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nilla Essay2014. 3. 10. 10:59

건담매니아들이 넘쳐나고 애니메이션 오덕들의 천국이라 불릴만한 일본에서 이런 설문조사가 있었드랬다. 10~~30대 여성들에게 최악의 남자들은 누구인가라는...그리고 결과에 떡하니 이런게 있었다. 비활동적이고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조용한 성격의 남자.!!! 여기에 몇가지 덧붙여 프라모델 건프라에 빠져사는 남자들. 게임기 붙들고 사는 히키코모리. 줄줄히 언급되는 남자들의 정체에 대해서 크게 반감없이 수긍하며 그렇게 사는 남자들은 문제가 있다라고 여성전체가 손가락질하는 분위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건프라와 게임과 애니오덕들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자신이 여자들을 만나면서 건담MG조립을 포기할리 없고 새로 등장한 LOL캐릭을 방치해둘 생각이 없으며 할렘물의 여주들이 프린팅된 베개를 껴안고 싶지 않을리 없기 때문에 별시덥지 않은 여자들이라고 치부하면 그만일 것이다. 


원래 취미란 이런 것이다. 누가뭐라고 해도 나는 내 갈길을 간다라는 분위기. 손가락질과 지탄이 난무해도 본인은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올 생각은 전혀 없다. 이유인즉슨, 그런 취미활동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재미가 있으면 어떤 사회적 분위기에도 이겨낼 용기같은 걸 막 생산해낸다. 게다가 이런 종류의 쾌감들은 반복적인 패턴을 가지고 있어서 '중독'이라는 레벨로 옮겨가게 된다. 여친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차마시고 심지어 AV유사스런 행동을 하는 스케줄이 동일선상에 존재한다해도 매니아들의 입장에선 부차적인 순위로 밀려날 뿐이다. 


독서도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얼마전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남녀 직장인들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직장인들의 독서량이 한달에 한 권이 안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하루 중 책읽는 시간이 약 30분, 그리고 책을 고르는 기준은 '유명한 사람의 에세이/자기계발서' 순이었다. 이런 조사가 '취업포탈'에서 조사된건 왜 일까. 이 프레임에 근간에는 사람의 능력과 무형스펙에서 '독서'가 차지하는 얼마간의 포션이 있거나 사회전체가 기대하는 '지적기준'의 항목에 독서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거대 출판사가 이런 통계를 들먹이며 '여러분들 너무 책을 안읽으시는군요. 이렇게 안 읽으시면 저희 망해요라고 푸념하는게 더 자연스럽겠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취업 포탈이 독서량을 지적하다니...,이 사회가 '책읽기'를 따분하고 도달하기 힘들면서도 반드시 하는게 좋을 법한 어떤 정형적인 프로세스로 인식하는 듯한 뉘앙스다. 


왜 읽고 싶지 않다는데도 사회는 독서포기의 자유에 대해 달가워하지 않는걸까. 대다수의 직장인들이 책읽기를 관두는 데에는 그들 자신이 무식해지고 싶어서도 그리고 책에 환멸을 느껴서도 아니다. 그저 책을 읽으려고 전진하는 의지에 너무나도 많고도 다양한 유사 선택지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책을 읽는 재미'보다 더 재미있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학업 지상주의에 파묻힌 어떤 고상한 선생님들의 부류에서는 '왜 책 읽기가 재미없냐'고 힐난하거나 '재미가 없어도 읽어야하는게 독서'라고 강하게 어필할 수도 있겠지만 그걸두고 수긍할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사람은 '어떤 재미가 느껴지지 않으면 억지로 무엇인가를 하는데 익숙치 않은 동물이다. 의지라는 것은 한도가 있고 그것도 언젠가는 닳고 없어지게 되어 있기때문이다. 그럼 독서가들의 대개는 강한 의지의 소유자란 말인가?  


1년에 책을 몇 권 읽는지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우려를 금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직장인들이 책을 너무 안 읽는데..한달에 한 권도 안 읽는다는데 나라도 이번달에는 읽어줘야겠어 라고 책을 사서 득달같이 읽는게 더 이상하다. 이 독서의 목적은 누구를 위한 걸까. 독서가들이 착각하는 몇가지의 생각들이 있는데 '책을 좋아서 읽는 사람'과 '책 읽는걸 과시하고 싶어서 읽는 사람'의 독서 유익성에 관한 부분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후자의 케이스를 우러러보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독서는 개인적인 영역이기때문에 그 사람이 무엇을 느꼈든 그 사람안에서 벌어지는 일일 뿐이다. 굳이 양적인 독서에 우러러볼 '권력지향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독서에 목적이 있기보단 자기의 독서과정에서 체득된 지식축적을 과시하고 싶은 일종의 '권력욕'일 뿐이다. 


결론을 내리자면 '책읽기'는 개인적인 것이며 그건 재미가 있어야 한다. 사회적 분위기에 끌려갈 필요도 없으며 읽기도 싫은걸 억지로 읽을 필요도 없다. 그렇게 강제로 읽어서 어떤 걸 알게되었고 깨닫게 된 사람으로부터 우리는 '독서'에 대한 또하나의 강박적 관점을 본다. '독서는 고귀하지만 어렵고 유익하지만 고통스럽다'는 괴이한 견해를 보며 후대들에게 이상한 독서 공포증과 형벌에 가까운 '과제'를 부과하고 있다. 그래서 말인데 다른 관점에서 독서쟁이들을 비웃을 필요도 없지 않은가. 그딴거 읽어서 뭐하느냐고 책을 읽으면 돈이 나오냐고 내 월급에 몇 푼을 더 보태줄 수 있냐고...그럴 필요가 역시 없다. 세상의 치열한 어떤게 존재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먹고, 자고, 똥싸고 섹스를 한다. 본능적인 것도 어떤 점에서는 자연스럽고 덜 고통스럽고 편안해지기 위해서 진행된다. 독서도 결국에는 재미있어 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읽는 사람은 읽는거고 읽기 싫어하는 사람은 안 읽으면 그만이다. 여기에는 어떤 고상한 논리가 있어서 책을 읽어야만 사람답게 사는 것도 아니며 책을 통해 지식을 축적해야먄 참지식이 되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깨달음의 루트가 있다.


