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BOOK/소설2014. 8. 19. 10:10


라파엘 사바티니의 '스카라무슈'를 며칠 전 다 읽었다. (이 책은 현재 절판 상태다. 재주껏 구해서 보셔야 함.) 책 두께는 어마무시할 정도지만 일단 읽기시작하면 이 두께를 의식하는 일따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책장이 마구 넘어가서 이윽고 정신차려보면 반절이 후딱 지나가버린다. 사실 두께가 두꺼운 책들의 대개는 별 내용 아닌 것들이 자리잡는 경우가 많다.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는 넘쳐나지만 그 이야기가 그렇게 중요해서 꼭 알아야만 하는 것들도 아니어서 사실상 생략해도 무방한 경우도 있다.  별개로 스카라무슈 같은 경우엔 쓸데없는 내용때문에 두터워진건 아닌듯 싶고, 워낙 주인공이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기때문에 상황을 바꿔가며 활극 나열을 하다보니 책 두께는 어쩔수 없는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두께가 별 문제가 안되는 이유로 전반적인 분위기가 '무협지'적인 뉘앙스를 품고 있는 것을 들 수 있다. 우리가 무협지를 읽을 때 그 엄청난 분량의 활자를 감내하는이유는 바로 가벼운 문체와 이해하기 쉬운 스토리와 어떤 걸 탐구할만한 사유의 늪에 깊이 빠져들 필요가 없어서다. 굉장한 에너지의 소모가 없이도 술술 읽히는 활극모험소설이라면 분량 따위는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유럽판 무협지를 방불케하는 이 '스카라무슈'에는 통속적으로 국내 '아침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우여곡절과 꼬이는 인연과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삶이 엄청난 속도로 전개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적 역사적 격랑으로 빨려들어가게 되고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에 반하는 어떤 상황을 만나면서 생각과 마음도 변화를 일으키며 주위의 인물들로부터 부단한 부대낌을 겪고 위험에 휩쌓이고 기어코 복수의 길을 가게 되는 식이다. 주인공의 마음가짐이라든가 어떤 행위에 대한 정당성은 이 소설의 배경에서 그 조짐을 느낄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의 전야. 


만약에 스카라무슈가 어떤 권선징악의 단순구도만을 추구했다면 앙드레 루이가 그저 복수와 검객과 정치코미디의 수사에 불과하다고 결론을 내버릴 수는 없다. 거기에는 일단의 역사가 흐르고 있고, 이야기를 지탱해주는 커다란 함의가 깔려있으니까. 사실 귀족, 민중충돌과 프랑스혁명사에 격동기에는 우여곡절이라는 운명의 실타래를 배경으로 로맨스와 모험을 찔러넣는 소설들이 꽤 있어왔다. 인생의 소용돌이란건 그곳에 자신이 빠지지 않은 채 경험해보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 마련이니까..사바티니의 이 소설은 독자들의 이런 대리만족을 이해한다는 듯이 적재적소에 활극을 심어주었다. 지면을 휙휙 뒤로 넘기고 앞으로 전속력 질주를 감행하게 되는건 어쩌면 사바티니가 노린 코스식 요리가 아니었을까. 준비들 되셨나요 이제 막 전채요리가 끝났을 뿐인걸요 메인디시는 아직이랍니다 라고 말이다..


이 책의 주인공 앙드레 루이의 파란만장함을 뒤늦게 돌아보자면 사실 몇 권으로 나뉘어 출간되었어도 수긍했을 것이다. 1부 변호사와 복수심, 2부 배우 스카라무슈로의 변신, 3부 검의 마스터, 루이 돌아오다, 4부 소용돌이치는 인연과 운명의 늪..뭐 이런식으로 그럴듯한 제목으로 4부작 시리즈로 적당히 폰트를 키우고 적절한 삽화와 각권의 표지와..등등 이렇게 상업적인 고려를 감안해서 출간이되었다면 어땠을까하는 상상이 들곤 한다. 팔릴지 안팔리지는 모르겠지만 어느정도 실패하지는 않았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이 책은 중간중간 끊어도 될만큼 각 스토리사이의 분절이 탁월히 칸막이 쳐져있어서 이제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는걸요 조금만 있으면 우리의 주인공 루이는 사랑하는 알린을 다쥐르 후작에게 내주고 처절히 몰락해가며 찌질한 인생을 살게 될거예요. 그러다가 다시 복수의 칼을 들게 되죠. 다음 이야기는 제2권에서...뭐 이런식으로 독자들의 심리를 꿰뚫어본다면 그럭저럭 분절 출간되었어도 좋았을 것이다. 


