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BOOK/소설2014. 6. 9. 15:00


<노르웨이의 숲>(ノルウェイの森)을 읽을 때면 설명할 수 없는 우울함이 슬며시 내려앉곤 한다. 와타나베는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않지만 소설속 모든 불행에 대해서 모종의 책임을 스스로 지려고 애쓰고, 주변인들은 지인이랍시고 아웃사이더에 대한 배려를 보여주는 듯 하다가 느닷없이 생을 마감한다. 오래 머물렀던 장소에서 얼마간 떨어지는 일도 어색하고 애잔할텐데 말을 나누며 공감했으며 내심 친밀감이 오고갔던 사람들이야 오죽했을까. 키즈키는 자동차 배기관을 끼우고 자살했고 나오코는 달빛이 내리던 밤 조용히 스스로 생을 끝냈으며, 나츠키는 면도칼을 침묵속에서 오용했다. 이즈음되면 어떤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라고 할지라도 정체된 '혼란'과 '우울'의 정서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플랑드르파의 암울한 그림들이 하늘에 걸려있다라는 단순한 현실묘사로는 부족한 것이다. 함부르크에 내린 와타나베는 그 시점부터 흘러나오는 비틀즈의 '노르웨이 숲'을 들으며 겪는 트라우마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 얜 아직도 이모양 이꼴이야. 1992년 <상실의 시대>를 읽었을때도 이랬다. 와타나베는 아직도 현재에서 과거를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나보다. 벌써 20년 넘게 시간이 흘렀는데도 예나 지금이나 계속 노르웨의 숲 속 '홀로' 와타나베였다. 


솔직히 나오코가 자신이 불완전한 인간이라고 했을 때, 아 이 소설은 자아와 정체성에 대한 청년기의 방황을 정신병리학적으로 전개하려나보다 이러다가 어떤 의미에 다다르면 현실을 털고 일어서서 앞으로 질주하는 푸른 희망을 말하겠지라고 생각하긴 했다. 하루키가 추구했던 고도의 계산된 리얼리즘으로 이런 자기극복과 캠퍼스 러브스토리를 트랜디적인 풍으로 묘사했더라면 아마 노르웨이의 숲은 이런 컬러가 아니었을 것 같다. 좀더 찬란한 오렌지빛에 햇빛에 반사된 골드빛 보도블록 위로 미도리와 와타나베가 손을 잡고 '마음에 드는 프라이팬 세트'를 사러 마트로 가는 이야기쪽이 더 대중적이지 않았을까. <상실의 시대>버전 당시에는 미처 시대적인 분위기가 지면위로 내려앉아서 고단한 이념논쟁의 열기가 시들고 이젠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지 다들 어벙벙한 상태에서 맞닥드린 '자기 정체성의 숙고'처럼 생각하고, 이를 빌미로 현대 자본주의의 감각적이다못해 세련된 문화적 뉘앙스를 기막힌 무덤덤하면서도 단백한 문장으로 읽는다라는 대중적이 평이 있었드랬다. 


하루키가 아니었으면 누가 이런 평이나 소감을 달았을까. 더군다나 '온기가 필요해서' 마치 섹스를 한다는 와타나베에게 나츠키로부터 '그렇게 살면 안된다는 지적까지 스치듯 지나가고, 와타나베는 '소통을 위해서 매개체적 역할을 감내하는 무라키미 방식의 철저한 시작점이 되어 '파격적인 성적분방으로 읽혀질 가능성도 꽤 컸다. 왜냐고? 와타나베는 이미 나오코와 ..레이코, 상상속에서 미도리와도 적나라한 섹스를 벌였다. 예전 웹상에서는 이런 '노르웨이의 숲'을 두고 뭔 스무살짜리의 인생 다반사가 섹스 편력이 이토록 복잡하고 난잡하냐고 지적까지 댓글로 우수수 달릴 정도였으니까. <작가란 무엇인가>에서 하루키가 '섹스'가 자신의 작품에서 어떤 소통과 발현의 방식이라고 밝혔다고는 해도 1990년에 그 의미를 제대로 눈치챈기란 어려웠다. 우선 그때의 청춘들의 감각의 제국에서 살면서 깨지 않고 숨죽여있는 스팟들을 덕지덕지붙이고 살때였다. 아마 눈에 들어온 문장들은 '자극' 그 자체였을 것이다. 