물론 내가 감명깊게 읽은 책들이 어떤 사람에게 지루하고 졸릴 뿐이라는 사실이 가끔 실망스럽긴 하지만, 나역시 어떤 시끄러운 환경에서 춤을 추고 왁자지껄 대화를 나누는 걸 싫어하지 않은가. 붕어빵같은 케이팝도 싫은데 왜 싫으냐고 사람들에게 신경질적으로 묻지 않는 것처럼 독서도 결국에는 개인의 취향적인 부분일 뿐이다. 굳이 사회적 문제시 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 이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압적으로 책이라도 읽힐 속셈인가. 인생의 선배된 입장에서 독서의 유익함을 위해서 강압적이 프로세스라도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다면 방법이 있긴하다. 대개의 독서습관은 '환경'에 좌지우지되니까 그런 습관을 들여주기 위해서라면 본인이 책을 많이 읽는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 자식들과 책을 읽고 차를 마시고 서로 대화하고 독서하고 글을 쓰고 읽어주고 하면 된다. 그게 재미있다면 성공할 것이다. 그러나 그게 고통스럽다면 자기도 고통스러운걸 왜 후대에 기대하는 걸까. 자기는 책하나 집어들지 못하면서 자식들에게 '책을 읽어야 한다'고 윽박지르는건 너무 웃기지 않은가. 대대로 고통을 물려주는 꼴이다. 결국, 세상의 기발한 콘텐츠 못지 않게 '책읽기'가 재밌다는 사실들을 깨닫게 되는 어떤 환경에 답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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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illa Essay2014. 2. 2. 23:35

경쟁의 시대에서 난관을 헤쳐나갈 전략적인 도식과 수식들의 틈바구니에서 경영사가들이 찾아낸 또 하나의 전가의 보도가 있었다고 보이는데 그게 바로 요즘 들먹이는 '인문학'이다. 여타의 어려운 상황들이 카운터처럼 양 뺨따구를 사정없이 후려치고 복부에 커다랗고도 묵직한 한방을 맞아 그로기상태에 빠져버린 유명 기업들 조차도 '우리에겐 인문학을 기본으로 한 경영철학이 없었다'라고 토로할 정도니까 이젠 인문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대세에 뒤떨어진 무엇이 되고 마는 느낌이 되버렸다. 


마르크스가 인간이 드러나는 결정적인 면모는 계급이니어쩌고 했을때에도, 그리고 헤겔이 노동을 언급했을 때에도 사람들이 자아중심주의적 사고에서 '구조주의'적인 사조로 가고 있는 줄 눈치채지 못했 듯, 인문학이란 것도 대개는 두부모를 자르듯 그렇게 구획하시키고 절단낸 다음 조각 케이크처럼 여기 인문학 두접시요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떤 점에서 보자면 대중이 보기좋아하고 두루두루 인용해야하며 적당하고도 적확한 예제가 되어줄 수 있는 그럴듯한 장르 카테고리라면 모를까.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상당수는 '읽는 것'자체에 재미를 느끼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수많은 지식들의 파편들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독서가들의 만족도는 내용 그 자체의 활용을 최종목적으로 여기지않고 뜻밖에도 자신들이 읽는 행위에만 그저 의미를 두고 만족해한다는 이야기, 그 틈에서 읽어지는 컨텐츠들에 대한 무의식적인 '의미부여' 소리없이 난무하는 느낌이다. 인문학이란 이런 의미부여라는 스티커를 이곳저곳에 붙이기 딱 좋은 대상이다. 사람은 역사, 문화, 교양, 신화, 문학 등등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며 어떠한 산출물도 이 카테고리를 벗어나기 어려운데도 마치 오늘날 이 인문학을 세상사람들이 잊고 살았다며 힐난하고 부족한 점은 인문학이었다고 지적들을 해대는건 좀 이상하지 않은가. 마치 이제껏 관심조차 같지 않고 읽기에만 몰두하던 독서가들조차도 '자신들이 읽었던' 뭔가에 대해 의미를 과하게 부여하려고 한다. 읽은 노력에 대한 사회적 인정같은 걸 원하는 걸까.


이 사기꾼들을 어떡하지 싶다가도 서가에 꽂혀있는 인문학에 대한 책들을 슬쩍슬쩍 보면 취지가 뭔지는 알듯 해서 약간은 좀 씁쓸하고 또 한편으론 뭐 이렇게라도 다방면에 관심을 가져준다면 좋은 거지라고 억지 추임새를 짓고 말았다. 먹고 살기 바쁜 수많은 샐러리맨들과 생계와 평안을 위해서 불철주야 고민하는 현대인들에게 '원전 책을 숙독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뭔가 깨달음을 얻고 머리에 차곡차곡 정리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일전에 2013년 한 해동안 600권의 책을 읽은 '독서가'의 블로그 댓글을 본적이 있었는데 각 책마다 5줄의 요약과 더불어 별점까지 매긴 그 포스트를 보며 이 분께서는 이 책들을 다 정독하면서 저자의 진의도 다 이해하며 내밀함을 샅샅히 분해라도 하셨던 걸까라고 시기심어린 의구심을 가졌었다. 


그렇게 책을 좋아하고 일상에서 페이퍼를 놓기 싫어하는 사람이 일반적이라면 서가의 인문학 서적들이 그렇게 팔릴리가 없었을 것이다. 인문학으로 유명한 저자는 수없이 많은 철학책을 독파하면서도 오히려 나이가들어 읽었던 책은 '고전문학'이었다고 거기에서 진정한 철학적 진면목과 삶에서 우러나오는 통찰력을 발견했다고 말했던 고백을 기억한다. 어떤 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깨달음을 얻는 그 대상의 다양성은 한두가지의 길은 결코 아님에도 유독 다이제스트식의 요약본이나 정리된 해설서에 의존하는 경향들이 짙다. 시간부족에다가 리소스의 한계를 보자면 '요약본'이라도 집어들어야 하는건 상식인데 왜 우리는 요약본 없이는 중요한 개념과 이데올로기와 역사와 문화를 비타민처럼 흡수하지 못하는가라는 궁금증이 든다.


이거 이런 식이면 시중에 나와있는 인문학의 지식들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여야 하고 그렇게 한다고 가정했을때 우리가 가지는 지식들의 편린들을 모아보면 어마어마하다. 철학의 흐름들과 역사의 대소사들, 그리고 중국고전들의 고어향연, 그리고 신화들의 숨겨진의미, 문학소설들에서 슬쩍슬쩍 들어나는 인간본성의 탐구, 그리고 문학적 감수성이 뭍어나는 문장들의 기묘하고 찬탄할만한 묘사들, 이게 왜 다이제스트로 친절하게 떠먹여야 '인문학'적 사고의 궁극적 완성이 되는 건지 아직까지도 헷갈린다. 왜 사람들은 제대로된 오리지널 원전같은 걸 읽지도 않으면서 해설서를 읽어서 그 사조와 경향을 이해해야 세상을 사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때가 되면 사람들은 여태 자신들이 알아왔던 지식의 두께가 빈약함을 깨닫는다고 한다. 그리고 나면 이 허기진 지적탐구의 본성이 허영으로 변질되고 그틈에서 그 허영을 채워줄 또 하나의 나열시 책읽기가 등장한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여태 인문학 외적인 삶을 결코 세상사람들이 살지도 않았는데도 갑자기 인문학이 모든 세상사의 기본이 된다라고 믿는 이 트렌드에는 약간의 뻥끼가 있는 것이다. 진작에 삼국시대와 조선시대 500년을 이미 알고 있고 그 틈에서 유럽사와 각종 철학들과 생물학적 지식, 사회, 도덕을 비롯한 수많은 상식들의 틈에서 살아왔는데 특별나게 당신이 미술사의 중대한 시기를 이해하고 르네상스 이면의 사회조짐의 큰 의미를 이해해서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다만 이런 건 세상사에서 조그만한 예시가 역사에 존재했을지도 모른다는 궁금증과 순수한 지식의 탐구욕에서는 가능한 이야기들이 될 수도 있다. 


