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BOOK/소설2013. 2. 12. 18:30

클라우드 아틀라스(Cloud Atlas) - 데이비드 미첼


 

워쇼스키 남매의 걸출 과거작들의 여파만 아니었어도 '클라우드 아틀라스'에 대한 기대는 미미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세계'를 정의하는 그 독특한 감각과 구성은 당시로서는 굉장한 '일탈'이자 '파격'이었으니까, 관객의 입장에서 또 한번의 혁신을 보여줄거라는 믿음, 그리고 자신들의 지적인 갈망을 좀 더 채워줄 수 있다는 문화적 파이오니아로서 워쇼스키를 정의해두는건 당연했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이런 워쇼스키가 '매트릭스'이후로 들고나온 영화가 '클라우드 아틀라스'라니 ….기대가 드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더군다나 데이비드 미첼의 전작 스타일을 볼 때, 묘한 환상과 SF안에 스며든 철학적 편린들은 그야말로 워쇼스키의 눈을 반짝이게 했을 거라는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클아우드 아틀라스의 케미스트리에는 어떤 연금술이 사용되었을까. 모두들 관심을 가질 무렵, 정작 이 작품의 원작 소설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었다.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총 6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있다. 영화는 굉장한 교차편집으로 이 6개 에피소드의 고리를 현란하게 오가지만 다행히도 소설은 하나의 챕터씩 전개해서 차근차근 1권에서는 '손미 451 오리즌'까지 갔다가 2권에서는 '슬로샤 나루터와 모든 일이 지나간 후' 로 정점을 찍고 다시 거꾸로 1권에 전개된 에피소드를 역순으로 따라간다.

 

아마 독자들이 이 소설을 읽을 때, 모종의 의미심장한 다짐같은 걸 가져야 겠다라고 생각하는 지점은 2권 '슬로샤 나루터'를 넘어가면서부터 일 것이다. 여지껏 읽었던 에피소드들의 재반복이 이어지는 순간 '내가 놓친 것은 없는지 , 혹시 암시적으로라도 복선같은 것들이 앞서서 모두 나열되었음에도 이해하지 못해서 화려한 후반부 지적여행을 놓치지나 않을까하는 우려가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주욱 읽다가 보면 사실 그렇게 치밀한 설정과 장치들에 대한 필요성은 잊게 된다. 모름지기 소설에서는 설정과 장치보다 오히려 '이야기'에 대한 몰입도에 의해서 좌우되기 마련이니까..


 

1권. 

[1] 애덤어윙의 항해일지 - 평등.

[2] 제델햄에서 온 편지. - 배려

[3] 반감기-첫번째 루이자 레이의 미스테리. - 희생

[4] 티머시 캐번디시의 치떨리는 시련. - 자유

[5] 손미 ~451의 오리즌 - 존엄성.


2권.

[6] 슬로샤 나루터와 모든 일이 지나간 후. 

[7] 손미 ~461의 오리즌

[8] 티머시 캐번디시의 치떨리는 시련.

[9] 반감기-첫번째 루이자 레이의 미스테리.

[10] 제델햄에서 온 편지.

[11] 애덤 어윙의 항해일지.



이야기의 전개상으로 보면 애덤어윙의 항해일지에서 모험담을 기대하였을 테지만, 어윙의 소소한 일상 외 그다지 드러나는게 별로 없다. 대신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대화속에 원주민격인 '모리오리'족에 대한 '개화'라든지 '평등'에 대한 이해관계가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다. 마오리 족으로부터 구타당한 오투아에 대한 모종의 노력등을 보면 어윙은 '평등주의자'이자 '휴머니즘'을 가진 당시로서는 앞선 지식인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윙의 면모가 히어로적이진 않다. 그는 프로피티스호에 타고 항해를 하게 될 뿐 거창한 자신만의 신념을 낭낭히 선원들에게 전파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그를 통해서 모리오족의 멸망과 탄압, 그리고 순수했던 종족이 어떻게 비참해지는 지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된다. 어윙이 독자이자 독자가 어윙이 되는 셈이다. 그를 통해서 '개화된다는 것이 어떻게 해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폭력'이란 개념이 어떻게 해서 모리오리족의 머리속에 각인되는지 간접적으로 전달되면서 어윙은 그속에서 '최소한의 인격적인 조력자'의 역할을 짊어진 것처럼 이어진다. 거대한 통념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행동하고 노력하는지에 대한 미세한 실마리를 전달해준다고나 할까... (사실 이 부분은 뒷부분에서 좀 더 명확해지지만..) 

 

 

'제델햄에서 온 편지'는 이에 비하면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을 가졌지만 방탕한 생활과 거만한 태도가 몸에 배인 몰락한 귀족의 자기 독백적 구성으로 이루어져있다. 로버트 프로비셔는 친구인 '식스 스미스'와 편지를 주고 받는 식으로 자기이야기를 하는데 아마 이 이야기의 근간은 '성적 소수자' 즉 동성애에 대한 세련된 자기변호같은 대목도 상당히 등장한다. 워쇼스키는 아마 '이 부근에서 굉장한 만족감을 가지고 어떻게든 액자식으로 구성해서 도드라지게 연출하고픈 욕구에 사로 잡히지 않았을까.  사실 제댈햄 이야기가 애덤어윙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고 골몰히 생각하면 머리만 아플따름이다. 유일한 연결고리는 책을 쌓아둔 반침을 뒤지다가 표지도 떨어져버린 책자를 프로비셔는 발견하고 그것이 1849년 부근에 쓰여진 애덤어윙의 항해일지라는 것을 알아내는 부근이다. 프로비셔는 이에 대해서 묘한 집착을 보이지만 이를 두고 어윙으로부터 어떤 영감을 얻었다던지 그리고 데자뷰가 일어났다던지하는 흥분감 같은 건 전혀없다. 그런데 아마 전체 작품을 두고 묘한 연결고리로 등장하는 상징이 없지는 않은데 바로 어깨위 '혜성모양의 모반' 자국이 각 에피소드를 두고 등장인물에 공통적으로 설정되어있다는 점이 그렇다.  