의그는 변호사에서 광대로, 광대에서 검객으로..그리고 혁명가였다가 운명의 장난에 의해서 모든 것을 희생해내야하는 전형적인 불굴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대개의 경우, 서사적인 흐름에서는 앙드레 일대기로 묘사되었어도 굉장한 분량의 역사드라마처럼 전개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에게는 활극와 로맨스만으로도 충분한 이야기가 거리가 있었다. 알린과 앙드레 루이와 다쥐르 후작. 세명을 뒤로한 역사의 혼란기에서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을 종횡할 것인가에 대한 사유가 있었어야 한다고 혹자는 이야기하지만, 그건 이 소설을 너무 진지하게 보는거다. 솔직히 말하자면 대개의 독자는 루이가 알린의 시선을 알아채리고 다쥐르에게 복수할 줄 알며, 불운과 불공평, 불평등의 세상을 헤쳐나가며 먼치킨처럼 우뚝서길 원할 것이다. 거기에는 역사적 깨달음이 없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사바티니가 독자들에게 프랑스 정치사에 있어서 앙드레 루이가 서있는 위치의 타당성과 상징성을 논하려고 지면을 할애하는 순간, 이 소설은 무지하게 따분하게 되었을 것이다. 대중 통속 소설로 시작해서 갑자기 독자들을 가르치려들면 할수록 우원래의 목적은 잊혀지기 마련이다. 자고로 소설은 흡인력이 있어야 하고 여기에는 '재미'란 요소가 빠질 수가 없다. 스카라무슈의 미덕은 바로 이 전형적인 '재미'이 있어서 앙드레 루이가 역사의 굴레속에서 부침을 겪다가 자신의 능력과 재능으로 이 모든 걸 이겨내고 복수하고 사랑을 쟁취하며 구조적인 사회의 분위기에 개의치 않는 '일당백'의 모습을 독자들도 원하게 된다. 만약에 루이가 마지막에서 혁명의 전제조건으로 개인의 행복과 사랑을 포기하고 유치찬란하게 정치계로 진출하고 동지들과 어깨를 나란히하며 국왕을 페위시키고 시민봉기를 주도하러 앞장서면서 끝을 맺었다면 이 뜬금 마무리에 다들 실소를 금하지 못했을 것이다. 


차라리 이런 식의 결말이라면 번갈아 연습하는 아르투로 페레즈의 '검의 대가'쪽이 그런 분위기에 가깝다. 사바티니의 '스카라무슈'는 완전히 재미가 보장되는 대중소설이다. 아쉬운 것은 '스카라무슈'외 '캡틴 블러드'같은 작품들이 완역본으로 출간되지 못했다는 점이고 나온 책이라고해봐야 아이들이나 보는 해적 모험 소설처럼 격하된 점이 못마땅스럽다. 


 



Posted by kewell
Review BOOK/소설2014. 6. 24. 11:10



이 책의 제목 이야기부터 해보면, 원제는 <The Sense of an Ending>인 반면, 번역 제목은 영 엉뚱하게도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로 되어있다.  이 두 제목 사이에 어떤 화학적 변형이 일어났는지 알 길이 없지만, 굳이 짐작해보자면 엔딩의 역설적인 부분을 강조하다보니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라고 막연히 짐작해 볼 따름이다.  그냥 원제 그대로 썼어도 좋았을텐데.......... '엔딩의 느낌' 내지는 '센스 오브 엔딩'이라고 발음나는데로 쓰던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고 하니 뭔가 화자가 줄거리 중 끊임없이 암시를 받았을런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토니는 영 분위기파악 못하고 예감은 커녕 돌아가는 상황도 잘 이해못하는 멍 한 캐릭터여서 독자들은 의아해한다. 어쩌면 예감은 틀리지 않다고 느낀건 독자였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제목만 생각하면 장르소설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탓에 여타의 추리소설적인 즐거움을 떠올리는 독자가 많았을 텐데, 저자인 줄리언 반스를 생각하면 이 책의 정체성이 추리소설적 즐거움이 된다는게 영 어울리지 않기도 한다.  전작이었던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처럼 읽을 독자는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득히 스토리를 감내하는 것과 의도하지 않았어도 호기심을 따라 물흐르듯 문장을 보내는건 완전히 다른 일이므로 <예감>쪽은 어쩌면 전형적인 통속소설이자 대중소설이고 <플로베르의 앵무새>는 문학을 빙자한 철학소설로 보는 사람들도 꽤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두소설은 완전히 다른 소설처럼 느껴진다. 플로베르 앵무새를 읽다가 아 도저히 재미없어서 못 읽겠어 이게 도대체 무슨소리지 라고 하품하던 독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예감쪽은 아주 재밌게 읽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결과가 어떻든 줄리언 반스는 대중적으로는 좀더 독자들에게 근접해간 느낌이다. 쉽게 문장을 따라가고 스토리를 흡수했으며, 중간에 의미심장한 부스러기를 충분히 줏어먹으면서 작자가 의도했던 길로 하염없이 가기만 하면 된다.  설마설마하는 마음을 가지고 조마조마하는 아슬아슬함을 여분의 연료로 사용하면서 엔딩으로 드라이브 하는 기분은 '일반적'이고 '대중적'이며 모험적이다. 먼저 줄거리를 대략 요약해보면 이 책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토니 웹스터는 학창시절에 콜린, 마셜, 앨릭스와 어울리며 새로 전학온 애이드리언을 만나게 된다. 그러다가 토니가 베로니카라는 여학생과 사귀고, 그녀의 집에 놀러가고 나중에 헤어지고 , 에이드리언이 베로니카와 사귀게 되고...얼마 후 에이드리언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토니는 영문을 몰라한 채 무슨일이 벌어진 건지 도무지 이해를 못하지만, 에이드리언이 자신에게 남겼다는 편지를 쫓아 과거를 거슬러간다. 


