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culture/Movie2014. 6. 14. 14:01



2003년 4월 1일, 홍콩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에서 그가 투신하였다고 매체에서 떠들어댔어도 당시엔 잠시동안이나마 다들 믿지 않는 눈치였다. 게다가 그날은 만우절이기도 했고... 일부러라도 그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믿어야했다면  그건 유머라곤 전혀없는, 그래서 만우절의 유쾌함을 감당해낼 수 없는, 지지리도 따분하고 진지한 사람들의 몫이었을 것이다. 이윽고 정말 그가 영영 떠났다는걸 알게 되었다. 장국영(張國榮)이 그렇게 떠난지 어언 11년이 지나고 있다.  거짓말처럼 그가  떠난 직 후,  오래도록 이어져온 청춘의 일기장 귀퉁이를 접고, 이제 그만 로망의 시절을 끝났다며 글쓰기를 멈춰버린 한 친구와 생전에 그가 출연했던 영화를 몇 주동안이나 보면서 퉁퉁부은 눈으로 나타난 동기 여자 아이들처럼 다들 소리없는 울음 바다속에서 기억을 침잠시키며 그렇게 지냈다. 그가 그냥 자살 정도로 떠난게 아니라 추억의 일면을 통째로 할퀴고, 기억의 포스터를 갈기갈기 찟어놓고 떠나갔기에 쉽게 잊혀질 수는 없었다. 오래도록 기억의 잔영들은 부유하기 마련이고 그러다보면 언제고 다시 수면위로 불현듯 떠오를 때가 있다. 너무나 황급하고 불현듯 떠나버린 '장국영'이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


장국영에 대한 이미지들이 로망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건 1987년 즈음이었다. 1987년과 세상을 떠난 2003년 사이의 간격은 내 삶의 '가시광선' 대역 정도여서, 보이는 것들로만으로도 충분히 삶을 다반사 시킬 만큼의 화려한 스펙트럼 사이사이에 모종의 스타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열렬하게 지지하고픈 스타들이 더 많을 수록 좋았으니까.. 모두가 책받침에 홍콩 스타들을 끼워놓았고 3류 동시 상영관에서 아침부터 오후 늦도록 반복해서 느와르와 무협을 보았으며 하이틴 스타들이 출현하는 드라마를 신문 편성표를 봐가며 쫓던 때이기도 했다.   




며칠 전 친구놈이 나에게 마누엘 푸익(Juan Manuel Puig)<부에노스 아이레스 어페어>(The Buenos Aires Affair,1973)를 빌려달라고 했었는데, 나는 그 이유를 짐짓 알고 있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어페어>는 마누엘의 푸익의 또 다른 역작, <거미여인의 키스>(El beso de la mujer araña)를 읽고 난 뒤, 푸익의 서적들을 죄다 읽어봐야겠다고 다짐한 이래 뒤지고 뒤져 찾아낸 책이다.(현재 품절 상태.) 구하기도 어렵고 남들에게 빌려주기도 싫고 해서 티내지 않았었는데 어쩌다가 그만 친구의 눈에 포착되었던 듯 싶다. 아마도 친구놈은 <해피투게더/춘광사설>(春光乍洩: Happy Together, 1997)를 봤을 것이다. 장국영의 기일이 오고, 추억이 살아오고, 그러다가 <해피투게더>를 보고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떠올리면, 나라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빈티지 하늘빛'을 묘사해둔 어떤 것이라도 찾아봤을 것이다. 이미지의 편린들은 종종 기억속에서 드리운 낚시대를 기다린 채 숨죽여 세월의 심연속에서 노니다가 '부에노스 아이레스'같은 미끼에 응답하는 거다. 굳이 봐야 했다면 난 <아비정전> (阿飛正傳, Days of Being Wild-1990) 쪽이었을 거다. 그게 더 효과적인 미끼였지 싶다..나에겐..


