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BOOK/소설2013. 8. 28. 11:04


블레이크 애드워즈의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1961)을 본 건 어린시절이었는데 지금와 생각해보니 도대체 뭐가뭔지 알지도 못한 채 그냥 보았던 것 같다. 이건 다들 아시는 오드리 햅번(Audrey Hepburn) 때문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게 없다. 청순하고 깜찍하면서도 톡톡튀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홀리'에 이입되었을 때, 모두들 <로마의 휴일>의 앤이 좀더 세속적이고 거침없어졌구나라고 이해했었으니까. 관객들은 영화속에서 오드리 크로니클을 모니터링하는 마음가짐으로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로마의 휴일>(1953)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오드리가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에서 명예와 인기를 지속시키기 위해서 캐릭터를 유지하겠다고 선언했었어도 이상할 건 없다. 다만 <로마>나 <티파니>는 오드리를 담는 같은 성향의 그릇이었을까란 물음이 남긴한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계속 이야긴 하고 있지만, 사실 말하고 싶은건 영화가 꼭 트루먼 커포티의 <티파니>를  100% 반영했던 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로마의 휴일>의 앤은 결코 <티파니에서 아침을>(이하 티파니)의 홀리가 될 수 없었다. 이게 오드리였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도 있긴 하지만 가능했던 이유라면 '티파니'가 소설 원작과는 다른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다는데에도 이유가 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발리에서 생긴 일>의 하지원이 조인성과 소지섭 중 한명에게 고백하고 한명과는 친구먹고, 발리에서 셋이 나이트파티라도 하면서 소근소근 웃으며 엔딩이 되버린 것과 비슷하다.) 


뭐 굳이 새드엔딩이나 극적인 내러티브가 있어야만 그럴듯한 작품완성도가 유지되는 건 아니지만 '홀리'는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영혼이었고 '폴'이란 인물은 등장도 안했고 (그럼 소설의 화자가 '폴'이 아니라면 누구냐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소설 어디에도 화자가 홀리와 결혼해야겠다고 다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화자는 커포티의 감정이 깃든 CCTV 정도..게다가 커포티는 동성애성향의 뉘앙스를 너무 풍긴다.) 홀리는 행복했지지도 않았드랬다. 나도 홀리가 행복해지는데는 찬성이다. 소설속  인물이 불행을 향해 치닷는 걸 보면서 이게 제대로된 현실반영이야 이랬어야 해라고 위안따위를 하며 가식떨고 싶은 마음 추호도 없다. 결국 내가 어린 시절 보았던 영화 <티파니>의 그 꽉찬듯한 희망과 행복은 그저 꿈같은 연출의 산물이었으며 실제 원작에서의 홀리는 좀더 애처롭고 처연하며 쓸쓸하게 저벅저벅 스토리를 기어나가 풍문으로 엔딩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대로 했다간 1960년대 영화를 보고나서 다들 길거리에 침을 뱉거나 술병하나를 들고 '삐뚤어져버릴거야라고 우울해했을 것이다. 이걸 시대가 용납했을리가 없지 않나..


티파니에서 아침을 (양장)트루먼 카포티(Truman Cap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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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간히 섞인 황갈색 머리카락. 알비노처럼 하얀금발. 노란머리채가 아른거리고 여름에 가까운 따듯한 저녁에, 날씬하면서도 시원한 검은 드레스에 검은 샌들을 신었으며, 진주초커를 건 채 세련되게 마른몸매를 자랑하며 아침 식사용 시리얼처럼 건강하고 비누와 레몬처럼 청결한 분위기를 풍겼던 여인이 홀리였고 오드리였다. (햅번 스타일이라고 불리우는 블랙드레스와 진주목걸이 매치업은 솔직히 커포티의 묘사덕분이지 오드리가 창안해낸게 아닌 것일 수도 있다.) 영화에서의 오드리는 원작의 이미지를 제대로 반영했다. 이걸 그레이스 켈리가 할수도 없고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더더군다나 할수 없는 영역의 이야기다. 활자그대로 옮긴다면 오드리는 '홀리' 그 자체로 완벽한 변신을 했던 셈이다. 이후로도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는 홀리를 떠올리기에 앞서 먼저 머리속에 오드리 햅번이 해맑게 웃는 모습이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그 다음 소설의 명문장, 혹은 영화속 대사가 떠오르는 식이다. 


