어쨋든 책을 사랑하는 망구엘의 열정은 말할 것도 없고, 그가 가진 지적인 두께도 얼떨떨하시다. 가끔 이렇게 책을 폭식하듯 읽고 안에 담긴 영양분을 하나하나 낱낱히 분해해서 혈관에 녹인듯한 기인들을 보면서 '난 시간이 부족했을 따름이라고' 속으로 거짓말을 일삼을 뿐이다. 


4. 

카프카의 '소송'과 ''을 다시 읽으려고 한다. 어언 이게 오래전 일이 되버렸는데 그냥 이야기의 뼈대만 슬쩍 기억나고 뭐가 어떻게 된건지, 그리고 무슨 의미였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패니의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를 다 읽고 나면 '성'을 읽어봐야겠다. 내 예전 기억의 파편들이 어느 정도의 크기로 부숴져서 흩어져있는지 가늠할 수있는 좋은 기회겠지. 


5. 

보르헤스의 '픽션들'을 여러차례 읽었는데도 사실 '진의'와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알레프도 그래서 주저하고 있는거겠지. '칠일밤'도 밀려있고,.....휴...그런데도 비오이 케세레스의 '이시드로 파로디의 여섯가지 사건'과 '모렐의 발명'은 정말 재밌었다. 이건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즈오 이시구로를 칭찬하듯 보르헤스가 카사레스를 그런식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이어졌다. 좀 재밌게 써줬으면 싶었는데 ...읽을 때마다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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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ewell



개인적으로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을 읽으면 막 조깅을 시작했을 때와 같은 두근거림이 있다. 몸은 활력을 찾아가고 사지에서 슬슬퍼저가는 긴장감과 숨소리와 섞이는 심작박동과..뭐 등등... 이 양반이 얼마나 재기발랄한 모습을 활자로 보여줄지 가늠이 잘 안되긴 하지만 이와 별도로 어쨋든 기대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거장들의 서적들속에는 모종의 자기들만의 무늬들이  있는데 그건 시그니처와도 같다고 늘 생각해왔다. 읽으면 아 이분의 글은 맞네 맞어 혼자 중얼거리게 되고 이내 그런 잠정적인 전제 조건들을 레디 장치로 각인해가며 읽게된다. 그러다보면 ~적이다라는 말의 뜻을 알 것도 같다. 혼자 단정짓고 결론을 내버려서 그 작가분들께는 죄송하지만 받아들인 나로서는 이 책이나 그 책이나 그 작가의 무늬들은 거의 흡사하게 느껴지는데다가 분위기역시 비슷해서 익숙해지는 과정을 피해갈 길이 없어지니까..


가끔 이런 예상이 빗나가는 작가도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가즈오 이시구로다. 나는 <나를 보내지마>에서 가즈오를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남아있는 나날>들에서는 전혀 가즈오 이시구로를 생각치 않고 읽어버렸다. 그리고나서 나중에 아 맞다 가즈오 이시구로였어 왜 잊고 있었지라고 황급히 떠올렸다. 이런 이런 이시구로의 스타일이 아니었나봐..아무튼  이 이야기는 나중에 책 이야기를 길게 쓸 때 한번 더 해볼 작정이다. 아무튼 너무나 글을 잘써서 속으로 감탄을 거듭하면서 끝까지 읽고 덮었다. 이 후 스테판 츠바이크<체스 이야기>파트릭 모디아노<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연타로 읽게 되었다. 아직 다 읽진 않아서 섣불리 말하긴 곤란하지만 지금까지는 잘 흘러가고 있다. 특히 스테판 츠바이크는 굉장히 재밌게 글을 쓰셨다. 마치 흥미진진한 추리소설을 읽듯 읽게 되었다는...


책 읽기에는 좋은 날씨다. 

Posted by kew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