그 친구와 나는 학창시절에 같이 <쳔녀유혼>(倩女幽魂,-1987)을 본 죽마고우다. 그래맞아 천녀유혼. 그러고 보니 오랜간만에 떠올려보는 '로망(Roman) 키워드'다. 절절히 기억했던건 <아비정전>쪽이었지만 사실 유명세는 <천녀유혼>쪽이 맞지 굉장했으니까. 당시로선 슬쩍 문이 열리면서 등장하는 머리칼 날리는 왕조현에 다들 넋을 놓고 빠져버려서 정말 섭소천이 유혹하려고 했던 남정네가 영채신인지 우리였는지 가늠이 안될 정도였다.  연약한 서생 영채신(장국영)과 난약사의 귀신 '섭소천'(왕조현)의 로맨스를 스토리로 한 영화. 영화 초반부 난약사에서 공중으로 쏟구치며 연적하하우형이 검술을 펼치고 난 뒤 두 칼끝이 장국영을 겨냥했을 때부터 우린 동시에 이 유약한 서생이  우리들의 '왕조현'(王祖賢)과 엮이게 될 것이라고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고, 실제로 이 착한 청년은 아름다운 귀신 섭소천(왕조현)과 사랑을 하게 되었다. 이때엔 나뿐 아니라 주변의 친구들도 그랬고 하나들 같이 실제 장국영이 왕조현과 연인이 되기를 은근히 기대했었다.  우리가 그렇게 기대했다고 해서 장국영이 어느날 왕조현에게 우리 팬들도 원하는데 한번 사귀어 봅시다라며 영채신처럼 고백할 리 없겠지만 현실의 우리들은 판타지의 두 커플이 현실이 되는 것만큼 멋진 것은 없을 거라고 여기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커플케미로 보자면 역대급이라고 본다.) 



내 기억속의 장국영은 그렇게 해서 전면으로 등장했다. 천녀유혼의 히트덕에 <영웅본색>(英雄本色-1986)도 따라 봤고, 연이어 느와르에 중독되고 베레타의 총소리에 익숙해지며, 덕택에 아주 낯간지러운 '강호의 의리가 땅에 떨어졌다'는 유치절정의 문구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다. (굉장히 오그라드는 문구들이었다.)  영웅본색의 장국영을 기억하고서도,  비디오 샵에서는 장국영의 인기를 이어가고자 우후죽순처럼 과거작들을 내놓았는데 <위니종정>((爲你鍾情-1985)이라든지 <우연>(偶然-1986)같은 걸 빌려야 한다고 극성을 부리던 누나들 틈에서 장국영의 존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장국영의 당시 이미지는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여린 청년의 이미지였다. 유약하고 뭔가 시류에 흔들거리고 마음속 깊이 간직해놓은 비밀이 있으며 남모를 고뇌에 시달리며 우울해하는 이미지로 화해가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아비정전>에서도 그렇고 이후 대중들이 좋아라 했던 무협물 <백발마녀전>에서도 그렇고, 그 그늘은 쉽게 걷혀지지 않았다.    


그리고선 장국영이 <동사서독>에서 서독으로 분했을 때, 차라리 본인을 위해서도 좋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서독이야말로 현실 감각적이고 생을 우울하게 바라볼 지언정 한탄하지 않으며 비열해질 수 있는 캐릭터였으니까, 어떤 슬픔을 머금고 그것을 속에 감추고 비뚤어진 시선으로 세상을 종횡한다는 그런 느낌의 캐릭터로 변해간다면 분출구로서 장국영은 좀더 현실적이 되어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암흑가의 협박이네뭐네 하면서 은퇴소동을 일으켰던 장국영의 입지와 애정전선은 대중들이 기대했던 그림으로 그려지지 않은 채 점점 괴이한 시간들이 흐르고 있었는데, 그가 <이동공간>에서도 그렇고 <해피투게더>에서도 그렇고 왠지 자신의 실제 이야기를 영화를 통해서 하고 있다고 느낄 무렵, 일이 벌어졌다. 



가끔은 장국영이 미로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그만 힘이 다해 버렸다식으로 생각한다. 그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미스테리하지만 그렇다고 영화와 현실의 우울한 정서가 그를 '자실'로 끌고 갔다고 생각하기 쉽지 않다. 아직까지 어떤 것들이 진실이었는지도 모르겠고...다만 팬의 입장에서 한가지 분명한건 그가 여타의 홍콩 느와르 스타 답지 않게 올곶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면서 작품을 선택해 왔다는 것과 어떻게든 스스로 그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애써왔다는 사실 같은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인기 작품들보다 '동사서독'과 '해피 투게더'와 '패왕별희' 등등의 작품을 눈여겨 보게 된다. 


로망은 로맨스의 캐릭터인데도 그가 그만 로맨스에 실연을 겪고 어떻게 나는 살아야지라고 방황할 무렵, 팬들은 그에게 그만 진지한 구석을 발견하고 아..장국영은 그랬던 건가라고 생각한다는 것. 그게 장국영이 나름의 삶속에서 성숙해가고 있었다는 방증이 아니었을까. 그렇긴 해도 역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는건 왕조현을 지긋이 바라보던 <천녀유혼>의 서생, 쪽빛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부에노스적 풍광이 어우러진 <해피 투게더>, 사막의 모래바람속에서 옷깃을 여미며 쓸쓸히 내뱉던 깊은 인상의 장면들이 떠오를 뿐이다. 그렇게 보면 관객들은 배우들에게서 자기가 보고 싶어하는 부분만을 볼 뿐이다. 배운 본인이야 어찌되었던 간에 우리는 추억속의 로망을 기억하면서 그 배우가 그렇게 살아주길 기대한다. 



