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anilla Essay2013. 8. 8. 20:45


챈들러

레인먼드 챈들러, 무라카미 하루키, 스콧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카버, 트루먼 커포티, 존 치버, 그리고 업다이크까지..우연이라고 말할 수 없는 특별한 이유로 위 작가들의 작품을 읽었다. 슬쩍 눈치빠른 분들은 아셨을 것이다. 선택과 순서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람은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라는 걸... 그가 어디 작품 한 귀퉁이에서라도 이 작가들을 언급안하고 넘어갔던 적이 있었던가. 그는 위의 작가들을 사랑했고 또 열렬히 추종하기도 했었다. 그리하여 하루키를 읽었던 대다수의 독자들에게는 한가지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실마리를 이 작품들에게서 찾게된다. 그는 어떻게 이렇게 군더더기 없으며 세련된 문장들을 구사할 수있는가에 대한 궁금증말이다.  


여타의 기사와 사설과 평론을 몇개 찾아보니까 나같은 경우가 적지 않았나 보다. 죄다 하루키 팬이랍시고 줄줄히 피츠제럴드, 카버, 커포티를 찾아서 읽었다고 고백들을 하고 계셨으니까.. 평론가들은 왠지 그런 하루키팬들에게 거봐 하루키가 소개해주지 않았으면 찾아보지도 않았을텐데 용케 좁은 소양으로 운좋게 명작들을 찾아 읽으셨네라며 은근슬쩍 비아냥거렸다. (지금도 이 현상은 진행 중이라고 본다.) 어찌됐든 좋은 명작이야 두루두루 읽히면 좋다. 아무리 좋은 작품들도 시간에 한번 매몰되면 어떤 계기가 벌어지기전까지는 '무덤속 신세'면할 길 없으니까. 이상한 나라 앨리스도 그랬고 위대한 개츠비도 그랬으며 '그리스인 조르바'도 모두 무덤속 신세들이었다. 


스콧 피츠제럴드

행여 갑자기 조인성이나 소지섭이 나와서 한 손에 <폭풍의 언덕>을 들고 커피한잔들고 읽으면서 혼자 '왜 너는 괴로우면 안되니'라고 읇조리며 연인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이라도 날린다면 그 다음날 서점가에는 에밀리 브론테의 이름이 박힌 책들의 탑을 보게 될 수도 있다. 그게 무슨 죄라고. 민망해야 할 꺼리도 못된다. 찬밥되었던 고전들을 평상시 알아보지 못해서? 어차피 되새김질은 소만 하는 것도 아니고 그 소조차도 과거에 소화불량이었던 시절을 생각하며 다시 억센 풀을 뜯어먹을 절호의 기회가 생긴다고 생각하면  이 보다 더 흥미진진한 모험도 없다. 그래서 다시 읽는 건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가끔 여러 문학계의 글들을 접하다보면 일상에서 김치드시듯 늘 고전을 탐독하지 않으면 당신은 독서가의 자격이 없는거야라고 나무라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다. 고전 문학소설을 삼면에 켜켜히 쌓아두고 고전의 숲에 파묻혀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그러지 못했다고 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고전명작 몇 권 다시 드는 것도 꽤 의미심장한 일이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닐테니..


트루먼 커포티

어찌되었든 언급한 책들을 주욱 돌아보다가 미처 읽지 못했던 몇 권의 책들을 발견했다. 어..그런데 읽었던 책도 책장을 넘기다보니 이게 또 새로운 거다. 기억도 하나도 안나는데다가 줄거리조차 새롭다고 느껴질 때는 혹시나 오래전 책 사재기만 하고 읽지도 않았던 비운의 책들이 아니었을까 곰곰히 생각하게 된다. 역시 기록이 없으면... 그리고 적용과 응용이 없으면 전부 휘발되어 날아가버리는 걸까. 내 과거의 책탐독의 결과는 실온에 나온 드라이아이스만도 못한 수명이었나보다. 그렇다고 시디나 DVD같은 기억력을 바랬던 것은 아니었는데 이토록 생경하다니..이래서야 책을 읽었다고 할수나있나 푸념만 나왔다. 


