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nilla Essay2018. 8. 3. 22:18

굳이 그러려고 그런건 아닌데,

이상하게도 죄다 철학책이 되버렸다.

 

1. 루이 알튀세르 - '마르크스를 위하여'

2. 비트겐슈타인- '논고해제'

3. 한나아렌트 - '인간의 조건을 읽는 시간'

4. 백승욱 - 생각하는 마르크스

5. 에티엔 발리바르 - '마르크스의 철학'

6. 발터벤야민 - 화재경보

 

 

뭐 때가 되면 또 장르는 바뀌겠지.

우선을 읽고 나서 생각하자.

Posted by kewell
Vanilla Essay2014. 7. 8. 11:38

책을 계속 해서 사재끼는건 별로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일정 금액의 수익은 정해져있고 소비는 제한적이며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모종의 룰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현실이며 그게 또 이성적이니까..자제하고 효율적으로 생각하며 아껴쓰고 적당해야 한다. 책을 사는 것도 자칫하면 과소비로 가는 길이 되기 십상이다. 끊임없이 출판되는 책들의 더미속에서 마음에 드는 몇 권의 책이 수십권의 책으로 변하는건 시간 문제다. 목록은 불어나고 자신도 모르게 하나둘씩 습관적으로 사들이다가 나중에서야 지나친 소비비율로 '책구매'가 자리잡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대개 책을 사는 것이 나쁘지 않고 투자의 성격이 강하므로 빚을 내서라도 사는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시는 부류들이 있는데, 냉정히 생각해볼 때, 그 사람이 '그 책을 통해서' 누리려고 하는 쾌감과 즐거움의 정체, 결과적으로 얻게 되는 이익들을 따져본다면 무형의 책읽기에서 뭔가를 얻어내는 속도보다 책을 구매해서 스스로 난처한 지경에 빠지는 속도가 훨씬 빠를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지나친 독서욕구, 탐욕적인 허세, 지식에 대한 과한 탐구욕들이 괴이한 변명으로 위안이 되곤 한다. 책은 유익하니까 차라리 술마시고 먹는거 사먹고 그러는데 쓰는 돈보다 그래도 낫지 않을까라는 사고가 기본적으로 깔려있다. 그러나 이건 한마디로 궤변에 가깝다. 


우리 어느 누구도 물을 먹지 않고 밥을 먹지 않고 책종이를 뜯어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책은 책일 뿐이며 밥은 밥일 뿐이다. 생계를 도외시하고 책을 구매하는 몇몇 지인들을 볼 때면 불편하다. 적당히 사서 적당히 누리고 적재된 책을 읽으며 버텨도 정서에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을 텐데..읽지도 않은 책들이 수십권인데도 계속해서 사댄다. 경제적 능력이 ..여력이 된다면 이 모든 과소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컬렉터와 같은 삶일 테니...피규어 수천종을 수집하는 매니아도 있는 마당에 책을 수천권 사댄다고 뭐가 문제가 되겠는가. 다만 그 사람이 책을 그렇게 구매할 능력이 못되는데 무리를 할 때 문제는 생긴다. 


자신의 형편을 돌아봐서 어느정도 제한선에 걸리면 책을 사대는 중독을 조절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선 사 놓은 책 부터 읽으시라..무조건 맘에 드는 새책들을 무작위로 사대지 말고..미적거리며 사두었던 미완의 이야기들을 소화하고 곱씹으며 책을 해치운다음 소소하게 사고 싶은 위시리스트를 꺼내고 거기서 현재 내 주머니에서 허락하는 한도내에서 새 책을 구입하는 걸 권장한다. 뭐 도박으로 집안이 망하나 책을 사서 가난해지나 가난해지는 건 매일 반 아닌가? 밥을 쫄쫄히 굶는데 사방에 쌓인 책을 보고 즐거워한다는 무슨 중국 고사성어같은 이야기를 떠올리는 시대착오적인 발상은 접어두고 현실에선 냉수 마치고 속을 차리는 편이 더 좋을 듯 싶다. 


그리고 돈이 없으면 무리하지 말고 빌려서 읽으면 된다.

국립 도서관은 폼으로 있는게 아닌데 ...발품을 팔고 가서 구민 회원증 만들고 한주당 3권씩 빌려서 읽으면 이것처럼 좋은 일이 어디있을까. 물론 내  책이 아닌지라 줄을 그을 수 없다지만, 그래도 읽을 수 있는 책이 손아귀에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인 일이다. 

Posted by kewell
Vanilla Essay2014. 7. 3. 11:44

김승옥(金承鈺)과 하루키(村上春樹), 그리고 장마비가 오는 날.


-<언어의 정원>-


대낮에도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후드득소리를 내면서 무거운 비의 진탕질이 길바닥에 시작되면 언제나 드는 생각, 조용한 조명아래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싶다는 생각 뿐이다. 하늘은 이미 야외의 축복이 없다고 단언하듯 시꺼먼 커텐을 쳐버렸고 땅에는 페인트 튀기듯 물난리가 벌어지면 거의 모든게 성가셔 진다. 남은 건 집구석에 쳐박혀 두터운 이야기의 세계로 들어가는 출입구만을 노리고...구석에 오렌지가 터져서 번진듯한 스탠드를 그윽하게 배경삼고, 적절하고도 눅눅함이 깃든 책한권을 손에 든 채  한장 한창 넘길 때, 이 보다 더 가슴 두근거리는 일은 아마도 없을 거라고...그렇게 혼자 중얼거린다. 사실은 그럴 수가 없을 뿐이지 세상에는 스스로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계기들이 수없이 존재한다. 다들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며,  약간 시니컬하게 말하자면 용기가 없어서 책읽기로 어수선함을 감내하기 어려울 뿐이다. 왜냐면 책을 읽는 동안은 자기가 현실을 도외시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얼마전,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다시 읽었다. 더불어 <서울 1964 겨울>도, <서울의 달빛 0章>도 같이 읽어버린 건 부수적인 행운이었지 아마 . 어쨋든 '60년대의 문학적 성찰'이라는 타이틀로도 이 묘한 기분을 갈음하기는 어렵다. 예나 지금이나 시대적인 소나기가 문장과 글에 내리고 그때였기 때문에 그렇게 감동적이지 않았을까라는 추측들은 다 별로였다. 이게 어디 60년대에 쓴 글이란 말인가 아무리 봐도 2014년 여름이 시작될 무렵에 썼다고해도 하나도 이상할게 없었다. 군더더기도 없고 단호한듯 하면서도 심플하고 그저 단촐한 풍경들이 이어지고 옅은듯 깊은 듯 감정의 도랑을 패이며 지나간다.  모종의 글쓰기 기술이란게 있다면, 아마 이런 문장들이 신의 축복이라고 했던 이유가 너무나도 분명해지는 순간이다. 아 이 분은 어쩌자고 이렇게 글을 잘쓰셔가지고 후대의 문학지망생들에게 두근거리는 도전의식을 심어주셨던가. 근 50년이 지나버렸는데도 아직 기력이 다하지 않은 이 생기발랄함은 뱀파이어 같을 정도다. 무섭기도 하고....평범해보이지만 정작 해보려고 하면 흉내도 내기 어려운 어떤 것들이 되버렸다. 