장국영이 작금에서도 잊혀지지 않는 이유는...그의 과거가 내 추억과 결합되어 늘러붙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미 합선되버린 전기회로처럼 이미 터져서 붙어서 이젠 떼어낼수 조차 없게 되버렸다. 영원히 그 부위는 그대로 스파크가 터질것이고 현실의 전기 콘센트가 꽂히는 날에는 내 마음의 전기충격이 가해질 테지. 그가 좀더 살았더라면 온전히 유지된 채 소소하고도 잔잔한 배경음악이 되어 주었을 텐데..이젠 피해갈길 없는 아쉬움이 되버렸다. 그래서 말인데 요즘에서는 장국영같은 배우를 보기도 어렵고 등장히지도 않는다. 우리는 서서히 대중의 욕구를 쫓아 어울리지도 않는 괴이한 CG가 난무하는 새로운 풍의 중국 영화를 보게 되고 거기에서 온라인 캐릭터같은 배우들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대륙의 배우들은 돈은 많이 벌 거야..

저 정도로도 괜찮은 걸까.


장국영 같은 배우들도 한때 있었는데....

세상이 어떻게 된거야? 정말 거짓말이라도 장국영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채, 혼자 어느 지방 산간에서 자신이 찍은 영화를 보며 슬며시 미소짓고 있기를 허황된 마음으로 바란다. 아마 내 세대가 끝나면 기억조차 안나는 배우가 되겠지만 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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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e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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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커피번, 혹은 모카번을 좋아한다. 

커피번에는 특유의 커피향이 담겨있기도 하지만, 겉이 살짝 딱딱하고 속은 말랑말랑한 이 구조야 말로 출줄할 때 최고란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커피번의 약점은 누가뭐래도 만들어진 후 얼마 후에 먹느냐에 따라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를테면 만든 직후에 먹는게 가장 최선. 그리고 1시간 후, 3시간 후, 반 나절후, 이윽고 다음날까지 이어지면 서서히 표피의 의연한 단단함이 서서히 그 힘을 잃고 나중에는 전혀 표피층의 무덤덤하고도 의연한 무엇이 느껴지지 않은 채 자포자기의 형태로 뭉그러지게 된다. 나를 이런 실온에 오래두면 난 공기중에 떠도는 모든 수분을 먹고 물먹는 하마처럼 축 늘어져버릴거라고 ..모카번은 그렇게 원망하게 된다. 그리하여 커피번은 만들어진 직후에 먹어야 제 맛이다. 


대개의 모카번이 제과점 오전에 테이블에 놓이고 약간의 시간 동안 다 팔려나가는 이유가 설명이 된다. 적어도 제빵사가 만든 '번'들은 재빨리 사가서 먹어줘야 하는 것이다. 한번은 모카번을 만들어보고자 스스로 시도해 본 적이 있다. 바로 아래 사진이 처음 만들었을때의 모카번인데 그럴듯하게 나와 준 듯 싶지만, 사실 저건 사진의 마술일 뿐이고 속이 영 꽝이었다. 푸석푸석해서 맛도 별로 없었고 부드러운 촉감이 거의 없다시피해서 표피만 뜯어먹고 싶을 정도였다. 


좀더 노력해서 '번' 다운 '번'을 만들어와봐야 할텐데, 다들 마카롱도 그렇고 번도 그렇고 제과에 관련한 곳에 발을 디디면 정말 스트레스 받는다는 말들을 이곳저곳에서 하는 탓에 공포감이 들어버렸다. 언제고 번과 마카롱과 쇼콜라 케익들의 푸념과 욕설이 들릴지 모른다. 이렇게 만들어서는 아무도 안먹는다고 나를 이렇게 만든건 비극이야 내 정체성을 돌려줬으면 좋겠어 라고 모카번과 마카롱이 컴컴한 자정이 지난 어느 순간에 푸념들을 털어놓을런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만드는 것이야 자유롭지만 만든후에 남아버린 '빵'으로서의 역할에 이르면 왠지 모를 '책임감'이 들곤한다. 


이럴땐 이 모든 빵을 만든 내가 꾸역꾸역 먹는 것외엔 도리가 없겠지. 




