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BOOK/소설2014. 6. 24. 11:10



이 책의 제목 이야기부터 해보면, 원제는 <The Sense of an Ending>인 반면, 번역 제목은 영 엉뚱하게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되어있다.  이 두 제목 사이에 어떤 화학적 변형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지만, 굳이 짐작해보자면 엔딩의 역설적인 부분을 강조하다보니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라고 막연히 짐작해 볼 따름이다.  그냥 원제 그대로 썼어도 좋았을텐데.......... '엔딩의 느낌' 내지는 '센스 오브 엔딩'이라고 발음나는데로 쓰던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고 하니 뭔가 화자가 줄거리 중 끊임없이 암시를 받았을런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토니는 영 분위기파악 못하고 예감은 커녕 돌아가는 상황도 잘 이해못하는 멍 한 캐릭터여서 독자들은 의아해한다. 어쩌면 예감은 틀리지 않다고 느낀건 독자였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제목만 생각하면 장르소설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탓에 여타의 추리소설적인 즐거움을 떠올리는 독자가 많았을 텐데, 저자인 줄리언 반스를 생각하면 이 책의 정체성이 추리소설적 즐거움이 된다는게 영 어울리지 않기도 한다.  전작이었던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처럼 읽을 독자는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득히 스토리를 감내하는 것과 의도하지 않았어도 호기심을 따라 물흐르듯 문장을 보내는건 완전히 다른 일이므로 <예감>쪽은 어쩌면 전형적인 통속소설이자 대중소설이고 <플로베르의 앵무새>는 문학을 빙자한 철학소설로 보는 사람들도 꽤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두소설은 완전히 다른 소설처럼 느껴진다. 플로베르 앵무새를 읽다가 아 도저히 재미없어서 못 읽겠어 이게 도대체 무슨소리지 라고 하품하던 독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예감쪽은 아주 재밌게 읽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결과가 어떻든 줄리언 반스는 대중적으로는 좀더 독자들에게 근접해간 느낌이다. 쉽게 문장을 따라가고 스토리를 흡수했으며, 중간에 의미심장한 부스러기를 충분히 줏어먹으면서 작자가 의도했던 길로 하염없이 가기만 하면 된다.  설마설마하는 마음을 가지고 조마조마하는 아슬아슬함을 여분의 연료로 사용하면서 엔딩으로 드라이브 하는 기분은 '일반적'이고 '대중적'이며 모험적이다. 먼저 줄거리를 대략 요약해보면 이 책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토니 웹스터는 학창시절에 콜린, 마셜, 앨릭스와 어울리며 새로 전학온 애이드리언을 만나게 된다. 그러다가 토니가 베로니카라는 여학생과 사귀고, 그녀의 집에 놀러가고 나중에 헤어지고 , 에이드리언이 베로니카와 사귀게 되고...얼마 후 에이드리언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토니는 영문을 몰라한 채 무슨일이 벌어진 건지 도무지 이해를 못하지만, 에이드리언이 자신에게 남겼다는 편지를 쫓아 과거를 거슬러간다. 


이 과정이 이 소설의 메인 뼈대다. 마치 일상적이고 너무나 평범한 사건들이 벌어졌지만, 그 이면에 담겨있는 비밀이 무엇이며, 결과가 어떤 식으로 벌어졌는지에 대해서 개인의 시각으로 쫓아간다는 것을 조건으로 아주 평범하게 독자의 시각으로 사건을 차근차근 밟아간다. 토니의 시각과 생각이 독자의 견해가 되는 건 당연하다. 이를 통해서 화자는 늘 '객관적이고 공정한 정보'를 독자에게 줄 것이라고 전제해놓고 스토리를 바라보지만, 이 책의 반전은 '진실이 꼭 화자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부분에 일정부분 할애되어 있다보니 뒷부분에서의 여파가 참신하게 느껴진다. 뒤에서 맞닥드리는 진실의 모습을 두고 독자들은 대개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토니는 틀렸고 실수했으며 망각했고 무책임한 인물이었다고..그리고 드러나는 진실에 대해서 줄리언 반스가 어떤 힌트와 암시를 배치했는지 앞부분으로 다시 가서 읽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어쩌다가 사건이 이렇게 된거지 분명히 내가 놓친 모종의 복선들이 놓쳤어..너무 많이 놓친게 틀림없어 라고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언젠가 이동진 기자의 <빨간 책방>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책을 읽고 난 후 들어봤음) 이 소설은 치밀하게 구성된 한편의 정교한 조각처럼 구석구석이 짜여져있다. 에이드리언이 언듯언듯 내비치는 자신의 생각이 소설 주제 전반을 건드리고, 등장인물들이 내뱉는 대사와 상황들 속에서 은근한 암시를 뿜어내준다. 토니는 과거의 학창시절 역사수업시간에 역사를 두고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라고 했고, 콜린은 약간 웃기게도 '역사는 생양파 샌드위치'라고 했으며, 에이드리언은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고 언급했다. 영민한 독자라면 느닷없이 역사토론을 벌이는 이 대목에서 과거 기억들의 모습들이 어떤 식으로 진실을 찾아가는지에 대한 미묘한 감정들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결국 에이드리언이 말한 '모든 역사적 사건에 대해 진실되게 말할 수 있는 말은 '뭔가 일어났다'는 것 뿐이라고 하는 대목에서 우리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느끼는 파편들에 대해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게 된다. 혹시 내가 잘못 기억하는 건 아닐까?  