이렇게 유사한 느낌을 하루키의 글에서도 받았는데 김승옥과 하루키가 왜 비슷하게 느껴지는 거지라며 한참을 생각했다. 둘은 시대적인 연배도 다를 뿐이고 장르적 유사성도 없는데다가 추구하는 세계도 다르다. 그런데도 같은 악보에 있는 프레이징 같은 느낌이다. 혹시 김승옥이 이 글들을 쓰고..하루키가 어느날 챈들러를 읽다가 우연히 <무진기행>을 읽고 그리고 <노르웨이의 숲>을 쓰고....뭐 그러면서 어느날 읽다보니 한국에도 인상적인 소설이 있었어요..김승옥 상이라고...단편들을 쓰셨죠. 업다이크도 좋지만 김승옥씨의 글도 좋았어요. 한번 읽어보세요.....아마 이렇게 추천사를 썼었어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고 이상하지도 않았을 것만 같다. 둘 사이에는 시간의 교량이 있어서 장마비가 내리는 날에 통로가 연결되고 그 다리위에서 오며가며 같은 감정을 느끼고 둘이 혹시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오호라 당신도 나와 비슷한 부류 구료 서로 인사나 하시죠 라고 악수도 하고 ....그러지나 않을까....



비가 상상을 너무 부채질 한다. 



Posted by kewell
Vanilla Essay2014. 4. 29. 10:25

내가 이미 삐뚤어져있다고 가정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많은 대중들은 현재 '지적인 허영'을 누리고는 싶지만 '책을 읽기는 싫은' 지경에 놓여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현학적인 자랑질과 책을 읽었다는 포만감과 무엇보다 지식의 두께와 감성의 찬란함을 작가로부터 빼앗고 책을 읽었다는 미션 클리어를 각자의 시그니처로 남들에게 내보이고 싶은 욕구는 넘치나 실제 책을 펼치고 장을 넘기며 행간에서 어떤 걸 느끼고 생각하고 감정의 유입과 뇌가 한여름 천정에 달린 환풍기처럼 가열찬 속도로 돌아가는 그런 과정을 소비하기엔 스스로가 너무 피곤하다고 생각한다. 또 어쩌면 맞는 말일 수도 있고..


이 고단함의 정체가 뭘까 생각해봤는데, 개인적으로는 미디어로부터 야기된 일종의 페이퍼에 대한 참을성 결여가 아닐까. 그런데도 팟캐스트의 '책소개'는 듣는다. 그리고 이 여파가 상당하다. 책방에서 한켠의 책들을 뺏다 꼽았다하면서 골라내는 수고따위는 어떤 비효율적 머저리들이나 하는 행위가 되고 미디어에서 소개해준 감칠맛나는 소감들로 책을 사러 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속죄'는 대형서점에서 판매부수 급상승이라고하는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이동진씨와 김중혁씨가 이 여파를 두고 팟캐스트에서 부담스러워했지만, 뭐 좋은 책이 사장되는 불편함을 생각해볼 때, 이런 여파는 있어도 나쁘게 볼 이유는 없지 싶다. 다만 이렇게 해야 책을 선택하는 이 풍토가 '신세계'의 일면이 되어가고 있을 뿐이다.

그래도 읽는다는 건 좋은 일 아니겠는가. 아니 읽고 넘어가는 것보다는 좋은 일이다. 대중성에 협조를 구하고 마케팅으로 어줍잖은 퀄리티의 책들을 속이는 죄야 분통이 터지지만 이렇게 넘어가는 책이나 걸작이지만 쉽게 잊혀지고 독자들의 얕은 참을성의 벽을 넘지 못한 채 침몰해가는 대작들이 얼마나 많을가를 생각해보면 쉽게 '광고'와 '선전'과 미디어에서 앞다투어 꺼내놓는 이 기회를 버리라는 건 가혹하다. 팟캐스트는 게다가 어떤 점에서 '상업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약간 부담이 덜하기도 하다. 다만 이런건 있다. 팟캐스트던 뭐든 아무리 세상일에 치여산다고 해도 '책을 읽는 대신' 팟캐스트를 읽으며 '책을 읽은 것'처럼 생각하는 건 좀 그렇다. 어차피 팟캐스트도 '책을 소개하는 이유'가 읽으라는 거였으니까. 안 읽고 대담으로 책내용을 가늠하고 다른 사람들의 견해를 내 견해로 치환하고 그렇게 정리하고 넘어가고 다른 책 이야기도 매주 해달라고 하고...왠지 편의주의적인 느낌이 막 든다. 