왜 억지로 인문학 관련서적을 읽어야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인문학은 천편일률적으로 다 독후감들이 되어서 저자의 가이드처럼 찍혀져 나와야 하는건지도 이상하다. 그저 어느날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산티아고의 풍경이 떠올라 짐을 꾸려 떠나 현지에서 보고 이런게 내가 상상했던 그런거구나라고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던 내 지인의 경험만도 못한 책읽기들이다. 우리가 집어드는 인문학 서적들에는 수없이 많은 '식당메뉴'들이 등장한다. 각자가 입맛에 맞는 메뉴를 고르긴 골라야 하는데 이게 뭔지 알수도 없으니 옆에 붙어있는 간략한 설명을 읽어보고 그런가보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서 난 이 레퍼런스를 참조했으니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해서 일단 먹어본다. 


먹고나서도 영 찜찜하다. 먹긴 먹었는데 이게 뭔지는 아직도 모르겠고, 나랑 별 관계도 없는 것 같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무 비싸다. 내 노력도 들어가고 내 시간도 들어가고 대체비용은 뭔가 명확하지 않은 애매한 경험담외에 별로 없는 것 같다. 요즘의 인문학이란 대개 이런 것들이다. 상식을 많이 알아야해서 언론사 시험을 대비하기 위해서 Q&A 문답집을 외우는 것과 뭐가 다를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중요한건 이런게 뭐 나쁘다는 게 아니고 다 해볼만한 일이고 나름 의미있 일이란 것을 부인하는게 아니다. 문제는 이렇게 해서 우리가 어떤 포장지를 다 외었다고 하면 그게 무슨 경쟁력에 도움이 된단 것일까. 그게 무슨 세상을 살아가는데 큰 통찰력을 준단 걸까. 


혹시, 다들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까.

책을 읽고 책에서 인용된 책들을 한번씨 다 읽어보라는 취지였다고....

것도 아니라면 바쁘니까 대신 요약해준거라고...


그렇게 해서 읽어 뭔가를 알게된 인문학의 대가들은 또 어떤 형태의 크리에이티브를 상징하게 되는가.

생각할수록 시대와 계절이 만들어낸 뽕끼다분한 허세와 허영기가 짙에 드리워져 있다. 인문학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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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illa Essay2013. 12. 4. 14:40




어느날부터인가 나이를 먹더니 불빛, 그림, 그리고 나무, 숲, 이딴 배경들에 묘한 로망을 느끼곤 한다. 무턱대고 모든 경치에 와 하면서 감탄하는건 아니고 그저 예전 기억과 추억에 기대어 몇몇 장면과 흡사한 광경을 만날 때마다 잠시동안 모든 걸 멈추고 풍경을 지긋이 바라보곤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동네 거리에 대한 로망이 있는데 그건 어린시절 학창시절 즐겨다녔던 도서관의 향기, 그리고 길거리. 가로등 아래 부어지는 오렌지색 커튼같은 불빛에 닿아있던 아스팔트. 하늘에는 별빛이 가득하고 (요즘 이런 하늘 보기도 꽤 어렵다면 어렵다.) 달은 엷은 미소와도 같은 샐쭉한 맵시를 뽐내며 덩그러니 걸려있었던 어느 저녁의 풍경. 그런게 가끔 그립곤 한다. 


요즘의 거리와 내 배경들은 온전히 걸작같은게 되기에는 수준미달이시다. 쓸쓸하고 차가우며 뭔가 구성요소들도 불균형적이어서 이 세상의 균열에서 살다가 언젠가는 반드시 이 곳에서, 이 근처에서 세계의 멸망을 볼지도 몰라라고 속으로 중얼거린 적도 있었다. 예전의 그 배경에서 살고 있다고 믿었던 나의 믿음에는 뭔가 결격 사유가 있었던지 아니면 나의 그림책은 이제그만 <끝>을 만났던지 아무튼 더이상의 좋은 배경그림이 내 뒤에 그려져있지 않다고 느끼곤 한다.  적어도 예전 그 시절에는 동네 겨울밤거리조차도 차갑다고 생각지 못했었고 그윽한 솜털처럼 가볍고 버터향보다도 짙게 스며든다고... 불가항력의 향취를 마파람처럼 맞아가며 미소를 지었드랬는데.....


몇년 전, 일본의 도쿄에서 한달넘게 있으면서 이거리 저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예전의 풍경을 만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동경은 아직 그 시절에서 멈춰선 느낌이어서 하이테크놀로지와 사회이슈에 떠밀려서 거리를 레고처럼 부수지도 않았고 정체에 대한 두려움때문에 무엇이든지 들어엎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어디에도 걸려있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게 의도적이었다고는 생각치 않는다. 어쩌다보니 변화보단 안주를.... 그리고 편리함에 대한 굳이 의심을 품기엔 기회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일본은 ..도쿄는 그 자리에 멈춰섰나보다라고 예상도 되니까..어쨌든 도쿄에서 난 90년대의 향취를 보곤 하는데 아직도 선진국이랍시고 정리정돈을 애써해보지만 모서리에 묻어나는 세월의 찌든때까지 없애지는 못해서 그대로 보면 하드 웨더링된 예술작품들을 길거리에서 대면했다고 믿고 있었다.  


젠장. 이건 내가 그때봤던 그 배경이었어. 그런 정경이 여기에 있었던건가. 속으로 감탄하면서 지면에서부터 하늘까지 파노라마처럼 시선을 옮기며 풍경을 의지의 접착체로 이어붙여 기억하려고 애쓰고 애썼다. 이런 풍경은 어디를 가도 힘들거야라고 외치면서 말이다. 스맛폰이 더 대중적으로 일찍등장했다면 페북과 트윗들에 이런 스틸들을 옮겨가며 친구들과 열광했을 것인데.. 그러나 그땐 귀찮게 사진을 찍어봐야 퀄리티를 보장하기도 힘든 조악한 사진파일들에 불과했고 그렇다고 디지탈 해머와도 같은 거대 DSLR을 짋어지고 거리를 걸을 만큼 멋대가리없게 살고 싶지도 않아서 모든 풍경과 배경은 오로지 머리속 깊은 스토리지라고 믿어의심치않는 '기억력'에 의존했다. 