이 과정이 이 소설의 메인 뼈대다. 마치 일상적이고 너무나 평범한 사건들이 벌어졌지만, 그 이면에 담겨있는 비밀이 무엇이며, 결과가 어떤 식으로 벌어졌는지에 대해서 개인의 시각으로 쫓아간다는 것을 조건으로 아주 평범하게 독자의 시각으로 사건을 차근차근 밟아간다. 토니의 시각과 생각이 독자의 견해가 되는 건 당연하다. 이를 통해서 화자는 늘 '객관적이고 공정한 정보'를 독자에게 줄 것이라고 전제해놓고 스토리를 바라보지만, 이 책의 반전은 '진실이 꼭 화자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부분에 일정부분 할애되어 있다보니 뒷부분에서의 여파가 참신하게 느껴진다. 뒤에서 맞닥드리는 진실의 모습을 두고 독자들은 대개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토니는 틀렸고 실수했으며 망각했고 무책임한 인물이었다고..그리고 드러나는 진실에 대해서 줄리언 반스가 어떤 힌트와 암시를 배치했는지 앞부분으로 다시 가서 읽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어쩌다가 사건이 이렇게 된거지 분명히 내가 놓친 모종의 복선들이 놓쳤어..너무 많이 놓친게 틀림없어 라고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언젠가 이동진 기자의 <빨간 책방>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책을 읽고 난 후 들어봤음) 이 소설은 치밀하게 구성된 한편의 정교한 조각처럼 구석구석이 짜여져있다. 에이드리언이 언듯언듯 내비치는 자신의 생각이 소설 주제 전반을 건드리고, 등장인물들이 내뱉는 대사와 상황들 속에서 은근한 암시를 뿜어내준다. 토니는 과거의 학창시절 역사수업시간에 역사를 두고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라고 했고, 콜린은 약간 웃기게도 '역사는 생양파 샌드위치'라고 했으며, 에이드리언은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고 언급했다. 영민한 독자라면 느닷없이 역사토론을 벌이는 이 대목에서 과거 기억들의 모습들이 어떤 식으로 진실을 찾아가는지에 대한 미묘한 감정들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결국 에이드리언이 말한 '모든 역사적 사건에 대해 진실되게 말할 수 있는 말은 '뭔가 일어났다'는 것 뿐이라고 하는 대목에서 우리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느끼는 파편들에 대해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게 된다. 혹시 내가 잘못 기억하는 건 아닐까?  


과연 나의 기억이 올바른 것일까. 어떤 왜곡된 표피에만 머물러 상황을 호도하고 중요한 어떤 부분들이 생략됨으로써 진정한 진실의 영역에 가까이 가지못한 오해의 역사가 진행되버린건  아닐까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줄리언 반스는 이 책에서 사건의 면모를 완전히 파헤져 주지 않는다. 어느 정도에 이르면 자살의 직접적 동기와 베로니카와 있었던 일들과 포드부인를 비롯한 베로니카 집안에 묘하게 풍겨지는 이면의 숨겨진 이야기들도 완벽히 드러나지 않은채 이야기가 매조지 된다. 왜 오백파운드를 유산으로 남긴건지 에이드리언이 썼다는 편지의 내용이 어떤 내용인지도 말해주지 않았다. 답답해서 미칠 노릇이지만 이 책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사건의 전모가 아니라 어쩌면 이 상황이 벌어지게 된 '오해'의 역사, 그리고 개인의 감정적 행동이 벌여놓은 배설같은 후폭풍이다. 이윽고 망각의 세월로 흩어져버린 스스로의 오욕의 기억들은 '책임'보다는 '생각하기 싫은 어떤 추억'이 되버리고 적당히 미화되어 기억에 자리잡았다라는 것.  '거기엔 축적이 있다. 책임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 혼란이 있다. 거대한 혼란이..' 이라고 종료되는 이유가 뭔지 알 듯도 싶다. 


