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BOOK/소설2014. 5. 23. 16:44


아주 오래전에 '폭풍의 언덕'과 '모비딕'을 읽었었다. 그러니까 이런 고전따위는 유년들의 삶에서 좀처럼 자발적으로 읽히기 힘든 어떤 지루함의 정서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건 내가 '문학'적으로 조금이나마 관심이 있었던 감성적 부류가 아니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때로는 친구들 중에는 캐서린 언쇼를 지긋한 눈빛으로 이해한다고도 했고 에이허브의 광기어린 하얀고래 집착증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본다고도 했드랬다. 나보다 다들 성숙해 있었던 걸 보면  그 나이, 그 시절, 내 정서의 함량을 넘어서는 퀄리티적인 괴리감이 그 친구들에게 있었던 것 같다. 당시의 나에게는 정신착란의 캐서린, 돌아버린 미치광이 에이허브였을 뿐이었으니까. 


그리하여 멜빌의 다큐같은 '모비딕'을 다시 차근차근 읽어보리라고 책장을 넘겼다. 무수한 세월들의 폭풍우가 가져다준 내 소양의 흔적들은 프랑스 척탄병같다던 피쿼드호을 완벽히 감싸안을 만큼 보호무늬가 되어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과연 나는 지리하게 이어지는 고래 해설서와 같은 대목들을 묵묵히 읽으며 지나갈만큼 동화되어 있었고 무덤덤해져 있었드랬다. 까짓거 2절판 운운하며 참고래와 향유고래 특성을 백과사전처럼 읇조려준다고 해도 난 이게 피쿼드의 생애와 사실적으로 여떻게든 연결되어있어서 갑판위에 이슈메일 뿐 아니라 스타벅스터브, 퀴퀘그에게 모종의 '지식'(?)이 되어줄거라는 착각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그리고 괴이하다고 느꼈던 크레타 문양의 형형색핵 문신을 가진 작살잡이 퀴퀘그를 비롯한 타슈테고와 다구의 투창병들 곁에서 작살날을 빼서 면도라도 하고..경건한 작살잡이는 한푼의 가치도 없다고해서 일부러라도 스스로를 흉포한척 하는 시늉이라도 할 뻔했다. 


이정도면 예전의 모비딕이 아닌거다. 135장 넘는 항해 일지같은 해설서를 관통하는 동안 어디 서고에 보관되어있는 기록지들의 몇 십년 연대사를 추적하고, 중간중간에 있었던 비밀스럽고도 은밀한 비화들을 숨죽여 읽던 후대 기록자의 마음으로 항로를 따라간다는 것, 이슈메일의 묘사대로 고래를 해체하고 작살던지기에 대해서 숙독하며, 기름통에 파묻혀 열병을 앓다가 살아난 퀴퀘그의 관을 옆에서 같이 만들었을 것 같고,  용연향 가로채기같은 고래강탈의 현장에서 같이 낄낄대고 있었던 것 같은 현실감, 다 모비딕을 다시 읽었을 때 생겨났던 보기드문 경험들이었다. 그러고보면 지리하게 서술된 고래에 관련된...바다와 관련된 수많은 백과사전식 해제들은 소설적 스토리와는 별개로 피쿼드호의 리얼리즘, 그리고 다큐적인 현실감들은 '시간의 세례'에 의해서나 드러나는 모종의 비밀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도 읽었지만 그땐 흰고래를 쫓는 광기어린 에이허브말고는 떠오르는 어떠한 이미지도 없었으니까..


낸터컷물보라 여인숙, 피터코핀에 걸려있는 성난고래가 선채를 뛰어넘다가 돛대머리에 꿰인 그림이나...,  광택이 나는 상아목걸이를 목에 건 야만적인 에티오피아 황제처럼, 적들의 뼈에 돋을 무늬를 새겨서 화려하게 몸치장을 한 솜씨좋은 식인종의 이미지를 뿜어냈다던 피쿼드호의 묘사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고 퀴퀘그의 '요조'는 이제서야 그 존재를 눈치챘다고 한다면 가히 '모비딕'을 읽었다는 표식은 좀 더 레벨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한 3 레벨 정도 되려나..요즘으로 치차면 잡설을 위한 잡설일지도 모르는 멜빌의 이런 묘사들은 '광경'에 대한 상상을 부추기고 감정에 대한 풍경을 그리게 된다. 나도 고래잡이를 더럽고 냄새나고 비위생적이고 기껏해야 도살업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었다. 도살업을 즐기면서 그저 흰색이 주는 순결함을 어떻게든 더럽혀보자는 잔인한 뱃사람들의 무모한 도전기가 모비딕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나보다.  