 아무튼 이동진의 <빨간책방>의 여파는 상당했다. 이언 매큐언<속죄>가 무료함의 두터움으로 독자들을 위협한지 꽤 시간이 되었음에도 이젠 다들 돌파하려고 서점으로 향했다. 이건 이동진 기자가 쌓은 '지적 욕구'의 상징성이 꽤 신뢰성이 있어서인가. 아니면 인간적인 매력때문에 소개하는 책도 믿고 보려는 대중들의 믿음때문인가. 그런데 약간 재밌는건 다른 경우였다면 <속죄>는 정말 지루한 서두를 벗어나기 어려운 딱딱한 작품이라서 <암스테르담>의 기민함이 없는 매큐언의 괴작이라고 불리웠을텐데 다들 아 이게 서두만 그렇다는 거지 이 부분만 참고 읽어나가면 뒤로는 엄청난 속도로 읽혀버리는 대목이 올거라는 당신들의 말을 믿어보지 라고 생각하게 된 독자들이다. 결국 독자들은 좋은 작품을 고르려고 서점에 가는 과정들이 죄다 빠진 채, 편하게 대리자에게 양도해버린다. 당신이 책을 소개해주고 골라만 준다면, 난 당신을 믿으니까 그 책을 사겠소...뭐 이런 것이다. 확률적으로 책선택의 실패확률이 줄어들 가능성이 큰 방법이다. 


독자들은 서점에 가서 골라서 살펴볼 여유보단 자신들이 믿는 범주안에서 누군가가 추천하고 그리고 유명매체에 등장하고 심지어 좋아하는 연예인이 언급한 책들을 사게된다. 어쩌면 책의 본연의 가치가 표지에 베어나와서 막 향기를 풍겨 서점전체를 진동하는 그런게 아닌 이상, 이런 마케팅내지 매체소개말고 대중들에게 친밀하게 다가갈 뾰족한 수도 별로 없긴 하다. 만약 이런걸 다 무시하고 좋은 책은 독자가 알아볼 거라는 말을 출판사가 철썩같이 믿고 책을 내놓는다면, 싸늘한 새벽바람 못지 않은 무관심과 냉대속에서 관심의 수면위로 올라오지조차 못한 채 잊혀질 것이다. 좋은 책은 독자가 알아볼 거라는 말이 맞긴 맞다. 다만 언제 알아볼 지 아무도 모른다. 우리가 감지하는 시간적인 기대치가 무한대에 가까울 만큼 랜덤이어서 밥벌어먹고사는 수익집단의 출판사들은 이런 한없는 기다림의 모험을 감수하기 두렵다. 언제 독자들의 '승인'과 '인정'이 떨어질지 알수 없다. 제기랄 아이돌 하나가 나와서 어느날 침대에 누워서 몇 시간내에 이 책을 다 읽었는데 기가막혔어요 너무 재밌었어요 라고 한마디만 해주면 좋을텐데..이런 상상을 하지 않는 기획자가 생기는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요즘은 그런 세상이다. 

책도 이미지로 앞서 선행되어야지 의지의 영역으로 온다.

이 책도 사서 읽어야 겠어 라는 의지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지적인 허영을 누리곤 싶지만 책을 골라 읽기에는 너무 피곤한 세상인건 더 명확해진다. 난 고르는 것도 굉장히 재미난 일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렇게 하기엔 대중들의 다른 관심사 RPM이 과열이다. 꾸페씨도 그렇고 '인문학 광풍'도 그렇고 '속죄'도 그렇고 어떻게 보면 대중들은 넋놓고 자신보다 안목이 뛰어난 누군가가 열렬히 책을 소개해주길 기다리고 기다린다. 팟캐스트가 없던 시절에 '책소개'는 시종일관 '지면'이었다. 지면을 안보는 독자에게 '지면소개'라니..활자를 읽기 지루해하는 대중들에게 찬란한 수식어구는 응답없는 외침같은 거다. 


TV에 등장했던 책낭독의 프로그램은 지면이 아니지만, '태도'의 위압감으로 사람들을 분류한다. 시청자들을 선별하고 채널을 고정시킬 만한 대상을 구획하시켜놓는다. 나같은 경우에는 이런 프로그램을 5분이상 보기 어렵다. 낯간지럽고 너무 진지하고 너무 젠채하고 너무 현학적인 ..짐짓 분위기있는 척하는 공기들이 부담스럽다. 역시나 글이나 쓰시고 지면에서 생각을 펴치셨어야 했어 저분은 너무 지적과 평가와 반응을 염두에 두신 나머지 언행에도 자신이 책과 가깝게 산다는 것을 드러내고 계시네 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래서 말인데 이런건 다 허세나 허영이나 가식이나 뭐 그런 것들 아닐까. 차분한 목소리의 낭독으로 마음의 위안을 찾기야 하겠지만 정말 변태같은 책 미치광이들은 출현하지 않는다. 


차라리 김중혁과 이동민은 변태까진 아니어도 자기들끼리 낄낄거릴만큼의 책에관한한 위트가 있다. 위트도 아무나 하나. 읽어야 하는거고 자기생각이 있어야하는거지. 관객들 분위기잡고 공기는 숙연하고 음악은 잔잔히 깔리고 그 와중에 국어책 읽듯이 말하는 이 프로그램들이라니....팟캐스트가 편한 이유를 알겠다. 두고봐야겠지만 빨간책방 말고도 여럿 팟캐스트가 생겼다. 이분들의 전문성이야 왈가왈부할 만한 것들이 아니다. 오히려 어색한 대중들과의 친밀성, 그리고 대화체가 어떻게 전개되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내용은 인정해줄 수 있지만, 재미는 더럽게 없는 지루한 어떤 팟캐스트가 될 가능성도 농후한 것이다. 


책과 관련한 업계에 종사하시는 분들은 알아야한다. 너무 진지하고 너무 젠채하는 태도가 오히려 책을 대중들로 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라는 ..게다가 히트는 매체의 특성과 미디어의 신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컨텐츠다. 내용이고 내용을 버무리는 독자적인 관점과 견해, 그리고 대중문화의 일면만을 들여다보지 않는 다양성의 견해들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들의 딱딱한 팟캐스트가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들을 수야 있겠지. 방송할수야 있다. 다만 그걸 듣는 사람들은 동기화가 된 그런 부류의 사람들일 것이다. 적당히 지루하고 적당히 따분하고 적당히 재미 없는 그런 사람들일지 아니면 정말 대다수를 아우르는 책과 친숙해지려는 애청자들일지 두고 볼 필요가 있겠다. 