자신의 과거가 설명하기에는 어려운 어떤 복잡한 미로에서 여전히 오리무중일거라는 묘한 느낌이 남는다. 어떤 것들이 일어나긴 했지만 그에 대해서 정확히 알기란 어려우며, 그저 일어났다는 정도만해도 최대한 알수 있는 모든 것일 수 있다는 그런 막연함이 휘몰아치고 슬며시 자기에게 유리하게 편집되 버리는 '자기위안' 장치에 당혹감을 느끼는 식이다.  혹시나 내 기억은 내가 재조립한 가짜의 모습, 왜곡된 거울같은 환영으로 남아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저자
줄리언 반스 지음
출판사
다산책방 | 2012-03-26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2011 영연방 최고의 문학상 맨부커상 수상작!2011 영연방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
Review BOOK/소설2014. 6. 18. 17:01


  

이언 매큐언이 전작들에서 악명이 높았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엽기'적인 소재를 이용해서 파격적인 이야기를 소설로 썼기 때문이다. 좀처럼 일부러 찾아보려고 해도 이런 류의 소설은 보기가 어려울수 밖에 없다. 방부 처리된 성기가 등장하는 <입체 기하학>라든지..극장에서 실제 정사를 벌이는 <극장의 코커씨>라든지..이외에도 강간을 비롯해서 근친상간같은 꺼려지는 소재를 아무렇지도 않게 연작 시리즈처럼 써버리면 독자가 생각하는 매큐언의 이미지는 뻔하다. 이런 경우, 매큐언의 소설이 개성있어서 좋다고는 해도 환영할만한 대중적 팬층을 확보하기는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원래 작가들은 자신들이 쓰고자 하는 것들을 쓰고 싶어하는 욕망때문에 상업성이라든가 대중성같은 것들을 등한시 하는 우를 범하기도 하지만, 내심 자신의 글들이 두루두루 읽히길 바란다는 측면은 아이러니하게도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보자면 매큐언은 아예 사람들이 터부시하고 거부하는 지점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자신의 길을 가는 엽기호러의 매니악스러운 작가로 아예 대놓고 공표하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암스테르담>이 등장하고, <속죄>가 등장 한다. 알다시피 암스테르담은 부커상, 속죄는 독자들의 찬탄을 불러일으키며 매큐언이 쓴 소설의 최고작이라고까지하는 극찬을 받는다. 암스테르담과 속죄만 놓고 보면, 그가 <시멘트 가든>작품을 썼다는게 믿겨지지가 않을 때가 있다. 마치 하루키가 태엽감는 새니, 양을 쫓는 모험이라든지, 1Q84를 쓰다가 알고보니 <노르웨이의 숲>을 썼다고 생각해보면 반전도 이런 반전이 없는 것처럼 매큐언이 통념을 일부러 쫓지 않았다는 전작들이 일종의 쇼맨쉽이 아니었을까하는 추측마저 들 정도다. 나도 충분히 리얼리즘적이고 평이한 일상을 노래할 수 있다는 의사표현일수도 있었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의 소설들이 이 지점에 이르러서야 대중들의 선택을 받았다는 점이다. (평론가들의 측면은 사실 잘모르겠다.) 


속죄는 워낙 유명해서 나중에 논외로 처야겠지만, 부커상의 빛나는 <암스테르담>을 읽고 있노라면 뭔가 중간에 몰리레인이 클라이브와 엽기적인 행위를 벌이고, 그와중에 버넌과 이중적인 섹스를 즐기고, 가머니와 중간에 변태적인 행각을 하는 팜므파탈의 여성으로 그려졌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런 매큐언씨 다시 시작하셨군 그럼 몰리는 클라이브버넌의 주도아래 가머니가 살해하고 시체를 절단하고 암스테르담으로 옮기고 셋다 몰리의 죽음을 놓고 옥신각신하다가 서로 총질을 하고 셋다 사망한다는 황당한 결말의 소설이 된다고 해도 충분히 매큐언표 소설로 충분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몰리가 불치의 병으로 죽었는데 과거의 남자와 애인이 서로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비교해가며 자존심 싸움을 하고 도덕적인 논쟁을 펼치고 서로를 경시하고 질투하다가 치부를 발견하고 스스로의 본성을 넘어서는 추악함을 보여주니 어 매큐언씨가 대중적인 블랙코미디를 표방한 스토리소설로 노선변경을 한 것같은 느낌이다. 