이제는 도쿄 조차 가기 어렵게되었다. 그 한여름의 찌는 듯한 더위속 눅눅한 공기조차 들이키기힘들만큼 오염되었을까봐 이제 근처에도 얼씬 못하지만 로망은 남아있다. 아직도 이이다바시와 스이도바시 중간 어디즈음 뒷골목에 매여있던 자전거와 나란히 서있는 줄서있었던 토마토 화분들..맨션의 베란다에서 나쁘끼던 빨래들. 그리고 짙은 도쿄 특유의 향기. 오차노미즈 수로에서 은근히 전해오는 세월의 이끼들, 즐비했던 고서점들 주변에서 빈티지의 부스러기가 공중에 먼지처럼 떠돌곤 했다고 지금도 믿는다. 이젠 그런 거리를 어떻게 만나지라고 생각하면 아쉽기 짝이 없다. 그래서 응답하라1994의 그 스틸들이 반가웠나보다. 캠퍼스까지 가지 않았어도 그리웠을 미장센들에 감정까지 담은 듯해서...두고 보면 이건 로망이긴 하지만 때론 주접 궁상이란 생각도 편편히 들어서 후다닥 생각을 줏어담고 현실로 돌아오는 나를 보곤 한다. 나도 이즈음되면 어린 나이가 아니란 소리겠지. 남들시선까지 생각하며 살다니..언제부터 그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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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illa Essay2013. 11. 30. 09:27

맨스필드<가든파티>를 읽고 토마스만의 <트리스탄>, 그리고 조이스<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읽었다. 조지프 콘래드<어둠의 심연>도 괴이한 패턴으로 읽혀버렸고 이제는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동안의 고독>을 읽을 차례가 되었다. 늘상 생각하지만 이게 무슨 유행도 다 지나버린 미친듯이 괴이한 취향때문에 읽고 그러는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번 즘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의 표현대로 '이런 걸 요새 누가 읽는다고' 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이런걸 누가 읽어라니...내가 읽지..피식피식 웃음이 나는데 그렇다고 이런 책들을 읽어야 뭔가 마음속에서 빈 공허함이 채워지고 허무한 공복감에 한 줌의 포만감이라도 줄수 있다는 건 결코 아니다. 그런건 애초 부터 없다. 


그냥 책을 읽으면서 이것저것 생각하기 좋아서다. 읽으면서 스쳐지나가는 쓸데없는 생각들. 평소에 생각치 못했던 오래되고 녹슨 회로들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생소하면서도 짜증날것 같은 미지의 영역에 와 있는 듯 해서지..읽어서 내마음의 양식 어쩌고저쩌고 하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한대 때려줄만큼 짜증이 솟아오르곤 한다. 난 책을 읽어도 마음의 양식, 인문의 소양같은게 레고마냥 탁탁 조립되어서 레벨없되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그러걸 기대한 것도 아니고 그런데도 사람들은 유틸리티 어플 다루듯 책도 읽나보다. 이걸 읽어서 내 이쪽 지식의 레벨을 업글해야겠다라고 그리고 나서 이쪽도 관심을 가져서 사람들과의 지적경쟁에서 뒤지지 말아야지 그러나보다. 


다 귀찮은 일이다. 읽은 것을 가지고 키재기를 하자는 것들. 어쩌면 굉장히 위험하면서도 해악스러운 풍토 아닌가. 게다가 이런 허영이 잘못 길을 들어서는 날에는 알수 없는 기괴한 자기오만과 합리주의에 빠져가지고 남들이 어떤걸 주장하는 꼴을 보기 힘들어한다. 난 진리를 탐구하고 정의가 무엇인지 안다고 말하지만 그게 진리인지 정의인지는 그 당사자의 관점에서는 아주 흐릿할 뿐이다. 선명한 스틸컷은 오로지 주변 이웃들에 의해서 판가름 난다. 대중들과 괴리적인 시선과 취향을 가졌다고 특별하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냥 괴팍한거고 보통 재수없는 부류들일 뿐이다. 뭔가 특별하고 뭔가 남다르고 자기만의 길을 간다고 해서 개성적이고 자기정체성 분명한 인간이라고 자위할 필요도 없다. 솔로몬 조차도 자기가 뭘 하는지 몰랐는데 


어느날인가 친구놈이 와서 스티븐 디덜러스에 대해서 몇마디 말을 했다. 맞다 조이스의 그 디덜러스. 애늙은이처럼 초장부터 사색의 늪에 빠져서 세상을 통달한 것처럼 지면을 관통했던 <젊은 예술가의 초상>속 그 인물 말이다. 그리고 친구놈이 그랬다. 자기 여친이 그 디덜러스를 꽤 좋아한다고 그래서 자기도 하루밤새 그 책을 다 읽었단 이야기다. 재수없지 않아. 디덜러스. 누가 그 나이에 그딴 생각들을 하고 살아 놀게 얼마나 많고 친구들도 많은데 누가 그딴 사색들을 하고 사냐 말이야 .  재수없지 나도 한동안 그놈만큼 재수없는 놈을 본 적이 없을 정도야 그러고도 젠채 하는 그 분위기만 봐도 토가 나올거 같을 때도 있었지 하지만 그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슬쩍 달 이야기를 해주면서 그 있잖아 그렇게 내려다보기 싫어서 그렇게 창백해진거 아니냐는 뭐 그런 폼재는 구절정도 읇조려주면서 난 이해한다는 뉘앙스를 흘려줘 





확실히 디덜러스는 재수없었다. 퀴퀘그가 더 솔직한 거지. 그렇게 보자면 와타나베는 머저리에다가 마음의 병이 있는 우울증환자고 나오코는 진작에 치료받았어야 하는 중증환자고 그런거지 호밀밭의 걔도 정상적이진 않았다. 세상의 수많은 부류가 있다지만 적어도 문학속에 나오는 인간들이 이렇게 탈대중적이란건 어쩌면 작가들이 자기분열을 하되 어떤 비대중적 일면만을 노리고 사람들이 간접체험이라도 해보슈라고 적어대는 일종의 인생극장같은게 아닐까. 그렇게 살았다면 그렇게 삶의 한순간하나하나 의미와 치열한 감성의 회오리속에서 밥쳐먹고 쓸데없는 공상따위를 하는 일을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대소사가 있어서 다들 그런 본능들을 숨기고 사는건가 싶었다. 


그러다보니 요즘 유행적이지 않은 책을 읽으면서 행여 친구들이 한마디하던게 두마디가 될거 같아서 게름직하다. 야 넌 그게 재밌냐 요즘 이런걸 누가 읽는다고 ...혹시 닉혼비가 말했던 그럴듯한 곳에서 지적허세질이나 하기 좋은 그런책들만 골라 읽는 머저리들의 틈에 끼인거 아니냐고 묻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한번 골똘이 생각해봤는데 그건 아닌거 같다. 난 적어도 어디가서 책 이야기는 잘 안하는편이고 누구한테도 책을 빌려주거나 하지도 않고 주절대는건 오로지 여기 이 블로그 뿐이다. 블로그에 있을땐 내가 누구인지 아는 인간들도 없는데다가 나는 책을 덮으면 농담따먹기나 하는 평범한 수다쟁이 일뿐이다. 