과연 나의 기억이 올바른 것일까. 어떤 왜곡된 표피에만 머물러 상황을 호도하고 중요한 어떤 부분들이 생략됨으로써 진정한 진실의 영역에 가까이 가지못한 오해의 역사가 진행되버린건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줄리언 반스는 이 책에서 사건의 면모를 완전히 파헤져 주지 않는다. 어느 정도에 이르면 자살의 직접적 동기와 베로니카와 있었던 일들과 포드부인를 비롯한 베로니카 집안에 묘하게 풍겨지는 이면의 숨겨진 이야기들도 완벽히 드러나지 않은채 이야기가 매조지 된다. 왜 오백파운드를 유산으로 남긴건지 에이드리언이 썼다는 편지의 내용이 어떤 내용인지도 말해주지 않았다. 답답해서 미칠 노릇이지만 이 책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사건의 전모가 아니라 어쩌면 이 상황이 벌어지게 된 '오해'의 역사, 그리고 개인의 감정적 행동이 벌여놓은 배설같은 후폭풍이다. 이윽고 망각의 세월로 흩어져버린 스스로의 오욕의 기억들은 '책임'보다는 '생각하기 싫은 어떤 추억'이 되버리고 적당히 미화되어 기억에 자리잡았다라는 것.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 이라고 종료되는 이유가 뭔지 알 듯도 싶다. 


자신의 과거가 설명하기에는 어려운 어떤 복잡한 미로에서 여전히 오리무중일거라는 묘한 느낌이 남는다. 어떤 것들이 일어나긴 했지만 그에 대해서 정확히 알기란 어려우며, 그저 일어났다는 정도만해도 최대한 알수 있는 모든 것일 수 있다는 그런 막연함이 휘몰아치고 슬며시 자기에게 유리하게 편집되 버리는 '자기위안' 장치에 당혹감을 느끼는 식이다.  혹시나 내 기억은 내가 재조립한 가짜의 모습, 왜곡된 거울같은 환영으로 남아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저자
줄리언 반스 지음
출판사
다산책방 | 2012-03-2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2011 영연방 최고의 문학상 맨부커상 수상작!2011 영연방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
Review BOOK/소설2014. 6. 18. 17:01


  

이언 매큐언이 전작들에서 악명이 높았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엽기'적인 소재를 이용해서 파격적인 이야기를 소설로 썼기 때문이다. 좀처럼 일부러 찾아보려고 해도 이런 류의 소설은 보기가 어려울수 밖에 없다. 방부 처리된 성기가 등장하는 <입체 기하학>라든지..극장에서 실제 정사를 벌이는 <극장의 코커씨>라든지..이외에도 강간을 비롯해서 근친상간같은 꺼려지는 소재를 아무렇지도 않게 연작 시리즈처럼 써버리면 독자가 생각하는 매큐언의 이미지는 뻔하다. 이런 경우, 매큐언의 소설이 개성있어서 좋다고는 해도 환영할만한 대중적 팬층을 확보하기는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원래 작가들은 자신들이 쓰고자 하는 것들을 쓰고 싶어하는 욕망때문에 상업성이라든가 대중성같은 것들을 등한시 하는 우를 범하기도 하지만, 내심 자신의 글들이 두루두루 읽히길 바란다는 측면은 아이러니하게도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보자면 매큐언은 아예 사람들이 터부시하고 거부하는 지점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길을 가는 엽기호러의 매니악스러운 작가로 아예 대놓고 공표하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암스테르담>이 등장하고, <속죄>가 등장 한다. 알다시피 암스테르담은 부커상, 속죄는 독자들의 찬탄을 불러일으키며 매큐언이 쓴 소설의 최고작이라고까지하는 극찬을 받는다. 암스테르담과 속죄만 놓고 보면, 그가 <시멘트 가든>작품을 썼다는게 믿겨지지가 않을 때가 있다. 마치 하루키가 태엽감는 새니, 양을 쫓는 모험이라든지, 1Q84를 쓰다가 알고보니 <노르웨이의 숲>을 썼다고 생각해보면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는 것처럼 매큐언이 통념을 일부러 쫓지 않았다는 전작들이 일종의 쇼맨쉽이 아니었을까하는 추측마저 들 정도다. 나도 충분히 리얼리즘적이고 평이한 일상을 노래할 수 있다는 의사표현일수도 있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소설들이 이 지점에 이르러서야 대중들의 선택을 받았다는 점이다. (평론가들의 측면은 사실 잘모르겠다.) 


