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BOOK/소설2014. 6. 18. 17:01


  

이언 매큐언이 전작들에서 악명이 높았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엽기'적인 소재를 이용해서 파격적인 이야기를 소설로 썼기 때문이다. 좀처럼 일부러 찾아보려고 해도 이런 류의 소설은 보기가 어려울수 밖에 없다. 방부 처리된 성기가 등장하는 <입체 기하학>라든지..극장에서 실제 정사를 벌이는 <극장의 코커씨>라든지..이외에도 강간을 비롯해서 근친상간같은 꺼려지는 소재를 아무렇지도 않게 연작 시리즈처럼 써버리면 독자가 생각하는 매큐언의 이미지는 뻔하다. 이런 경우, 매큐언의 소설이 개성있어서 좋다고는 해도 환영할만한 대중적 팬층을 확보하기는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원래 작가들은 자신들이 쓰고자 하는 것들을 쓰고 싶어하는 욕망때문에 상업성이라든가 대중성같은 것들을 등한시 하는 우를 범하기도 하지만, 내심 자신의 글들이 두루두루 읽히길 바란다는 측면은 아이러니하게도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보자면 매큐언은 아예 사람들이 터부시하고 거부하는 지점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길을 가는 엽기호러의 매니악스러운 작가로 아예 대놓고 공표하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암스테르담>이 등장하고, <속죄>가 등장 한다. 알다시피 암스테르담은 부커상, 속죄는 독자들의 찬탄을 불러일으키며 매큐언이 쓴 소설의 최고작이라고까지하는 극찬을 받는다. 암스테르담과 속죄만 놓고 보면, 그가 <시멘트 가든>작품을 썼다는게 믿겨지지가 않을 때가 있다. 마치 하루키가 태엽감는 새니, 양을 쫓는 모험이라든지, 1Q84를 쓰다가 알고보니 <노르웨이의 숲>을 썼다고 생각해보면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는 것처럼 매큐언이 통념을 일부러 쫓지 않았다는 전작들이 일종의 쇼맨쉽이 아니었을까하는 추측마저 들 정도다. 나도 충분히 리얼리즘적이고 평이한 일상을 노래할 수 있다는 의사표현일수도 있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소설들이 이 지점에 이르러서야 대중들의 선택을 받았다는 점이다. (평론가들의 측면은 사실 잘모르겠다.) 


속죄는 워낙 유명해서 나중에 논외로 처야겠지만, 부커상의 빛나는 <암스테르담>을 읽고 있노라면 뭔가 중간에 몰리레인이 클라이브와 엽기적인 행위를 벌이고, 그와중에 버넌과 이중적인 섹스를 즐기고, 가머니와 중간에 변태적인 행각을 하는 팜므파탈의 여성으로 그려졌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런 매큐언씨 다시 시작하셨군 그럼 몰리는 클라이브버넌의 주도아래 가머니가 살해하고 시체를 절단하고 암스테르담으로 옮기고 셋다 몰리의 죽음을 놓고 옥신각신하다가 서로 총질을 하고 셋다 사망한다는 황당한 결말의 소설이 된다고 해도 충분히 매큐언표 소설로 충분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몰리가 불치의 병으로 죽었는데 과거의 남자와 애인이 서로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비교해가며 자존심 싸움을 하고 도덕적인 논쟁을 펼치고 서로를 경시하고 질투하다가 치부를 발견하고 스스로의 본성을 넘어서는 추악함을 보여주니 어 매큐언씨가 대중적인 블랙코미디를 표방한 스토리소설로 노선변경을 한 것같은 느낌이다. 


암스테르담을 읽으면 예전 리처드기어, 샤론스톤 주연의 <마지막 연인>이 생각난다. 두여자를 놓고 혼수상태에 빠져버린 주인공 남자이야기. 남자로부터 누가 진정한 사랑을 받았는가에 대한 각자의 시각, 그리고 서로에 대한 배려같은 것들. 암스테르담은 이 영화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된다. 리처드 기어는 몰리 레인이 맡고, 샤론스톤과 다도비치는 클라이브와 버넌이 되는 식이다. 여기에 가머니가 맡을 역이 부족하지만 어쨋든 모양새는 비슷하다. 다만 스토리상 영화말미에 보여줬던 서로를 향한 미덕같은 건 없다. 대신 파국을 향해 질주하는 추한 세남자의 적나라한 모습만이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다. 소설의 제목이 암스테르담인 이유는 소설 말미에도 밝혀지지만, 이 세남자의 최종 결말을 아우르는 상징적인 장소여서 그런 듯 싶다. 처음 읽기시작할 때는 블랙코미디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점점 수위가 올라가더니 마치 지기싫어하는 남정네들의 자존심과 되먹지 못한 도덕관념 논쟁에다가 정치적인 불순함, 가족에 대한 무책임, 그리고 몰락해가는 추한 모습을 바라보는 서로간의 생각들이 엉켜서 속내가 복잡해진다. 


