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BOOK/소설2013. 3. 3. 23:37

<페르미나 마르케스>- 발레리 라르보(Valery Larbaud)/시공사

 


" 생토귀스탱에서 맞는 이러한 저녁들. 겁에 질려 도망가듯이 가는 열차들이 멀리서 파리를 향해 신음을 흘리는 소리가 잠들때까지 들려오는 그런 저녁나절들. 파리근교 마을의 이 절망적인 저녁나절들에 담긴 우수에도 더는 흔들리지 않았다." (40p)

 

 

 

청춘소설이 다 아련하게 아퍼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리고 성장했다라는 결론도 너무 뻔하다. 청춘성장소설이란 타이틀을 붙여놓을땐 아마 뻔해서가 아닐가라고 생각했던 적도 많다.  삶이, 혹은 인생이 때론 교훈적이지도 않아서 회상하기도 싫은 괴로운 악몽을 감내할 인내가 굉장히 하찮게 느껴질수도 있다. 그럴바엔 그따위 '성숙'은 포기하고 말지' 라고 되뇌이며...오히려 아름다운 추억이라는 이름아래 세월이 내린 몇십년짜리 진통제가 남겨놓은 치유불가의 후유증으로..트라우마로 남는다. 아픈건 다 사라지고 몽롱하고 나른한 몇개의 따스한 햇볕같은게 내 인생을 내리쬐었다는 기억만을 환영처럼 남겨둔 채.. 아름다웠으니 그것으로 된 것아니냐며 위로한다.  그런가싶다가도 의외로  찌질하고 조잡하고 민망하고 심지어 오글거려서 미칠지경의 대목들이 불쑥불쑥 기억에서 벌떡 일어난다. 아...젠장 내가 왜 그 시절 그랬을까. 가만히나 있을 것이지, 솔직함과 당당함과 순수함이 뭐라고....후회했던 횟수만 꼽아봐도 롤플레잉 게임 중간 죽어버린 캐릭터 갯수보다도 많다. 게임 시나리오야 숙지하고 외워서 다시해보기라도하지. 인생에 그런건 없다. 도중에 킬 당하면 캔슬키 눌러서 not save한채로 뒤로 돌아갈 기회같은건 있지도 않은 구라같은 이야기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라든지, 제임스 조이스의 <젋은 예술가의 초상>같은 작품들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도 유명한 이 발레리 라르보의 <페르미나 마르케스>도 역시 아름 다운 한편의 추억과도 같은 청춘소설이리라 짐작하긴했다. 현실감각 결여된 또 하나의 고전, 그것도 아니라면 약간 로맨스가 곁들여졌다면 '오만과 편견'같은 것이나 '기구한 운명의 '테스'에피소드2 정도 될수도 있겠네싶었는데 점점 후반부로 갈수록 마냥 '소중한 추억'이나 간직할 것'이라는 경구조차 생각나지 않게 만들어버린다. 후기를 철썩같이 공감하기 드문데, 붙어있는 역자의 견해에는 살짝 공감했다. 사랑의 이야기라기보단 '시간의 작용에 대한 이야기'인것 같다고 하는 부분 말이다.


이 소설에는 그야말로 청순과 아름다움의 화신과도 같은 우상 '페르미나 마르케스'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 소녀를 흠모하는 소년셋이 교차하면서 이야기를 이어가는데 한명은 보잘것 없는 신분이나 타고난 지적능력을 자랑하는 천재적 찌질이 '조아니 레니오' 그리고 반면 잘생긴 외모와 재력의 소유자로 거침없이 상남자로서의 매력을 뿜어내는 미성숙의 질풍노도 소년 '산토스 이투리아', 내성적이고 조용하면서 삶에 무기력증을 유발시키나 마음속으로 페르미나를 흠모하면서 인생의 이유를 찾는 전형적 짝사랑 바보 '카미유' 이렇게 셋이다. 그리고 초반부에서 조아니...아니 중반부까지 조아니의 화끈거리는 지적 허세질, 그리고 콤플렉스를 커버하기 위한 자기위안과 나르시즘의 괴논리을 자기식대로 펼치다가 페르미나의 냉랭한 반응에 자존심이 구겨진 이야기가 등장하고, 이 후 틈을 노리던 산토스 이투리아의 대쉬로 완전히 대세가 역전된다.  중간에 카미유는 그야말로 카메오처럼 순수하게 살짝 등장하고 ...오랜세월 후 그런일이 있었지라고 회상하는 걸로 마무리 .이렇게 해서 얇은 170여페이지의 소설은 그 역할을 다한다.  