아마도 당시에는 미사여구와 화려한 만연체 난무하는 고전소설의 페이지속에서 지루함을 이기는 방편으로 그저 '읽기'만 했으리라. 미션 클리어처럼 앞으로 돌진하면서 한 줄 한 줄 해치우는 심정으로...그 의미와 행간의 뜻따위는 어떻게되도 좋다고 생각했겠지 그러다가 맨 뒤쪽 표지로부터 몇 십장 안쪽에 다다르면 아 대충 이렇게 결말이 되는구나라고 신속히 덮어버리고  치워버렸을 게다. 그래서말인데 누가 카버의 단편을 이야기하거나 커포티의 세련된 문장을 인용하거나 하면 속으로 '그런걸 다 기억한단 말이야?' 엄청 감동적이었나보네라며 놀라워했다. 소설의 편린을 기억한다는 건 두고두고 그 사람의 인생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다는 뜻이다. 물론 그 대상이 되는 문장이 독을 품고 있을지 아니면 아름다운 로망을 이야기일지 선택하는 독자의 몫이겠지만 책 귀퉁이 아니 메모지 짜투리에 끄적여쓴 글귀조차도 어느날 문득 발견하게 되면 고구마 넝쿨캐듯 당시의 감흥들까지 부록으로 얻을 수 있다. 추억이든 영향이든 이런 것들이 가능하려면 적어도 뭔가를 기억하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레이먼드 카버

아쉽게도 그런 기억의 파편 및 짜투라기 끄적임조차 보이지 않는 내 독서인생이라니..좀 한심스럽고 허무했다. 최근 들어서는 한 권을 읽으면 조그만한 페이지에 단순하게라도 써둔다.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자만 그래도 쓴다. 그렇다고 뭘 어떻게 활용하겠다는 거창한 생각같은 건 없다. 그저 써둘 뿐이다. 억울하니까. 뭔가 현재의 생생함이 잠재의식으로 가버리는건 너무 매정하고 무책임스러워 보여서다. 뇌는 너무 매정하고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으니 안간힘을 쓰면서 무엇이든 써서 남겨야 겠다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어제 그렇게 많이 읽었다고 자부했던 커포티의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또 다시 읽었고 카버의 단편집 '사랑을 말할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들'을 다시 꺼냈다. 읽다가 보니 언저리 비슷한 처지의 책들을 죄다 다시 읽고 싶어졌다. 이를 어쩌지 시간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고 먹고는 살아야 하는데 이 충동적이고도 무책임한 의욕이라니..


존 치버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독서가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가치있을까라고 ..명사들의 서슬퍼런 꾸짖음이 귓가에 들리는 듯 하지만 사실 내가 책을 몇 권 더 읽는다고 해서 내 삶이 윤택해질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경험적으로 보면 감성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좀 더 사색적이 되는건 맞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스타일에 대한 구성요소지 경제적인 구성요소로 작용하진 않는다.  매정하게 이야기해서 내가 고전 몇 권을 더 읽어도 마이너스 통장에 뭔가 입금되는 건 아니다.  무형의 자산. 좋은 소리다. 마음의 양식이 되고 깊어가는 내면의 성찰도 좋고 다양한 인간군상의 간접경험도 사는데 도움이 될테지 그런데도 이 독서가 죽고 못하는 어떤 거만스러움이 될 때가 있다. 가난하고 우울해도 정신적으로 좀 더 깊어질거라는 늘러붙은 자존심마냥 하염없이 비현실적인 어떤 고리타분함 같을 때가 있다. 그런데도 이런 책들을 읽게 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존 업다이크

난 아무래도 아무생각없이 그냥 읽나보다. 그래서 오래도록 곁에 두고 읽고 또 읽고..좀 바보스럽고 무의미한듯 하지만 왠지 이야기들이 나와 너무도 달라서 황당해서 그런걸까 것도 아니면 언젠가 경험했었던 유사감정의 기시감때문이었을까. 말로는 표현하기 힘들겠고 어떻게든 좀 공유해보려고해도 누구랑 말해야할지 모르는 막막한 그런 상태에서 맞닥드린 공감대 같은 것들...? 이도저도 아니면 챈들러나 커포티나 카버, 피츠제럴드가 일정부분 추억을 점거하고 있어서일수도 있겠다. 그들이 없었으면 내 청춘의 초상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거라는 .....뭐...비스무리한 착각같은 것들인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 모든 작가들을 사랑한 덕에 그를 읽었던 대다수의 팬들도 이 작가들의 작품을 따라 읽었다. 어떤 점에 있어서는 그냥 찾아읽었어도 좋았겠지싶다.  우연찮게 도서관을 뒤지다가 문득 '달려라 토끼'를 읽고 '그게 누구였는지 말해봐'를 읽고 '빅슬립'을 발견하고 '위대한 개츠비'를 집어들고 하는 일들이 운명처럼 일어나는것도 흥미진진한 일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고 한들..즉 하루키 아저씨가 소설에 언급하고 에세이에서 칭찬하고 개인적으로 너무좋다 어쨌다고 몇 줄 써놓은걸 보고 호기심에 찾아 읽었다고  한들 그게 부끄러운 책읽기가 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책을 어떻게든 읽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렇게 된 이상 이 후 스토리는 읽은 사람의 몫으로 남겨질 뿐이다. 읽었으니 좋은 것이고 좋았다면 더 기쁜일이다. 그게 비록 하루키덕이었지만..그게 아주 친한 친구를 통해서 또 다른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처럼 속으로 쾌재를 부를 일이다. 쾌재를 부를 일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무라카미 하루키