영화의 잔상이 이토록 강했으니 원작소설을 읽을 때 홀리가 어떤 캐릭터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건 다 영화덕분이지만 초반부를 지나 중반부를 넘어갈때까지도 괴리감은 미미했으니까 나쁜 상상력은 아니었다. 다만 스토리가 진행됨에 따라 커포티 원작의 소설이 좀더 농도짙은 현실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이건 위스키에 눈이 풀려서 <왈츠추는 마틸다>를 합창하는 호주장교들 틈을 스카프처럼 떠다니는 홀리의 행실에 관한 묘사때문만은 아니다. 코티지 치즈와 멜바토스토로 연명하면서도 레즈비언이 훌륭한 주부라는 홀리의 익살스러움같은 건 오히려 애처로운 것이기도 했고..주변에서도 그녀를 '세코날 병바닥을 비우고 인생끝났다고 신문에서 보게될 여자라고 읇조릴 때는 아 커포티가 홀리를 어떤 부류의 삶을 상징하는 캐릭터로 묘사하리라는 것정도는 예측이 되고 있었다. 다만 영화는 너무 귀여웠고 매력적이었을 따름이다.

시간이 지났어도 홀리가 사람들의 기억과 추억속에 남는건 오히려 이미지도 이미지지만 특유의 '솔직함' 때문이었을 것 같다. 대중매체들은 홀리를 고전 된장녀의 프로토타입이라고 가끔 언급하지만 된장녀는 모름지기 스스로를 되돌아보거나 처지를 신랄하게 비꼬거나 하는 일 따위는 별로 안하거나 스스로 인정하지 않거나 뭐 그렇다. 홀리가 영화배우로 변신해서 스타가 될 만한 기회가 왔음에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자신은 절대 영화스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너무 힘들고 자신의 콤플렉스는 그럴만큼 열등하지 못했으며 영화스타가 된다는 것과 하늘높은 줄 모르고 솟는 자존심이 손을 잡고 나란히 가야하는 일이었다고...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난들 부자고 유명해지는게 싫겠어요. 내가 어느날 아침 '티파니'에서 아침을 먹는다해도 여전히 나이고 싶어요 " 라고..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라고 제목이 정해진 이유가 뭔지 좀 깨끗해지는 느낌이다. 

쿨하면서도 적극적이고 활력이 넘치고 매력적이기까지하면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기 마련이다. 때가 지금의 분위기와도 많이 달랐던 원스어폰어타임 시절인데도 이런 여성을 그릴수 있었다는 건 굉장히 파격적이면서도 진취적인 여성성에 대한 사회적분위기를 가늠케한다. 대개의 경우 이렇게 매력적인 여성들이 이야기구조상 '결핍'을 가지지 않는건 일종의 배신같은 것이었을테지만 이런 것들은 동정심을 자아내고 애처롭게 바라봐주는 독자들의 증가를 위한 것들이지 신랄한 삶을 이야기하고 싶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가 그렇게 흘러갔던 거겠지 그래서 홀리가 마지막 프로포즈를 받아들이고 정상적인 삶으로 제자리 했던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아니올시다였다. 

홀리 골라이틀리의 소설속 등장에서 드러나는 몇가지는 '고양이에게 이름 붙이지 않기' 그리고 '심술궂은 빨강'에 대한 공포. 사랑을 바라보는 굉장히 작위적이고 가벼운 듯한 홀리의 태도. 감춰진 현실의 이름 '룰러매반스'에 담겨진 그녀 본연의 과거들. 그럼에도 유지되는 그녀의 애처로운 모습이다. 소설책의 정확히 반의 지점이 지나게 되면 이런 우울함과 안타까움들이 와인잔에 와인이 넘치도록 수위가 올라온다. 적당히 끝냈어도 좋았을 파티용 와인이었는데 그만 흘러서 넘치고 파티는 망가지고 그러는 느낌 알잖는가..