속죄는 워낙 유명해서 나중에 논외로 처야겠지만, 부커상의 빛나는 <암스테르담>을 읽고 있노라면 뭔가 중간에 몰리레인이 클라이브와 엽기적인 행위를 벌이고, 그와중에 버넌과 이중적인 섹스를 즐기고, 가머니와 중간에 변태적인 행각을 하는 팜므파탈의 여성으로 그려졌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런 매큐언씨 다시 시작하셨군 그럼 몰리는 클라이브버넌의 주도아래 가머니가 살해하고 시체를 절단하고 암스테르담으로 옮기고 셋다 몰리의 죽음을 놓고 옥신각신하다가 서로 총질을 하고 셋다 사망한다는 황당한 결말의 소설이 된다고 해도 충분히 매큐언표 소설로 충분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몰리가 불치의 병으로 죽었는데 과거의 남자와 애인이 서로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비교해가며 자존심 싸움을 하고 도덕적인 논쟁을 펼치고 서로를 경시하고 질투하다가 치부를 발견하고 스스로의 본성을 넘어서는 추악함을 보여주니 어 매큐언씨가 대중적인 블랙코미디를 표방한 스토리소설로 노선변경을 한 것같은 느낌이다. 


암스테르담을 읽으면 예전 리처드기어, 샤론스톤 주연의 <마지막 연인>이 생각난다. 두여자를 놓고 혼수상태에 빠져버린 주인공 남자이야기. 남자로부터 누가 진정한 사랑을 받았는가에 대한 각자의 시각, 그리고 서로에 대한 배려같은 것들. 암스테르담은 이 영화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된다. 리처드 기어는 몰리 레인이 맡고, 샤론스톤과 다도비치는 클라이브와 버넌이 되는 식이다. 여기에 가머니가 맡을 역이 부족하지만 어쨋든 모양새는 비슷하다. 다만 스토리상 영화말미에 보여줬던 서로를 향한 미덕같은 건 없다. 대신 파국을 향해 질주하는 추한 세남자의 적나라한 모습만이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다. 소설의 제목이 암스테르담인 이유는 소설 말미에도 밝혀지지만, 이 세남자의 최종 결말을 아우르는 상징적인 장소여서 그런 듯 싶다. 처음 읽기시작할 때는 블랙코미디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점점 수위가 올라가더니 마치 지기싫어하는 남정네들의 자존심과 되먹지 못한 도덕관념 논쟁에다가 정치적인 불순함, 가족에 대한 무책임, 그리고 몰락해가는 추한 모습을 바라보는 서로간의 생각들이 엉켜서 속내가 복잡해진다. 


왜 불편하냐면, 이런 극단의 모습들이 나를 비롯한 누군가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기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던 어떤 연인으로 부터 선택을 받지 못하고 그 연인이 나에 대한 많은 비밀을 간직한채 다른 사람에게 가버렸을 즈음에는 사소하게나마 소소한 광기는 애교수준이다. 평상시 고고한 척해도 불현듯 밀려오는 모멸감때문에 드잡이질을 할 수도 있고, 냉철함은 온데간데 없고 광폭하고도 극단적인 언쟁을 소리높여 아무렇지도 않게 배설할 수도 있다. 왜냐면 우리 모두 인간이니까..그래서 <암스테르담>이 인간본성의 추악함이라고 평을 내리는 듯 싶다. 소설 초입에서 몰리레인은 죽은 채다. (아마도 표지 여인이 몰리 레인일듯.) 이미 핵심 인물이 죽은 상황에서 남겨진 3명이 남자는 묘한 경쟁을 벌이는데 이것들은 다 각자의 위치에서 결함이라고 불리우고 약점이라고 여겨질만한 구석에서 점차 퍼져나간다. 클라이브는 '예술적 자부심' (예술적 성취를 위해서 도덕적 의무감을 져버릴수도 있다는 부분), 그리고 버넌은 언론인으로서의 공정하고도 냉혹한 직설적 비평 (기사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인권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부분), 가머니는 올바르고 청렴하고 능력이 있는 정치인으로서의 생존본능 (실제로는 '고위직 개새끼'이자 '밤의황제'라고 불리우는 타락함)이 바로 그것들이다. 


