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Pantry2014. 6. 14. 11:56

1. 

레이먼드 챈들러를 읽게 된 건, 완전히 무라카미 하루키의 영향이었지만, 사실 하루키가 극찬한다고 해서 내가 그걸 재미있게 읽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아무래도 난 무게감있고 진지하며 자아성찰적이면서 눅눅한 현실을 담담히 묘사해서 그럴듯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야말로 명작들에 대해서 그걸 인내심을 가지고 읽을 만한 '태도'를 갖추지 못한 독자쪽이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스토리가 두근거릴정도로 재미있어야 하고, 문체는 재기발랄하면 더 좋고 구질구질하지 않으면서 암울한 불운의 스토리가 비엔나 쏘세지처럼 이어지지 않는 그야말로 뻔한 소설쪽이 더 어울린다. 실제로도 그런 쪽을 더 잘읽는다. 이건 피해갈 수 없는 진실이다. 그래서 내가 어디가서 잰체할 수 없고 뭔가를 안답시고 주절거릴 수가 없다. 좀만 아는 척해버리면 이윽고 들통 나버릴 수 있는 확률이 커질테니까. 그런 점에서 보면 챈들러의 소설은 좀 자유로운 편이다. 


'빅슬립'당시에 문장의 간격에서 벌어지는 왠지 모를 쿨함때문에 피식피식 웃음이 나버리고 쉽게 쉽게 사건이 요약되고 뭔가 위트가 사이사이에 치즈처럼 발라져 있다.   어느날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 면도를 하고 맥주 하나를 까서 먹으면서 침대로 향하다가  누가 내목을 강하게 내려쳐서 정신을 잃었다라는 식의 전개가 무덤덤하게 전개된다 .주인공이 쓰러졌다라는 사실에 군더더기가 없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 빠르고도 전광석화같은 반전들이 일목요연하게 요약되는 와중에 주인공은 상황에 맞지 않는 시니컬한 농담이나 끄적이고 있고.....결국 문장 자체에서 이런 일목요연하면서 깔끔한 리듬을 느끼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지 싶다. 챈들러의 장기는 구구절절한 설명이 없다는 거였어. 그저 사건이 벌어지고 그 사건들이 짧게 묘사되는 동안 생각은 독자가 하고 필립말로우는 그걸 쿨하게 받아들이는 거지. 하드보일드적이란건 대체로 이런 거였나..혼자 상상하게 된다. 빅슬립이 완전히 흠뻑 빠질만큼 재밌다곤 할 수없었음에도 이런 매력때문에 '기나긴 이별'을 읽으려고 '호수의 여인'대신 고르게 되었다. 기나긴 이별쪽이 더 길고, 긴 만큼 이 여운을 더 즐길 수 있을 거라는 조삼모사식의 해석 때문이었다. 두고 보면 알겠지. 


2.

SS 밴다인의 '비숍 살인사건'을 최근 읽었다.  읽다가 보면 역시 추리소설의 중흥기는 1900년대 이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스 마플엘러리퀸필립 말로우마이크 해머,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이먼 템플러라든지 말이다. 물론 대다수의 독자들이 생각하는 탐정소설의 캐릭터는 '셜록'이다. 컴버배치의 씽크로 100%에 가까운 BBC 드라마만 해도 몰입도를 극대치로 키워줄 정도니까 이런 탐정물의 역사는 하루아침에 이루진 건 결코 아닌 셈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 추리소설은 죄다 일본 소설이나 스칸디나비아풍의 변종 소설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뭔가 지나치게 작위적인 느낌을 지울 길 없고 뭔가 드럽게 재미없다는 (매니아분들께는 죄송) 느낌이 반복되고 있다. 어떤 점에서는 참신함을 발굴하고자 기존 고전들의 따분함을 아예 거세해버리는 선택을 한 셈인데 이게 효용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팔리는걸 보면 이를 인정 안할 수도 없어서 그저 난 개인적으로 뒤쳐져버린 세대가 되버렸군이라는 생각만 든다. 난 아직도 브라운 신부의 스토리를 좋아하고 에퀼 포와로의 사색을 잊지 못한다.  아무리 베스트셀러에 올라가 있어도 히가시노의 갈릴레오는 내 추억의 캐릭터에 비교조차 안된다. 이게 진정한 고리타분함이라고도 할수 있겠다.


3.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 재출간이 되자마자 그동안 중고사이트에서 폭등한 가격으로 흠칫 놀라게 만들었던 몇 몇의 중고상품들이 가격 하락을 겪고 있다. 올곶이 버티는 분들도 계시는데 그 분들은 아예 자신들이 등록한 대성당이 있었는지도 잊고 있는 양반들이거나 대성당 신판이 등장한 것을 아예 모르고 계시는 아주 바쁜 분들일 가능성이 크다. 아무튼 중고사이트에 등록되는 몇가지의 서적들에 대한 가격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제때 구입하지 못한 책에 대한 댓가가 제대로 돌아온다는 느낌이다. 그 때 구입했어야 하는건데 라는 후회는 사실 말짱 아무짝에 쓸모없는 후회일 뿐이지만, 어찌됐든 형편상 책을 구입하지 못하는 것도 운명적이 측면이 있다. 


어떤 책들은 생각조차 안했음에도 불현듯 구매해서 충동질의 결과로 남고, 어떤 책은 매번 갈때마다 집었다놨다를 반복하다가 결국 그 자리에 모셔두고 그냥 오는 경우도 있다. 그런 책들의 운명은 내가 읽을 운명이 아닌 아이러니한 책들의 목록에 추가된 채, 인생 전체를 부유하게 된다. 내가 놓쳐버린 책, 읽었어야 하는 책..뭐 이런 타이틀이 붙은 채 말이다. 다만 훗날이라도 그 책을 찾아 해메일때 가격이 적당했으면 좋으련만, 흠칫 놀랄 정도의 가격표를 보노라면..이 책을 절판시킨 출판사를 원망하게 된다. 이 모든 가격폭등의 책임자는 출판사로 귀결되는 것이다. 이렇게 대성당 처럼 신판이 나와주면 좋은 일이긴 하다. 가끔은 가격을 너무 터무니 없이 올려버린 중고서적들의 주인들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볼 때, 이런 신판은 '책의 정체성'을 교란시키는 배신행위처럼 비추어질 수도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운명은 절판의 운명이니까 이대로 둬. 세상의 몇권만 남은채 나를 부각시키고 싶단 말이야 ..뭐 이런..대성당은 그러기에는 대중의 욕구가 큰 소설이었지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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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ew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