다만 읽는건 그저 읽는 과정에서 느껴지는 뭔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생각해보고 경험하지 못했던 본질적인 뭔가를 줏어먹는 느낌으로 읽을 뿐이다. 인생을 짧은데 욕심은 많아서...그러다가 재미없어지면 책이고 뭐고 다 집어치워 버릴 작정이다. 그러보면 난 책을 사랑하는 인간은 결코 될 수 없겠다.  그냥 자기방향성 없이 읽는 무책임하고 비효율적인 독서쟁이 일 뿐이지 근데 요즘책도 몇개 집어 읽어봤는데 재미가 별로 없다. 누가 추천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밤과 새벽과 아침의 눅눅함이 점점 그 영역을 확장해오는 이런 어둠의 계절에서는 '재미'가 보장되지 않는 어떤 책을 읽는다는건 정말 쓸데 없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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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illa Essay2013. 11. 24. 10:38

피천득의 '인연'을 기억한다. 교과서에도 실려있었던 아주 고리짝시절의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이 소설의 목적이 뭔지 감도 잡지 못했드랬다. 고딕하게 박혀있는 '인연'의 레터적 해석은 죄다 피상적이고 유행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될 뿐 이면에 가라앉아있는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생각해보면 그 나이의 내가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흔한 연애의 아스라한 기억도 없이 그저 순정만화의 한 페이지를 떠올리며 눈꼬리를 내리고 배시시 웃는 정도의 설레임까지가 최선이었으리라. 


"그리워하는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 


어쨋든 아사코와 대면했던 피천득씨의 엔딩이 꽤 인상깊었다. 소설의 인과응보, 그리고 밝은 엔딩이 세상의 진리라고 믿었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남겨져 각진 기억의 모서리를 다듬고 기어코 아름다운 무엇이 되어 은은히 빛나던 과거라는 건 보통 소중하니까..아무리 추억이라고는 해도 연애감정들의 통념을 뒤집는 듯한 체념적 뉘앙스는 왠지 서글펐던 것이다.  결국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도 연애를 하고 이별을 하고 그러면서 이런 '인연'의 고리가 세상을 사는 만고불변의 진리 중 하나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초속 5센티미터토노 타카키시노하라 아카리를 오래 전 놓치고 성인이 되고 나서도 잊지 못하고 괴로워했고, (결국 그들은 스쳐지나듯 해후하고도 각자의 길을 간다.) 유년을 두근거리게했던 캔디테리우스의 사랑을 받아들이면서도 결국 자신을 위해 희생한 스잔나를 선택했다. 나는 어린 시절 사랑하면서도 헤어진다는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이 짝사랑이든, 엇갈린 사랑이든 어쩌면 다 성장의 한 과정이라고 억지로 이해하면 살았겟지 우선은 시간이 약일테고 새로운 사랑과 시간의 무게에 짓눌려서 추억이란건 다 압착되버릴거다 그즈음 되면 지금은 괴로울 지라도 그 감정들도 빛이 바랠테니......라고 미친놈처럼 중얼거리며 시절을 관통했다. 지금은 2013년이지만 응답하라1994를 보다가 그만 압착되어서 다시 들추지 못하게 만들어놓은 추억의 틈새로 삐쳐나온 편린을 보게 된다. 아...그리고 슬쩍 그 조각을 다시 밀어넣고 살아야 한다는 걸 알게도 된다. 미소로 지나갈수있는 정도의 나이가 된 듯 싶다. 응답하라 1997에서는 빗겨간 시대적 돋보기땜에 한켠에 비켜서서 관조적으로 봤었는데 고작 3년 당겼다고 내 시절의 이야기가 되다니...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특히 여자들의 경우 나정이의 남편이 쓰레기이길 기대한다고 한다. 쓰레기정도면 내러티브로 보면 최강스토리 라인급이니까 이게 비약이거나 말도 안되거나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나조차도 나정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건 쓰레기라고 믿는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세상에는 무수한 인연들이 있고 그 인연들의 카테고리가 너무 찰나적이어서 그 사람의 한 인생에 어떻게 고리가 걸릴지 알수 없다는 깨달음이 점점 늘어만 갔다. 그래서 문득 이 드라마가 굉장히 현실밀착적이라면 '러브액츄얼리'식의 당연한 기대가 해피엔딩이라는 결론말고도 다른 결론이 이입될수 있다고 상상한다. 나정이는 쓰레기에게 향해있지만 칠봉이가 자기를 좋아하는 것도 알고 있고 쓰레기도 이 상황을 이해하고 있게 되었다. 


칠봉이는 현실로보면 야구선수같지 않고 투수를 포기한 것 같은 느낌이 오늘 들어버렸고 나정이는 1994에 삼풍백화점에 두고온 칠봉이를 향해 뛰어가는 것 같다. 울면서... 드라마 시나리오를 잘쓴다는 건 이런걸 두고 하는 말이겠지. 그게 삼각관계를 미묘하게 이끌어서가 아니라 피천득의 '인연'을 이해하는 듯한 시선, 그러니까 당연한 사랑의 이야기들과 오고가는 감정의 시선들을 독자들이 알지만 인연이라는 우연을 통해서 삶이 다르게도 갈 수 있음을...쓰레기가 아니라 칠봉이고, 혹시 칠봉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나정이의 남편이 되더라도 나는 이해할 수 있다. 대중들의 인기를 먹고사는 드라마니까 그저 우리는 대리만족을 하고 있는거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칠봉이였던 적이 있었고 쓰레기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해태가 되어서 나정이의 그런 고민을 들어주었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놀라운건 이건 드라마일뿐인데, 과거와 추억을 매개로한 노림수 확연한 드라마일뿐인데도 울컥하게 된는거다. 눅눅히 미소지으며 시청할 뿐 깊숙이 끌려들어가지는 않았는데 예고편에서 그렁그렁한 나정이의 눈물을 보니 다음회는 그냥 건너쳐가야 하겠다고 읇조리고 있었다.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하니까 그리고 그 심정이 되어봤으니까..그러고 보면 드라마같은 일들이 정도의 차이일뿐 사람들의 기억에 많이 잔존하는 것 같다. 온통 내이야기처럼 느껴진다는 착각이 난무하는 걸보면 웃음도 나오고...하물며 피천득의 인연을 슬쩍 펼치다가도 2013년에 다 모여서 헤어지지 않고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는 응답하라 1994의 신촌하숙집 사람들이라니...아니만났어야 좋았을 그런 지경까지는 다들 가지 않은 거잖아 라고 쾌활해졌다. 



그래도 아니만났어야 좋았다는 그 구절을 이해한다. 

해후가 없었어도 좋을 기억은 추억만으로도 족하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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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illa Essay2013. 11. 23. 11:37

책을 제때 제때 사서 읽어야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늘 형편과 상황이 그렇게 딱 좋게 전개되는게 아닌지라 구매하고 싶은 책이 떡 하니 눈앞에 진열되어도 그저 몇 장 읽다가 주머니 사정을 떠올리고 뒤돌아선 적이 한 두번이 아닌게 문제지... 책이란 원래 읽고 싶을 때 구매하지 않으면 그 마음가짐이 변해버려서.. 안 떠올리면 안사고, 안 사면 서서히 잊게 된다. 그러다가 온갖 지명도로부터 그 컬러가 희미해질 무렵, 책 스스로가 '이젠 나를 안찾는군' 이라고 힘없이 중얼거리고, 가출하듯 잠적한다. 그야말로 이건 완전한 잠수이자 세상과의 매몰찬 단절인 것이다. 이런 일이 발생하기 전에 어떻게든 생각난 책은 근시일내에 수중에 품어야 한다는 절박함같은 게 생긴다. 나중에 후회하기는 너무 싫으니까..물론 구매하지 않고 자꾸 미루어둬도 계속해서 마음속 한구석에서 '빨리 나를 읽어줘'라고 종용하는 책이 있긴하다. 이런 경우엔 이런 끊임없는 외침에 굴복하듯 결국 어떻게든 나중에 책장에 가서 꽂히게 되지만,  대개의 경우엔 '언젠가는 읽어주리라'는 모호한 다짐의 게으름속에서 하염없는 위시리스트로 떠돌 뿐이다. 더우기 그때 주머니 사정이 안좋을수록 그 책이 가지는 경제적 지위는 너무나 우월해서 결국 '자본주의의 폐혜'와 어떤식으로든 관련이 있을거라는 말도 안되는 핑계도 댄다. 