서서히 이 세사람은 서로의 약점을 향해 몰리레인을 매개체로 찌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렇게 찔림을 당한 측은 이에 대한 당혹감과 모멸감으로 상대방에게 더 강도높은 가해를 시작한다. 그리고나선 폭주하는 거다. 그리고 같이 멸망. 이게 암스테르담의 주된 플롯이자 스토리라인이다. 여기서 세세하게 그 과정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이야기하는건 스포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기타 여백은 독자들이 읽으면서 채워야 하겠지만, 어쨋든 중요한건, 클라이브던, 버넌이든, 가머니이든 ..결국 다 우리들의 한 측면이라는 점, 그래서 나도 클라이브처럼 행동하고 버넌처럼 생각하고 가머니처럼 움직일수 있다는 지점이 독자들이 느끼는 <암스테르담>의 느낌이 된다. 


만약 이 책을 읽으면서 불편함을 느낀다면 '당신의 종착역은 '암스테르담'이야' 라고 마음속에 확 다가올지도 모른다. 소설말미에서 세명의 남자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협잡꾼'일수도 있으며, '창의성하나도 없는 구제할 길없는 단조로운 재능의 소유자'이며, '더러운 타락의 결론으로 가족을 침몰'시킬수도 있는 사람이란걸 일깨워준다.  물론 소설을 읽으면서 뭔가를 깨달아야지만 가치가 있는건 아니다. 다만 매큐언이 시종일관 견지했던 자신의 소설의 정체성은 본성의 추악함이 바로 우리곁에 있다라는 부분이 아니었을까. 그런게 소설속에 베어나와 가슴을 자극하면 과거가 부끄럽게 떠오른다. 결국 <암스테르담>을 읽으면서 '당신도 알고보면 그리 깨끗한 인간은 아니라오'라고 지적당한다. 좀 찝찝하고, 좀 적나라하며, 많이 부끄러워진다. 나도 구차함을 빙자해서 누군가가 내 생명을 끝내줄 모종의 장치가 있는 암스테르담으로 가야만 하나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버린다. 약간 코미디적이지만 일절 부인하기에는 솔직하지도 못하고 위선적이고 파렴치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암스테르담'은 추악함의 종점처럼 비춰진다. 




암스테르담

저자
이언 매큐언 지음
출판사
MEDIA2.0 | 2008-01-08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한 여자를 사랑한 두 남자, 그들이 암스테르담에 간 까닭은?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
카테고리 없음2014. 6. 16. 14:01




입구가 어디있는지 잠시 혼란을 겪었던 상암동 우연이란 일식집. 일식집 특유의 고급스러운 것들(?)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대개의 일식집은 고급을 빙자해서 인터리어 비용을 고객들로 부터 받아내겠다는 일념으로 후덜덜한 가격표를 붙여놓거나 아예 대놓고 '애들은 가라'식의 요정풍 인테리어를 표방해서 뭔가 답답하고 폐쇄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곤 했다. 진짜 일식집이 그렇진 않다. 도쿄에서도 그렇고 편안하고도 고즈넉한 식당들이 도처에 널렸는데 왜 국내만 들어오면 죄다 일식집은 별로 였다. 


메인 디쉬전 나오는 두부튀김. 이걸 뭐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얼마전 읽었던 <양배추 볶음에 바치다>(이노우에 아레노 작)에 나오는 군침돌던 두부튀김과 비슷할지도....




메인으로는 가게 타이틀을 걸어놓은 우동을 먹어봐야 했기에 우연 우동을 주문하였다.  자작한 소스에 우동면빨이 살아있는 듯 탱탱하고 곁들어진 신선한 튀김이 올려져있다. 일반적인 우동이라면 면이야 그렇다치고 특유의 감칠맛이 도는 국물이 핵심일텐데..우동이란 영화를 봐도 그렇고 국물이라고 할 수도 없는 소량의 소스가 면과 어우러져 비벼먹는 우동도 적지 않았드랬다. 아마도 그런 우동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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