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nilla Essay2013. 9. 3. 08:41





<이미지 출처 : http://culturacolectiva.com/lo-surreal-en-murakami/>


 


'노르웨이의 숲'을 '상실의 시대'로 읽은 지 대략 이십여년이 흐른 듯 싶다. 그땐 하루키의 문체가 좋다느니 혹은 그의 스타일이 좋다느니 하는 열렬함이 있긴했는데 그렇다고 정서상의 '원심분리기'라는게 있어서 하루키 책을 넣고 스위치를 켜면 45 퍼센트의 우울함과 15 퍼센트의 로맨스, 5 퍼센트의 자기연민, 그리고 35 퍼센트의 재즈가 백그라운드로 깔려있는 연상녀와의 섹스로 구성되어있어요라고 딱 부러지게 말할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모호함과 개인적인 느낌이었을 뿐이다. 어찌됐든 당시 대중의 문학습득 분위기는 지루함을 무찔러라같은 느낌이었다고 기억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때는 바야흐로 밀레니엄을 맞이하며 세기말의 회색빛 암울함을 장식처럼 주렁주렁 매달고 누군가가 돗자리만 펴준다면 이 욕구들을 다  싸질러버리겠다고 마음먹었던 시절이었으니까..'희망'따위는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됐고 일탈과 방황과 젊은시절의 타락정도로 질펀한 섹스를 묘사했어도 뭐 그정도 쯤이야라는 젊은층의 배려(?)가 있었드랬다. 


약물에 중독되서 그룹섹스를 벌이는 파격적인 내용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무라카미 류)를  모 당시 유명 작가는 '의미있다'며 자기 부인에게 읽어보라고 추천까지 했다고 들었는데, 사실 난 그 때 그 책을 읽으면서 이런 걸 읽고나서 누군가에 추천해준다는건 '나도 너와 이런걸 해보고 싶어'라고 은밀히 의사표시를 하고 있다는 오해를 피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었다. 욕구 탐닉의 위험수위라는게 이런게 아니면 뭘까라고 이견이라도 말하고 싶었지만 개인이 바라보는 문학의 질감들은 다 다르기에 나같은 속물적이면서도 대중 표피층에 살면서 정도껏 소비를 일삼은 범인들의 입장에선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의 의미를 안다고해도 내 삶은 더 투명해지지 않기를 바랬다.


당시에 읽었던 책들은 다 이런 류의 정서를 광고 카피로 가지고 있었다. 어쟀든 인기를 끌었고.. 시대를 풍미했고.. 살아남을 것들은 살아남고 사라져줄 것들은 침식되고 세월의 퇴적층으로 가라앉아주셨다. 그런데 묘하게 '정서'는 남았드랬다. 하루키 정서가 아직도 꿈틀거린다는 느낌, 이윽고 언론에서 인용한 하루키스러운 이디엄들을 나열했는데 피식 웃음이 나온다. 레이먼드 챈들러, 트루먼 카포티, 스콧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카버정도야 인정해줄만하지만 삿포르 맥주라디오헤드스탠게츠니 하는 것들은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어서다. 물론 그가 라디오 헤드를 듣고 게츠의 음악을 듣기야 했겠지만, 하루키가 '그럼 난 뭐 삿포르 맥주를 먹다가 라디오헤드를 듣고 스탠게츠로 레이블을 돌려가며 듣는 천편일률적인 인간인가'라고 한숨이라도 쉴 판이다.  


그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 핀볼'이래로 수없이 끄적였던 에세이 시리즈, (이를테면 무라카미 라디오)를 보다보면 영미 문학쪽의 조예가 남다르다는 것즈음은 짐작할 수 있으니까 그가 피츠제럴드의 개츠비 이야기를 자꾸 이야기하는 이유를 알게된다.(이 아저씨는 피츠 제럴드를 너무 좋아하긴 한다.) 예전 등단시절, 오에 겐자부로의 초기평에서는 하루키가 '너무 미국문학의 영향을 받아 개성이 없다'라는 평도 있었다. 챈들러를 칭찬하고 카버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며 카포티의 유려함을 감탄하는 정도는 그의 문학적 스타일로 볼 때, 어떤 모체가 될만한 스타일상의 '목표치'같은 것이었을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카버나 카포티가 되려고 노력했다는 건 아니다.  (가끔가다가 챈들러의 하드보일드가 슬쩍 엿보인다고는 할 수 있어도..) 다만 하루키의 문체가 어떤 독서를 통해서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해소해줄만 하다. 그래서 다들 챈들러니, 카버니 카포티니 찾아 읽는거겠지 싶다. 