3번째 에피소드는 1974년, 루이자 레이의 거대 조직에 맞서 진실파헤치기 모험담이다. (모험담이라고 하기에는 약간 심각하고 잔인하고 다이나믹한 구성들이라 당황스러울지도..) 물론 여기서도 이전 에피소드에서 언급한 '제델햄'의 프로비셔가 편지를 주고받았던 '식스 스미스'가 박사가 에피소드 연결고리로 등장하긴 하지만 제델햄에 관련된 큰 암시적인 복선으로 보이지 않는다. (루이자 레이가 클라우드 아틀라스 6중주 음반을 손에 쥐는 내용이 더 의미심장할 수도 있겠는데 이건 전체 에피소드를 아우르는 지도같은 느낌인지라..) 이 에피소드의 가치는 '진실'과 '희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싶다. 진실을 파헤치는 언론인들의 말로가 죽음내지는 희생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죄책감에 대한 비장미서린 결말까지 이어질때면 꽤나 격한 수위로 테마의 가치를 위로 끌어올리는 느낌이다. 


그리고 4번째 에피소드, 2012년 티머시 캐번디시의 치떨리는 시련은 약간 뜬금없다. 출판사사장이 우여곡절끝에 요양원에 강제수용되면서 세상과 단절되고 탈출하기위해서 안간힘을 쓰지만 쉽지 않다는 내용으로 위트있고 약간 비딱하며 명랑하기까지한 노회한 지식인 캐번디시의 자태가 꽤 유쾌하게 전개된다. 캐번디시도 전 에피소드의 루이자 레이 이야기를 출판할 후보 책으로 등장시키는 점이 약간 재미있고 역시 모반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전생의 루이자 레이를 이어받는 모양새도 역설적이다. (약간 진부하고 따분하다는 평가를 루이자 레이 미스테리에 엮어놓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양원을 탈출하는 스펙타클 만큼은 압도적으로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 마치 '쇼생크 탈출'의 카리스마를 엮어놓은 듯한 스릴로 땀을 쥐게 만들어주고 결국 '자유'를 맞이하는 달콤하고도 기쁜마음을 잔잔히 지는 노을 처럼 누리게 해준다. 


" 사람을 좀비 대열에 끼게 만들기도 하고, 구해주기도 하는 것은 세월이 아니라 태도이다. 젊은이들의 영토에도 좀비의 정신을 가진 자들이 우글거린다. 그런 상태로 흘러가면서 수십 년간 내부에서 진행되는 부패를 감출 뿐이다. 바깥에는 눈송이가 슬레이트 지붕과 화강암 벽위로 내려앉고 있다. 뉴욕에서 일하는 솔제니친처럼, 나도 내뼈를 엮은 도시에서 멀리 도피해 와 부지런히 일할 것이다. 솔제니친처럼, 어느 맑은 날 해 질 녘에 돌아갈 것이다. " 245p.


 

 

 

이윽고 2144년 서울로 건너띄면서 '손미 ~451 오리진' 에피소드로 이어진다. 무거운 주제이자  순혈인간에 대비되는 복제인간의 처연함과 부조리함을 주제로 삼고 있다. 많은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이런 주제가 아주 생경한 주제들은 결코 아니다. 오래전 부터 SF장르가 고민해왔던 '인간 존업성의 기준을 복제인간에까지 확대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녹아있는 부분이 그렇다.  공각기동대에서 심화된 바있는 전뇌화와 사이보그화에 대한 여러가지 철학적 고민들이 재생산됨으로 인해서 약간 진부해질수는 있겠으나 손미가 과정에서 보여주는 '상승'에 대한 여러가지 깨달음, 문화적 충격들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존엄성이 어떤 토대에서 이뤄져있는 지에 대한 실마리를 준다고 생각한다. '상승'(복제인간 내면에 본질추구에 대한 본능들을 억제해놓았으나 어떤 계기로 인해서 복제인간이 이를 넘어서는 사유과 사고를 통해서 복제인간의 범주를 벗어나는 현상)과 거대조직(유니언)에 대한 기존 질서체계 유지방식들은 현실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아마도 저자는 현재나 미래나 이런류의 고민과 갈등은 계속해서 있을 것이라고 묵묵히 이야기하는 것 같다. (손미는 거의 이 에피소드에서 2권 초입부까지 '현자'같은 뉘앙스로 철학적 주제들을 관통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손미도 '혜성 모양의 모반'을 가지고 있다. 복제인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 환희의 나라는 네오 에도에서 디지털 촬영하여 소니로 생성한 시뮬라크럼입니다. 

  진짜 하와이 열도에는 그런 곳이 없습니다." - 2권. 178p


이즈음 되면 독자들은 '윤회'에 대한 철학적 설정에 대해 깊이있는 재고를 시작한다.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거대한 '윤회'의 고리속에서 끊임없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중의적인 시그니쳐라고 생각하게 되고 어윙과 프로비셔, 루이자 레이, 캐번디시, 손미 모두 어깨에 '혜성모양의 모반'자국이 있음을 읽으면서 알게된다. 그렇다면 한 인물이 겪는 이 모든 상황은 결국 세대를 뛰어넘어 모든 영역에서 끊임없이 이어져간다는 거대한 환생이야기로 완성되는 것이다.  <클라우드 아틀라스>를 설명하는 '모든 목소리가 조금 다른 하나의 목소리가 된다' 고 말했던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가. 개인적으로는 제델햄 이야기 이후, 루이자 레이 미스테리, 캐번디시의 치떨리는 시련, 손미 ~451의 오리즌 모두 옴니버스 형태의 굉장히 재미있는 단편소설처럼 읽혀졌다. 각각의 소설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있다고나 할까. 

 

 

 


무엇보다도 좋았던 것은 각 에피소드를 변주하는 미첼의 문장구사력이다. 에피소드들의 스타일이 완전히 구분되는 이 특징들은 마치 신출귀몰한 설정들과 무지개처럼 산란하는 미첼의 변신술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어윙은 덤덤하고도 묵묵하게 그리고 한편으로 침착하고 고지식한 지식인풍의 어투로…그리고 제델햄 이야기는 끼를 주체하지 못하는 굉장한 천재들의 광기어리고 어디로 튈지모르는 괴팍함과 경박스러움, 그리고 재기발랄함으로..루이자 레이는 열정 폭주로 이어지는 집요하고도 신념의 일환으로 달리는 정의구현자의 절박함, 티머시 캐번디시는 노회한 지식인의 아이러니한 세상풍자, 그리고 말년에 펼쳐지는 모험담, 손미는 예전 공각기동대와 블레이드 런너의 데칼코마니스러운  SF적 설정, 그리고 인간 존재와 가치에 대한 기준. 그리고 고민거리를 안겨주는 냉철하고도 모호한 판타지스러운 설정과 분위기로 등장한다. 그것도 제각각 다른 패턴과 다른 설정과 전개, 질감도 다르고 뉘앙스도 다르다. 