암스테르담을 읽으면 예전 리처드기어, 샤론스톤 주연의 <마지막 연인>이 생각난다. 두여자를 놓고 혼수상태에 빠져버린 주인공 남자이야기. 남자로부터 누가 진정한 사랑을 받았는가에 대한 각자의 시각, 그리고 서로에 대한 배려같은 것들. 암스테르담은 이 영화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된다. 리처드 기어는 몰리 레인이 맡고, 샤론스톤과 다도비치는 클라이브와 버넌이 되는 식이다. 여기에 가머니가 맡을 역이 부족하지만 어쨋든 모양새는 비슷하다. 다만 스토리상 영화말미에 보여줬던 서로를 향한 미덕같은 건 없다. 대신 파국을 향해 질주하는 추한 세남자의 적나라한 모습만이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다. 소설의 제목이 암스테르담인 이유는 소설 말미에도 밝혀지지만, 이 세남자의 최종 결말을 아우르는 상징적인 장소여서 그런 듯 싶다. 처음 읽기시작할 때는 블랙코미디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점점 수위가 올라가더니 마치 지기싫어하는 남정네들의 자존심과 되먹지 못한 도덕관념 논쟁에다가 정치적인 불순함, 가족에 대한 무책임, 그리고 몰락해가는 추한 모습을 바라보는 서로간의 생각들이 엉켜서 속내가 복잡해진다. 


왜 불편하냐면, 이런 극단의 모습들이 나를 비롯한 누군가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기때문이다. 내가 사랑하던 어떤 연인으로 부터 선택을 받지 못하고 그 연인이 나에 대한 많은 비밀을 간직한채 다른 사람에게 가버렸을 즈음에는 사소하게나마 소소한 광기는 애교수준이다. 평상시 고고한 척해도 불현듯 밀려오는 모멸감때문에 드잡이질을 할 수도 있고, 냉철함은 온데간데 없고 광폭하고도 극단적인 언쟁을 소리높여 아무렇지도 않게 배설할 수도 있다. 왜냐면 우리 모두 인간이니까..그래서 <암스테르담>이 인간본성의 추악함이라고 평을 내리는 듯 싶다. 소설 초입에서 몰리레인은 죽은 채다. (아마도 표지 여인이 몰리 레인일듯.) 이미 핵심 인물이 죽은 상황에서 남겨진 3명이 남자는 묘한 경쟁을 벌이는데 이것들은 다 각자의 위치에서 결함이라고 불리우고 약점이라고 여겨질만한 구석에서 점차 퍼져나간다. 클라이브는 '예술적 자부심' (예술적 성취를 위해서 도덕적 의무감을 져버릴수도 있다는 부분), 그리고 버넌은 언론인으로서의 공정하고도 냉혹한 직설적 비평 (기사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인권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부분), 가머니는 올바르고 청렴하고 능력이 있는 정치인으로서의 생존본능 (실제로는 '고위직 개새끼'이자 '밤의황제'라고 불리우는 타락함)이 바로 그것들이다. 


서서히 이 세사람은 서로의 약점을 향해 몰리레인을 매개체로 찌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렇게 찔림을 당한 측은 이에 대한 당혹감과 모멸감으로 상대방에게 더 강도높은 가해를 시작한다. 그리고나선 폭주하는 거다. 그리고 같이 멸망. 이게 암스테르담의 주된 플롯이자 스토리라인이다. 여기서 세세하게 그 과정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이야기하는건 스포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므로 기타 여백은 독자들이 읽으면서 채워야 하겠지만, 어쨋든 중요한건, 클라이브던, 버넌이든, 가머니이든 ..결국 다 우리들의 한 측면이라는 점, 그래서 나도 클라이브처럼 행동하고 버넌처럼 생각하고 가머니처럼 움직일수 있다는 지점이 독자들이 느끼는 <암스테르담>의 느낌이 된다. 


만약 이 책을 읽으면서 불편함을 느낀다면 '당신의 종착역은 '암스테르담'이야' 라고 마음속에 확 다가올지도 모른다. 소설말미에서 세명의 남자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협잡꾼'일수도 있으며, '창의성하나도 없는 구제할 길없는 단조로운 재능의 소유자'이며, '더러운 타락의 결론으로 가족을 침몰'시킬수도 있는 사람이란걸 일깨워준다.  물론 소설을 읽으면서 뭔가를 깨달아야지만 가치가 있는건 아니다. 다만 매큐언이 시종일관 견지했던 자신의 소설의 정체성은 본성의 추악함이 바로 우리곁에 있다라는 부분이 아니었을까. 그런게 소설속에 베어나와 가슴을 자극하면 과거가 부끄럽게 떠오른다. 결국 <암스테르담>을 읽으면서 '당신도 알고보면 그리 깨끗한 인간은 아니라오'라고 지적당한다. 좀 찝찝하고, 좀 적나라하며, 많이 부끄러워진다. 나도 구차함을 빙자해서 누군가가 내 생명을 끝내줄 모종의 장치가 있는 암스테르담으로 가야만 하나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버린다. 약간 코미디적이지만 일절 부인하기에는 솔직하지도 못하고 위선적이고 파렴치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암스테르담'은 추악함의 종점처럼 비춰진다. 