그런데 왜 이런 것들이 관심거리가 될까 궁금증이 생긴다. 그가 브룩스브라더스의 자켓을 걸치던 윈드 브레이커를 즐겨입던 뭐 특출난 건 아니지 않나 싶다. ...그럼 아침에 조깅을 하고 가끔가다가 커틀릿을 만들어먹고 거품많은 맥주에  튀긴 두부를 한 모이상 먹으면서, 마일스 데이비스와 빌리 할리데이 음악을 잔잔히 듣고, 진구구장 뒤에 누워 푸른하늘을 보면서 '네가 응원하는게 저팀이야'라는 핀잔도 여친으로부터 들어야 하루키를 닮아가는건가라는 생각도 들어버린다. 이런걸 해보면 하루키의 감정상태가 묘한 리듬을 타고 정서에 와서 콱 박히기로 한단 뜻인가... 문학의 싸구려티를 내기위해서라면 주저없이 하루키를 읽어라라고 비아냥 거렸던 비평가들의 입장에서는 이거야말로 무턱대고 추종하는 하루키빠들의 무지함아닌가라고 지적할지도 모르겠다. 


상실의 시대를 읽으면서 옳다구나 카포티도 나왔고 챈들러도 나왔어..카버도 나오고 피츠 제럴드에 개츠비도 나왔으니 이젠 뭐 또 되새김질할만한 하루키적 특성들이 반복되는게 눈에 보인다고 이젠 하루키는 끝장난거라고 밑천이 드러난 교활한 자기복제의 증거들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고 의미심장하게 미소라도 짓는다면 이거야말로 오해하는거 아닌가. 개인적으론 최근의 다자키 쓰쿠루 건도 그렇고 업계가 인기매몰의 포커스가 하루키에게 다 쏠리는걸 못마땅해한다는 느낌이다. 그러나 상실의 시대를 읽었던 세대가 현재의 사회주류층이기 때문이라는 부분에 생각이 미치면 이해못할 것도 없다.  어차피 지나가는 세대고 흐르고 나면 다시금 기억하려고해야 생각나는 이미지들에 불과하다. 하루키가 아니었어도 조정래의 정글만리나 히가시노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 알랭드 보통의 세대가 온다. 다만 하루키적 정서라는것도 알고 보면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이나 그리스인 조르바와 같은 대중성을 갖지 말란 법이 없으니 좀더 족적을 남기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나쁠 건 없지 않을까. 아무리 그래도 그의 스타일상 하루키가 뭘 했다고 해서 그걸 따라하거나 그게 그의 스타일이라고 하는건 좀 웃음이 나온다. 



cf. 하루키는 삿포르 맥주보다는 거품이 많은 맥주라면 뭐라도 좋다고 했고, 특별히 스탠게츠보단 두루두루 재즈음악을 좋아하며 라디오헤드외에도 역시 레드핫칠리페퍼등도 많이 등장한다. 블레이저 코트야 그렇다치지만 슬리퍼에 가벼운 차림으로 나다니는 걸 좋아하고 다만 야쿠르트 스왈로즈를 선호하긴한다. 이 정도는 각자 다 있는 취미들이다. 이게 하루키여서 생겨난 뭔가 스타일리쉬한건 아니지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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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illa Essay2013. 8. 8. 20:45


챈들러

레인먼드 챈들러, 무라카미 하루키, 스콧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카버, 트루먼 커포티, 존 치버, 그리고 업다이크까지..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는 특별한 이유로 위 작가들의 작품을 읽었다. 슬쩍 눈치빠른 분들은 아셨을 것이다. 선택과 순서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람은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라는 걸... 그가 어디 작품 한 귀퉁이에서라도 이 작가들을 언급안하고 넘어갔던 적이 있었던가. 그는 위의 작가들을 사랑했고 또 열렬히 추종하기도 했었다. 그리하여 하루키를 읽었던 대다수의 독자들에게는 한가지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실마리를 이 작품들에게서 찾게된다. 그는 어떻게 이렇게 군더더기 없으며 세련된 문장들을 구사할 수있는가에 대한 궁금증말이다.  