Posted by kewell
Vanilla Essay2014. 3. 26. 10:37


최근에 닉혼비의 <피버피치>(Fever Pitch)가 2014년 신판으로 재출간되었다. 물론 이 책은 문학사상사에서 2005년에 이미 출간되었던 적이 있던 책인데, 당시 표지부터 축구 관련 서적아니랄까봐 불타는 축구공을 떡하니 붙여놓고 부제를 '나는 왜 축구와 사랑에 빠지는가'라고 전단지마냥 등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닉혼비 정도되고 그 정도의 글솜씨를 가진 작가의 축구 에세이라고 하면 사실 그렇게 노골적인 표지 디자인과 축구광들이나 구매욕구를 가질 수 있는 극단의 디자인을 선보일 필요가 없었는데 아쉽게도 작가적인 역량을 몰라봤거나 대놓고 축구매니아들에게 어필하려는 속셈에 완전히 점령당했다. 


최신판은 이렇게 노골적인 표지가 아니라 일상적이고 소소한 생활 에세이같은 카툰 일러스트가 잔잔히 표지로 등장했다. 이게 과연 축구 에세이인지 뭔지 알수 없을만큼 평범해서 문제이긴한데 목차만 쓰윽 보면 대략 이게 어떤 부류의 에세이인지 알 수 있으니까 뭐그다지 굉장히 불편하지는 않다. 닉혼비의 이 책은 오히려 그의 대표작들인 <어바웃어 보이>보다도 더 알려져있다. 나같은 축구매니아에게는 더 유명하고 더 적나라하며 더 공감가는 책인 것이다. 그가 굳이 아스날빠가 아니었더라도 난 그의 의견에 대부분 동조할 수 있는데다가 그가 흥분하면서 글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폭주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귀퉁이에 욕지거리를 써놓는다고 해도 난 그정도쯤은 이해해줄 수 있다. 원래 축구팬이란 대개 그런 법이니까.  


여기서 닉혼비가 좋아할만한 소식. 최근에 EPL구도에서 아스날이 회생과 부활과 그리고 또 강자의 도래라고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닉혼비도 역시 TV앞에서 혼자 지그시 미소를 짓거나 이런 상황에 대해서 가슴 두근거리고 있을 것이나, 이런 현상이 EPL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흐지부지 되고 있는터라 약간 아쉽게 되었다. 나는 뱅거감독의 불안한 심리가 그대로 선수들에게도 이입되는 것 같다고 느끼곤한다. 그의 잘 안잠겨지는 점퍼 지퍼도 그렇고 외질의 불안하고도 들쑥날쑥한 경기력에 대해 힘겹게 변호하는 것도 그렇고, 지루의 막장 쓰리섬 사건도 부들부들거릴것이며, 초반에 반짝하고 소리없이 숨죽여 사라져버린 반딧불이 '램지'도 그렇다. 


그렇다. 아스날의 처지는 그 현상 그자체다. 굳이 뭘 또 자세히 난잡하게 이것저것 설명할 것도 없고 심리적인 이유와 이면에 감춰진 비화같은 걸 꺼낼 필요조차 없다. 아스날의 현상황은 그냥 경기력에서 보여지니까. 닉혼비는 도래했던 영화에 대한 꿈을 다음시즌으로 넘겨야할거고 아스날팬은 그저 오래도록 라이벌이었던 맨유의 몰락을 보면서 '우린 그래도 저정도는 아니잖아. 아직 할만해' 라고 위안삼아도 될 것이다. 내가 진짜하고 싶었던 부분이다. 바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즉, 맨유의 몰락에 관한 이야기다.  나는 맨빠정도는 아니더라도 EPL구도에서 균형감각을 유지하며 어느정도 균등한 접전을 선호하는 제너럴한 축구팬을 대표한다고 생각하는데 맨유의 몰락은 이런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재미없고' '안타까운' 부분이 되어가고 있다. 


금일 새벽 2013-14 EPL 28 R 맨시티와의 경기에서 3 : 0 으로 발렸다. 그것도 처참하게 공격기회다운 기회한번 얻지 못하고..이게 반페르시의 부재라고 위안삼기에는 전통적인 맨유의 위력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기에 더 아쉬운 법이다. 퍼거슨이 말했던 '시끄러운 이웃' 맨시티는 이제 강자가 되버렸고, 맨유는 쓸쓸하게 그 자리를 시끄럽지만 아주 센' 맨시티에게 양보할 수 밖에 없게 되버렸다. 이젠 라이벌이라고 떠들어댈 날이 그리 많지 않을수도 있다.  프리미어 시청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건 정의의 위반이네 하면서 침을 튀기며 흥분하는 맨빠의 심정을 아주 이해못하는건 아니다. 어차피 맨시티는 만수르의 바빌로니아니까. 자본주의 사회라면 이런 불공정한 물량공세를 당연히 생각하면서도 어떻게 안되는 형편에 인상을 구겨야 하는 현실이 자꾸 떠오를 뿐이다. 


맨유의 패착이 뭐고 페인이 뭐고간에 그런건 긴 이야기가 될테니 여기서 언급하지는 못하겠지만, 내심 마음속으로 기대하는 몇가지가 있긴 하다. 하나는 맨유도 '바빌로니아'급은 안되더라도 재건을 위한 물량투자를 어느정도 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거기에는 물량으로만 해결이 안되는 질적인 퀄리티, 즉 월클 선수에 대한 유입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럽시장의 이적 루머의 상당부분에 맨유가 등장하는건 웃기기 까지 하다.  다들 맨유가 이 시점에서 누군가를 데려와야 한다고 계속해서 지적하는게 아닌가. 불특정 다수가 다들 맨유는 이래선 안돼 이 선수라도 영입해야 한다고 알아들었어 멍청이 맨유 관계자들 듣고 있냐고..라고 말이다.  


맨유팬들이라면 닉 혼비의 '피버피치' 정도는 우스울 거다. 이미 클레버리를 보면서 인내심의 최고치를 경험하고 있고, 돈독이 오른 루니를 보며 계속해서 회의가 들며 키만 큰 펠라이니가 과연 맨유에 뭘 해다 줄 수 있을지 계속 의심한다. 이미 비디치는 막장이고 퍼디낸드는 할아버지급에 필적할만큼 퇴보되었으며 나니는 일찌감치 맨유로부터 멀어지셨다. 카가와는 도르트문트 시절의 자신을 보조하던 디펜시브 조력자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게 증명되었고 마타는 자기의 롤이 뭔지 헷갈리는데다가 반페르시는 자신의 몸조차 관리가 안되는 피노키오 신세다. 아들이 맘에 안드니 아버지가 그럼 내가 대신 뛰어주지 라는 심정으로 긱스가 헐떡이는 맨유라니....