그럼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다. 체계적으로 차곡차곡 계획하에 정기적으로 구입하면 될 거 아니냐고...경제적인 스케줄, 그리고 적절한 분배...뭐 다 좋은 이야기다. 하지만 책 구매란 적어도 나에겐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불현듯 나타나는 로맨스와도 비슷하다. 우연의 고리에서 어느날 문득 다가오는 충동적인 독서욕구는 랜덤에 가깝고 운명적인 만남스럽다. 스케줄 따위는 다 무용지물이고 쓸데없는 '사서고생'쪽에 가까워지곤 했드랬다. 야심차게 준비해도 정작 구매 직전에 가게 되면 마음이 바뀌고 그 책도 온데간데 없고..그러다보면 계획이란건 좀 더 즉각적이어야 했음을 깨닫고..뭐....그러는 편이다. 계획목록에 넣어야 하는 책들도 너무 수시로 자주 바뀐다. 


책이란 읽고 싶을 때 읽어야 하는 법, 따라서 그날 필을 받은 책이 있다면 위시리스트의 상단부는 그런 책들도 다 물갈이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 책을 읽다가 불현듯 레이먼드 카버를 읽고, 트루먼 커포티를 읽었다가 업다이크를 읽는다. 디킨즈의 무게감이 그리워 그리고 기어갔다가  브론테 자매의 드라마를 몰아 시청하듯 읽고, 동종의 제인 오스틴 작을 두루두루 읽어본 다음 맬빌의 다큐, 모비딕 이야기로 빠진다. 아르투로 페레즈에서 뒤마클럽, 그리고 삼총사로 갔다가 사바티니를 뒤져서 기어코 스카라무슈와 캡틴블러드, 그러다가 갑자기 환상문학의 로저 젤라즈니에다가 홈즈시리즈, 러브크래프트에다가 뭐...줄줄이 이런식으로 상대를 바꿔가며 애정행각을 벌인다. 어장관리하듯 로맨스의 대상이 하루아침에 휙휙 바뀐다. 이 우연을 가장한 피치못할 욕구들은 언제나 번개처럼 다가오고 식전과 식후다르듯 소리없이 소멸된다. 문제는 대면했을때의 욕구가 너무 강한 나머지 잠시동안의 참을성도 마비되는 거다.  


이유는 단 하나. 이 순간의 충동적인 감정으로 이 책을 읽지 않으면...다음기회에는 이런 느낌으로 이 책을 못 읽을 것만 같은 불안감 때문이다. 이를테면 책을 처음 접하고 책장을 넘겨서 진득한 독서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한 마음가짐의 밀도, 그리고 흠뻑 취해버리는 중독 예상의 수치, 끝까지 달려가겠다는 체력적인 부분까지도 완전히 첫번째의 욕망이, 느낌이 다 컨트롤한다. 이 본능이 발동이 걸릴 때 읽는 책들은 몰입의 최강단계를 경험하게 해주고 당위적이거나 잡념이 끼어들어올 틈을 주지 않은 채 새벽녘의 밤하늘을 가로지를만큼 광활한 쾌속질주의 리딩으로 이끈다. 그래서 때가 이르렀을때 책을 집어들고 읽어야 하는 것이다. 유일한 장애물은 간만에 그런 미지의 조우가 이뤄진다고 해도..정신차려보니  그 대상이 이 세상에서 몸을 감춰버렸다는 걸 알게 될 때다. 


난 컬렉터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리고 유행을 따라 출렁이는 뭔가가 되는 것도 별로다. 그냥 한여름 담쟁이 담벼락 위에서 소용돌이 사탕을 빨면서 세상의 7월을 눈감고 느끼는 그저 유치한 독서쟁이가 되고 싶을 뿐이다. 한마디도 제멋대로 읽고 싶을 때 읽을 수 있는 계절이 그리울 뿐이다.  그런데도 그런 계절이 와도, 연인이 문앞에 '지금은 외출중'이라는 문패같은 알림판을 남겨놓은 채 행방불명이라면 그 기분이 어떨까. 때가 와도 모든 것이 완벽해도 정작 제일 중요한 무언가가 없을 때, 과거의 실책과 후회를 들먹이며 자책한다. 책도 그렇다 .책의 유명세와 이름은 인터넷을 주유하는데 실제 하지 않는다니...다들 은퇴하듯 세상에서 책들도 시장에서 다 도망가셨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재고 00 권' 만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이다. 


1900년대까지 가지 않더라도 2000년대 초반 출판 서적들 조차 절판이나 품절의 딱지를 붙이고 아주 미스테리의 심연으로 사라져주시다니..아니 세상에 태어나서 읽고 싶은 책을 읽는데도 이렇게 힘들어야 하다니.. 도대체 이 책들은 왜 일찍 세상을 달리한 요절 천재의 모습을 한 채 사라져주신걸까. 출판사가 돈이 떨어져서 도저히 출판을 할 능력이 못되거나 원 저작자와의 계약만료로 이젠 갱신할 비용이 없어 관두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수요가 너무 지지부진해서 출판할 명분이 안되거나 ...뭐 이러저런한 이유일 것이다. 이유가 어찌됐든 책은 없고 검색은 된다. 검색은 되는데 어디에도 '지금 주문'은 비활성이다. 바야흐로 '절판'의 계절이다. 


얼마 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보려고 뒤적거리다가 알게 되었는데 생각의 나무에서 내놓은 양장판 율리시스가 절판된 걸 알게되었다. 그때 사뒀어야 하는건데..미적거리다가 이럴줄 알았어라고 혼자 되뇌이고 있었다.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도 그랬지만 이언 매큐언의 '암스테르담'도 이에 못지 않았다. 이 책이 수상작이던 뭐던 간에 일단 손이 가서 몇 장 넘겨보고 괜찮다싶으면 사뒀어야 한다. 지금은 구하기도 어렵고 아무리 욕구가 승천해도 이걸 몇 배씩 주고 사고 싶은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왠지 책가격을 가지고 장난을 치는 분위기가 싫어서일수도 있고 이 정도의 책이라면 언젠가는 다시 재출간해주리라 믿기 때문이기도 하다. 근본적으로는 책이 언젠가는 나올수 있다는 쪽에는 긍정적이지만 처음 채을 구매하지 못했던 상황에 대해서 끊이없이 후회하는 쪽이라 더 미련스럽다.