 

 



감탄이 나올만큼 변화무쌍한 저자의 표현력도 감탄이 나올지경이고 이 수많은 줄기의 이야기고리들을 스파게티처럼 꼬이지 않게 잘 정돈하면서 스스로의 길을 가도록 고고하게 이끄는 저변의 생각들도 일관성이 있다. 클라우드 아틀라스가 비록 이 6개의 에피소드를 합주하는 6중주의 음악으로 완벽히 연주되었는지 어떤지는 읽는 독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이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6가지의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6가지의 꿈속에서 나는 어윙으로, 프로비셔로, 그리고 루이자 레이, 캐번디시, 손미가 되어서 그들의 생각과 모험을 누렸던 것 같은 인상이다. 소설을 읽는 동안에 누렸던 이 호사스러움을 표현할 길 막막하지만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결국에 한 영혼이 누렸던 이 공통되고도 실질적인 인간과 인간사이에 벌어지는 사랑를 비롯한 이 세월 여파는 세기를 넘나들면서도 수그러들지 않았던 것 같다. 잠시 동안 '혜성모양의 모반'이 나에게도 어디 있지 않을까라는 착각이 들만큼….

 

 


클라우드 아틀라스. 1

저자
데이비드 미첼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0-11-1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젊은 거장 데이비드 미첼의 대표작!서로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클라우드 아틀라스. 2

저자
데이비드 미첼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0-11-1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젊은 거장 데이비드 미첼의 대표작!서로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기...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
Review BOOK/소설2013. 2. 8. 20:30

 

 

 

 " 쟤 정말 괴짜같지 않냐? 그렇지? "

그러자 밥은 고개를 끄덕거렸어. 그때 패트릭이 절대 잊어버릴 수 없을 것 같은 말을 했지.

" 쟤는 월플라워 wallflower 야"

그러자 밥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고, 방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지.

그래서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지만 패트릭이 안심을 시켜줬어.

(p69)

 

 

월플라워가 제2의<호밀밭의 파수꾼>이라고 불리우나보다. 아마도 타이틀을 '현실부적응자의 섬'으로 내건 후에 주인공의 내면에서 방황하는 걸 공통분모로 설정하고 성장소설이라는 그럴듯한 카테고리로 묶어버리게 되면 내용물이 뭐든 간에 통조림은 다 '통조림'으로 분류하면 대충 맞아 떨어질거라는 추측과 비슷한 류의 비약들로 요약 될 수도 있겠다. 하기사 '호밀밭'의 홀든이 '통념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드러낼때 짙게 드리우는 쓸쓸함같은 건  '월플라워'의 찰리도 일맥상통이었으니까... 꽤나 우울하고 쓸쓸하며 암울하기까지한 순간들이 줄기차게 등장하고 무엇보다 현실에 섞일수 없다는 주인공의 자책성 독백들이 지면을 수놓을 때 즈음,  어째 청소년들이 겪는 질풍노도의 방황기를 대변하는 상징적인 정서가 바로 이런게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이 소설에서 찰리는 누군가에 편지를 쓰는 듯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독자들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꽤 고민을 들어줄 것 같은 너'를 알고있다면서 자기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허심탄회하게 편지를 줄기차게 보낸다. 답장을 찰리가 받은  흔적이 없지만 이 편지를 받는 또래의 동년배는 찰리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한 채, 그의 은밀하고도 깊은 속내에 대해 같이 듣고 고민하게 된다. 이런 이야기를 계속해서 듣다보면 '나는 찰리의 이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부터 시작해서 '나라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라는 적용의 영역까지 옮아가게 되기 마련이다.

 

간접적이고도 상징적인 '찰리'친구가 한명 생기는 꼴이다. 한편, 이 책의 후기를 보면  현재 미국내 도덕주의자들에 의해서 '월플라워'를 금서목록으로 지정해야 한다고 하는 주장이 일고 있다고 언급되었는데 이유인즉슨, 약물, 섹스, 동성애 그리고 굉장히 일탈적인 여러 상황들에 대한 묘사가 직접적으로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냥 밝고따뜻한 영혼을 위로하는 성장소설이겠거니 했다가 그 이야기를 풀어가는 소재들과 매개체가 거친것을 알고 흠칫 놀라게 되는 것이다. 미국내의 기득권 부모세대들로서는 눈살을 지푸릴만큼의 파격과 일탈을 미화시키려는 것으로 월플라워을 해석할 소지는 충분하다못해 확신까지 나아갔으리라..


우여곡절끝에 사귄 친구는 동성애자고 누나는 덜컥 임신해서 낙태를 해야하니 같이가자고 하고.., 아버지는 어린시절 지독한 폭력에 시달렸고, 무엇보다 찰리는 친구의 자살, 그리고 유년시절, 헬렌이모로부터 유래한 일련의 사건은 그 수위가 후덜덜할 지경이다. 이즈음되면 국내 독자들이 월플라워의 진면목을 이해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경험적 산물'에 대한 비경험적 추측과 상상만으로 '찰리'를 이해한다는 건 영화감상 수준이거나 그보다 훨씬 못한 '피상적 동감'에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찰리와 같은 동년배 청소녀들은 아마 '진정한 고민'들을 헤쳐나가고 결국 '한계는 없을 것이다'라는 프레이징을 결말에서 보게 되므로 문화적, 사회적 괴리감은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항변할 수도 있겠고 (결국 또래들은 서로 통하는 것이니까. 정서적으론 완벽한 방황기의 펭귄들 아닌가.)  또 그만하면 소설이 말하려고 하는 진짜 이야기가 무엇인지 어른들은 놓치고 있다는 지적을 '월플라워'추종자들로 부터 받게 될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소설은 쉽게 읽힐만큼 가볍고 솔직하고 간간이 위트가 버무려져있다. 충격적인 사실들에 대해서는 은유와 모호하을 약간씩 곁들여 놓았으며 헬렌이모 사이에서 벌어진 과거사건은 완전히 적나라하게 꺼내놓은 것은 결말까지 유보해놓았기에 사실상 찰리의 방황근거를 심리적 원인으로 돌려버리는 부분은 완벽히 가려졌다. (사실 이게 제일 컸던 것 같은데 말이다.) 소설에서 공감을 얻는건 찰리가 패트릭과 샘을 만나면서 진심을 터놓고 다가가는 부분이다. 책 제목처럼 '월플라워'는 '파티에서 초대받지 못하거나 파트너가 없는 왕따인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학생들로 치면 '찌질이이거나 뭔가 모자란 또라이거나 ' 완벽히 다른 어떤 스타일의 인격'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소설에서 유일하게 처음부터 지속적으로 찰리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인물은 빌 선생님인데 '찰리'의 문학적 감수성, 그리고 글로 표출되는 독특한 시각을 재능으로 인지하고 그에게 좀더 자기계발과 더불어 '친구들 문화'로 끼어들게 조언을 주저하지 않는 '착한 선생님'으로 등장한다. 인격적으로나 능력적으로나 찰리에게 둘도 없는 멘토역할이 될테지만 그 조차도 완벽히 찰리의 속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저 '비밀스럽게 이야기해준 사적인 대화들을 부모들에게 일러버리는 그저그런 선생님'의 일면도 가지고 있는 정도다. 그래서 찰리가 패트릭과 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으려고 애썼는지도 모른다. 자신을 이해해주려고 노력하는 친구들은 그들이 유일했으니까...월플라워에서 그나마 순기능적이고 밝으며 희망찬 메시지를 읽을수 있다는 건 '따분하고 지루하며 뻔한' 친구들의 결론 같은게 아니다. 패트릭은 브래드와 은밀한 동성애를...샘은 자기를 한낯 마네킹으로만 보는 크레이그를 만나는식의 '실패할만한 사랑'을 하는 친구들이다.  


