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nilla Essay2014. 3. 11. 11:39

나는 책들에도 무늬가 있다고 생각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종이에 인쇄된 글자 이면의 문장들에 배어있는 모종의 커넥트비티, 뉘앙스, 그리고 농담흐린 감정의 먹선이 적셔져 있어서 그 선을 보는 사람들을 따라 취사선택 되어지는 것이라고 믿는다. 결국 책들의 운명이란 그렇게 결정되어 지지 않을까. 어떤 책들은 운좋게 자신의 무늬를 봐준 독자의 손을 따라 읽혀지게 될 것이나 그렇지 못한 책들은 범용의 숲에 무늬가 드러나지 않은 채 세월을 감내하다가 빛을 잃어간다. 


어느날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자기는 OO작가의 책은 도저히 읽어주지 못하겠노라고, 완벽하게 다른 감성적 패턴을 가지고 있어서 한장 한장 넘기는게 고역이라고..그렇다면 집어치우고 네가 좋아하는 다른 작가꺼나 읽으라고 말해줬지만 사실 이런 현상이 그 친구한테만 일어나는 희귀 질병 같은건 아니다. 엄연히 책들의 무늬는 어울리는 배경들이 존재하니까. 자신의 배경에 그 무늬는 영 어울리지 않아서 마치 시대착오적스럽게 느껴지는 불협화음은 일부러라도 겪고 싶지 않을 뿐이다. 


더구나 어디에도 이런 책들이 드물다고 할 수 없을 뿐더러 오히려 더 넘쳐나는 세상이다. 저기 세상의 책들이 모여있는 서재가 있어요 당신의 마음에 쏙 드는 책이 일천구백사십팔만오천이백삽십몇개의 더미 밑 42번째에 꽂혀 있는게 보이시나요 그렇다면 가서 그 책을 뽑아서 보시지요. 보이지 않으신다구요 그렇다면 하는수 없죠 당신은 그 책을 읽을 운명이 아닌거예요. 이렇게 누가 나를 설득한다면 난 기꺼히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아마 아마존 닷컴의 이름이 아마존인 이유는 완벽하게 가려진 무늬 속 내 책을 찾기 어렵다는 걸 은유적으로 표현한게 아닐까.



최근에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의 저작들 몇 개와 <풍장의 교실>,<솔뮤직 러버스 온리>의 야마다 에이미(山田詠美), 코맥 맥카시(Cormac McCarthy)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카운슬러>, 그리고 김연수의 <사월의 미, 칠월의 솔>을 읽었다. 개중에는 무늬가 생경해서 영 아니올시다라고 느껴진 작품이 있기야 한데 눅눅히 지면을 돌파하는 감내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의외로 낯선 무늬도 수용가능한 숲이 되줄수 있겠다라는 느낌도 든다.  선입견 같은게 딱히 있는건 아니다. 물론 코맥 맥카시는 별종의 피칠을 벽에 덕지덕지 발라가며 스타카토식으로만 스토리를 전개시키는 아웃사이더가 아니며, 야마다 에이미는 로맨스를 빙자한 노골적인 성애주의자도 아닐 뿐더러  스토리 위를 부유하는 감성적 문장들 탓에 우울함만 더해가는 김연수가 아니란 것 정도는 나도 안다. 


작가들의 편린은 작품이겠지만 어디 복잡다단한  이야기의 몫은 사실 오롯이 작가만의 것이 아닌지 오래되었기에 느끼는 감수성에 동조하지 않을 독자들이 어디 한 둘일까.  수없이 열광하는 독자들에 의해 이미 다반사되고 수많은 블로그들에다가 자신들의 무늬로 적절히 편광시켜 놓은 흔적들을 본다. 모두 다 나와 같을 수 없겠지 무늬는 한개의 태양이라도 천개의 모양을 만들어 낼 테니...그나저나 손발 오그라드는 추종 독자들의 감상평은 정말이지 뭐라 표현하기 힘든 겸연쩍음 같은게 있다. 읽을 수록 웃음이 나온다. ^^

Posted by kew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