맨유가 추진 중인 올 여름 이적시장 수비수 - 에제키엘 가라이


모예스의 회견내용을 슬쩍보게되면 대충 이 아저씨가 어떤 마음가짐이고 어떤 구상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되는데 한마디로 안타깝기 짝이 없는 상황이다. 그래도 한때는 효율의 에버튼으로 불리우던 시절의 명장이었는데...지금 시점에서는 맨유에 기대하는 건 좋은 선수의 여름 영입 뿐이다. (기존 선수들의 케미는 이미 일어난 화학반응이고 연쇄반응을 기대하기엔 엔트로피는 고갈상태..)  두명의 월클이 이미 이적동의를 했다는데 대충 가늠하길..윌리암 카르발류, 그리고 가라이 정도가 아닐까하는 예상. 그런데 이 둘이 월클이었던가. 월클이라면 토니 크로스카바니 정도 돼줘야 뭔가 그럴듯해질텐데...그래서 말인데 코엔트랑이던 가라이던 카르발류던 누가 와서 분위기 쇄신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렇게 된다면 흥미진진한 EPL이 되지 않겠는가. 만수르의 맨시티. 무리뉴의 첼시, 닥공의 리버풀, 안간힘을 쓰는 아스날에 재건되는 맨유라...이 정도면 볼만할 거 같다. TOP4의 시절은 갔지싶다. 참고로 난 리즈팬이다. 아스날와 맨유에 아무런 악감정이 없으며 다만 흥미진진함과 공정한(?) 자원의 분배로 인한 긴장감 고조를 기대할 뿐...^^

Posted by kewell
Vanilla Essay2014. 3. 19. 16:19

가끔 에밀리 브론테멜빌루이스캐롤의 책들을 유재하의 '그대 내품에'가 깔리던 서점 한 코너에서 한 두시간이고 쭈구리고 앉아서 읽던 시절이 있었다. (아직 내 플레이리스트에 유재하가 있다는 건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결국 그 까짓   에이헤브가 모비딕을 잡던말던, 앨리스가 토끼굴에서 보았던 오렌지 마멀레이드 단지가 비워져 있거나말거나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원래 고전이란 현실괴리적이고 우왕좌왕하거나 뻔하거나 너무 빈티지스럽거나, 이도저도 아니면 지루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시간은 많았고 호기심은 인내를 매몰차게 바람맞히던 시절이었지 아마도... 


그런데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도 여전히  다시 그 책들을 다시 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분명 어딘가에는 나같은 놈이 있겠지만, 이런 회귀적인 취향이 청승맞아보여 어디서 책을 펼치지도 못하겠다. 에이헤브의 라스트를 읽고 빨간여왕의 치대는 대사를 이상한 나라에서 읽으며, 코퍼필드의 삶에 뼈마디가 쑤시는 착각도 일부러 읽으며 상기시킨다. 이것도 병이다. 다시 사춘기도 아닌데 왜 이럴까. 가끔은 고전 소설같은 험난함과 아이러니함이 현실에 이입되지 않기를 바라곤 한다. 소설속에서도 버티지 못했던 주인공인데 하물며 현실에서라면 너무나 괴로울테니까, 소설을 읽으면 단련이라도 되는 줄 알았나보다.


가끔 기도를 이런 막연한 두려움때문에 했던 것 같다. 소설속에서 일어났던 이 광폭한 장난같은 일들이 지금 내가 사는 세상에서도 일어날까봐..해일과 같은 걱정과 근심의 토네이도 속을 거닐며 ..이런게 진짜 삶이라고 말할건 없다.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비린내 물씬 풍기는 날 것같은 불쾌감이 있는 세상인데 햇빛 좀 비추고 따스한 봄바람이 분다고 해서 그게 비현실적이라고 말할것 까지는 없으니까...더 많은 행복감을 느끼기위해서라도 우연 같은 즐거움이 있기를 바라고 바란다. 

Posted by kewell
Vanilla Essay2014. 3. 17. 11:52

야마다 에이미<솔 뮤직 러버스 온리>,<120% Cool>을 읽고 김연수<사월의 미, 칠월의 솔>을 읽었더니  핑크색 컬러 선글라스를 쓴 채, 오렌지색 방안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두 작가가 비슷한 색채감을 우려낼만한 유사문체의 소유자도,  정서상의 데자뷰도 없긴 하다. 야마다 에이미는 38.9도 언저리에서 숨소리를 거칠게 뿜어내고 김연수는 18.4도 부근의 쌀쌀함을 매개로 코트 깃을 올려세우는 느낌이니까. 그렇긴 해도 두 작품을 양손에 들고 교대로 읽어버리면 에이미의 '유화'같은 스토리의 쓸쓸함도 김연수의 '팔월의 '라'로 읽힐지 모른다. 다 같은 감기지만 증상도 다르고 앓는 수준도 다른 뭐 그런 것들 아니겠는가.


예전에도 이런 경우가 있었다. 특히 레이먼드 카버존 치버가 그랬다. 둘의 소설을 한데 섞어 읽었던 시절이 많아서 치버의 단편작을 카버의 단편작으로 오독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는데,  중독된 팬과 매니아들이 아니 그걸 어떻게 헷갈려 카버는 카버고 치버는 치버지 어떻게 둘을 혼동한단 말인가 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읽는 시기가 비슷하면 카버의 다양성이 치버의 정체성을 침범하는 경우도 종종 일어나기도 하고 치버의 스토리 플러그를  카버의 콘셉트에 꽂을 수도 있는 거다. 읽는 이의 대전제가 위력적이란 말이 괜히 생긴게 아니지싶다. 혹시라도 착각해서 치버의 책을 펼쳤는데도 내가 카버의 소설이라고 단정해버린다면...그건 그 순간부터 의심스러우나 카버의 다양성으로 읽혀질 가능성은 충분할테니..  


