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난 후 요약하거나 줄을 그어놓지 않으면 아무짝에 쓸모없다는 걸 알게 된게 거의 근래다. 아니 그토록 많이 읽어댔는데 이제서야 그걸 알았단말이야 지금까지 읽었던 책들이 아깝다 아까워 어쩔거냐 여태 읽었던 건...라고 푸념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읽었다는 만족감과 어렴풋한 잔상과도 같은 , 환영스러운 이미지들만 희미하게 아른거리는게 영 짜증 날 뿐이지. 이래서야 책을 읽었다고 하기에도 무안하고 내용을 더듬어봐도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것 같은 '황당'함만이 느껴질땐 자괴감마저든다. 기억력 폭망이라는 단어들이 전두엽근처로 떠다니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러다보면 세월의 '능력반감' 특성을 보완해줄만한 어떤 걸 갈망하게 된다. 뭘 어떻게 해야 할까 전부 다 기억하기는 힘들테니 요점이라도 기억하길 오래도록 바라고 또 바라면서 떠오른 한가지 생각. 기록밖에는 답이 없다는 것이었다.


기록을 하려면 독후감이라도 써야한단거냐 이런 스피드가 생명인 라이프사이클에서 그런 여유로운 퀄리티는 자못 사람이 얼마나 한가하면 그런 데까지 신경을 쓰는가하고 질시어린 오해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어떻게든 적긴 적어야 한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면 안 될 것도 없다. 기록도 다양하긴 하다. 블로깅도 한가지 방법이고 독서노트도 좋겠는데 노트란걸 아니써본 것도 아니고 줄창 써봐도 흐지부지되는걸 경험한 이 후,  이런 건 아무래도 꼼꼼하고 치밀하고 침착한 어떤 반듯한 분들이 특별히 보유한 덕목중 하나란 걸 알게되었다. 그러니까 쓰다가 팔아퍼서 질리고, 내 필체에 질리고, 지져분한 노트에 실망하고, 글씨체에 짜증이 나는 그런 상황이 줄줄이 이어지면 그냥 확 던져버리고 무관심의 영역에서 기억과 같이 퇴적되길 은근 바란다. 바야흐로 수단도 막 나가서는 곤란한 것이다. 분명 자신에게 맞는 기록방식, 스타일, 선호도가 있다. 보기좋은 떡이 먹기도 좋은건 진리다. 그래서 찾아낸 스타일....


이름하여 '몰스킨'....두둥...
몰스킨을 알게 된게 몇 년 안짝이다. 몰스킨이 그렇게 유명한 브랜드인줄은 절대 몰랐고 그냥 쓰다보니 다들 쓰시는 분들이 많다는 걸 알게되었다. (브랜드빨로 쓰시는 분들도 계심) 나야 뭐 그저 교보 문구 핫트랙스에서 기웃거리다가 겉이 딱딱하고 종이질 좋고 마침 있었던 내 펜으로 쓱쓱 쓰면 잘 어울릴 거 같아서 덥썩 구입해서 2011년 이래로 주욱 써왔다. 기본적으로 실망감보단 만족감이 컸던 것 같다. 중간에 실망해서 던지지도 않고 소중히 넘겨가면서 서걱서걱써댄 걸 보면 의식하지 않은 채 만족하고 있었단 방증이다. 몰스킨도 종류가 많다. 몰스킨의 각 버전에 자신의 삶을 카테고리별로 다 기록해야만 하는 골수 매니아 정도는 절대 아니고  딱 2가지 버전만 사용한다. 난 독서에 대한 기록질에 목적이 있었으니까 사용성으로 치자면 '북저널'쪽으로만 선호하고 그외 '플레인 노트'( 줄도 안간 민숭민숭한 그냥 흰종이 (약간 미색계열))정도의 팬일 뿐이었다. 플레인 노트는 아이디어 요약본으로 라인이 그어져 있지 않은 공백의 종이라서 더 자유도가 높다는 장점이 있다. 레시피용, 여행용, 영화, 음악, 심지어 가든용까지 있는걸 봐서 이걸 종류별로 구입하는 매니아도 있을 듯 싶기는 하지만 난 그렇게까지 쓰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저 내 머리속 아이디어가 날아가지 않게 잡아두는 용도외 읽은 책에 대한 소소한 기록정도면 대만족이다.

 

 

그렇게 쓰다보니 쏠쏠하고 중독성이 있어서  좀처럼 이걸 버리고 새로운 노트를 손에 쥐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몰스킨으로 계속 가는듯...무념무상으로 쓰다보니 알게모르게 나랑 쓰는 방식들이 다 비슷해서 좀 놀라고 또 고수들이 많아서 또 놀라게 되었드랬다. 그 중에서 '나는 일러스트레이다'를 출간하신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 밥장님의 블로그에서 몰스킨 사용방식을 보고 놀랐드랬다. 그림 그리는 패턴까지 비슷해서...수상쩍어서 '나는 일러스트레이터'를 구입해서 읽어봤더니만 이 분의 레벨이 그냥 취미용이 아닌 프로쪽인걸 알고 감탄..그리고 컨셉이나 사용성에 대해서는 '고수'급을 넘어서시는 진정한 매니아이심을 알아봤다. (cf.  일러스트레이다는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그림에 관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시도해보는 편인데 ...직업적으로까지는 아니더라도 라이프 성향상 조언들을 잘 되새기며 여러방편으로 그림을 소소히 그려보고 그런다.) 


아무튼 몰스킨에 대한 사용성 진가는 사실 자신이 기록해둔 분량이 쌓이면 실감하게 될 듯 싶다.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 틈에서 그 많은 좋은 글귀와 감동을 핀포인트로 찝어낼 만한 기억력이 나에겐 없으므로 몰스킨이 백업 스토리지처럼 도움을 주고 있다. 기억할만하고 기억해야만 한다면 몰스킨에 써둔다. 그리고 나중에 슬쩍 넘겨보면 화려했던 지난 날을 기억하는 이름모를 가수처럼 '주마등같은 기억내용들이 화선지 먹물에 젖든 낭창하게 푸근해진다. 그 농도 정도면 다시 책을 펴들지 않아도 충분히 적당한 담도를 자랑한다. 게다가 필체가 스며든 그 계절의 느낌까지 읽혀져서 묘한 감동도 있다. 아직까지 디지털이 흉내낼 수 없는 획에 담긴 그 정서는 경쟁력이 있다고 본다. 사람은 여전히 아날로그를 버리지 않고 소소히 사용할 때, 진가를 알 수 있는 법이다.

 

 


Posted by kew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