" 난 이 고양이에게 이름을 줄 권리가 없어요. 얘는 누군가의 것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우리는 어느날 그저 강가에서 마주친거나 다름없죠. 서로의 소유가 아닌걸요. 얘는 독립적인 존재이고 나도 그래요 " 

"두렵고 돼지처럼 땀이 나는데 뭐가 두려운지 모르는...다만 나쁜 일이 생긴다는 것 말고는..그런데도 뭔지 모르는 거예요" 

홀리가 그렇게까지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아마 스스로에대한 독립심이나 현실에서 불현듯 닥쳐올 미지의 아슬아슬함 공포감에 대한 반작용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도 가끔은 홀리같다면 참 삶에 조언같은 건 적나라하게 말해줄거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아마 홀리가 화자에게 이야기했던 '돈을 버는편이 좋을것 같다고 비싼 상상을 하니까라고 말하는 대목들은 폐부를 찌르면서도 현실적인 부분 아닐까. 그리고 내가 빈정거리며 그 의견에 반대라도 한다면 그녀는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여기서 저 문까지가는데 4초면 되겠죠. 난 2초 주겠어요. 라고....정신이 확들 것 같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커포티의 소설에서만큼은 여러가지로 머리가 복잡해지곤 한다. 나뭇잎이 쌓인 호숫가에서 낙엽을 태운 모닥불이 인디언 신호처럼 흔들리는 공기속의 유일한 얼룩이었다고 할 때만 해도 편안한 정서와 커포티의 탐닉적인 묘사를 그냥 즐기면 될 뿐이야라고 생각했는데 화자의 소설에 대한 평을 하면서 "두번 읽어봤는데 짜증나는 애들이랑 흑인이랑 떨리는 이파리 어쩌고...아무 의미없잖아요"라며 폭풍의 언덕고 비교하면 그야말로 멘붕이 올 것이다. 짝사랑하던 여인에게 의외에 말투에 당황하고 찬물담긴 컵한잔 확 뿌려맞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솔직함도 지나치면 병이겠지만 홀리정도 되야 현실에 발딪고 사는 것 아니겠는가. 티파니를 동경한다고 해서 상류사회를 꿈꾸는 머리에 바람든 여인이라고 매도하기는 억울한 거다.


그래서 아마 말미에 휘몰아친 사건들에 묻혀 사라져버린 홀리가 해피엔딩일지 새드엔딩일지 가늠이 안되는 것이겠지싶다. 걸어온 것만 보면 폭풍처럼 살아갈 수도.. 그렇다고 박차고 나갈 용기와 재능도 없어져버린 보통사람들로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었으니까. 그저 소설의 화자처럼 슬쩍 다가갔다가 연정의 마음을 품었다가 의외로 쌀쌀함에 상처받고 다시 너도 함 상처받아봐라고 외면했는데 아예 그 존재가 삶에서 사라져버린 느낌..비워진 자리를 보며 더 쓸쓸하고 슬프다는 느낌..그래서 차라리 홀리가 티파니에서 아침을 먹더라도 자리에 있었으면 하는 느낌...


아마 그런 느낌이 소설을 읽고 난 한동안 계속 스물스물 거렸던 것 같다. 


티파니에서 아침을

저자
트루먼 커포티 지음
출판사
시공사 | 2013-06-24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잊을 수 없는 한 시절에 관한 짧은 동화!고독한 소년의 눈을 가...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
Vanilla Essay2013. 8. 8. 20:45


챈들러

레인먼드 챈들러, 무라카미 하루키, 스콧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카버, 트루먼 커포티, 존 치버, 그리고 업다이크까지..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는 특별한 이유로 위 작가들의 작품을 읽었다. 슬쩍 눈치빠른 분들은 아셨을 것이다. 선택과 순서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람은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라는 걸... 그가 어디 작품 한 귀퉁이에서라도 이 작가들을 언급안하고 넘어갔던 적이 있었던가. 그는 위의 작가들을 사랑했고 또 열렬히 추종하기도 했었다. 그리하여 하루키를 읽었던 대다수의 독자들에게는 한가지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실마리를 이 작품들에게서 찾게된다. 그는 어떻게 이렇게 군더더기 없으며 세련된 문장들을 구사할 수있는가에 대한 궁금증말이다.  