몇몇의 독자들은 피쿼드가 모비딕을 만나기전까지 수많은 여정들이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로망의 해양탐험소설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나. 캄비세스 카이사르, 그리고 티모르 잭이라도 만나고 일본왕 모르콴과 칠레고래 돈 미겔을 보면서 고래 수족관에 온 구경꾼마냥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관람하고 열대해역의 문지방으로 들어가 그곳을 영원히 지배하고 있는 키토의 화창한 봄빛 속을 달리면서 향기롭고 넘칠듯한 풍족한 낮시간을  장미향수를 뿌린 눈으로 만든 페르시아 빙과를 수북히 쌓은 수정그릇에 비유할 줄 안다면 잠시나마 모비딕은 로망소설일 거다. 게다가 에이허브는 선원들에게 듣기에도 애매한 고고한 자신의 은유와 비유를 설파하지 않는가. 듣고 있으면 마치 바다를 향해서 자신의 자아를 어떤식으로든 그럴듯하게 포장하려는 고집센 철학자같으니... 고래잡아 죽이기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소설치고는 너무 낭만적인 것이다. 


'나를 모욕한다면 태양이라도 공격하겠어' 대충은 에이허브가 어떤 캐릭터인지 알듯한 구절은 이 구절하나만은 아니다. 물그러미 바다를 내려보면서 '나에게 달아나는거지'라고 미친노인이 지금까지 보여준 것보다 훨씬 깊고 절망적인 슬픔을 띠고 있었다고 했는데 이즈음되면 이 포경스토리가 기어코 해피엔딩으로 가는 일은 배제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듣기에 따라서는 에이허브가 모비딕을 잡던 말던 책의 중간이상을 넘어가면 모종의 안도감같은 것들이 감돈다. 하이델베르그의 술통에 빠져서 생을 달리할 뻔했던 타슈테고와 그를 살려낸 퀴퀘그, 그리고 바다에 자신의 자아를 두고 정신이 나가버린 피핀, 요나와 잡힌 고래와 놓친고래에 대한 작가의 진지한 고찰.. 비록 스쳐지나가듯 정답없는 몇가지의 상념들이었을 지도 모르지만 배위에 있거나 지면위에 있거나 다들 비슷한 생각들을 하면서 살아간다고 보면 이 소설도 나름대로 역할을 다하고 있는 셈이다. 


퍼스를 얽어매고 치솟아오른 모비딕이 데리고 사라진 피쿼드의 영혼들틈에서 살아남은 이슈메일의 엔딩이 너무 단촐해서 시간에 쫓긴 블럭버스터의 가위질이 생각나지만 미친듯한 엔진과열음이 들리다가 기어코 어느순간 엔진은 멈추고 고요가 찾아오면 그때야 말로 꼭대기까지 삼켜진 피쿼드호 처럼 모든게 끝난다고 깨끗이 털어버릴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하여 수많은 여정끝에서 며칠간의 추적, 그리고 모비딕과의 해후끝에는 피쿼드에 실려 같이 항해를 했던 독자들의 지친 고단함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이슈메일이 구조되고 다시 낸터컷으로 돌아오면....잠시동안의 장례식대열을 쫓아가다가 물보라 여인숙으로 아니간다고 장담할 수 잇을까. 다시 퀴퀘그를 만나고 상아 장식의 식인종같은 피쿼드 같은 배에 다시 탑승하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이건 다 모비딕이 남긴 후유증이자 향수다. 

.


모비딕

저자
허먼 멜빌 지음
출판사
작가정신 | 2013-08-0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포경선을 탄 경험이 있는 특이한 이력의 작가 허먼 멜빌이 격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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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ewell
Book Pantry2014. 5. 21. 13:24

1.

어렴풋이 짐작했던 것이기도 했지만, 책을 읽었다고 해서 책안의 모든 내용을 다 기억 할 수 있는건 결코 아니라는 걸 다시한번 절감하게 되었다.  지인이 어떤 대목을 말하며 '그 부분을 난 이해할 수 없어 넌 어때'라고 불현듯 물을 때, 아 그래 그 대목 나도 이해가 안가..라고 말하면서 바로 맞장구 칠만큼 신속하게 기억에서 팝되었으면 좋겠는데 이건 그야말로 희망사항 일 뿐이다. 몇 초간의 탐색질 끝에 내 머리속에서 '띵'하고 경고 팝업이 뜨듯 슬며시 말한다. '기억에 없음..' 뭐라고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나도 뭐라고 이야기해줘야 할 지 모르겠네' 라고 얼버무려 버렸다. 이건 책을 읽었다고, 그렇다고 안읽었다고 말하기도 뭣하다.


2. 

가브리엘 마르케스가 생을 달리하셨다. 갑자기 검색어에 '백년동안의 고독'이 '삶의 고독'을 대표하듯 캐치프레이즈처럼 나부끼고, 블로그들에도 느닷없는 찬사와 추억 되새김질과 사후 찬미의 루틴한 호응이 벌어지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백년동안의 고독'을 읽으면서 난 마술적 리얼리즘이 뭔지 감도 잡지 못했다. 그저 아르카디오의 피가 흘러흘러 층계를 지나 바닥 복도를 지나 대문을 지나 그리고 또 어쩌고 저쩌고 해서 드디어 죽음이 전달되는 과정을 읽고, 멜키아데스의 유체이탈된 삶도 읽고, 주전자가 끓어 뚜겅을 열어보니 구더기가 드글드글 하고 뭐 이런 비현실적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현실적으로 묘하는게 '마술적 리얼리즘'인가보다 했다. 어찌되었든 개인적으로 기억나는건 그냥 '백년'의 서사가 아니라 '고독'의 느낌이었드랬다. 아우렐리아노나 우르슬라나 아르카디오나 레메디오스나 레베카나 다들 외롭고 '고독'하며 쓸쓸하다는 느낌..마콘도가 그냥 처음의 부엔디아의 안중에서 에덴처럼 유지되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상상만 들곤 한다. 한번 다시 읽어볼까 고민 중이다. 


