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습관'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4.03.10 독서량과 독서강박증의 시대
  2. 2013.10.14 붉은 여왕 스타일의 독서습관
Vanilla Essay2014. 3. 10. 10:59

건담매니아들이 넘쳐나고 애니메이션 오덕들의 천국이라 불릴만한 일본에서 이런 설문조사가 있었드랬다. 10~~30대 여성들에게 최악의 남자들은 누구인가라는...그리고 결과에 떡하니 이런게 있었다. 비활동적이고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조용한 성격의 남자.!!! 여기에 몇가지 덧붙여 프라모델 건프라에 빠져사는 남자들. 게임기 붙들고 사는 히키코모리. 줄줄히 언급되는 남자들의 정체에 대해서 크게 반감없이 수긍하며 그렇게 사는 남자들은 문제가 있다라고 여성전체가 손가락질하는 분위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건프라와 게임과 애니오덕들의 입장에서는 어차피 자신이 여자들을 만나면서 건담MG조립을 포기할리 없고 새로 등장한 LOL캐릭을 방치해둘 생각이 없으며 할렘물의 여주들이 프린팅된 베개를 껴안고 싶지 않을리 없기 때문에 별시덥지 않은 여자들이라고 치부하면 그만일 것이다. 


원래 취미란 이런 것이다. 누가뭐라고 해도 나는 내 갈길을 간다라는 분위기. 손가락질과 지탄이 난무해도 본인은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올 생각은 전혀 없다. 이유인즉슨, 그런 취미활동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재미가 있으면 어떤 사회적 분위기에도 이겨낼 용기같은 걸 막 생산해낸다. 게다가 이런 종류의 쾌감들은 반복적인 패턴을 가지고 있어서 '중독'이라는 레벨로 옮겨가게 된다. 여친을 만나서 이야기하고 차마시고 심지어 AV유사스런 행동을 하는 스케줄이 동일선상에 존재한다해도 매니아들의 입장에선 부차적인 순위로 밀려날 뿐이다. 


독서도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얼마전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남녀 직장인들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직장인들의 독서량이 한달에 한 권이 안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하루 중 책읽는 시간이 약 30분, 그리고 책을 고르는 기준은 '유명한 사람의 에세이/자기계발서' 순이었다. 이런 조사가 '취업포탈'에서 조사된건 왜 일까. 이 프레임에 근간에는 사람의 능력과 무형스펙에서 '독서'가 차지하는 얼마간의 포션이 있거나 사회전체가 기대하는 '지적기준'의 항목에 독서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거대 출판사가 이런 통계를 들먹이며 '여러분들 너무 책을 안읽으시는군요. 이렇게 안 읽으시면 저희 망해요라고 푸념하는게 더 자연스럽겠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취업 포탈이 독서량을 지적하다니...,이 사회가 '책읽기'를 따분하고 도달하기 힘들면서도 반드시 하는게 좋을 법한 어떤 정형적인 프로세스로 인식하는 듯한 뉘앙스다. 


왜 읽고 싶지 않다는데도 사회는 독서포기의 자유에 대해 달가워하지 않는걸까. 대다수의 직장인들이 책읽기를 관두는 데에는 그들 자신이 무식해지고 싶어서도 그리고 책에 환멸을 느껴서도 아니다. 그저 책을 읽으려고 전진하는 의지에 너무나도 많고도 다양한 유사 선택지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책을 읽는 재미'보다 더 재미있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학업 지상주의에 파묻힌 어떤 고상한 선생님들의 부류에서는 '왜 책 읽기가 재미없냐'고 힐난하거나 '재미가 없어도 읽어야하는게 독서'라고 강하게 어필할 수도 있겠지만 그걸두고 수긍할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사람은 '어떤 재미가 느껴지지 않으면 억지로 무엇인가를 하는데 익숙치 않은 동물이다. 의지라는 것은 한도가 있고 그것도 언젠가는 닳고 없어지게 되어 있기때문이다. 그럼 독서가들의 대개는 강한 의지의 소유자란 말인가?  


1년에 책을 몇 권 읽는지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우려를 금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직장인들이 책을 너무 안 읽는데..한달에 한 권도 안 읽는다는데 나라도 이번달에는 읽어줘야겠어 라고 책을 사서 득달같이 읽는게 더 이상하다. 이 독서의 목적은 누구를 위한 걸까. 독서가들이 착각하는 몇가지의 생각들이 있는데 '책을 좋아서 읽는 사람'과 '책 읽는걸 과시하고 싶어서 읽는 사람'의 독서 유익성에 관한 부분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후자의 케이스를 우러러보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독서는 개인적인 영역이기때문에 그 사람이 무엇을 느꼈든 그 사람안에서 벌어지는 일일 뿐이다. 굳이 양적인 독서에 우러러볼 '권력지향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독서에 목적이 있기보단 자기의 독서과정에서 체득된 지식축적을 과시하고 싶은 일종의 '권력욕'일 뿐이다. 