Posted by kewell
Review BOOK/소설2013. 2. 21. 16:00

<달려라, 토끼>(Rabbit, run) - 존업다이크 (John. Updike)

 

 

 

2010년 즈음으로 기억하는데, 토끼해를 맞이해서 컬럼을 수놓던 몇군데의 매스컴에서 '토끼' 연관성을 찾아 헤맨끝에 끄적여 놓은 소스제공으로도 '달려라 토끼'가 몫을 다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토끼 해와 달려라 토끼가 뭔 관련이 있다고..굳이 연상도 안되는걸 강제로 엮으셨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 쓸게 하도 없어서 기어코 '토끼'자가 들어가는 문학작품이라도 인용해야 겠다라고 생각하셨나보다.) 아무튼 토끼라는 뉘앙스에는 아무래도 '동화적' 색채감이 깔려있다보니 분명히 모르고 접하는 <달려라 토끼>에는 불행을 달고 사는 주인공이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역경을 딛고 희망찬 미래를 바라보면서 달려나간다라는 식으로 결말이 마무리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니까 토끼해에 대한 의미를 떠올릴때 달려라 토끼까지 끌어들이는 것 아닌가. 얼마나 거칠고 처참하고 암울한지도 모르면서...'달려라'라는 말은 대체로 '파이팅' '힘내'라는 의미를 품고 있으니까.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는 에세이들과 그의 작품들 귀퉁이에 업다이크의 책을 들고 어디론가 가서 읽어야만 하는 계절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수시로 써놓은 적이 있다. (1Q84의 신포니에타(야나체크) 한번 인용했다고 음반가게에서 갑자기 돌풍일으키는 것과 유사하게 업다이크 책도 찾는 사람들이 많았으리라. 최근 정리 발매된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에서 1968년의 봄을 업다이크를 읽기 좋은 계절이라고 언급하였다. 이외에도 업다이크는 그의 작품에서 수시로 등장한다.) 적어도 국내에서 업다이크 저작들이 90년대에 하루키의 인용에 의해서 슬쩍슬쩍 고개를 내민건 사실이다. '상실'과 '방황'을 무슨 장신구마냥 달고 고뇌했던  91학번 세대는 절판의 저세상으로 가버린 문학작품이라 할지라도 묘지라도 파헤쳐서 '업다이크 책들을 꺼낼 마음가짐들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하루키에 동조했었으니까. 감동먹은 감수성의 힘이란 그런 것 아닌가. 유행을 달리는 저자들의 유래와 정체성에 대한 탐구. 모든 출처에 대해 조사해보고 싶은 충동, 그러다보면 특유의 감수성이 어디로 부터 유래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만날 것만 같은 기대감. 그리고 업다이크의 대표작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저기...<달려라 토끼> 있나요? " 라면서...


앞서 언급한대로 미국 영미문학의 상징적으로 인용되는 <호밀밭의 파수꾼>, <위대한 캐츠비>에 비하면 <달려라 토끼>는 도대체 언급은 되는데 어디서도 구하기 힘든 책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절판의 회오리가 '토끼'를 오즈의 나라로 데려가버리고 난 후..잠시동안 업다이크는 '인용의 기호'로만 이미지화 되어 숨쉬고 있다가  2011년 문학동네에서 정영목씨의 번역으로 재등장했다. 말로만 듣던 <달려라 토끼>라니..이것이야말로 오래 가뭄 끝, 단비와도 같은 것이지 않나. '이야 이제 달려라 토끼를 읽을 수 있겠어. 그것도 제대로 된 번역으로..'라고 쾌재를 부르던 문학매니아들을 비롯해서 작가 지망생들의 기쁜 얼굴들하며...그렇게 보자면 이 <달려라 토끼>에 걸린 타이틀이 자못 궁금해진다. 도대체 어떤 소설이길래...업다이크의 대표작이 된 것일까라든지, 무슨 내용이었기에 4부작까지 이어지면서 업다이크의 명성을 드높여 주었는지 등의 궁금증이 생기기 마련이다.