청춘 애정 소설같지만 사실은 후반부에서 결정타를 몇개 날려줘서  마냥 아름다웠던 추억 이야기 내지 '해피엔딩'같은 건 개나줘버려리라는 섭섭함을 느끼게 될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허황되거나 그렇진않다. 애궂게 주인공이 훗날 아쉽게 불운을 경험했다고 해서 추억이 어떻게 되란 법은 없으니까. 다만 훗날 스러져버린 교정과 추억들을 간직했던 장소들의 침식들속에서 화자는 달라져버린 현실세계의 차가운 빗줄기를 부슬부슬 맞으면서 회상한다.  화자가 교정을 걸을때 소소하게 내뱉던 감정들을 읽자면 꿈같던 추억이 소중했다고 말하는 걸까. 아니면 그토록 아름다웠던 추억조차도 시간이 지나고 나니 남는게 없다고 말하는걸까 둘다겠지. 아마도...'유리창이 깨지고 창틀은 떨어져 나간채, 그렇게 오늘날의 햇빛과 하늘의 푸르름을 향해 활짝 열려있고,  분주함으로 가득한 파리의 하늘을 향해, 안개와 연기, 전깃불의 빛무리들...둥근 창은 이제 그 모든 것들 가운데 그 어느것도 비추지 못한다는 그 독백들을 읽으면 그저 덧없다란 생각뿐이다. 쓸쓸하고 왠지 아련하다.


철없던 시절의 이야기들정도로 치부하고 살짝 연애소설로 읽어둘걸 그랬나. 그 정도로 읽기엔 조아니의 굉장한 지적허세가 안스럽고 실황중계처럼 절절해서 여기서 약간 몰입되고 이입되는 경우라면 공감을 표하고 싶다.  왜 그렇지 않은가. 연애감정의 당사자로선 '자신의 존재가 상대편에게 의미있는 그 무엇이기를 바라는 그런 기대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느낌' '그렇게 하기위해 매력적인 무엇인가를 표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정작 당사자는 아예 신경도 안쓰는데 상처받은 자존심달래보려고 있는 지식 없는 지식 다 동원해서 최대한 페르미나를 굴욕주려는 조아니의 절절함은 이 소설의 메인테마인 듯 싶다. 어쩌면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애정패턴은 붕어빵같다. 틀만 바뀌었지 찍어내는 것들은 다 붕어카테고리일테니까.. 이즈음 조건적으로 부족할 것 없는 이투리아의 매력에 넘어가는 페르미나의 속물스러움을 도덕적 죄책감으로 대신하려는 건 뭐 대단한 변명거리도 못된다. 이건 마냥 천사와 같은 소녀이야기가 될수조차 없는 거였다. 


정말 이 이야기가 시간의 작용이었다면 조아니는 참 슬픈 인생이었고, 산토스는 지리멸렬하고 페르미나 마르케스는 한계절 피고지는 이름 모를 꽃처럼 처량했다. 굳이 그렇게 조숙하고 고고하고 청순해야할 필요는 없었는데도 라르보는 그야말로 그럴듯한 소년소녀들의 소소한 연애감정을 묘한 강박관념 셋트처럼 캐릭터에 이입했다. 지적인 것과 고고한 것과 당당함과 세속적이면서도 성스러운 묘한 불일치들을 보면서 그때나 지금이나 다들 너무 성숙해보인다고 잠깐 생각이 들었드랬다. 정말 성장하고도 남을만큼..지나치게 청춘스럽고 애잔하고 쓸쓸하다. 페르미나가 지금쯤 결혼해서 잘 살고 있을 거라는 말은 왠지 피천득씨의 '인연' 말미와 매우 닯아있지 않은가. 한낯 꿈같은 찰나의 추억들이었다.

 


페르미나 마르케스

저자
발레리 라르보 지음
출판사
시공사 | 2011-12-24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소박하고 우아한 필치로 담아낸 청춘과 사랑의 기록!20세기 청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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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ew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