그런데도 찰리, 패트릭, 샘은 자신들만의 세계를 공유하며 서서히 서로를 위로한다. 찰리가 엘리자베스에게 숨기지 않고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사람은 '샘'이라는 걸 밝히고 나서도 기어코 셋은 이해한다. 정말 우상과도 같았던 샘이 찰리와 잘되길 빌었던 독자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환각에 취해서 자신의 불안감을 이야기할때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패트릭과 샘이 지켜주지 않았더라면 찰리의 삶은 어느날 갑자기 돌연사한 불행하고도 정서적으로 문제있는 왕따 학생으로 그쳤을 것이다. 언제고 빌선생님은 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현실에 참여하지 않기 위해서 생각속에 빠져드는 사람들이 있다'고..간접적으로 찰리의 독백과 대화들은 너무 많은 생각에 기반한다. 끊임없이 자기를 객관화하고 지나칠정도로 배려하며 과격하게 자기를 학대한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생각과 그를 지배하는 과거의 트라우마를 보면 '생각많은 솔직한 찰리'군의 친구되기 이야기는 눈물겹다.

 

그래서 말인데, 빌선생님이 건네주는 도서들의 연계관계도 흥미롭다. 왜냐면 조금씩 조금씩 불안감을 해소하며 깊이있고 사려깊은 판단을 내려주길 은밀히 원하는 선생님의 의도가 담겨있는듯해서다. 또 소설속에는 소통에 관한 또 하나의 매개체가 등장한다. 바로 찰리가 패트릭, 샘과 공유한 음악들.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테이프에 담아서 건네주는 그네들의 문화들을 이용해서 찰리가 평상시 자신의 감성을 고이 간직한 음악들을 친구들에게 꺼내놓는 것이다. 아래는 찰리가 샘에게 건네준 테이프에 담긴 음악목록이다.

 

Asleep - 더 스미스,

Vapour Trail - 라이드,

Scarborough Fair - 사이먼 앤 가펑클
A Whiter Shade of Pale - 프로콜 할럼
Dear Prudence - 비틀즈
Gypsy - 수잔 베가
Nights in White Satin - 무디 블루스
Daydream - 스매싱 펌프킨
Dusk - 제네시스
MLK - 유투
Blackbird - 비틀즈
Landslide - 플리트우드 맥
Smells Like Teem Spirit - 너바나
Another Brick in the Wall Pt.2 - 핑크 플로이드
Something - 비틀즈


cf) 영화에서 등장한 데이빗 보위의 'Heors'더 소설에 맞는 것으로 느껴지는데 소설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의 해소는 후반부에 가서나 확연히 드러나지만 과정들속에서도 찰리는 분명히 폭주하는 광기의 소년으로 묘사되지는 않았다. 엄밀히 이야기해서는 심리적 장애를 가진 환자였으므로 통상적인 학생으로서의 고민을 이야기하기는 어려웠지만, 많은 부분들에 대해서는 찰리특유의 솔직함으로 덤덤히 서술했고 또 그것들의 이면에는 자신이 왜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심정을 공개해놓았다. 그걸 읽는 독자들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할수도 있겠구나'라는 의외의 동감을 경험할수 있다면 이 책은 교묘하게 부모세대들에게도 충분히 납득할만한 소설로서의 기능을 다하는 셈이다. 무엇보다도 좋았던 건, 찰리가 샘을 보내면서 들었던 샘의 진심들..'너도 어떤 행동을 했어야 했어'라는 말, 그게 찰리에게 커다란 희망과 깨달음을 주었을 수도 있다. 자신이 삶에 있어서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전면에 나서기 위한 준비운동같은 느낌이다.

 

부족하지만 찰리는 영화에서도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에게 한계는 없어" 라고...

 

 

아마 또래들에게는 인생을 두고 살아가는데 있어 용기를 주는 그런 가슴벅찬 독백이 아니었을까.

(참고로 영화또한 잘만들어졌으니 꼭 봐두었으면 ..)  

 

 


월플라워

저자
스티븐 크보스키 지음
출판사
돋을새김 | 2012-12-24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미국의 100만 청소년독자들을 열광시킨 성장소설 『월플라워』.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
Review BOOK/소설2013. 1. 18. 18:00

<아르센 뤼팽의 마지막 사랑> : 모리스 르블랑. 성귀수 옮김.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오리지널 특유의 뤼팽분위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편이어서 성귀수씨가 탁월한 솜씨로 번역한 까치판의 전집들을 모조리 다 읽어대진 못했다. 정말 좋아하는 몇 편만 듬성듬성 읽었을 뿐이다. 그것도 813의 비밀같은 내용도 꽤 되고 구성도 좋고 인기작중에 인기작이랄수 있는 것을 골라서... 그런데도 오히려 난 어린 시절 읽었던 루팡 시리즈를 잊을 수가 없다. 그 때 읽었던 작품들이 어디 출판사인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기억속에는 까치판의 뤼팽 이미지와는 좀 달랐다. 더 사악하지도 그리고 음흉하거나 더 범죄자스러운 스낌이 걷혀진 모험가였다고나 할까.(기암성에서의 뤼팽은 중년삘이 좀 나주셨지만  적어도 괴도신사편에서는 청년의 느낌이 물씬...흑진주 사건도 꽤 좋아했던 작품이고, 세븐하트이야기도 정말 흥미진진했다.) 아마 성귀수씨의 완역본이 더 뤼팽 원작에 더 가깝고 더 생생하리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왠지 유년시절의 뤼팽이 좋은 건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 같다.