3.

알베르트 망구엘의 <책 읽는 사람들>을 드디어 2 챕터 정도만 남기고 다 읽어간다. 오랫동안 음미하듯 읽었는데 어떤 경우에는 한 단락도 이해가 잘 안되서 넘어가질 못하고 디제잉 판 튀기듯 앵무새처럼 반복해서 단락을 와따리가따리 하셨다. 그런다고 해서 이해되지 않는게 갑자기 이해될 리는 만무하겠지만,  여러번 읽는 다는 건 뇌에게 '야 제대로 이해 좀 부탁해. 이건 중요한 거니까 반드시 이해해야만 하거든' 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으니 자꾸 자꾸 읽는 것 외에는 딱히 방법이 없는 셈이었다. 어쨋든 책을 사랑하는 망구엘의 열정은 말할 것도 없고, 그가 가진 지적인 두께도 얼떨떨하시다. 가끔 이렇게 책을 폭식하듯 읽고 안에 담긴 영양분을 하나하나 낱낱히 분해해서 혈관에 녹인듯한 기인들을 보면서 '난 시간이 부족했을 따름이라고' 속으로 거짓말을 일삼을 뿐이다. 


4. 

카프카의 '소송'과 ''을 다시 읽으려고 한다. 어언 이게 오래전 일이 되버렸는데 그냥 이야기의 뼈대만 슬쩍 기억나고 뭐가 어떻게 된건지, 그리고 무슨 의미였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패니의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를 다 읽고 나면 '성'을 읽어봐야겠다. 내 예전 기억의 파편들이 어느 정도의 크기로 부숴져서 흩어져있는지 가늠할 수있는 좋은 기회겠지. 


5. 

보르헤스의 '픽션들'을 여러차례 읽었는데도 사실 '진의'와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알레프도 그래서 주저하고 있는거겠지. '칠일밤'도 밀려있고,.....휴...그런데도 비오이 케세레스의 '이시드로 파로디의 여섯가지 사건'과 '모렐의 발명'은 정말 재밌었다. 이건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즈오 이시구로를 칭찬하듯 보르헤스가 카사레스를 그런식으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이어졌다. 좀 재밌게 써줬으면 싶었는데 ...읽을 때마다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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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ewell



개인적으로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을 읽으면 막 조깅을 시작했을 때와 같은 두근거림이 있다. 몸은 활력을 찾아가고 사지에서 슬슬퍼저가는 긴장감과 숨소리와 섞이는 심작박동과..뭐 등등... 이 양반이 얼마나 재기발랄한 모습을 활자로 보여줄지 가늠이 잘 안되긴 하지만 이와 별도로 어쨋든 기대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거장들의 서적들속에는 모종의 자기들만의 무늬들이  있는데 그건 시그니처와도 같다고 늘 생각해왔다. 읽으면 아 이분의 글은 맞네 맞어 혼자 중얼거리게 되고 이내 그런 잠정적인 전제 조건들을 레디 장치로 각인해가며 읽게된다. 그러다보면 ~적이다라는 말의 뜻을 알 것도 같다. 혼자 단정짓고 결론을 내버려서 그 작가분들께는 죄송하지만 받아들인 나로서는 이 책이나 그 책이나 그 작가의 무늬들은 거의 흡사하게 느껴지는데다가 분위기역시 비슷해서 익숙해지는 과정을 피해갈 길이 없어지니까..


가끔 이런 예상이 빗나가는 작가도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가즈오 이시구로다. 나는 <나를 보내지마>에서 가즈오를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남아있는 나날>들에서는 전혀 가즈오 이시구로를 생각치 않고 읽어버렸다. 그리고나서 나중에 아 맞다 가즈오 이시구로였어 왜 잊고 있었지라고 황급히 떠올렸다. 이런 이런 이시구로의 스타일이 아니었나봐..아무튼  이 이야기는 나중에 책 이야기를 길게 쓸 때 한번 더 해볼 작정이다. 아무튼 너무나 글을 잘써서 속으로 감탄을 거듭하면서 끝까지 읽고 덮었다. 이 후 스테판 츠바이크<체스 이야기>파트릭 모디아노<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연타로 읽게 되었다. 아직 다 읽진 않아서 섣불리 말하긴 곤란하지만 지금까지는 잘 흘러가고 있다. 특히 스테판 츠바이크는 굉장히 재밌게 글을 쓰셨다. 마치 흥미진진한 추리소설을 읽듯 읽게 되었다는...


책 읽기에는 좋은 날씨다. 

Posted by kew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