대체로 이런 유사성에 대한 방비로 주로 택하는 해결책은 완전히 다른 질감의 책을 교대로 읽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야마다 에이미의 <120% COOL>을 읽고 조셉 콘래드<어둠의 심연>을 읽는 식이다. 다시 돌아가 이언 매큐언<암스테르담>을 집어들었다면 다음은  로버트 어윈 하워드<시메리아 연대기 : 코난 더 바바리안>을 읽어 버리는 거다. 아무렵 말로가 콩고에서 도덕성의 타락을 목격해가며 인간성 상실의 어쩌고를 느꼈다는 걸 동조했더라도('어둠의 심연') 다음 코난이 바나하임의 하임둘 머리를 날려버리고 아탈리를 덮치려는 스토리와 헷갈릴 리가 있을까. 하지만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고 문득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읽어버린다면 홀든의 생애는 와타나베로 이입되버린다. 이런 '케미'가 어떤 작가의 유사성을 꿰뚫어볼 수 있는 통찰력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나에게 와타나베는 와타나베로...홀든은 홀든으로 남는 쪽이 훨씬 좋다. 


최근 잭 런던의 단편선을 읽고 그 유명한 나스 키노코<공의 경계>를 읽었다. (가끔 타입문 소설도 읽고 라이트 노벨도 즐겨 읽을때가 있다.) 때론 버거에 치즈를 끼우는 방법으로는 이런 무자비함이 어울린다. 치즈와 치즈사이에는 반드시 뭔가가 들어가야 한다. 완전히 다르다면 더더욱 좋지 않을까.



Posted by kewell
Vanilla Essay2014. 3. 13. 17:45

오고가는 지하철에서 머무르는 시간만 따지자면 내 전세금의 일부분은 5678 지하철쪽으로 주는게 도리에 맞다. 이게 흔들리지도 않고 주기적으로 어수선하게 누가 왔다갔다하는 환경적인 인터럽트만 제외해준다면 어떤 점에서 하나의 생활공간이 아닐까 의심한 적도 많았으니까. 문이 열리고 난 들어오고 앉고 내 할 일을 하고 한참 후 다시 나간다. 집과 다른게 뭘까. 공간이 좀 좁다는 정도? 


어느날, 고개를 들고 지하철 객실을 스윽 보았는데 통로에 늘어선 사람들이 마치 가로등같다고 느껴졌다. 다들 손에다가 스맛폰 하나씩들고 얼굴에 광선을 맞아가며 제 역할을 하고 있노라니... 스맛폰의 화면이 좀더 크고 소프트웨어 엔지니어가 신경 좀 써주면 다들 액정을 통해서 이계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기능이라도 만들어 줄지 모른다. 그리하여 다들 지하철에 타자마자 스맛폰 액정을 통해서 4차원 공간으로 들어가는거지 거기서 게임과 액션을 즐겨하며 정신줄 놓고 목적지까지 가고 목적지에 다다를 때, 다들 액정에서 튀어나와 유유히 지하철 문을 열고 내리는거다.  뭉그레뭉그레 거리면서 영혼들이 화면으로 빨려들어가고 나오는걸  보는 재미라니..놓치고 싶지 않은 구경거리일텐데...  

  

다 이계공간으로 떠난 지하철에서 난 책을 혼자 꺼내 읽는거다. 다들 자리에는 스맛폰만 번쩍이고 깜빡이고 오프라인 올드보이들만 남아서 책이나 읽고 잠이나 쳐자고 그렇게 말이다. 그냥 책을 좀 편하게 읽었으면 해서 상상해본 쓸데없는 짓이었다. 실상에서 지하철이 책을 읽기에는 나쁘지 않은 장소이긴 한데 최적의 장소라고 격찬할 정도도 아니다. 리얼 월드에서는 위의 망상같은 판타지가 없기 때문에 쳐들어오는 승객들을 우선 다 받아내야 한다. 우라지게 오래되어 색깔조차 고풍스런 몇몇 호선은 그야말로 김말이에 부어진 알밥 알갱이들처럼 꾸역꾸역 쏟아져 들어온다. 지하철공사측에서는 '알갱이들 다 다 타셨어요. 당신들 부대끼다가 터져도 우린 책임지지 않습니다 준비되셨죠 문닫아요 라고 방송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와중에 난 자리에 후다닥 앉는다고 다음의 시련이 오지 않는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우선 현대인들의 다이어트 유행을 무시라도 한듯한 어깨들이 자신들의 어깨를 끼어 맞춘다. 레고도 사이즈가 안맞는걸 억지로 끼울순 없듯이 지하철 자리에도 어깨를 무조건 끼우는게 서로 친밀감을 상승시키지 않는다. 때로는 어깨가 끼워지고 나면 밀려들어간 내 어깨의 가로사이즈가 원망스럽기까지하다. 가방도 흘러내려서 짜증나는데 여기서도 밀려버리다니..책을 들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내 옆에 무뢰한은 내  책을 흘긋보고 우람한 근육으로 책따위는 치우시지 라고 무언의 협박을 하는 느낌이다.  


몇몇 정거장에서 들어오는 불청객들은 거대한 고기 공장에서 자신들이 화형식을 거행하고 왔다고 자랑질을 객실전체에 쩌렁쩌렁 자랑한다. 이게 무슨 법이 있어서 불쾌한 냄새 소유자는 탑승 금지 뭐 이런게 있는것도 아닌데 어쩌겠는가만은 온갖 고기냄새와 살냄새와 뜨거운 입김들과 생활에 없어서는 안될 개개인의 통화내용들을 완전 공개로 객실에 쏟아놓으면 책을 읽는건 정신병자들이나 하는 짓이란 생각이 강하게 들 뿐이다. 덮고 그냥 눈감고 이 세상이 잠시간 다른 세상이라고 여기면서 꿈을 꾸는게 더 좋다. 


지하철에 사람이 없기를 간혹 바란다. 

물론 아무도 없으면 공포영화가 생각나서 움찔움찔하지만..너무 빼곡하지만 않다면..

읽으려고 쌓아놓은 책들 몇 권은 이 익스프레스 라이브러리를 통해서 읽혀질텐데..읽고 나서도 노트귀퉁이에다가 몇호선 몇구간을 지나면서 완결이라고 끄적여 놓을수 있을텐데...


말같지도 않은 바램을 한번 해봤다.  


