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아마도 초딩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교에서 집안의 가훈이 무엇인지 알아오라는 과제를 내준 적이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가훈'이라는 단어조차 의미를 이해하기 힘들었을만큼 '거창'한 것들에 대한 공포를 간직한 채 아버지에게 '가훈'에 대해서 여쭈었드랬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뜻하지 않은' 상황에 직면이라도 하신 것처럼 천정을 잠시동안 바라보시고 '정직'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해주셨드랬다. 정직이라니..밑도 끝도 없이 그냥 말그대로 뜻그래도 정직? 정직이 좋은 말이긴하지만 범용적 의미로서는 이보다 더 무미건조할 순 없는데다가 개성이라곤 조금도 없는 그야말로 따분하기 짝이 없는 단어가 아닌가. 물론 그 시절에는 정직이라니..정말 멋있는 단어인가보다라고 막연히 추측하고 한자로 적어주시는 공책위의 어려운 자취를 보면서 뭔가 대단한 걸 적어가는구나라고 멍청하게 생각했었다.

 

무미건조한 '정직'이 가훈이라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고 해서 내가 아버지를 유치하게 생각한다던지 아니면 '그시절의 아버지들이 다 그렇지뭐'라고 애써 몰개성을 폄하한다던지하는 개념없는 자식까지는 결코 아니다. 기본적으로 굳이 논하자면 아버지는 존경의 대상쪽이다. 다만 FC 바르셀로나처럼 아버지를 바라본다기 보다는 레알마드리드의 호날두를 보는 것처럼 아버지의 장점을 본다고 해두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대개 많은 사람들은 현대에 이르러서 완벽한 시스템을 칭찬하기보단 흠이 없을수 없는 어떤 상황에서 부분부분을 더 경이롭게 본다고나 할까..내가 아버지의 장점을 보는 것도 이와 같을 따름이다. (지금도 전체가 완벽히 조화롭다고 말할 수 있는건 바르셀로나 뿐이라고 생각한다. ) 어찌됐든 나이를 먹다보니 가훈이 '정직'이라는 건 거의 당시 임기응변으로 넘어가기위한 아버지의 궁여지책임을 눈치챘다.

 

정직에대한 깊이 있는 철학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런걸 자연스럽게 체득할만한 당신만의 관점같은게 나한테 전달된게 없으니까..불만은 없지만 아마도 그럴듯한 워딩이 필요하셨으리라..자식들에게 왠만하면 대중적이고도 그럴듯한 가훈정도는 있어왔다라고 '족보'스럽게 언질해줄 의무감같은 뭐....그런 것들의 일종이 아니었을까싶다. 그러다가 나이를 조금씩 먹고 나도 언젠가 자식으로부터 '우리집의 가훈은 뭐예요?'라고 기어코 듣게 될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가훈을 할아버지가 '정직'이라고 했다고 나까지 '정직'을 대를 이어 가훈으로 설정하기에 심히 민망스럽다. 적어도 난 '정직'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머니까...'임기응변' '변신' '배반' 이런쪽이 더 가까울 판이다.

 

그래서 말인데, 난 가훈을 이렇게 설정해야 겠다라고 마음 먹었다.

 

'그런가보네, 됐고..'

 

 

이게 무슨 가훈이냐고? 가훈이란게 별거 있을까. 의미를 두고두고 꼽씹을 만큼 교훈적이거나 깨달음이 있으면 될뿐이지 성인들의 명구를 걸어놓는다고 해서 그 명언들이 집안벽에 스며드는건 결코 아니니까..설명하자면 이런 거다. 우선 저 가훈을 둘로 나뉘어서 생각해야 한다. 그런가보네는 외부적으로 표출하는 자세이자 태도, 그리고 '됐고'는 내면으로 추스리는 마음가짐정도다. 세상사람들에게 굳이 깊게 관여하지도 말고 간섭하지도 않는 그런걸 좋아한다. 충고랍시고, 혹은 걱정이랍시고 오지랖넓게 이것저것 지적질하는 인생은 그야말로 길가다가 똥밟을만큼 불행연속의 격변을 맞아들이기 쉽다. 세상은 자고로 스스로를 추스리고 다른 사람의 삶을 묵묵히 관조하며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이런 해석이 미쳐서는 가끔 곤란할 것이다. 무관심처럼 비춰질수도 있으니까...그러나 기본적으로는 난 저런 삶의 자세를 좋아한다.

 

남에게는 악의없는 덤덤한 자세, 그리고 스스로에게는 다시한번 자신을 돌아보는 내실있는 생각들...좀 유치하긴해도 오히려 가훈으로 삼을만큼 실효성있다고 본다. 나중에 자식들의 선생님들이 이에 대해 저질스러운 과제였다고 평이라도 한다면 자세한 해설 가이드를 A4용지로 한장 뽑아서 첨부해줄 작정이다. 많은 사람들은 너무 많은 경구와 의미에 취해서 자신도 지키지못할 괴이한 괴리감을 가훈으로 건다. 멋있기야 할테지만, 그게 무슨 고생인가. 맞지도 않은 가훈땜에 이중인격자라는 소리를 듣기나 하고..

Posted by kew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