근래에 시리즈가 우후죽순처럼 출간되는 건 아마 저작권으로부터 완연히 풀려서일 것이다. 물론 셜록 홈즈도 마찬가지이고 ...예전 기억을 떠올리는 독자들은 이런 재출간에 반색하겠으나 세월이 지나고 난 뒤에 느끼는 감흥은 몇 십년 전하고 같을 수가 없기에 감동도 반감, 그리고 흥미도 반감되기 마련이다. 책장을 들고 괴도신사 아르센 뤼팽 의 1권부터 기암성을 넘어갈 때 즈음, 어렸을 유년시절에 느꼈던 흥미진진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더랬다. 이미 나의 상상력과 기괴할데로 날카로워진 현실감각을 탓하며 지루해져만 갔다. 더우기 개인주의적 해결사로만 알았던 뤼팽이 부하들이라니..그리고 숨겨진 장치, 통로...이런건 너무 많이 등장하면 추리소설이 아니라 모험소설이 될 뿐인지라 어린 시절 홈즈와 필적할 만큼 두뇌력을 자랑했던 뤼팽의 정체가 적나라하게 밝혀져버렸다. (지금도 홈즈가 벌이는 두뇌게임, 즉 추리적 패턴을 뤼팽이 수행해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아마 추리에 대한 요소가 너무 반감되고 비밀통로, 모종의 장치, 그리고 너무 거대해져버린 부하들의 출연이 뤼팽스토리를 훼손했다고 본다. 그리고 과정의 생략이 너무 많다.)


<아르센 뤼팽의 마지막사랑>이 작품은 숨겨진 르블랑의 유작으로 성귀수씨가 우여곡절끝에 지인으로부터 이 원고를 넘겨받고 번역했다고 알려진다.  아마 뤼패니언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겠으나 사실 숨겨진 유작이라고 해서 그게 재밌을 것라는 보장은 별로 없다. 상징적 의미라든지 뤼팽이 또 다른 모험담 정도의 가치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아무튼 설정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코라 드 레른의 주변 네명의 남자중 뤼팽이 숨어있다. 모종의 사건으로 코라는 위기에 처하고 그의 부는 자기방에서 '진정한 사랑을 찾아라'라는 유서을 남기고 권총 자살을 한다. 이후 아르센 뤼팽은 코라의 곁에서 그녀를 지키고 사랑을 얻게 된다는 줄거리이다. 르블랑의 뤼팽 패턴을 대략 짐작하고 있어서인지 역시 뤼팽이긴 했지만, 특유의 거만에 가까운 자신감, 그리고 실수와 좌절에 대한 연극대사같은 독백들을 읽게 되면 고전치고는 너무나 작위적이어서 약간 현대적 색채와 이질감이 느껴질지도 모른다.


뤼팽을 좋아하지만, 아마 르블랑의 고전 뤼팽은 시대적인 괴리감이 꽤 있다. 아마 이건 취향탓일텐데, 난 스스로 고뇌에찬 뤼팽을 좋아하고 혼자 상상하고 모험을 즐기는 그런 스타일을 좋아하는 것 같다. 왕비 목걸이 사건에서 어린시절 앙트와네트의 목걸이를 탈취하는 라울의 모험. 파티에 나타나선 자기가 아르센 뤼팽이라고 밝히는 그런 반전과 카타르시스를 좋아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 이 마지막 사랑편은 여전히 뤼팽스럽고 흥미진진하지만 전작들의 위명으로 볼 때 그렇게 탁월하게 재밌는 작품이라곤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뒤늦게 르블랑의 유작이 등장했다는 반가움정도는 들지도 모르겠다. ...


cf) 그런데 까치판 뤼팽 전집을 모조리 다 읽고 실망을 하더라도 해야지 드문드문 읽고 실망하는 것 같아서 겸연쩍다. 때가 되면 꾸준히 다 읽어 볼 예정이다. 뤼팽 전집에서 정말 재밌었던건...카리오스트로 편, 그리고 1권 괴도신사, 813의 비밀 정도다..나머진 약간 실망상태...


 


아르센 뤼팽의 마지막 사랑

저자
모리스 르블랑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2-05-1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70년 동안 잠들어 있던 아르센 뤼팽의 마지막 이야기!괴도 신사...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
Review BOOK/소설2013. 1. 15. 14:00

<언더그라운드 맨> : 믹잭슨.

 

 

 

 

<뼈모으는 소녀>를 통해서 '고딕소설'의 재미에 맛을 들인 독자들은 믹잭슨의 또 다른 걸작 <언더그라운드맨>을 어떻게든 접하게 되어있다. 마치 집으로 가기위해 정해진 노선을 자연스럽게 갈아타듯이 필연적으로 언더그라운드맨에 도달하는 식으로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뼈소녀'에서만큼이나 '언더그라운드맨'에서 엄청난 흥미를 느꼈으리라는 보장은 별로 없다. 언더그라운드맨은 그야말로 '언더스러운' 주인공의 외로움과 쓸쓸함, 자아성찰, 기묘한 자기탐구를 통해 세상을 보려는 운둔자의 행로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은둔자로부터 느끼는 뉘앙스들은 폐쇄적이거나 자기탐닉적이고도 복잡한 내면 탐구의 영역으로 옮겨가기 일쑤고 그렇게 되면 독자들은 독백의 바다에서 홀로 이성의 돗단배를 펴고 지루함의 풍랑을 견뎌야한다. 어디로 갈지..행여 모호하고 이해할 수 없는 연민에 휩쌓인 채 표류하는 자신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뼈소녀의 기묘한 모험담을 뒤로하고 이런 내면탐구의 시절로 돌아간다는 건, 대중 통속소설의 매니아 입장에선 받아들이기 쉬운일이 결코 아닌 것이다. 더우기 이건 믹잭슨이란 작가에 대한 신뢰성에 대한 기준이 될 테니까..(언더그라운드맨이 문학적으로 훌륭하다는 사실이 뼈소녀에 대한 환상을 그대로 유지시켜준다는 보장은 결코 없다.)  위안이라면 그래도 이 작품은 영국의 휘트브레드상을 받은 '수상작'이란 점.