Posted by kewell
Vanilla Essay2014. 3. 12. 21:52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시오리코다자이 오사무<만년>에 불을 붙이는 쇼로 가사이를 충격에 빠뜨릴 때 가사이는 '시오리코가 결코 책에다가 불을 붙일 부류의 인간이 아니었음을 알았음에도 당황했었드랬다. 왜 그랬을까. 좋아하는 책이 소멸된다고 생각해서다. 앞뒤 가릴 것없이 그것만 눈에 들어오는 좁아진 시야를 보면서 한정판의 위력을 본다. 모든 한정판은 가슴을 뛰게 한다던 지인의 표현처럼 어떤 대상이든 그것이 제한적이거나 소멸의 과정에 있다면 남기고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게 마련이다. 책같은 경우에는 좀 다르다고는 생각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책이 불탄다고 상상하면 나도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는 결코 책에다가 불을 불일 수 없는 시오리코 같은 부류가 반드시 존재한다. 그 사람들은 책을 찢을 수도 구길 수도 그리고 불태울 수도 없는... 제 몸이 구겨지고 찢겨질 지언정 책은 보듬어 안고 언제까지나 깊은 자신들만의 서재에 꽂아두고 싶어 하는 쪽이다.  나는 그정도는 아니어서 영원한 소유를 꿈꾸지도 않지만 가끔 읽어야 할 책들이 내곁에 늘 있어서 읽고 싶을 때 언제든 집어들 수 있기를 기대한다. 기대하고 바라는게 죄는 아니지 않은가. 단순히 읽고 싶은 순간에 찾아도 찾아도 없는 경우가 문제인거지..가끔 읽었어야 했지만 여러가지 저간의 사정으로 읽지 못했던 회한의 책들을 다시 찾으면서 이번에는 읽어야지 이젠 여유도 있고 시간도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때가 무르익지 않았겠어 읽어야 할 때가 도래했으니 나는 읽어야만해 라고 마음먹고 당차게 서점사이트를 클릭하지만...온라인 책 검색결과에 쓰여있는 책의 정보 하단에는 덩그러니 '절판' '품절'이라는 글자가 두둥 하고 불길하게 등장한다. 제기랄 그러게 내가 뭐랬어 미리 사두자고 했잖아. 



오래전 짝사랑하던 연인으로 부터 차갑게 들었던 '거절'의 뉘앙스가 '품절'이라는 글자에 박혀있었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놓쳐버린 그리고 제때에 챙기지 못했을 괴이한 회한으로 자책질의 폭풍이 지나고 나면 현실적으로 이 책을 구할 방법이 없을까쪽으로 선회한다. 요즘은 온라인쪽이 많이 발전하여 어디서든 중고서적의 검색이 자유롭다. 지레 포기할 단계가 아닌 것이다. 우리의 '마술램프'와 '공원'사이트를 뒤지고 저명한 몇 개의 중고서적 사이트를 헤메다가 재고를 발견하게 되면 쾌재를 부르는 거고 그렇지 않아도 때를 모색하며 쥐죽은 듯 인내의 시간을 버티면 된다. 책이란 수요에 의해서 언젠가 다시 검색란에서 재등장할 날이 오니까..그러나 이런 과정을 거친다고 해도 세상에서 감쪽같이 모습을 감춘채 종적이 사라져버린 소멸의 책들도 있긴하다. 그 책은 내가 읽을 인연의 책이 아니었던 거다.


최근에 몇 권의 절판 및 품절 서적을 손에 넣었다. 라파엘 사바티니<스카라무슈>, 그리고 야마다 에이미<슈거 앤 스파이스>, 이언 매큐언<암스테르담>, 레이먼드 카버<대성당>이다. 사바티니의 저작들은 국내에 정말 제대로 등장한지 꽤 되었다. 스카라무슈라 그렇다쳐도 (옛날 고리짝시절 문고판으로 등장하긴 했었다), 불후의 명작 캡틴 블러드 따위는 아예 등장도 안한다. 어린 시절에 보물섬에서 보았던 이현세옹의 만화을 떠올리며 스카라무슈를 기억할 뿐이었다. 활극소설로 사바티니를 능가할 작가도 별로 없다고 보는데.. <스카라무슈> 몇 년전 등장했다가 휘리릭 사라져 주셨드랬다. 물론 중고 서적에 이 책이 등장하기는 했는데 가격대가 후덜덜해서 문제인거지 싶다. 3배 넘는 가격으로 등장해버려서 과연 내가 이 책을 이 가격에 읽어야만 할까로 한참 고민을 안겨주고 있었다. 최근 또 다른 서적상으로부터 적절한 가격으로 번개처럼 검색이 되었다. 후다닥 결제라인을 완료하고 나니 다시 품절로 가버리는 걸 보고 인연의 끝을 마지막에 잡은 느낌이라니...



야마다 에이미의 작품들은 약간 논란이 있긴 한데 왠지 여성들이 읽는 책이란 선입관과 너무 에로적이고 적나라하다는 속성때문에 대중적으로 그리고 공개적으로 칭찬하는 부류는 아니었을 거다. 이렇게 보수적인 나라에서 섹스장면이 부지기수로 등장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묘사해대는 과감함은 또 다른 오해를 부르기 딱 좋지 않은가. <설국>도 그렇게 매도된지 오래다. 대중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책을 읽는 사람들의 수준 운운하는 모양인데 요시모토 바나나쿠니 가오리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으면서 야마다 에이미를 은근슬쩍 꺼려하는건 이율 배반적이지 않은가. 난 개인적으로 야마다 에이미의 소설을 맹렬히 좋아하진 않았어도 나쁘지 않게 읽는 편이다. <풍장의 교실>같은 건 드물게 정서를 침참시켜서 절구통에 삐죽삐죽한 짜증덩어리를 넣고 돌려대는 느낌이다. 너의 정서란 세상의 그저 한 부스러기일 뿐이야 라고 책망받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에이미의 저작들도 초기작들은 왠간에서 구하기가 어렵다. <슈거 앤 스파이스>가 아마도 나쁘지 않은 작품일텐데도 제대로 읽어볼 기회조차 오질 않았다니...희한하긴 희한하다. 아무튼 이 책도 중고서적에서 건져냈다. 