여타의 기사와 사설과 평론을 몇개 찾아보니까 나같은 경우가 적지 않았나 보다. 죄다 하루키 팬이랍시고 줄줄히 피츠제럴드, 카버, 커포티를 찾아서 읽었다고 고백들을 하고 계셨으니까.. 평론가들은 왠지 그런 하루키팬들에게 거봐 하루키가 소개해주지 않았으면 찾아보지도 않았을텐데 용케 좁은 소양으로 운좋게 명작들을 찾아 읽으셨네라며 은근슬쩍 비아냥거렸다. (지금도 이 현상은 진행 중이라고 본다.) 어찌됐든 좋은 명작이야 두루두루 읽히면 좋다. 아무리 좋은 작품들도 시간에 한번 매몰되면 어떤 계기가 벌어지기전까지는 '무덤속 신세'면할 길 없으니까. 이상한 나라 앨리스도 그랬고 위대한 개츠비도 그랬으며 '그리스인 조르바'도 모두 무덤속 신세들이었다. 


스콧 피츠제럴드

행여 갑자기 조인성이나 소지섭이 나와서 한 손에 <폭풍의 언덕>을 들고 커피한잔들고 읽으면서 혼자 '왜 너는 괴로우면 안되니'라고 읇조리며 연인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이라도 날린다면 그 다음날 서점가에는 에밀리 브론테의 이름이 박힌 책들의 탑을 보게 될 수도 있다. 그게 무슨 죄라고. 민망해야 할 꺼리도 못된다. 찬밥되었던 고전들을 평상시 알아보지 못해서? 어차피 되새김질은 소만 하는 것도 아니고 그 소조차도 과거에 소화불량이었던 시절을 생각하며 다시 억센 풀을 뜯어먹을 절호의 기회가 생긴다고 생각하면  이 보다 더 흥미진진한 모험도 없다. 그래서 다시 읽는 건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가끔 여러 문학계의 글들을 접하다보면 일상에서 김치드시듯 늘 고전을 탐독하지 않으면 당신은 독서가의 자격이 없는거야라고 나무라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다. 고전 문학소설을 삼면에 켜켜히 쌓아두고 고전의 숲에 파묻혀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러지 못했다고 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고전명작 몇 권 다시 드는 것도 꽤 의미심장한 일이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닐테니..


트루먼 커포티

어찌되었든 언급한 책들을 주욱 돌아보다가 미처 읽지 못했던 몇 권의 책들을 발견했다. 어..그런데 읽었던 책도 책장을 넘기다보니 이게 또 새로운 거다. 기억도 하나도 안나는데다가 줄거리조차 새롭다고 느껴질 때는 혹시나 오래전 책 사재기만 하고 읽지도 않았던 비운의 책들이 아니었을까 곰곰히 생각하게 된다. 역시 기록이 없으면... 그리고 적용과 응용이 없으면 전부 휘발되어 날아가버리는 걸까. 내 과거의 책탐독의 결과는 실온에 나온 드라이아이스만도 못한 수명이었나보다. 그렇다고 시디나 DVD같은 기억력을 바랬던 것은 아니었는데 이토록 생경하다니..이래서야 책을 읽었다고 할수나있나 푸념만 나왔다. 


아마도 당시에는 미사여구와 화려한 만연체 난무하는 고전소설의 페이지속에서 지루함을 이기는 방편으로 그저 '읽기'만 했으리라. 미션 클리어처럼 앞으로 돌진하면서 한 줄 한 줄 해치우는 심정으로...그 의미와 행간의 뜻따위는 어떻게되도 좋다고 생각했겠지 그러다가 맨 뒤쪽 표지로부터 몇 십장 안쪽에 다다르면 아 대충 이렇게 결말이 되는구나라고 신속히 덮어버리고  치워버렸을 게다. 그래서말인데 누가 카버의 단편을 이야기하거나 커포티의 세련된 문장을 인용하거나 하면 속으로 '그런걸 다 기억한단 말이야?' 엄청 감동적이었나보네라며 놀라워했다. 소설의 편린을 기억한다는 건 두고두고 그 사람의 인생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다. 물론 그 대상이 되는 문장이 독을 품고 있을지 아니면 아름다운 로망을 이야기일지 선택하는 독자의 몫이겠지만 책 귀퉁이 아니 메모지 짜투리에 끄적여쓴 글귀조차도 어느날 문득 발견하게 되면 고구마 넝쿨캐듯 당시의 감흥들까지 부록으로 얻을 수 있다. 추억이든 영향이든 이런 것들이 가능하려면 적어도 뭔가를 기억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레이먼드 카버