 

문학적인 재능과 스토리 텔링에 관한한 믹잭슨의 노력을 감안한다면 뼈소녀보다는 더 진지할테고 더 고형적일거라는 믿음같은게 자리잡을 테고....그 기대감을 가지고 본다면 초반부에서는 캐번디시의 삶도 뼈소녀처럼 꽤 미스테리하고 괴이스럽기에 드디어 믹잭슨의 고딕재능이 힘을 발휘하는 구나라고 쾌재를 부르실수도 있겠다. 하지만 점차 스토리가 진행 될수록 독자들은 그런 흥미거리로부터 멀어지는 플롯을 보게된다. 읽는 내내 느끼게 된 유사유형의 인물..'쥔스키의 '좀머씨'? 호밀밭의 파수꾼? 세상에 대한 자기만의 시선, 자기를 평가하는 세속적인 기준으로부터의 탈피, 스스로 돌아보며 세상과 벽을 쌓았지만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인연의 고리들. 결국 무엇인가 쓸쓸하고도 처연한 느낌 (공작의 표현대로 가을이 남겨두고 간 시체들로 가득찬 거리를 보는 듯한)에 둘러쌓이게 된다. 이윽고 아마 공작의 말로가 결코 행복해지지 않으리라는 모종의 안스러움이 서서히 발밑에 밀려들오는 바닷물처럼 잠식한다. 좋은 쪽으로 기대보자면 말이 없지만 숙고적이고도 친절한 주인공이 세상을 더 살아볼만한 무엇으로 인식하여 약간의 소통을 사소하게 시작하는 식으로 결말이 났었어도 꽤 좋은 동화이야기가 되었을 수도 있다. 마음 한켠에 뿌듯함을 가지고 캐번디시의 새로운 사랑을 기대하면서...클레멘트와 어깨동무라도 하고 슬며시 미소지으면서 스케이트 신발을 다시 신으면서 그렇게 마무리를 했더라면...

 

악몽이 침대보에 어떤 식으로든 흔적을 남겨놓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무명천이 고독의 찌꺼기를 빨아들였을 수도 있었다. 최근 들어 심해진 잠을 설치는 현상은 완전히 떨어진 줄 알았던 나쁜 감정이 내 몸에 의해 다시 덥혀지면서 또다시 강해진 결과가 아닐까? (38p)

 

우리가 살면서 쌓는 경험은 기억이라는 귀중품실에 안전하게 보관된다. 우리는 이곳에다가 우리의 과거를 넣어둔다. 우리가 보관하는 기록이란 그때그때 모아들인 기념품, 즉 삶의 사소한 성공과 가슴 아픈 실패,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과 (운이 따라준다면) 우리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전부다. 잘 살았다는, 삶이 다했을 때 이정도면 괜찮게 살았다는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마음이라는 거대한 바위턱, 즉 우리의 기억속에 얌전히 보관되어 있는 그 많은 증거들이다. 하지만 귀중품실의 입구가 파손된다면 ? 틈새 어딘가로 비바람이 들어온다면 ?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우리는 희망이라곤 없이 영원히 떠돌아다녀야 할지도 모르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53p)

 


 외로움과 쓸쓸함의 농도가 더 진해지는 건, 외부요인이라기 보단 스스로에 대한 결정때문이라고 믿는 편인데, 노환과 지루함과 달라지지 않는 일상과 재미와 활력을 찾기엔 공작에게 너무 '연인'과 '지인'과 '친구'들이 부족했다. '책상'과 '인체지도'와 '터널'같은 건  정을 터놓을 존재들이 아니다.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는 것들이라고 할까. 몇 십년동안이나 계속된 지루함의 결정체이거나 변하지 않을 법한 일상사 따분함, 외로움과 고독을 더 강하게 만들어줄 담금질에 필요한 촉매제 같은것이겠지 아마.. 물론 생각하시기 좋아하는 많은 분들이 세상과 이별하지 않기 위해 자기만의 방법으로 터널을 뚫고 주유했다고 생각할테지만 나는 터널도 폐쇄적인 자기 기만처럼 보였드랬다. 왜 그는 터널에 흥분했을까. 한발자국이라도 은밀하게 조용히 방해받지 않고 '나다닐 수 있어서?'


공작은 패니 아들레이드와 결혼했어야 했다. 그렇게 되었다면 유년시절의 쓰라리게 아픈 존재감상실에 대한 은밀한 슬픔을 위로 받을 수 있었고 '스노'와의 이별도 덤덤히 인정했을 것이다. 범람하는 유년시절의 잊혀졌던 아픔과 상처에 대한 보호막따위는 그저 공작이 혼자 되뇌였던 독백들로 치유될만한 것들이 아니었던 셈이다.  소설에서 유난히 별처럼 빛났던 건  적나라한 현실인식이 아니라 순수하고 참신했던 그의 표현력들인데,  육체와 영혼을 연결시킨 실, 연을 띄우듯 꿈을 꾼다고 했던 말들. 애들레이드가 자신의 청혼을 거절하고 얼마 안있어 생선조각에 목숨일 잃게된 아이러니함따위에 연연하지 않듯 덤덤히 버텻지만. 사실 그건 버틴게 아니라 계속해서 외로움에 침식당하고 있었으리라.

 

 

내 생각에는 아주 가느다란 실이 닻 역할을 하는 텅 빈 육체와 영혼을 연결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이 실을 통해 별들 틈에서 노니는 영혼의 진동이 전달되는데, 잠이 든 우리몸은 이를 꿈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자면서 연을 날릴 경우 우리는 연을 날리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연이기도 하다. (78p)


 


언더그라운드 맨

저자
믹 잭슨 지음
출판사
생각의나무 | 2009-07-17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어느 기이한 귀족의 흥미진진하고도 애잔한 초상!뼈 모으는 소녀의...
가격비교

Posted by kewell
Review BOOK/소설2013. 1. 10. 13:30

 검의 대가(El maestro de esgrima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김수진/열린책들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Arturo Perez-Reverte)<검의 대가>(El maestro de esgrima)을 아무 의심없이 광풍의 속도로 읽어버렸다. 누가뭐라해도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1990)이나 <뒤마클럽>(1992) 정도가 그의 유명작이겠으나 '검의 대가'는 처녀작만이 가진 임팩트가 있다. (아마도 그리 길지도 않으면서 굉장히 타이트한 스토리때문이었으리라.), 뻔한 미스테리 추리물 느낌이 약간 나주시다가 결말에 이르러서는 독자들의 기대와 환상을 뒤엎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여기서 묘하다고 한 점은 책을 끝까지 읽어보시면 알게 되신다.)