Posted by kewell


'몰스킨'같은 좁다란 노트에다가 뭘 그린다는 게 그리 익숙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그리려면 차라리 커다란 스케치북이 제격이지. 화이트색 광활한 공간이야 말로 생각의 여유를 불러일으키고 시행착오의 실수들을 충분히 수정해 줄만큼 아량이 넘쳐보이는 존재감의 스케치북 말이다. 하지만 스케치북을 들고 전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카페에 앉아서 펼쳐놓고 그리고 싶은 걸 그리려면 굉장히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하고 ,몇가지의 번잡스러움을 버텨낼 줄 알아야 한다. 큰 백팩도 필수겠지? 


편의성의 시대의 그런 번잡함이라니..낙서를 해도 우리는 뭔가를 갖추고 싶어한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제대로 된 아이디어 수첩이자 적당한 사이즈의 스케치북을 대용할만한 무엇인가를 찾게 되었다. 그리고 몰스킨이 두둥 등장한다. 사실 몰스킨의 역사를 보노라면 녹록치 않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걸 알게된다.  이런 역사를 이미 알았다고 해도 그 역사의 진중함에 감탄하고 아 그렇구나 이런 유서깊은 사연들이 있었어 그럼 내가 써줘야 겠어 멋지게 그림을 그려주고 그래야지 라고 생각하진 못한다. 그렇게 있었나보다 정도지. 


실제로 몰스킨이 유명해지는 건, 몰스킨을 이용해서 자신의 그림을 아주 멋지게 그려내는 몇몇의 예술가들, 일러스트레이터들로부터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그럴듯하면서도 탐나는 어떤 컨텐츠'로서의 그림들이 아담한 사이즈로 예쁘고도 오밀조밀하게 그려져있는 몰스킨이라니...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마티아스의 스케치북>도 이런 맥락에서 보면 아주 좋은 몰스킨 스케치북 사용교본과도 같다. 


국내에도 몰스킨 사용성으로 이름을 날리신 '밥장'님이 계시긴 하지만 대개의 스케치 중독자들이 가지고 있는 패턴들은 몰스킨적이다. 끊임없이 그리고 또 상상하고 재빨리 옮기고 색칠하고 열심히 스케치북의 종이를 넘긴다. 빼곡히 채워진 상상속의 이미지들과 오밀조밀한 생각들의 향연, 그리고 스쳐가는 영감들을 걷어올리는 잠자리채가 되어서 기록을 남긴다는 것. 그게 매력적인 것지 싶다. <마티아스의 스케치북>에는 이런 상상의 편린들이 이미지로 빼곡히 자리잡고 있다. 이 스케치북은 활자가 그윽한 책이라기 보단 화보에 가까운 편이지만 난 이 몰스킨스러운 디자인의 책을 펼쳐놓고 일러스트레이트를 오랜 시간동안 응시하면서 시간보내는 걸 아까워하지 않는다.  글자도 없어서 읽을 구절이 없는데도 그림들을 그저 바라 볼 뿐인데도...귀퉁이에 자리잡은 조그만한 시그니쳐도 놓치지 않을 기세로 열심히 스캐닝한다. 


필체의 귀획과 연결부위의 마무리와 조그마한 사람들의 표정과 동네의 멋진 구도와 그로테스크한 패턴무늬, 디스토피아적인 환타지 요소들을 보면서 마티아스의 상상력을 쫓고, 그걸 이 스케치북에 옮겨온 걸 감탄하는 식이다. 물론 이 화보집을 읽고 나도 이렇게 해야지라든지 나도 그려보겠어라는 생각이 아니들 수는 없겠지만, 그것보다는 차라리 마티아스의 상상력이 실현되는 결과물로서 그림들을 보는 걸 더 즐긴다. 이렇게 해서 그의 머리속의 이미지들이 이렇게 간편한 형태로...그리고 보다 구체적으로 ...예술적으로 그려졌다는 것. 그런식으로 이렇게 한장한장이 채워진다는 것. 마티아스는 스스로 굉장히 뿌듯하고 풍요로움을 느낄지도 모른다고생각하는 것이다. 때로는 자신의 이미지가 갑자기 머리속에 번득 떠오르고 슬며시 부유하며 소리소문 없이 색체가 희미해질 무렵, 우리는 뭔가 소중한 것이 지나갔음을 느끼게 되고 그것이 영영 돌아올 수 없는 망각의 공간으로 사라졌다는 걸 알았을 때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는 스스로를 자책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마티아스의 이 스케치북이 주는 의미가 강렬하다. 




마티아스의 스케치북

저자
마티아스 아돌프슨 지음
출판사
한스미디어 | 2014-01-01 출간
카테고리
예술/대중문화
책소개
드로잉과 다시 사랑에 빠지다 마티아스는 뉴욕 타임스의 작업들과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