반면 지면속에 잠자던 숨은 의도가 궁금했던 다수의 궁금이들은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였다. 이 책을 읽고 느낌이 어땠어. 정말 '상실'에 대한 이런 고민 따위를 이렇게 와타나베스럽게 해본 적이 있긴 한거야?  미도리가 와타나베를 구출해줬을까 그러지 않았다면 와타나베는 결국 사회 부적응자가 되어서 방황하다가 회사도 잘리고 함부르크 공항에서 가슴을 부여잡고 트라우마의 노예가 되지나 않았을까. 나오코는 만나지 말았어야 했고 우리들은 다 나가사와처럼 사는걸 당현하게 받아들여야 할까 뭐 등등 물어볼 건 수없이 많았다. 사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물어본다고 해도 딱히 그럴 듯하게 설명해주는 친구들이 있을리 없었을 것이다. 우리들의 판례는 뻔했다. 호밀밭의 홀든을 와타나베에게 이입하는 정도였을 것이고, 삶이란 어떤 것이라고 뭉뚱거려서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우리는 멈추지말고 나아가야한다'는 시덥지 않는 이야기들이 하고, 하다못해 자기는 나오코라든지 미도리라든지 하츠미, 레이코라도 만나서 연애라도 하고 섹스라도 해보지 않아서 실감이 안난다고 푸념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게 <노르웨이의 숲>이라면 너무 과대평가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가만히 보니 <노르웨이의 숲>에는 내 시절의 스무살이 별로 등장하지 않고 있었다. 일어났어야 했다면 어떻게든 소설적인 미장센들이 현실에서도 유사하게 등장했어야 하지만 비슷한 일도 일어난 적 없고, 유사 캐릭터들도 얼쩡 거리지도 않았고 그야말로 주변은 조용했으며, 쓸쓸했고 지루할 따름이었다. 스무살이 가진 막연히 불안한 감정 뒤편에 죄다 '와타나베'같은 혼란스러운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의뭉스러움을 맡긴 채,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더 그럴듯 했다.  와타나베는 비현실적 세계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불편해하는 그런 영역에서 방황하도록 놔두고 난 현실에서 적당하게 적응해가면서 산다는 정도 ?  그런걸 두고 다들 자기 정체성이라고 이름을 붙여두었지만 난 이게 뭔지 당시에 도무지 감도 잡지 못했다. 그렇게 1987년 이후 90년 초입을 거쳐 2000년을 걸어왔다. 다시 지금 <상실의 시대>를 <노르웨이의 숲>으로 읽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모종의 30년 시절에 대한 인생경험이, 혹은 어떤 숨겨진 진실을 보는 혜안이 있어서 그동안에 어설픈 청춘에 가려있었던 진면목을 보게 해줄 거라는 믿음으로 책을 다시 잡은 것도 있었다. 그때랑 지금은 난 좀 더 '모래폭풍'에서 피를 흘리며 견뎌낸 나만의 시절이 있었으니까 <노르웨이의 숲>이 다르게 읽힐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와타나베를 읽으며 '얜 20년이 넘어도 여전하구나'란 느낌만 강했다. 게다가 그를 둘러싼 모든 환경적인 스타일들도 바뀌지 않고 있었다. 하루키가 토로했던 것처럼 그때나 지금이나 통속적인 마케팅의 영향을 제외해버리면 디킨스와 단테와 조지프 콘래드와 업다이크, 챈들러, 카포티를 좋다고 열렬히 읽어대는 스무살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고 여전히 쾌락적인 자극의 시대에선 골동품은 계속 골동품이었다.  관심이 없는 영역은 '무지의 영역'이지 '참고'의 영역조차 될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말인데 하루키가 이 책에서 설정한 와타나베의 성향과 나가사와의 성향은 현대 30년을 아우르는 일반성이 내포되어있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와타나베는 스콧 피츠제럴드와 카포티와 챈들러를...나가사와는 단테와 발자크와 조지프 콘래드와 디킨즈를 읽는 캐릭터다. 그리고 그 나이의 대다수는 그게 뭔지 30년전이나 지금이나 잘 모른다. 이게 일반적인게 아니면 또 뭐가 일반적인 걸까. 모래폭풍을 지나왔어도 여전히 와타나베는 우울하고 나가사와는 재수 없었다.  


