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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11.24 피천득의 인연과 응답하라1994
Vanilla Essay2013. 11. 24. 10:38

피천득의 '인연'을 기억한다. 교과서에도 실려있었던 아주 고리짝시절의 이야기지만 당시에는 이 소설의 목적이 뭔지 감도 잡지 못했드랬다. 고딕하게 박혀있는 '인연'의 레터적 해석은 죄다 피상적이고 유행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될 뿐 이면에 가라앉아있는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생각해보면 그 나이의 내가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흔한 연애의 아스라한 기억도 없이 그저 순정만화의 한 페이지를 떠올리며 눈꼬리를 내리고 배시시 웃는 정도의 설레임까지가 최선이었으리라. 


"그리워하는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 


어쨋든 아사코와 대면했던 피천득씨의 엔딩이 꽤 인상깊었다. 소설의 인과응보, 그리고 밝은 엔딩이 세상의 진리라고 믿었던 시절이기도 했지만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남겨져 각진 기억의 모서리를 다듬고 기어코 아름다운 무엇이 되어 은은히 빛나던 과거라는 건 보통 소중하니까..아무리 추억이라고는 해도 연애감정들의 통념을 뒤집는 듯한 체념적 뉘앙스는 왠지 서글펐던 것이다.  결국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도 연애를 하고 이별을 하고 그러면서 이런 '인연'의 고리가 세상을 사는 만고불변의 진리 중 하나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초속 5센티미터토노 타카키시노하라 아카리를 오래 전 놓치고 성인이 되고 나서도 잊지 못하고 괴로워했고, (결국 그들은 스쳐지나듯 해후하고도 각자의 길을 간다.) 유년을 두근거리게했던 캔디테리우스의 사랑을 받아들이면서도 결국 자신을 위해 희생한 스잔나를 선택했다. 나는 어린 시절 사랑하면서도 헤어진다는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이 짝사랑이든, 엇갈린 사랑이든 어쩌면 다 성장의 한 과정이라고 억지로 이해하면 살았겟지 우선은 시간이 약일테고 새로운 사랑과 시간의 무게에 짓눌려서 추억이란건 다 압착되버릴거다 그즈음 되면 지금은 괴로울 지라도 그 감정들도 빛이 바랠테니......라고 미친놈처럼 중얼거리며 시절을 관통했다. 지금은 2013년이지만 응답하라1994를 보다가 그만 압착되어서 다시 들추지 못하게 만들어놓은 추억의 틈새로 삐쳐나온 편린을 보게 된다. 아...그리고 슬쩍 그 조각을 다시 밀어넣고 살아야 한다는 걸 알게도 된다. 미소로 지나갈수있는 정도의 나이가 된 듯 싶다. 응답하라 1997에서는 빗겨간 시대적 돋보기땜에 한켠에 비켜서서 관조적으로 봤었는데 고작 3년 당겼다고 내 시절의 이야기가 되다니...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특히 여자들의 경우 나정이의 남편이 쓰레기이길 기대한다고 한다. 쓰레기정도면 내러티브로 보면 최강스토리 라인급이니까 이게 비약이거나 말도 안되거나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나조차도 나정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건 쓰레기라고 믿는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세상에는 무수한 인연들이 있고 그 인연들의 카테고리가 너무 찰나적이어서 그 사람의 한 인생에 어떻게 고리가 걸릴지 알수 없다는 깨달음이 점점 늘어만 갔다. 그래서 문득 이 드라마가 굉장히 현실밀착적이라면 '러브액츄얼리'식의 당연한 기대가 해피엔딩이라는 결론말고도 다른 결론이 이입될수 있다고 상상한다. 나정이는 쓰레기에게 향해있지만 칠봉이가 자기를 좋아하는 것도 알고 있고 쓰레기도 이 상황을 이해하고 있게 되었다. 


칠봉이는 현실로보면 야구선수같지 않고 투수를 포기한 것 같은 느낌이 오늘 들어버렸고 나정이는 1994에 삼풍백화점에 두고온 칠봉이를 향해 뛰어가는 것 같다. 울면서... 드라마 시나리오를 잘쓴다는 건 이런걸 두고 하는 말이겠지. 그게 삼각관계를 미묘하게 이끌어서가 아니라 피천득의 '인연'을 이해하는 듯한 시선, 그러니까 당연한 사랑의 이야기들과 오고가는 감정의 시선들을 독자들이 알지만 인연이라는 우연을 통해서 삶이 다르게도 갈 수 있음을...쓰레기가 아니라 칠봉이고, 혹시 칠봉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나정이의 남편이 되더라도 나는 이해할 수 있다. 대중들의 인기를 먹고사는 드라마니까 그저 우리는 대리만족을 하고 있는거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칠봉이였던 적이 있었고 쓰레기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해태가 되어서 나정이의 그런 고민을 들어주었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놀라운건 이건 드라마일뿐인데, 과거와 추억을 매개로한 노림수 확연한 드라마일뿐인데도 울컥하게 된는거다. 눅눅히 미소지으며 시청할 뿐 깊숙이 끌려들어가지는 않았는데 예고편에서 그렁그렁한 나정이의 눈물을 보니 다음회는 그냥 건너쳐가야 하겠다고 읇조리고 있었다. 나는 그 마음을 이해하니까 그리고 그 심정이 되어봤으니까..그러고 보면 드라마같은 일들이 정도의 차이일뿐 사람들의 기억에 많이 잔존하는 것 같다. 온통 내이야기처럼 느껴진다는 착각이 난무하는 걸보면 웃음도 나오고...하물며 피천득의 인연을 슬쩍 펼치다가도 2013년에 다 모여서 헤어지지 않고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는 응답하라 1994의 신촌하숙집 사람들이라니...아니만났어야 좋았을 그런 지경까지는 다들 가지 않은 거잖아 라고 쾌활해졌다. 



그래도 아니만났어야 좋았다는 그 구절을 이해한다. 

해후가 없었어도 좋을 기억은 추억만으로도 족하는 걸.... 






Posted by kew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