결론을 내리자면 '책읽기'는 개인적인 것이며 그건 재미가 있어야 한다. 사회적 분위기에 끌려갈 필요도 없으며 읽기도 싫은걸 억지로 읽을 필요도 없다. 그렇게 강제로 읽어서 어떤 걸 알게되었고 깨닫게 된 사람으로부터 우리는 '독서'에 대한 또하나의 강박적 관점을 본다. '독서는 고귀하지만 어렵고 유익하지만 고통스럽다'는 괴이한 견해를 보며 후대들에게 이상한 독서 공포증과 형벌에 가까운 '과제'를 부과하고 있다. 그래서 말인데 다른 관점에서 독서쟁이들을 비웃을 필요도 없지 않은가. 그딴거 읽어서 뭐하느냐고 책을 읽으면 돈이 나오냐고 내 월급에 몇 푼을 더 보태줄 수 있냐고...그럴 필요가 역시 없다. 세상의 치열한 어떤게 존재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먹고, 자고, 똥싸고 섹스를 한다. 본능적인 것도 어떤 점에서는 자연스럽고 덜 고통스럽고 편안해지기 위해서 진행된다. 독서도 결국에는 재미있어 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읽는 사람은 읽는거고 읽기 싫어하는 사람은 안 읽으면 그만이다. 여기에는 어떤 고상한 논리가 있어서 책을 읽어야만 사람답게 사는 것도 아니며 책을 통해 지식을 축적해야먄 참지식이 되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깨달음의 루트가 있다.


물론 내가 감명깊게 읽은 책들이 어떤 사람에게 지루하고 졸릴 뿐이라는 사실이 가끔 실망스럽긴 하지만, 나역시 어떤 시끄러운 환경에서 춤을 추고 왁자지껄 대화를 나누는 걸 싫어하지 않은가. 붕어빵같은 케이팝도 싫은데 왜 싫으냐고 사람들에게 신경질적으로 묻지 않는 것처럼 독서도 결국에는 개인의 취향적인 부분일 뿐이다. 굳이 사회적 문제시 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 이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압적으로 책이라도 읽힐 속셈인가. 인생의 선배된 입장에서 독서의 유익함을 위해서 강압적이 프로세스라도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다면 방법이 있긴하다. 대개의 독서습관은 '환경'에 좌지우지되니까 그런 습관을 들여주기 위해서라면 본인이 책을 많이 읽는 모습을 보여주면 된다. 자식들과 책을 읽고 차를 마시고 서로 대화하고 독서하고 글을 쓰고 읽어주고 하면 된다. 그게 재미있다면 성공할 것이다. 그러나 그게 고통스럽다면 자기도 고통스러운걸 왜 후대에 기대하는 걸까. 자기는 책하나 집어들지 못하면서 자식들에게 '책을 읽어야 한다'고 윽박지르는건 너무 웃기지 않은가. 대대로 고통을 물려주는 꼴이다. 결국, 세상의 기발한 콘텐츠 못지 않게 '책읽기'가 재밌다는 사실들을 깨닫게 되는 어떤 환경에 답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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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nilla Essay2013. 10. 14. 10:18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유년시절 이미 읽었는데도 최근 다시 읽게 되었다. 뭐 특별할 것 같은 이유는 딱히 없었지만 왠지 어렸을때의 앨리스가 지금의 앨리스와는 다르게 다가올 것 같은 막연한 느낌이거나 얼핏얼핏 스쳐지나가듯 보여지는 문장들틈에서 왠지 의미를 놓치고 앨리스를 듬성듬성 읽은게 아닐까하는 호기심같은 것이 있었다고 보는게 좋을 것 같다. 보르헤스의 미로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런 수수께기와 같은 문장들은 뭔가 숨겨진 함의를 품고 독자들을 끊임없이 사고하게 만들고 그 속에서 나름대로의 즐거움을 찾게 되니까..이런 접근방식이 아주 맥락없는 동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서문의 소개글에서 이런 접근이 '붉은 여왕'적 관점이란걸 알았지만 (반대로 무의미적 접근에서는 그리핀적 접근이라고 언급되어있다.) 때로는 세상살이가 날 이렇게 각박하고 딱딱하게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만 하는 고지식한 태도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참 피곤하게 살고 있는게 아닌가라며 한숨을 쉬게된다. 순수함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수도 있고 아무렇지도 않은 농담한 자락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때엔 또 다른 형태의 질병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최근 고전읽기의 전체적인 분위기도 영향을 받았나보다. 난 완전히 붉은 여왕적 독서를 하는 셈이다. 


최근 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포함하여 생떽쥐베리의 <야간비행/남방우편기>, 멜빌의 <모비딕>,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개정판을 다시 읽고 있다. 이 모든 건 다 붉은 여왕의 눈동자가 내 눈에 이식된 탓이다. 과거는 현재가 되고 현재도 언젠가 과거가 되겠지만 매번 이 작품들의 의미가 다르게 다가온다. 이건 완연히 '피에르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처럼 되가고 있는게 아닌가.작품을 풍부하게 만드는건 저자가 아니라 독자라는.....이런 해석이 어제오늘일은 아닌데도 막상 읽었던 작품을 다시 읽으면서 새로운 감상에 사로잡히게 되면 '읽기'라는건 영원히 반복되는 뫼비우스고리가 된다.  


난 오늘도 이 뫼비우스의 고리를 따라 과거에 읽었던 책들을 현재로 포장한다. 이미 내용은 충분히 달라져있었고 스토리는 선택지의 가지수를 늘렸으며 주인공들은 다른 생각들을 한다. 분명히 10년전에는 옳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어리석고 무지하며 바보같은 결정을 내리고 있다. 이런 세월의 차이를 읽는다는 건 분명히 흥미진진하긴 하데 과거와 달라져버린 시선때문에 당혹스럽긴하다. 읽은 건지 안읽어도 될 만큼 달라져버린다면 절대적 읽기라는건 감히 꿈꾸기 어려운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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