암스테르담

저자
이언 매큐언 지음
출판사
MEDIA2.0 | 2008-01-08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한 여자를 사랑한 두 남자, 그들이 암스테르담에 간 까닭은? ...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
Review BOOK/소설2014. 6. 9. 15:00


<노르웨이의 숲>(ノルウェイの森)을 읽을 때면 설명할 수 없는 우울함이 슬며시 내려앉곤 한다. 와타나베는 직접적으로 말은 하지 않지만 소설속 모든 불행에 대해서 모종의 책임을 스스로 지려고 애쓰고, 주변인들은 지인이랍시고 아웃사이더에 대한 배려를 보여주는 듯 하다가 느닷없이 생을 마감한다. 오래 머물렀던 장소에서 얼마간 떨어지는 일도 어색하고 애잔할텐데 말을 나누며 공감했으며 내심 친밀감이 오고갔던 사람들이야 오죽했을까. 키즈키는 자동차 배기관을 끼우고 자살했고 나오코는 달빛이 내리던 밤 조용히 스스로 생을 끝냈으며, 나츠키는 면도칼을 침묵속에서 오용했다. 이즈음되면 어떤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라고 할지라도 정체된 '혼란'과 '우울'의 정서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플랑드르파의 암울한 그림들이 하늘에 걸려있다라는 단순한 현실묘사로는 부족한 것이다. 함부르크에 내린 와타나베는 그 시점부터 흘러나오는 비틀즈의 '노르웨이 숲'을 들으며 겪는 트라우마는 아직도 현재 진행형. 얜 아직도 이모양 이꼴이야. 1992년 <상실의 시대>를 읽었을때도 이랬다. 와타나베는 아직도 현재에서 과거를 편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나보다. 벌써 20년 넘게 시간이 흘렀는데도 예나 지금이나 계속 노르웨의 숲 속 '홀로' 와타나베였다. 


솔직히 나오코가 자신이 불완전한 인간이라고 했을 때, 아 이 소설은 자아와 정체성에 대한 청년기의 방황을 정신병리학적으로 전개하려나보다 이러다가 어떤 의미에 다다르면 현실을 털고 일어서서 앞으로 질주하는 푸른 희망을 말하겠지라고 생각하긴 했다. 하루키가 추구했던 고도의 계산된 리얼리즘으로 이런 자기극복과 캠퍼스 러브스토리를 트랜디적인 풍으로 묘사했더라면 아마 노르웨이의 숲은 이런 컬러가 아니었을 것 같다. 좀더 찬란한 오렌지빛에 햇빛에 반사된 골드빛 보도블록 위로 미도리와 와타나베가 손을 잡고 '마음에 드는 프라이팬 세트'를 사러 마트로 가는 이야기쪽이 더 대중적이지 않았을까. <상실의 시대>버전 당시에는 미처 시대적인 분위기가 지면위로 내려앉아서 고단한 이념논쟁의 열기가 시들고 이젠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지 다들 어벙벙한 상태에서 맞닥드린 '자기 정체성의 숙고'처럼 생각하고, 이를 빌미로 현대 자본주의의 감각적이다못해 세련된 문화적 뉘앙스를 기막힌 무덤덤하면서도 단백한 문장으로 읽는다라는 대중적이 평이 있었드랬다. 


하루키가 아니었으면 누가 이런 평이나 소감을 달았을까. 더군다나 '온기가 필요해서' 마치 섹스를 한다는 와타나베에게 나츠키로부터 '그렇게 살면 안된다는 지적까지 스치듯 지나가고, 와타나베는 '소통을 위해서 매개체적 역할을 감내하는 무라키미 방식의 철저한 시작점이 되어 '파격적인 성적분방으로 읽혀질 가능성도 꽤 컸다. 왜냐고? 와타나베는 이미 나오코와 ..레이코, 상상속에서 미도리와도 적나라한 섹스를 벌였다. 예전 웹상에서는 이런 '노르웨이의 숲'을 두고 뭔 스무살짜리의 인생 다반사가 섹스 편력이 이토록 복잡하고 난잡하냐고 지적까지 댓글로 우수수 달릴 정도였으니까. <작가란 무엇인가>에서 하루키가 '섹스'가 자신의 작품에서 어떤 소통과 발현의 방식이라고 밝혔다고는 해도 1990년에 그 의미를 제대로 눈치챈기란 어려웠다. 우선 그때의 청춘들의 감각의 제국에서 살면서 깨지 않고 숨죽여있는 스팟들을 덕지덕지붙이고 살때였다. 아마 눈에 들어온 문장들은 '자극' 그 자체였을 것이다. 