당시 여인네들이 열렬히 지지했던 <상실의 시대>는 '미도리'적인 감각과 와타나베스러운 진지함에 대한 경의 같은게 있었다. 쉬이 지나왔던 젊은 나날들을 돌아보며 자신을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세상과 어깨를 나란히 한채 발걸을 맞추어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정체된다는 느낌, 모조리 불운한 것들에 대해 막연한 죄책감을 가지는 행위들, 부조리와 시스템속에서 몸부림치다가 결국 자신도 나사로 끼워져 시스템이 되버리는 시절들을 맞이하면서 서서히 치열한 반항기도 누그러지고 경각심의 모퉁이도 모조리 깍였던 시절이었으니까. 모두가 이 책을 읽을 때면 스스로를 돌보지 않았음에 부끄러워하면서 와타나베의 배려심과 여린 감성에 동기화되어 위로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에 매몰되다보면 정말 키즈키처럼 그리고 하츠미처럼 자신의 가치를 하락시킨 채, 세상과 이별해야 할지도 몰랐을 거다. 대중들이 주목했던건 이런 이면의 불편함을 뒤로하고 약간이나마 현실적인 부분에서 위로를 찾으려고 했으리리고 본다. 이 책에서 그나마 현실적인 부분은 ? 떠오르는 건 미도리 뿐이었다. 지금에서야 하는 이야기지만 아 노르웨이의 숲에는 미도리가 있었어 라고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하루키특유의 음악적 장치와 음식의 묘사와 일상에서의 무덤덤한 행동반경을 다 제외한다면 이 책에서 기억에 남는 거라곤 나에게는 미도리의 대사뿐이었다. 왜 미도리는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기쁜, 덩달아 미소를 짓고 되바라지고 당돌하지만 왠지 자기의사가 분명한 쾌활함이 있었지 않은가 차라리 그런게 위로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미도리적인 표현에는 그런 것들이 많았다. 고등학교 1학년때 계란말이용 팬을 사고 싶어 브래지어 살돈으로 사버리고, 석달동안 브래지어 하나로만 살았던 이야기하며 세상의 슬픈일 가운데 덜 마른 브래지어를 하는 것보다 슬픈 것은 없을거라는 둥, 불이 나도 기어코 와타나베를 옆에다 앉혀두고 같이 죽어도 좋냐고 묻고.. 딸기쇼트케익의 예를 들어가며 '연인'으로서의 권리를 역설하며 '와타나베가 스스로 당나귀똥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등등.. 미도리야말로 우리세대의 발랄함이 될 수 있었다. 