아쉽게도 그런 기억의 파편 및 짜투라기 끄적임조차 보이지 않는 내 독서인생이라니..좀 한심스럽고 허무했다. 최근 들어서는 한 권을 읽으면 조그만한 페이지에 단순하게라도 써둔다.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자만 그래도 쓴다. 그렇다고 뭘 어떻게 활용하겠다는 거창한 생각같은 건 없다. 그저 써둘 뿐이다. 억울하니까. 뭔가 현재의 생생함이 잠재의식으로 가버리는건 너무 매정하고 무책임스러워 보여서다. 뇌는 너무 매정하고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으니 안간힘을 쓰면서 무엇이든 써서 남겨야 겠다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어제 그렇게 많이 읽었다고 자부했던 커포티의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또 다시 읽었고 카버의 단편집 '사랑을 말할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을 다시 꺼냈다. 읽다가 보니 언저리 비슷한 처지의 책들을 죄다 다시 읽고 싶어졌다. 이를 어쩌지 시간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고 먹고는 살아야 하는데 이 충동적이고도 무책임한 의욕이라니..


존 치버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독서가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가치있을까라고 ..명사들의 서슬퍼런 꾸짖음이 귓가에 들리는 듯 하지만 사실 내가 책을 몇 권 더 읽는다고 해서 내 삶이 윤택해질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경험적으로 보면 감성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좀 더 사색적이 되는건 맞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스타일에 대한 구성요소지 경제적인 구성요소로 작용하진 않는다.  매정하게 이야기해서 내가 고전 몇 권을 더 읽어도 마이너스 통장에 뭔가 입금되는 건 아니다.  무형의 자산. 좋은 소리다. 마음의 양식이 되고 깊어가는 내면의 성찰도 좋고 다양한 인간군상의 간접경험도 사는데 도움이 될테지 그런데도 이 독서가 죽고 못하는 어떤 거만스러움이 될 때가 있다. 가난하고 우울해도 정신적으로 좀 더 깊어질거라는 늘러붙은 자존심마냥 하염없이 비현실적인 어떤 고리타분함 같을 때가 있다. 그런데도 이런 책들을 읽게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존 업다이크

난 아무래도 아무생각없이 그냥 읽나보다. 그래서 오래도록 곁에 두고 읽고 또 읽고..좀 바보스럽고 무의미한듯 하지만 왠지 이야기들이 나와 너무도 달라서 황당해서 그런걸까 것도 아니면 언젠가 경험했었던 유사감정의 기시감때문이었을까.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겠고 어떻게든 좀 공유해보려고해도 누구랑 말해야할지 모르는 막막한 그런 상태에서 맞닥드린 공감대 같은 것들...? 이도저도 아니면 챈들러나 커포티나 카버, 피츠제럴드가 일정부분 추억을 점거하고 있어서일수도 있겠다. 그들이 없었으면 내 청춘의 초상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거라는 .....뭐...비스무리한 착각같은 것들인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 모든 작가들을 사랑한 덕에 그를 읽었던 대다수의 팬들도 이 작가들의 작품을 따라 읽었다. 어떤 점에 있어서는 그냥 찾아읽었어도 좋았겠지싶다.  우연찮게 도서관을 뒤지다가 문득 '달려라 토끼'를 읽고 '그게 누구였는지 말해봐'를 읽고 '빅슬립'을 발견하고 '위대한 개츠비'를 집어들고 하는 일들이 운명처럼 일어나는것도 흥미진진한 일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고 한들..즉 하루키 아저씨가 소설에 언급하고 에세이에서 칭찬하고 개인적으로 너무좋다 어쨌다고 몇 줄 써놓은걸 보고 호기심에 찾아 읽었다고  한들 그게 부끄러운 책읽기가 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책을 어떻게든 읽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렇게 된 이상 이 후 스토리는 읽은 사람의 몫으로 남겨질 뿐이다. 읽었으니 좋은 것이고 좋았다면 더 기쁜일이다. 그게 비록 하루키덕이었지만..그게 아주 친한 친구를 통해서 또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속으로 쾌재를 부를 일이다. 쾌재를 부를 일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무라카미 하루키



Posted by kew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