<달려라 토끼>의 내용은 비 온 다음날 말끔하게 개인 하늘에 살짝 그려놓은 수채화같은 투명함과 산뜻함과는 거리가 멀다. 굳이 비유하자면 덕지덕지 발라진 유화풍의 그림인데다가 알수없는 붓자국, 흘러내리고 번진 그리고 닳다못해 찢어져버린 캔버스쪽에 가깝다. 내용은 거칠고, 폭압적이며 뼈대는 일탈과 방황, 그리고 기어코 독자들의 마음을 화석처럼 차갑게 만들고 난 다음 , 심해의 깊은 곳으로 던져져 무겁게 내려앉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주인공 해리 앵스트롬은 세일즈를 하면서 사는 중산층 20대다.  알콜과 TV중독에 빠진 임신한 부인, 나아지지 않는 생활, 그리고 과거의 촉망받았던 농구선수로서의 자존심등이 한꺼번에 회의감으로 몰려와 무단가출, 그리고 방황하다가 아무 남자하고 자는 '루스'를 만나 외도하고, 부인 제니스는 어떻게 살든 나몰라라로 일관하다가 동네 목사와 주위의 권유에 따라 (출산일이 다가온 부인때문에 어쩔수 없이..) 다시 부인에게 돌아왔다가..다시 반복되는 따분한 일상과 거절된 섹스로 인해 다시 또 가출...(이 부근에 다다르면 래빗에 대한 독자들의 불만이 최고조로 폭등한다.) 여기에 제니스는 딸 레베카를 실수로 익사시키고, 현실의 암울함을 견디다 못해 다시 가출해서 옛연인 루스에게 찾아가지만 거기서도 거절당한다는 뭐 아주 읽다보면 한심하고 미칠것 같은 증오가 일어나는 그런 내용으로 이뤄져있다.

 


페미니스트들이 업다이크를 여성혐오론자아니냐고 힐난했다고 하는데 충분히 이해간다. 등장하는 여인에 대한 몰인정하고도 무책임한 주인공 래빗(해리 앵스트롬의 별명)의 사고나 행동은 충분히 지탄받을만하다못해 '차라리 결혼이나 하지 않았으면'이라는 짜증까지 불러일으키고,  누가 어떻게 되든 현재 자신이 그렇게 느끼는데로 충동적이고 이기적이고 상대방은 생각지못하는 단세포같은 인물이었으니 그럴만도 하다. (그의 코치로 등장하는 토세로도 비슷하긴 매일반.) 그런데도 미국의 문학계는 이 책의 모든 상황이 다분히 '실존'적이고 중산층의 삶을 대변해주고 있다고하는 평을 걸어주었다. 이 이야기는 요약해서 '주변에서 일어날 법한 일상적인 이야기'라는 것이다. 쳇바퀴돌듯 이어지는 무기력하고 나아지지 않는 생활, 옴짝달싹못하는 현실적인 압박, 꿈과 유망함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려서 도대체 내일은 뭘 하면서 살아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 그런 시절이 한동안 지속될 때, <달려라, 토끼>가 그것들을 설명해주고 대변해주고 뭐 그런단 의미아닐까.. 이런 암울한 삶속에서 미국 중산층의 평범한 서민 래빗에게 무슨일이 일어나는지, 내면에서는 어떤 갈등과 절망과 암울함들이 스며드는지 아슬아슬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이런 일탈과 방황이 현실세계에서 일어난 버린 래빗으로서는 어떡하다가 이렇게 된 것인지 스스로도 납득하기 힘들어한다.


' 래빗은 진실을 느낀다. 그의 삶을 떠난 것은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것. 아무리 찾아 헤매도 되찾아올수 없다는 것. 아무리 날아가도 거기에는 이를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여기에 있었다. 도시밑에 이 냄새와 이 목소리들안에, 영원히 그의 뒤에. 우리가 자연에 몸값을 내면 , 자연을 위해 아이들을 만들어내면 충만함은 끝이 난다. 그러면 자연은 우리와 관계를 끝낸다. ' (322p)