길을 가다가 문득 든 생각인데 어쩌면 없는 살림에 쪼개서 몇 권 구매한 내 책장의 책들을 오히려 더 감칠맛 나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뭐 경제적 쪼들림이 '책을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에너지드링크라도 부은 걸까. 정신은 선명해지고 집중도는 올라가니...그나저나 절판 서적들은 요청이 있을시에 다시 내주었으면 한다. 미련스러운 그 바램들이 다시 희미해져서 아예 기억조차 나지 않게 되면 다시 기억하게 될 우연의 시기는 적어도 몇 십년 후가 될 수도 있으니까..그때 다시 회한을 품는건 정말 미련하기 짝이 없게 된다. 청춘을 그리워하는 노년의 쓸쓸함에 견줄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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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illa Essay2013. 11. 4. 11:41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 언쇼가 에드거 린턴의 청혼을 받아들이면서 히스클리프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드랬다. '히스클리프랑 결혼하게 되면 내가 왠지 천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야'라고..그리고 그걸 엿들은 히스클리프는 폭풍의 언덕을 떠나고 이후 다들 아시는 것처럼 대서사의 복수 무정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언쇼가문을 몰락시킨다. 


이렇게 스쳐지나가듯 내뱉은 말. 초점없는 눈빛으로 중얼거렸던 몇마디, 그리고 무심한 눈빛. 아무렇지도 않게 추측했던 결론들. 강인해지고 무시무시한 현실의 칼날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몇 겹 갑옷처럼 두르고 살아야 한다고 말들 하지만,  언제나 아픈 말들은 비수처럼 갑옷의 빈틈을 찾아 비집고 들어온다. 이 비수들은 사실 뜻밖의 사소함으로 부터 스노우볼처럼 커진다. 공교롭게도 가장 친한 사람으로 부터 그 크기가 비약적으로 커진다는게 아니러니할 뿐이다. 그렇다고 그런 아픔으로부터 성숙해진다는건 수많은 칼날이 비집고 들어오는 고통에 대해 무감각을 유지하는걸까. 칼이 쑥하고 들어오는데 '아 이거 별거아냐 며칠전에도 당했던 거야'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반응할 수 없는 것처럼 언제나 고통과 불운은 불가항력의 영역인 것이다.  


난 귀찮으면 모든 걸 피하고 싶은 그 게름직함을 안다. 난 현실이 힘들면 다른 것들은 배려도 할 수 없다는 그 느낌을 이해한다. 그리고 며칠만 굶으면 파렴치한 짓도 저지를 수 있음을 은근히 느낀다. 세상의 모든 불행이 벌어지지만 않는다면 천사처럼 살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없는 사랑과 애정과 따스한 시선을 기대하면서...늘 노력하지만 드라마속에서 나오는 꿋꿋한 캔디처럼 살아갈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소하게 시작된 이 자존심에 대한 폭압적인 전개들이 수습불가가 될 지언정 결코 다시 회수하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원래 시나리오는 이런게 아니었을테지. 지금은 힘들지만 이겨내고 행복을 쟁취하듯...그래서 자기에게 벌어진 상황이 일시적인거고 좀 더 버티면 빛이 비출거고 다시 좋아질거고 하는 그런 시나리오를 인생 가이드인것처럼 받아들이고 싶었을 거다.  그런데도 시간이 세월이 되는 동안 '히스클리프'처럼 헤어나오기 힘든 불행을 겪는다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블랙홀처럼 상황악화의 절대불명에 봉착하면 우리는 과연 이성적일수 있을까란 생각이 문득 든다. 


불운의 화살을 미처 피하지 못하고 맞은 상처받은 영혼들에게는 '왜 화살이 당신에게 가서 꽂혔을까요'라는 질문은 가혹하다. 나도 그 화살을 못피하겠지. 내가 후두둑 수십발을 맞게 되면 난 그제서야 이렇게 생각할거다. 억울하다고...아무런 이유도 없이 인생에서 이런 화살을 맞았노라고....그 사람이나 나나 별다를 바 없다. 불운이란 사람을 모두 이렇게 만든다. 어느 누가 괴이해서 특별해서 불운을 부르는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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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illa Essay2013. 10. 17. 17:36


펭귄 클래식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다가 '거울나라의 앨리스'까지 읽지 않으면 도저히 안되겠다는 막연하고도 충동적인 느낌때문에 서점을 뒤졌다. 문제는 '거울나라의 앨리스'가 절판의 경지에 다다렀다는 점이다. 교보에도 절판중이시고 (현재까지는..) 반디앤루니스에서도 약 2권 남짓만 남아있는 상태고 어느 서점에서도 유독 '거울나라의 앨리스'만 집착적으로 많이 팔려주셨다. 괴이하기도 하지만 어쩔수 없겠다싶어 발품을 팔고 종로타워지점까지 가서 북셀프로 '거울나라의 앨리스'을 질렀다. 속이 다 후련하지만 책을 이렇게 충동적으로 사가지고 온 적이 어디 한 두번도 아니고 매번 이럴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혼자 자책하는 시나리오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내 책장의 책들은 다 이런 식으로 구매된 랜덤과 무작위와 충동적인 감정의 산물들이었으니 숙명적으로 습관과의 평생 전쟁을 치룰 조짐들이라는....


언제나 충동적인건 아니지만 간혹 제대로 걸리는 날들이 있다.  지금도 이언매큐언의 '암스테르담' 그리고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 그리고 커트보네거트의 '타이탄의 미녀'같은 책들은 언제나 '충동구매'의 영역안에 산다. 서점 책장 어디 한 귀퉁이에 꽂혀있기라도 하다면 그야말로 심마니 산삼보듯 쾌재를 불러줄텐데 요즘 같은 시절에는 결코 벌어지지 않는 꿈같은 이야기다.  온라인에서 절판이라는 딱지가 붙어버린면 오프라인으로 구매하는 것도 힘들긴 매한가지니까.. 구하기가 어려워서 중고서적을 기웃거려도 보지만 예전 중급의 중고서적을 받아들었던 기억으로 볼 때 그 볼품없는 타인의 흔적때문에 실망한 적이 하도 많아서 별로 내키지도 않는다. 중고는 나름대로는 어느정도 대안이 될 수있지만 여전히 아니다싶은 구석도 많다. 책을 읽을때 나아닌 다른 사람의 자취를 대면한다는 건 그리 좋은 기분이 아니고.... 어찌됐든 서점을 오고가다 보면 충동적인 구매의 향연을 벌일 때가 있다. 일전에도 아르투르 페레즈 레베르테의 '뒤마클럽'을 봤는데 얼마전까지 절판으로 구하기가 어려워서 헤맸던 책이었다. 경제적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질러볼까하다가 그동안 저지른 충동의 통장내역이 한심스러워 눈물을 머금고 포기했던 적이 있었다.  