솔직히 와타나베가 나오코에 허우적거리는 동안 통속적인 시트콤이었다면 미도리가 와타나베의 뒷덜미를 잡아서 '이래선 곤란하다고 와타나베. 내 딸기 쇼트케익을 내가 어제 던져버렸는데 넌 아직 다시 사올 기미도 없어. 그래선 안되는거야 넌 나의 소울메이트잖아. 내말을 들으라고 알았어? 라면서 다그치면서 데리고 왔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수많은 90세대의 젊은이들은 미도리의 이런 쾌활함이 <노르웨이의 숲>을 헤쳐나오는 유일한 돌파구라고 생각했을 거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우리는 이게 와타나베의 자유연애 소설일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나오코든 하츠미던 레이코든 결국에는 미도리에게 돌아와 난 이제 너에게 정착할께 다른 여자들은 다 나에게 쓸모없었어라고 씁쓸하게 웃고 마무리되는 소설로 갔어도 피식 웃고 그렇게 될줄 알았다고 생각하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이런게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했다. 어떻게 미스테리하고 난해한 나오코의 달밤 자살을 설명하고,  자동자 배기관을 창에 연결해 세상을 달리한 기츠키를 생각하며, 머리에서 나사가 펑하고 날아가버린 레이코를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이 소설에는 현실에 지지대를 박아놓은 캐릭터가 별로 없었다. 그나마 미도리 말고는 정말 없었다.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한다. 키즈키와 하츠미와 나오코의 죽음 이면에서 허우적대는 와타나베가 꽤나 정상적인 캐릭터인지도 몰라서 대개는 우리같이 현실에 달궈진 그럴듯하게 적응해버린 사람들에게 '당신은 언제부터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왔나요'라고 묻는게 아닐까라고 말이다. 결국, 와타나베는 세상과 어울지못한 채 생을 마감해버린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알수 없는 미안함을 느끼고 자신이 그들을 완벽히 이해해줘야만 하고 뭔가를 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할수 있는게 뭔지는 모르겠고 나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 곧 그들을 따라 갈것만 같다면 와타나베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이면에도 비슷한 뭔가가 있을 거라고..그래서 마음속으로 다들 불편했을지도 모른다. 와타나베여 굳이 아픈 곳을 들춰서 그게 바로 너라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텐데 ...세상속에서 그렇게 다들 살아가는걸 뭐....진즉, 쓸데없는 우산같은 건 버리고 두손으로 제대로 미도리를 안아줬어야하는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그런다. 친구들이 말하길, 철이 없는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와타나베와 미도리적인 관점에서만 이 소설이 보일거라고...그래서 말인데 소설 말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지 


'그래 나는 미도리를 사랑한다. 

 그건 오래 전 부터 분명히 알았다. 

 나는 다만 그 결론을 끌면서 회피했을 따름이다.'.......


이세상에서 너 말고 내가 바라는 건 없어. 라고 말했을때, 이 책은 할 일을 다한거다. 

가끔은 주변의 열렬한 노르웨이숲 신봉자들의 일장연설을 들을 때마다 따분하고 지리하고 뻔하고 너무 진지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무슨 미도리 이야기라도 할라치면 노르웨이의 숲에서 '미도리'는 그저 장신구일뿐 핵심 캐릭터가 아니라고 날 설득하고 와타나베의 심연과 나오코의 심리적 방화과 정신적 질병, 그리고 레이코의 트라우마를 끌고 오곤했다. 물론 그 이야기들이 꽤나 중요할 수도 있다. 단 개개인의 내밀한 관점에서 보자면 여러가지의 선택지가 있다고 볼 수도 있을테니..하루키가 어디선가 밝힌 바와 같이, 소설가란 다양한 가능성과 가설의 상황들을 독자에게 던지고 작가는 선택이란 걸 하지 않는 것이 맞다고..다양한 가설 속에서 유독 난 미도리와 와타나베만 보고 있는 거겠지 싶다. 


시간이 많이 지난 후, 세월의 풍화작용에 깍인건 와타나베가 미련퉁이였다는 사실과 미도리의 현실감각에 칭찬을 주는 정도였지만, 그게 다 일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여전히 난 도입부의 와타나베 트라우마를 읽으며 나 자신의 가슴에도 과거의 트라우마가, 추억이..기억이 몰려오는 걸 경험한다. 아 드디어 그 시절의 내가 오는군, 다시 또 그 시절의 다사하고도 다난했던 에피소드들이 쏟아지며 잠시나마 플랑드르파의 암울한 하늘묘사에 그럴듯한 내 그림을 걸어두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 책은 유독 젊은 시절의 한 단면을 그대로 가직한 느낌이다. 내가 이 책을 젊은 날에 읽었으니 앞으로도 나이를 먹고 기억이 헐거워지고 시야가 흐릿해지고 만사가 귀찮을때라도 이 책의 편린들만큼은 선명할 것이다. 


그런게 노르웨이의 숲이 가지는 몫이다. 더도말고 덜도말고 그렇게 한 귀퉁이에서 오래도록  자리잡고 청춘을 대변해주고 있다는 느낌..그게 얼마나 갈지는 더 두고 볼 일이지만서도...




노르웨이의 숲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3-09-02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한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현...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