예전 로만 폴란스키의 괴작<나인스게이트>(Ninth gate)를 보고 나서 <뒤마클럽>이 원작이라는걸 알았다. 그로테스크하면서도 미스테리한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뒤마클럽을 하루만에 다 읽어버렸던 기억이 있는데. 물론 영화와 소설은 괴리감이 있기 마련이고 아르투로 페레즈의 뒤마는 좀더 학구적이고도 좀더 인간적이었다는 느낌인터라 영화의 조니뎁과는 약간 어울리지 않았음에도 묘한 분위기만큼은 매력적이었다.그에 비하면 <검의 대가>는 문학적이란 뉘앙스가 강하게 느껴진다. 혹 역사적 배경과 결합된 서사적 구조때문일까라고 추측 해 볼수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것보다는 신비함과 미스테리한 초월적 분위기가 판타지적으로 등장하지 않아서가 아닐까..

 

아무튼 <검의 대가>쪽은 스페인의 19세기 정치적 상황이 명료하게 명시되어있는터라 좀더 무겁고 어두운 스페인의 묵직함같은게 소설 전반에 흐른다. 정치적 관점을 가지고 주인공 하이메와 그를 둘러싼 지인들의 격론도 소설의 배경을 차지하고 있으며 초반부 전개를 읽다가보면 혹시 이게 정치소설인가 하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킬만큼  굉장한 분량으로 독자들을 지치게 한다. (아마 재미로 이 소설을 집어든 독자는 대실망 예상! )  물론 주인공 하이메 아스트를로아는 이런 정치적 격랑에 휩쓸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 철저한 무관심과 자기절제를 보여주면서 서서히 자기 갈 길을 간다.


하이메는 나이가 들면서 뭔가를 이뤄내야 한다는 강박관념같은게 있었는데 아마도 그건 '궁극적인 검술, 즉 최강의 검법을 완성하는 것' 이었던 것 같다. 여기까지 오면 '오호 이건 무협소설일지도..' 라는 착각이 있을테지만 많은 독자들이 기대하는 초식 전개 같은 무협지적 묘사는 흉내만 낼 뿐 포커스가 향해있지도 스토리상 그걸 원하지도 않는다. 물론 다양한 플뢰레 펜싱에 대한 기술용어가 줄을 지어 등장해서 마치 이걸 다 알아야만 하이메의 극강 검술을 상상이라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들긴 한다. 아마도 아트루로의 검술용어 나열은 검술가로서의 섬세한 몰입, 정신세계로 향하는 그만의 여정을 구체화 할 수 있는 유일한 지도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뒤돌아서 찌르고, 한발 비켜서 검을 세우고 꼿꼿치 목을 노린채 연속해서 두번찌르고..하는 부연 설명과 화려한 이름들의 나열속에서 하이메는 왠지 모를 이상향 추구를 목매 기대리는 절실함같은게 엿보인다고나 할까.


그런데도 하이메는 '궁극의 경지'로 올라갈 기미같은게 도무지 보이질 않게 되고, 서서히 자신의 나이와 세월의 흐름속에서 다다를 수 없는 실패감과 그에 따른 무기력함을 느끼게 된다. '정의롭고' '굳건하며' '소신을 지키는' 따위의 자세가 허물어질때즈음,  아델 오테로가 찾아온다. 뒤늦은 나이에 젊고 매력적이고 검술까지 잘하는 묘령의 여인이 등장하면서 하이메는 다시 피가 요동치고 삶의 기쁨까지 누리게 된다. 여기까지만 해도 노회한 검술가와 매력적인 여제자사이에서 벌어지는 밀고당기는 로맨스, 그리고 정치적 격랑으로인해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면서 기구한 애정행로를 테마로 하는 로맨스 소설의 진면목을 보여줬으면 아마 모르긴 몰라도 '찰스디킨즈'의 두도시 이야기만큼 거대 서사소설로 변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여기서 숙명적인 전개를 꾸며놓았다. 독자들도 대개의 경우 결말을 예상하게 되는데 아마 충격의 여파는 하이메가 결말에서 오테로를 어떻게 맞이하는가가 아니라 , 오테로가 하이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느냐 쪽이 아닐까싶다. 거기서 독자들은 충격까지는 아니어도 작은 탄식을 내뱉지 않을까.


과연 이 여인은 무엇때문에 하이메로부터 검술을 배우려고 했던것인지는 미스테리 소설이 가지는 기본 장치정도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건 그다지 중요한 요소도 아니고...다만 오테로가 스승 하이메로부터 느꼈던 감정의 본질, 그리고 하이메가 오테로에게 쏟았던 관심과 열정의 정체,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역설적인 혼란속에서 전개된 하이메의 궁국의 검술이 드러나면서  하이메가 심혈을 기울였던 이상향을 완성시키게 된다. 독자들은 하이메가 그토록 원했던 궁국의 검법의 현실화를 보면서 어쩌면 이상향이란 냉혹하면서 피할수 없는 숙명적 대면을 극복하면서 나타나는 찰나적 깨달음일 것이다라고 느낄수도 있겠다. 원래의 검술가로 돌아온 하이메에게 뒤늦은 로맨스와 사랑과 회한은 어떤 의미였을까.


cf) 아르투로 페레즈는 <뒤마클럽>을 통해서 스페인의 움베르토 에코라는 명성을 가지게 되었다는데 움베르트의 <장미의 이름>을 읽었던 나는 <뒤마클럽>도 그렇고 <검의 대가>도 그렇고 슬며시 '어디가 비슷하다는 거지?' 라고 되뇌이고 있다. 유사한 뉘앙스라곤 역사적 사실과 서스펜스를 결합시키는'분위기'정도..  아무튼 움베르트 에코와 아르투로 페레즈를 엮는건 좀 비약이 아닐까싶다.