개인적으로 느낀 것이지만 <달려라 토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완벽한 '행복한 인물'들이 없다. 최악이 해리 앵스트롬이라면, 남편에게 의지하고 삶의 무기력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부인 제니스, 딸의 불행을 보면서 애초부터 결혼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스프링어 부인, 아들의 일탈이 '제니스'의 탓이자 스프링어 가문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앵스트롬 부인. 기독교 교인의 문제는 다 자기문제라고 생각하는 동네 목사 에클스. 교인들을 지나치게 돌보느라 가족들을 돌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에클스 부인. 아무렇게나 몸을 굴리다가 드디어 제대로된 온전한 남자를 만났다고 착각한 루스, 래빗을 오랜시간 코치하며 인생을 인도했으나 자기자신과 함께 타락시켜버린 토세로.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대개 이런 판단을 내릴 것 같다. '이런게 진짜 인생이다' 라고..완벽하게 100% 행복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불행도 같이 가는 것이다라고..그래서 읽는내내 굉장히 힘들다. 부딪히고 넘어지고 이 책장을 넘기면 이보다 더 암울하게 전개될 수 없겠다싶다가도 더 최악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말미에서는 범람하는 암울함을 견디기 어렵게 된다. (베키에 대한 래빗은 절망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리고 래빗은 이 모든 절망에 대한 회피를 달리는 것으로 갈음하려고 한다. 아마 '달려라' 라고 하는 부분은 래빗의 암울함을 보는 많은 이들이 내심 관조적으로 내뱉는 탄식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나마 달려야 하지 않겠나 래빗..뭐 이런...그리고 기어코 래빗은 이런 상황을 '상대편이 그가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수비두명을 붙이는 바람에 어느쪽으로 돌든 둘중 한명과 부딪히게 되어 할 수있는 일이라고는 패스하는 밖에 없던 때와 비슷하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패스밖에 할게 없다라...인생에서 주도적으로 뭔가를 결정할 수 없다는 그런 의미리라 생각되지만 많은 독자로서는 인정하기 힘들 것이다. 거의 용서보다는 증오를 래빗에게 돌릴테니, 자초한 일이었다고 그때 래빗이 도망치지 말았어야 했다고 혀를 끌끌 차지나 않을까. 그래서 토세로의 마지막 말이 의미심장하다.


" 옳으냐 그르냐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게 아니야. 우리. 우리가 만드는거야. 불행을 막기위해. 변함없이. 해리 변함없이............. 불행은 그것을 따르지 않는데서 나와. 우리 자신의 불행은 아니지. 처음에는 우리 자신의 불행이 아닌경우가 많아. 그런데 너도 너 자신의 인생에서 그러한 예를 하나 본 거야 " (397p)


래빗의 이야기가 1부로 끝나지 않고 4부까지 이어져서 그나마 다행이다. 제니스도 그렇게 살지 않았어야 했고, 루스도 불쌍하긴 매일반이며 토세로도 안타깝긴 마찬가지다. 에클스도 적당히 가족을 돌봐야하고 무엇보다 래빗도 최소한 잘살아보면서 고민따위를 하는 지지리도 궁상인 중산층 비스무리한 삶에서 벗어도 나야 한다. 때로는 이런 삶이 우리 곁에 있는 듯하지만 다들 마음속으로 생각하길...'난 이정도는 아니야'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난 이정도로 무책임하지는 않아라고 자위하면서 하지만 삶이 어떻게 그렇게 뜻대로 되겠는가. 그 때 래빗이 갑자기 차를 몰고 430번을 타고 포토맥을 넘어가는 그런 순간이 오지말란 법이 어디있는가. 마음속으로는 래빗보다 더 많은 가출과 더 많은 탈출을 꿈꾸며 사는 이들은 생각보다 많을 수도 있다. 마치 상상속으로만 펼쳐보았던 대탈출의 현실화가 비극적이고 또 처참하게 전개되었지만 마음속으로 '불쌍한 래빗'이라고 읇조릴만할때는 다들 결국 비슷한 것이다. 래빗이나 나나...그리고 이웃들이나...


cf) 그리고 업다이크의 신경증에 걸릴것 같은 현재형 묘사실력때문에 머리가 멍멍하다. 이런 묘사는 어디서도 본 적없는데 때로는 굉장히 천천히 그리고 음미하듯 읽었어야 하는게 아닐까라는 자기반성적인 느낌이 들곤한다. 그런데 이런 암울함을 곱씹으면서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진 않는다. 공부하듯 답습하듯 문장과 문체를 연구한다고해도 <달려라 토끼>를 여러번 읽는건 지치는일이다.

 


달려라 토끼

저자
존 업다이크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1-08-22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물질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20세기 미국문학의 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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