여타의 기사와 사설과 평론을 몇개 찾아보니까 나같은 경우가 적지 않았나 보다. 죄다 하루키 팬이랍시고 줄줄히 피츠제럴드, 카버, 커포티를 찾아서 읽었다고 고백들을 하고 계셨으니까.. 평론가들은 왠지 그런 하루키팬들에게 거봐 하루키가 소개해주지 않았으면 찾아보지도 않았을텐데 용케 좁은 소양으로 운좋게 명작들을 찾아 읽으셨네라며 은근슬쩍 비아냥거렸다. (지금도 이 현상은 진행 중이라고 본다.) 어찌됐든 좋은 명작이야 두루두루 읽히면 좋다. 아무리 좋은 작품들도 시간에 한번 매몰되면 어떤 계기가 벌어지기전까지는 '무덤속 신세'면할 길 없으니까. 이상한 나라 앨리스도 그랬고 위대한 개츠비도 그랬으며 '그리스인 조르바'도 모두 무덤속 신세들이었다. 


스콧 피츠제럴드

행여 갑자기 조인성이나 소지섭이 나와서 한 손에 <폭풍의 언덕>을 들고 커피한잔들고 읽으면서 혼자 '왜 너는 괴로우면 안되니'라고 읇조리며 연인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이라도 날린다면 그 다음날 서점가에는 에밀리 브론테의 이름이 박힌 책들의 탑을 보게 될 수도 있다. 그게 무슨 죄라고. 민망해야 할 꺼리도 못된다. 찬밥되었던 고전들을 평상시 알아보지 못해서? 어차피 되새김질은 소만 하는 것도 아니고 그 소조차도 과거에 소화불량이었던 시절을 생각하며 다시 억센 풀을 뜯어먹을 절호의 기회가 생긴다고 생각하면  이 보다 더 흥미진진한 모험도 없다. 그래서 다시 읽는 건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가끔 여러 문학계의 글들을 접하다보면 일상에서 김치드시듯 늘 고전을 탐독하지 않으면 당신은 독서가의 자격이 없는거야라고 나무라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다. 고전 문학소설을 삼면에 켜켜히 쌓아두고 고전의 숲에 파묻혀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러지 못했다고 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고전명작 몇 권 다시 드는 것도 꽤 의미심장한 일이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닐테니..


트루먼 커포티

어찌되었든 언급한 책들을 주욱 돌아보다가 미처 읽지 못했던 몇 권의 책들을 발견했다. 어..그런데 읽었던 책도 책장을 넘기다보니 이게 또 새로운 거다. 기억도 하나도 안나는데다가 줄거리조차 새롭다고 느껴질 때는 혹시나 오래전 책 사재기만 하고 읽지도 않았던 비운의 책들이 아니었을까 곰곰히 생각하게 된다. 역시 기록이 없으면... 그리고 적용과 응용이 없으면 전부 휘발되어 날아가버리는 걸까. 내 과거의 책탐독의 결과는 실온에 나온 드라이아이스만도 못한 수명이었나보다. 그렇다고 시디나 DVD같은 기억력을 바랬던 것은 아니었는데 이토록 생경하다니..이래서야 책을 읽었다고 할수나있나 푸념만 나왔다. 


아마도 당시에는 미사여구와 화려한 만연체 난무하는 고전소설의 페이지속에서 지루함을 이기는 방편으로 그저 '읽기'만 했으리라. 미션 클리어처럼 앞으로 돌진하면서 한 줄 한 줄 해치우는 심정으로...그 의미와 행간의 뜻따위는 어떻게되도 좋다고 생각했겠지 그러다가 맨 뒤쪽 표지로부터 몇 십장 안쪽에 다다르면 아 대충 이렇게 결말이 되는구나라고 신속히 덮어버리고  치워버렸을 게다. 그래서말인데 누가 카버의 단편을 이야기하거나 커포티의 세련된 문장을 인용하거나 하면 속으로 '그런걸 다 기억한단 말이야?' 엄청 감동적이었나보네라며 놀라워했다. 소설의 편린을 기억한다는 건 두고두고 그 사람의 인생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다. 물론 그 대상이 되는 문장이 독을 품고 있을지 아니면 아름다운 로망을 이야기일지 선택하는 독자의 몫이겠지만 책 귀퉁이 아니 메모지 짜투리에 끄적여쓴 글귀조차도 어느날 문득 발견하게 되면 고구마 넝쿨캐듯 당시의 감흥들까지 부록으로 얻을 수 있다. 추억이든 영향이든 이런 것들이 가능하려면 적어도 뭔가를 기억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레이먼드 카버