이언 매큐언<암스테르담>은 사실 주변의 지인들이 열렬히 찾던 책이다. 이 책은 온라인에서 검색해서 구할 수 있긴 한데 역시나 가격이 문제다. 두배이상으로 뻥튀기 되어있기 때문에 약간 망설여지는데 어차피 읽어야 할 책이라면 그냥 마음 편하게 확 구매해서 읽으면 그만이긴 하다. 그나저나 <암스테르담>이 재판되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없다. <토요일>은 아직도 버젓이 유명 서점에 꽂여 있는데 <암스테르담>의 어떤 점이 절판의 블랙홀로 이끌었는지 감지조차 되지 않을 뿐이다. (하기사 토요일에 비할바가 아니지..매큐언의 소설도 어쩌면 대중적이어야만 했을 거다.)


 마지막으로 카버의 <대성당>. 이건 정말이지 할 말이 많은데, 문학동네측에도 문의했던 데로 아마 이 책은 신판 문학시리즈의 하나로 재출간되긴 할 것이다. 그런데 정말이지 질리게도 시간을 오래끌고 지지리도 진척이 없어서 문제다.  문의한게 작년인데 아직도 나오지 않는다. 대성당의 가격이 미친x 머리칼 나부끼듯 폭주하는걸 보면서 혹시 저 책의 특정 페이지에 카버의 유서라도 들어있는건가 의심하곤 했다. 하지마 이 책은 우연찮게 지나던 중고 서점에서 구했다. 물론 제 가격에...


이런 걸 보면 책이란건 정말 인연이란게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된다. 읽으려고 읽으려고 애써도 손에 안들어오는 책이 있는가하면...한참을 잊고 있었어도 결국에는 손에 들어와 읽히는 책들이 있다. 그 책들과 나와 어떤 운명적인 실타래가 있는지 알수 없다. 때로는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던 책들이 오랜 시간 후에 내 손에서 읽히는 날도 많았으니까..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을 순 없다는 걸 안다. 그래도 최소한 눈에 걸리는데로 읽어야 겠다고 다짐한 책들의 일부분 만이라도 나와 같이 숨쉬며 생존해 있기를 바라고 잠시 기억에서 사라졌더라도 언제고 다시 나타나 주길 꿈속에서라도 기대할 것이다. 


   

Posted by kewell
Vanilla Essay2014. 3. 11. 11:39

나는 책들에도 무늬가 있다고 생각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종이에 인쇄된 글자 이면의 문장들에 배어있는 모종의 커넥트비티, 뉘앙스, 그리고 농담흐린 감정의 먹선이 적셔져 있어서 그 선을 보는 사람들을 따라 취사선택 되어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결국 책들의 운명이란 그렇게 결정되어 지지 않을까. 어떤 책들은 운좋게 자신의 무늬를 봐준 독자의 손을 따라 읽혀지게 될 것이나 그렇지 못한 책들은 범용의 숲에 무늬가 드러나지 않은 채 세월을 감내하다가 빛을 잃어간다. 


어느날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자기는 OO작가의 책은 도저히 읽어주지 못하겠노라고, 완벽하게 다른 감성적 패턴을 가지고 있어서 한장 한장 넘기는게 고역이라고..그렇다면 집어치우고 네가 좋아하는 다른 작가꺼나 읽으라고 말해줬지만 사실 이런 현상이 그 친구한테만 일어나는 희귀 질병 같은건 아니다. 엄연히 책들의 무늬는 어울리는 배경들이 존재하니까. 자신의 배경에 그 무늬는 영 어울리지 않아서 마치 시대착오적스럽게 느껴지는 불협화음은 일부러라도 겪고 싶지 않을 뿐이다. 


더구나 어디에도 이런 책들이 드물다고 할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더 넘쳐나는 세상이다. 저기 세상의 책들이 모여있는 서재가 있어요 당신의 마음에 쏙 드는 책이 일천구백사십팔만오천이백삽십몇개의 더미 밑 42번째에 꽂혀 있는게 보이시나요 그렇다면 가서 그 책을 뽑아서 보시지요. 보이지 않으신다구요 그렇다면 하는수 없죠 당신은 그 책을 읽을 운명이 아닌거예요. 이렇게 누가 나를 설득한다면 난 기꺼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아마 아마존 닷컴의 이름이 아마존인 이유는 완벽하게 가려진 무늬 속 내 책을 찾기 어렵다는 걸 은유적으로 표현한게 아닐까.



최근에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의 저작들 몇 개와 <풍장의 교실>,<솔뮤직 러버스 온리>의 야마다 에이미(山田詠美), 코맥 맥카시(Cormac McCarthy)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카운슬러>, 그리고 김연수의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을 읽었다. 개중에는 무늬가 생경해서 영 아니올시다라고 느껴진 작품이 있기야 한데 눅눅히 지면을 돌파하는 감내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의외로 낯선 무늬도 수용가능한 숲이 되줄수 있겠다라는 느낌도 든다.  선입견 같은게 딱히 있는건 아니다. 물론 코맥 맥카시는 별종의 피칠을 벽에 덕지덕지 발라가며 스타카토식으로만 스토리를 전개시키는 아웃사이더가 아니며, 야마다 에이미는 로맨스를 빙자한 노골적인 성애주의자도 아닐 뿐더러  스토리 위를 부유하는 감성적 문장들 탓에 우울함만 더해가는 김연수가 아니란 것 정도는 나도 안다. 


작가들의 편린은 작품이겠지만 어디 복잡다단한  이야기의 몫은 사실 오롯이 작가만의 것이 아닌지 오래되었기에 느끼는 감수성에 동조하지 않을 독자들이 어디 한 둘일까.  수없이 열광하는 독자들에 의해 이미 다반사되고 수많은 블로그들에다가 자신들의 무늬로 적절히 편광시켜 놓은 흔적들을 본다. 모두 다 나와 같을 수 없겠지 무늬는 한개의 태양이라도 천개의 모양을 만들어 낼 테니...그나저나 손발 오그라드는 추종 독자들의 감상평은 정말이지 뭐라 표현하기 힘든 겸연쩍음 같은게 있다. 읽을 수록 웃음이 나온다. ^^

Posted by kew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