반면 지면속에 잠자던 숨은 의도가 궁금했던 다수의 궁금이들은 속으로 끊임없이 되뇌였다. 이 책을 읽고 느낌이 어땠어. 정말 '상실'에 대한 이런 고민 따위를 이렇게 와타나베스럽게 해본 적이 있긴 한거야?  미도리가 와타나베를 구출해줬을까 그러지 않았다면 와타나베는 결국 사회 부적응자가 되어서 방황하다가 회사도 잘리고 함부르크 공항에서 가슴을 부여잡고 트라우마의 노예가 되지나 않았을까. 나오코는 만나지 말았어야 했고 우리들은 다 나가사와처럼 사는걸 당현하게 받아들여야 할까 뭐 등등 물어볼 건 수없이 많았다. 사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물어본다고 해도 딱히 그럴 듯하게 설명해주는 친구들이 있을리 없었을 것이다. 우리들의 판례는 뻔했다. 호밀밭의 홀든을 와타나베에게 이입하는 정도였을 것이고, 삶이란 어떤 것이라고 뭉뚱거려서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우리는 멈추지말고 나아가야한다'는 시덥지 않는 이야기들이 하고, 하다못해 자기는 나오코라든지 미도리라든지 하츠미, 레이코라도 만나서 연애라도 하고 섹스라도 해보지 않아서 실감이 안난다고 푸념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게 <노르웨이의 숲>이라면 너무 과대평가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가만히 보니 <노르웨이의 숲>에는 내 시절의 스무살이 별로 등장하지 않고 있었다. 일어났어야 했다면 어떻게든 소설적인 미장센들이 현실에서도 유사하게 등장했어야 하지만 비슷한 일도 일어난 적 없고, 유사 캐릭터들도 얼쩡 거리지도 않았고 그야말로 주변은 조용했으며, 쓸쓸했고 지루할 따름이었다. 스무살이 가진 막연히 불안한 감정 뒤편에 죄다 '와타나베'같은 혼란스러운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의뭉스러움을 맡긴 채,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더 그럴듯 했다.  와타나베는 비현실적 세계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불편해하는 그런 영역에서 방황하도록 놔두고 난 현실에서 적당하게 적응해가면서 산다는 정도 ?  그런걸 두고 다들 자기 정체성이라고 이름을 붙여두었지만 난 이게 뭔지 당시에 도무지 감도 잡지 못했다. 그렇게 1987년 이후 90년 초입을 거쳐 2000년을 걸어왔다. 다시 지금 <상실의 시대>를 <노르웨이의 숲>으로 읽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모종의 30년 시절에 대한 인생경험이, 혹은 어떤 숨겨진 진실을 보는 혜안이 있어서 그동안에 어설픈 청춘에 가려있었던 진면목을 보게 해줄 거라는 믿음으로 책을 다시 잡은 것도 있었다. 그때랑 지금은 난 좀 더 '모래폭풍'에서 피를 흘리며 견뎌낸 나만의 시절이 있었으니까 <노르웨이의 숲>이 다르게 읽힐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와타나베를 읽으며 '얜 20년이 넘어도 여전하구나'란 느낌만 강했다. 게다가 그를 둘러싼 모든 환경적인 스타일들도 바뀌지 않고 있었다. 하루키가 토로했던 것처럼 그때나 지금이나 통속적인 마케팅의 영향을 제외해버리면 디킨스와 단테와 조지프 콘래드와 업다이크, 챈들러, 카포티를 좋다고 열렬히 읽어대는 스무살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고 여전히 쾌락적인 자극의 시대에선 골동품은 계속 골동품이었다.  관심이 없는 영역은 '무지의 영역'이지 '참고'의 영역조차 될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말인데 하루키가 이 책에서 설정한 와타나베의 성향과 나가사와의 성향은 현대 30년을 아우르는 일반성이 내포되어있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와타나베는 스콧 피츠제럴드와 카포티와 챈들러를...나가사와는 단테와 발자크와 조지프 콘래드와 디킨즈를 읽는 캐릭터다. 그리고 그 나이의 대다수는 그게 뭔지 30년전이나 지금이나 잘 모른다. 이게 일반적인게 아니면 또 뭐가 일반적인 걸까. 모래폭풍을 지나왔어도 여전히 와타나베는 우울하고 나가사와는 재수 없었다.  