아쉽게도 그런 기억의 파편 및 짜투라기 끄적임조차 보이지 않는 내 독서인생이라니..좀 한심스럽고 허무했다. 최근 들어서는 한 권을 읽으면 조그만한 페이지에 단순하게라도 써둔다.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자만 그래도 쓴다. 그렇다고 뭘 어떻게 활용하겠다는 거창한 생각같은 건 없다. 그저 써둘 뿐이다. 억울하니까. 뭔가 현재의 생생함이 잠재의식으로 가버리는건 너무 매정하고 무책임스러워 보여서다. 뇌는 너무 매정하고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으니 안간힘을 쓰면서 무엇이든 써서 남겨야 겠다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어제 그렇게 많이 읽었다고 자부했던 커포티의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또 다시 읽었고 카버의 단편집 '사랑을 말할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을 다시 꺼냈다. 읽다가 보니 언저리 비슷한 처지의 책들을 죄다 다시 읽고 싶어졌다. 이를 어쩌지 시간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고 먹고는 살아야 하는데 이 충동적이고도 무책임한 의욕이라니..


존 치버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독서가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가치있을까라고 ..명사들의 서슬퍼런 꾸짖음이 귓가에 들리는 듯 하지만 사실 내가 책을 몇 권 더 읽는다고 해서 내 삶이 윤택해질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경험적으로 보면 감성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좀 더 사색적이 되는건 맞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스타일에 대한 구성요소지 경제적인 구성요소로 작용하진 않는다.  매정하게 이야기해서 내가 고전 몇 권을 더 읽어도 마이너스 통장에 뭔가 입금되는 건 아니다.  무형의 자산. 좋은 소리다. 마음의 양식이 되고 깊어가는 내면의 성찰도 좋고 다양한 인간군상의 간접경험도 사는데 도움이 될테지 그런데도 이 독서가 죽고 못하는 어떤 거만스러움이 될 때가 있다. 가난하고 우울해도 정신적으로 좀 더 깊어질거라는 늘러붙은 자존심마냥 하염없이 비현실적인 어떤 고리타분함 같을 때가 있다. 그런데도 이런 책들을 읽게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존 업다이크

난 아무래도 아무생각없이 그냥 읽나보다. 그래서 오래도록 곁에 두고 읽고 또 읽고..좀 바보스럽고 무의미한듯 하지만 왠지 이야기들이 나와 너무도 달라서 황당해서 그런걸까 것도 아니면 언젠가 경험했었던 유사감정의 기시감때문이었을까.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겠고 어떻게든 좀 공유해보려고해도 누구랑 말해야할지 모르는 막막한 그런 상태에서 맞닥드린 공감대 같은 것들...? 이도저도 아니면 챈들러나 커포티나 카버, 피츠제럴드가 일정부분 추억을 점거하고 있어서일수도 있겠다. 그들이 없었으면 내 청춘의 초상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거라는 .....뭐...비스무리한 착각같은 것들인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 모든 작가들을 사랑한 덕에 그를 읽었던 대다수의 팬들도 이 작가들의 작품을 따라 읽었다. 어떤 점에 있어서는 그냥 찾아읽었어도 좋았겠지싶다.  우연찮게 도서관을 뒤지다가 문득 '달려라 토끼'를 읽고 '그게 누구였는지 말해봐'를 읽고 '빅슬립'을 발견하고 '위대한 개츠비'를 집어들고 하는 일들이 운명처럼 일어나는것도 흥미진진한 일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고 한들..즉 하루키 아저씨가 소설에 언급하고 에세이에서 칭찬하고 개인적으로 너무좋다 어쨌다고 몇 줄 써놓은걸 보고 호기심에 찾아 읽었다고  한들 그게 부끄러운 책읽기가 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책을 어떻게든 읽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렇게 된 이상 이 후 스토리는 읽은 사람의 몫으로 남겨질 뿐이다. 읽었으니 좋은 것이고 좋았다면 더 기쁜일이다. 그게 비록 하루키덕이었지만..그게 아주 친한 친구를 통해서 또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속으로 쾌재를 부를 일이다. 쾌재를 부를 일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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