 


검의 대가

저자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출판사
열린책들 | 2009-12-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검의 대가』고전들을 젊고 새로운 얼굴로 재구성한 전집「열린책들...
가격비교

 

Posted by kewell
Review BOOK/소설2013. 1. 5. 23:30

보네거트는 속이 뜨금거릴만큼 영악하면서도 폐부를 찌르는듯한 신랄함을 위트에 버무려서 자신의 문장으로 빚어내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는 작가로 유명했다. (살아생전에는..) <제5 도살장>같은 진지 그 자체의 저작들에서도 비슷한 명징함이 강력함으로 다가오지만, 오히려 가볍지 않은 진지함때문에 분위기자체는 엄숙했다라고 볼 수도 있다. 몰살과 전쟁과 잔인한 소재가 완연히 유쾌해지리라는 건 거의 비약에 가깝기 마련이다. 따라서 커트 보네거트가 독자들에게 열렬한 호응을 받고 환대를 받은 작품은 오히려 덜 진지하면서 가볍다고 볼 수있는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씨>같은 작품일수도 있다. 차라리 여기서 커트 보네거트의 진가는 더 진해진다. 

 

주인공 엘리엇 로즈워터의 기행에 가까운 모험담( 백만장자이면서 상대적으로 못살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봉사 헌신하는 줄거리)을 보여주면서 역시 부와 가난, 그리고 미덕과 악덕을 그만의 방식으로 분류, 전개, 기어코 마지막에서 거대한 반전을 선보이며 독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보인다. 그런데 다들 눈치채겠지만, 보네거트의 인기나 매력이 실제 작품에서 드러난 이야기흐름이라던지 '주제'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어느정도 영향력이 있기야 하겠지만)  그의 표현능력, 즉 현실을 빗대어 교묘하게 틀어버린 그의 문장 구사력에 있어서 그만이 가진 독특한 능력때문이라면 모를까. 

 

그의 독특한 묘사능력은 그동안 세간에서 전혀들어보지 못한 참신성, 그리고 무릅을 치게 만드는 비유, 기발한 조크로 지면 위를 수놓았다.  '정직하고 부지런하고 평화로운 시민들은 최저임금만 요구해도 즉시 흡혈귀로 분류되고, 칭찬은 언제나 엉성한 법망을 피해 범죄를 저지르고 막대한 돈을 챙기는 방법을 고안한 자들의 몫으로 돌아갔다'라는 설명을 '유머없는 미국 계급제도'에 붙여놓는 기발함은 약간의 예시정도에 불과할 뿐 소설내내 이런 류의 보네거트 시그니쳐가 고유명사처럼 계속해서 등장한다. 


'양심의 입을 막을 때마다 가장 먼저 나타나는 지도자는 '사리사욕'이라고 묘사하면서 사리사욕은 기어코 해골문양의 깃발로 '널 지옥으로 보내주겠다'라는듯이 위압적으로 휘날린다고 하고 '우리는 당신의 재떨이에 오줌을 싸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신도 우리의 소변기에 담배를 버리지 말아주세요'라고 부자들에 대한 묘한 시선을 어필하기도 했으며 엘리엇이 자신에게 기대는 다수의 루저들에게 처방하는 단순명료 방법으로 '아와' (아스피린 + 와인)를 권유한다던지, 가상의 SF소설가, 킬고어 트라우트를 이용해서  2BRO2B 이야기를 햄릿과 치환시키는 과정에서 천재성을 느낄만큼 탁월함으로 다가온다. 

 

이 밖에도 엘리엇이 꿈이야기를 하면서 '소스타인 베블런'이 자꾸 꿈에 나타난다고 희화화하는 대목에서 슬며시 미소짓고,   공중전화부스의 낙서에 '실라 테일러는 감질만 나게하는 여자다'라고 쓰여있다고 언급하는 부분,  엘리엇의 부인인 실비아의 병명을 '자신보다 불행한 사람의 고통에 대한 히스테리성 무관심'으로 정의된 사마리안 실조증, 정상인이란  부유하고 산업화된 사회의 상류계층에서 탈없이 살아가는 사람으로 양심의 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는 부류'라고 비꼴 때 드디어 그가 현실 사회에서의 부조리함과 인간내면의 본성을 가감없이 뒤집어 주는 능력에 재주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책 뒤에도 언급되었다시피 엘리엇이 아기에게 세례주면서 읇조린  '안녕 아가들아 지구에 온 걸 환영한다. 여긴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단다 그리고 둥글둥글하고 축축하고 붐비는 곳이지. 여기선 고작 100년정도 산단다. 아가들아 내가 아는 단 하나의 규칙을 말해줄까. 제기랄, 착하게 살아야한다." 라고 한 부분을 통해 분명 보네거트의 편린이자 정체성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 노암 촘스키가 자신의 논리를 블랙유머스럽게 어필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얼추 비슷하지 않을까.

 

이외에도 샐수 없이 많은 기발한 문장들이 등장한다. 밑줄쳐두고 귀퉁이를 접어놓은 것만 수십페이지가 되니까. 책 전체가 위트있는 묘사력으로 똘똘뭉쳐있는 느낌이다. 무엇보다 이 책이 재밌고 매력적인 점은 미국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엘리엇의 아버지와 엘리엇의 대비뿐만 아니라 노먼 무샤리같은 부류의 인간들이 강탈하려고하는 돈과 재력의 본질을 시니컬하게 비웃으면서 막판에 통쾌하게 대처하는 방식이다. 방식조차도 일관성있기는 쉽지 않다. 나같으면 눈에는 눈식으로 악질적으로 변신했을 수도 있다. 물론 여기까지 가지 않았어도 이미 엘리엇의 기발한 언행과 건들거림을 통해서 독자들은 많은 카타르시스를 느낄것이다. 


독자들은..아마 엘리엇같은 사람을 현실세계에서 보지 못할 것이라는 아쉬움과 어쩌면 그토록 바라마지 않았던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대한 명료함이 결합된 실체에 열광했을 수도 있다. 좀더 잘사는 사람들이 적어도 몇푼의 돈을 분배니 어쩌니하면서 나눠주지 않더라도 가졌으면 하는 마음의 자세같은 걸 슬며시 깨닫게 해줘서 그럴 수도 있고..아무튼 커트 보네거트는 이 책을 통해서 깊이있으면서도 통찰력있고 핵심을 꿰뚫는 몇가지를 알려줬다. 그건 정말 이 세상을 착하게 살아도 당신이 손해보는 건 별로 없다라는 거부하기 힘든 믿음, 설사 의심이 들더라도 왠지 대중들이 올바른 선택을 하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는 무언의 바램같은 것들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세상은 좀 더 좋아질 수 있다고 말이다. 

 

읽을 수록 묘한 미소가 지어지는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씨

저자
커트 보네거트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0-03-05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주정뱅이 백만장자 로즈워터의 유쾌한 모험담미국 최고의 풍자가이자...
가격비교

 

 


 

Posted by kew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