왜 불편하냐면, 이런 극단의 모습들이 나를 비롯한 누군가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기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던 어떤 연인으로 부터 선택을 받지 못하고 그 연인이 나에 대한 많은 비밀을 간직한채 다른 사람에게 가버렸을 즈음에는 사소하게나마 소소한 광기는 애교수준이다. 평상시 고고한 척해도 불현듯 밀려오는 모멸감때문에 드잡이질을 할 수도 있고, 냉철함은 온데간데 없고 광폭하고도 극단적인 언쟁을 소리높여 아무렇지도 않게 배설할 수도 있다. 왜냐면 우리 모두 인간이니까..그래서 <암스테르담>이 인간본성의 추악함이라고 평을 내리는 듯 싶다. 소설 초입에서 몰리레인은 죽은 채다. (아마도 표지 여인이 몰리 레인일듯.) 이미 핵심 인물이 죽은 상황에서 남겨진 3명이 남자는 묘한 경쟁을 벌이는데 이것들은 다 각자의 위치에서 결함이라고 불리우고 약점이라고 여겨질만한 구석에서 점차 퍼져나간다. 클라이브는 '예술적 자부심' (예술적 성취를 위해서 도덕적 의무감을 져버릴수도 있다는 부분), 그리고 버넌은 언론인으로서의 공정하고도 냉혹한 직설적 비평 (기사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인권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부분), 가머니는 올바르고 청렴하고 능력이 있는 정치인으로서의 생존본능 (실제로는 '고위직 개새끼'이자 '밤의황제'라고 불리우는 타락함)이 바로 그것들이다. 


서서히 이 세사람은 서로의 약점을 향해 몰리레인을 매개체로 찌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렇게 찔림을 당한 측은 이에 대한 당혹감과 모멸감으로 상대방에게 더 강도높은 가해를 시작한다. 그리고나선 폭주하는 거다. 그리고 같이 멸망. 이게 암스테르담의 주된 플롯이자 스토리라인이다. 여기서 세세하게 그 과정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이야기하는건 스포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기타 여백은 독자들이 읽으면서 채워야 하겠지만, 어쨋든 중요한건, 클라이브던, 버넌이든, 가머니이든 ..결국 다 우리들의 한 측면이라는 점, 그래서 나도 클라이브처럼 행동하고 버넌처럼 생각하고 가머니처럼 움직일수 있다는 지점이 독자들이 느끼는 <암스테르담>의 느낌이 된다. 


만약 이 책을 읽으면서 불편함을 느낀다면 '당신의 종착역은 '암스테르담'이야' 라고 마음속에 확 다가올지도 모른다. 소설말미에서 세명의 남자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협잡꾼'일수도 있으며, '창의성하나도 없는 구제할 길없는 단조로운 재능의 소유자'이며, '더러운 타락의 결론으로 가족을 침몰'시킬수도 있는 사람이란걸 일깨워준다.  물론 소설을 읽으면서 뭔가를 깨달아야지만 가치가 있는건 아니다. 다만 매큐언이 시종일관 견지했던 자신의 소설의 정체성은 본성의 추악함이 바로 우리곁에 있다라는 부분이 아니었을까. 그런게 소설속에 베어나와 가슴을 자극하면 과거가 부끄럽게 떠오른다. 결국 <암스테르담>을 읽으면서 '당신도 알고보면 그리 깨끗한 인간은 아니라오'라고 지적당한다. 좀 찝찝하고, 좀 적나라하며, 많이 부끄러워진다. 나도 구차함을 빙자해서 누군가가 내 생명을 끝내줄 모종의 장치가 있는 암스테르담으로 가야만 하나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버린다. 약간 코미디적이지만 일절 부인하기에는 솔직하지도 못하고 위선적이고 파렴치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암스테르담'은 추악함의 종점처럼 비춰진다. 




암스테르담

저자
이언 매큐언 지음
출판사
MEDIA2.0 | 2008-01-08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한 여자를 사랑한 두 남자, 그들이 암스테르담에 간 까닭은?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