다자이 오사무 전집도 충동적으로 질렀고, 레이먼드 챈들러의 절판 작품들도 혈안이 되서 찾곤 했었다. 그리하여 현재 읽어제끼는 책들보다 읽어야할 책들이 책상에 쌓여간다. 키는 점점 높아져서 이윽고 모니터 높이를 넘어서고 그리고 책장의 두칸정도높이로 솟구쳐올라 굉장한 기세로 말한다. 도대체 언제 읽을거냐고...그래도 시간이 흘러 그 책들을 구하지 못하게 되는건 너무나도 쓰라리다. 일단 구해놓으면 언제고 읽게 되니까. 벌이가 한심스러워서 책구매에 돈지출을 매조지해버리지 않는 이상 이런 투자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곤 했다. 친구말마따나 내가 이런 책의 탑에서 한권씩 한권씩 읽어 해치워 나간다고 해서 내 소양이 배가되고 인문학적 통찰력이 레벨업 되고 그럴거라고 기대하진 않는다. 


뭐라고 할까. 식신로드 중 만나는 별미를 놓치기 어려운 매니아적, 취향적인 식탐과 유사할까. 뭐하여튼 그런 느낌이다. 그냥 책속의 내용을 탐닉하고 그 작가를 읽어야만 하는 운명적인 데자뷰 같은 것들. 그리고 단 몇줄의 문장만 덩그러니남아 노트귀퉁이에서 조용히 말할 때, 그저 읽어버린 책 이상의 아우라들이 있게 된다. 어쩌면 코난도일의 말이나 망구엘 할아버지 표현대로 글쓰기를 위한 굉장히 효율적인 보물창고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일부러 그럴듯하게 보이려고 퀼트처럼 명문을 갖다 붙이는 작위적인 의도는 꿈도 꾸지 않는다. 대개의 경우는 문장보단 감정이 남게되고 그런 감흥의 뒤에선 뭔가 스물거리는 삶의 묘미를 느낄 뿐이다. 아이러니하고 때론 우여곡절끝에 다다르는 간만의 정서적 안도감 정도면 그럴듯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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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illa Essay2013. 10. 14. 10:18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유년시절 이미 읽었는데도 최근 다시 읽게 되었다. 뭐 특별할 것 같은 이유는 딱히 없었지만 왠지 어렸을때의 앨리스가 지금의 앨리스와는 다르게 다가올 것 같은 막연한 느낌이거나 얼핏얼핏 스쳐지나가듯 보여지는 문장들틈에서 왠지 의미를 놓치고 앨리스를 듬성듬성 읽은게 아닐까하는 호기심같은 것이 있었다고 보는게 좋을 것 같다. 보르헤스의 미로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런 수수께기와 같은 문장들은 뭔가 숨겨진 함의를 품고 독자들을 끊임없이 사고하게 만들고 그 속에서 나름대로의 즐거움을 찾게 되니까..이런 접근방식이 아주 맥락없는 동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서문의 소개글에서 이런 접근이 '붉은 여왕'적 관점이란걸 알았지만 (반대로 무의미적 접근에서는 그리핀적 접근이라고 언급되어있다.) 때로는 세상살이가 날 이렇게 각박하고 딱딱하게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하는 고지식한 태도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참 피곤하게 살고 있는게 아닌가라며 한숨을 쉬게된다. 순수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수도 있고 아무렇지도 않은 농담한 자락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때엔 또 다른 형태의 질병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최근 고전읽기의 전체적인 분위기도 영향을 받았나보다. 난 완전히 붉은 여왕적 독서를 하는 셈이다. 


최근 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포함하여 생떽쥐베리의 <야간비행/남방우편기>, 멜빌의 <모비딕>,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개정판을 다시 읽고 있다. 이 모든 건 다 붉은 여왕의 눈동자가 내 눈에 이식된 탓이다. 과거는 현재가 되고 현재도 언젠가 과거가 되겠지만 매번 이 작품들의 의미가 다르게 다가온다. 이건 완연히 '피에르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처럼 되가고 있는게 아닌가.작품을 풍부하게 만드는건 저자가 아니라 독자라는.....이런 해석이 어제오늘일은 아닌데도 막상 읽었던 작품을 다시 읽으면서 새로운 감상에 사로잡히게 되면 '읽기'라는건 영원히 반복되는 뫼비우스고리가 된다.  


난 오늘도 이 뫼비우스의 고리를 따라 과거에 읽었던 책들을 현재로 포장한다. 이미 내용은 충분히 달라져있었고 스토리는 선택지의 가지수를 늘렸으며 주인공들은 다른 생각들을 한다. 분명히 10년전에는 옳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어리석고 무지하며 바보같은 결정을 내리고 있다. 이런 세월의 차이를 읽는다는 건 분명히 흥미진진하긴 하데 과거와 달라져버린 시선때문에 당혹스럽긴하다. 읽은 건지 안읽어도 될 만큼 달라져버린다면 절대적 읽기라는건 감히 꿈꾸기 어려운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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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illa Essay2013. 9. 3. 22:01

어느 유명한 작가가 서점에 가서 '디킨즈의 데이비드 코퍼필드'가 어디있냐고 물었다. (여기서 유명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다. )


점원왈 


'그게 누군데요' ......

'디킨즈요..데이비드 코퍼필드요' 

'그러니까 그게 누군데요'...... 

'헐..'


어차피 015B도 잊혀지고 김광석도 사라지고 유재하도 기억못할게 뻔하다. 하물며 샬롯 브론테나 제임스 조이스, 피츠제럴드 정도는 아마도 듣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할지도 모르지. 어쩌면 옛날 유년시절 다 떨어진 조악하고도 텁텁한 책더미에서 노을을 맞아가며 읽었던 마크 트웨인의 소설도 역시 같은 신세가 되겠지싶다. 


얼마 전 어머니가 전화로 오랜만에 추억하시며 옛날 일을 꺼내놓으셨다. 

예전 근교 주공아파트에 살 때, (정확히 701동 307호였다. 잊혀지지도 않는다.) 시에서 만든 도서관이 같이 건립되었드랬다. 그때 입주하면서 앞도 뒤도 논이었던 풍경이 다였던 그 아파트 부근을 쓸쓸히 걷다가  열지도 않은 도서관에 갔었던 걸 기억하냐고..(개관을 준비중이었던 도서관이었다.)


어머니는 그때 오픈도 안된 도서관에 나를 들여보내주려고 무던히 애를 쓰셨다. 그 사서에게 애 좀 들여보내주면 안되겠냐고 .... 그저 책을 읽게만 해달라고..그 사서분은 남자분이었는데 웃으면서 들어오라고 했었다.  그리고 내 키의 몇배나 컸었던 책장들의 나래비를 보면서 그 틈에서 스파이더맨처럼 장르를 옮겨다녔다. 그 해 여름방학을 그 숲에서 살았다. 책의 숲...말이다. 초딩 3학년때다. 


그 때 읽었던 책들 오랜 기억으로 남아 내 삶과 같이 간다.

묘한 기분이다.


최근 고전이든 문학이든 뭘 읽었다는 애들 본 적이 별로 없다. 

심드렁한 얼굴 보는게 더 고역이다. 

책좀 읽으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다. 




Posted by kew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