당시 여인네들이 열렬히 지지했던 <상실의 시대>는 '미도리'적인 감각과 와타나베스러운 진지함에 대한 경의 같은게 있었다. 쉬이 지나왔던 젊은 나날들을 돌아보며 자신을 생각한다는 것, 그리고 세상과 어깨를 나란히 한채 발걸을 맞추어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정체된다는 느낌, 모조리 불운한 것들에 대해 막연한 죄책감을 가지는 행위들, 부조리와 시스템속에서 몸부림치다가 결국 자신도 나사로 끼워져 시스템이 되버리는 시절들을 맞이하면서 서서히 치열한 반항기도 누그러지고 경각심의 모퉁이도 모조리 깍였던 시절이었으니까. 모두가 이 책을 읽을 때면 스스로를 돌보지 않았음에 부끄러워하면서 와타나베의 배려심과 여린 감성에 동기화되어 위로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에 매몰되다보면 정말 키즈키처럼 그리고 하츠미처럼 자신의 가치를 하락시킨 채, 세상과 이별해야 할지도 몰랐을 거다. 대중들이 주목했던건 이런 이면의 불편함을 뒤로하고 약간이나마 현실적인 부분에서 위로를 찾으려고 했으리리고 본다. 이 책에서 그나마 현실적인 부분은 ? 떠오르는 건 미도리 뿐이었다. 지금에서야 하는 이야기지만 아 노르웨이의 숲에는 미도리가 있었어 라고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하루키특유의 음악적 장치와 음식의 묘사와 일상에서의 무덤덤한 행동반경을 다 제외한다면 이 책에서 기억에 남는 거라곤 나에게는 미도리의 대사뿐이었다. 왜 미도리는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기쁜, 덩달아 미소를 짓고 되바라지고 당돌하지만 왠지 자기의사가 분명한 쾌활함이 있었지 않은가 차라리 그런게 위로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미도리적인 표현에는 그런 것들이 많았다. 고등학교 1학년때 계란말이용 팬을 사고 싶어 브래지어 살돈으로 사버리고, 석달동안 브래지어 하나로만 살았던 이야기하며 세상의 슬픈일 가운데 덜 마른 브래지어를 하는 것보다 슬픈 것은 없을거라는 둥, 불이 나도 기어코 와타나베를 옆에다 앉혀두고 같이 죽어도 좋냐고 묻고.. 딸기쇼트케익의 예를 들어가며 '연인'으로서의 권리를 역설하며 '와타나베가 스스로 당나귀똥이라고 생각하게 만들고...등등.. 미도리야말로 우리세대의 발랄함이 될 수 있었다. 


솔직히 와타나베가 나오코에 허우적거리는 동안 통속적인 시트콤이었다면 미도리가 와타나베의 뒷덜미를 잡아서 '이래선 곤란하다고 와타나베. 내 딸기 쇼트케익을 내가 어제 던져버렸는데 넌 아직 다시 사올 기미도 없어. 그래선 안되는거야 넌 나의 소울메이트잖아. 내말을 들으라고 알았어? 라면서 다그치면서 데리고 왔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수많은 90세대의 젊은이들은 미도리의 이런 쾌활함이 <노르웨이의 숲>을 헤쳐나오는 유일한 돌파구라고 생각했을 거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우리는 이게 와타나베의 자유연애 소설일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나오코든 하츠미던 레이코든 결국에는 미도리에게 돌아와 난 이제 너에게 정착할께 다른 여자들은 다 나에게 쓸모없었어라고 씁쓸하게 웃고 마무리되는 소설로 갔어도 피식 웃고 그렇게 될줄 알았다고 생각하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이런게 <노르웨이의 숲>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했다. 어떻게 미스테리하고 난해한 나오코의 달밤 자살을 설명하고,  자동자 배기관을 창에 연결해 세상을 달리한 기츠키를 생각하며, 머리에서 나사가 펑하고 날아가버린 레이코를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이 소설에는 현실에 지지대를 박아놓은 캐릭터가 별로 없었다. 그나마 미도리 말고는 정말 없었다. 


가끔은 이런 생각을 한다. 키즈키와 하츠미와 나오코의 죽음 이면에서 허우적대는 와타나베가 꽤나 정상적인 캐릭터인지도 몰라서 대개는 우리같이 현실에 달궈진 그럴듯하게 적응해버린 사람들에게 '당신은 언제부터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왔나요'라고 묻는게 아닐까라고 말이다. 결국, 와타나베는 세상과 어울지못한 채 생을 마감해버린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알수 없는 미안함을 느끼고 자신이 그들을 완벽히 이해해줘야만 하고 뭔가를 하고 싶었는데 그렇게 할수 있는게 뭔지는 모르겠고 나도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서 곧 그들을 따라 갈것만 같다면 와타나베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이면에도 비슷한 뭔가가 있을 거라고..그래서 마음속으로 다들 불편했을지도 모른다. 와타나베여 굳이 아픈 곳을 들춰서 그게 바로 너라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텐데 ...세상속에서 그렇게 다들 살아가는걸 뭐....진즉, 쓸데없는 우산같은 건 버리고 두손으로 제대로 미도리를 안아줬어야하는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그런다. 친구들이 말하길, 철이 없는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와타나베와 미도리적인 관점에서만 이 소설이 보일거라고...그래서 말인데 소설 말미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지 


'그래 나는 미도리를 사랑한다. 

 그건 오래 전 부터 분명히 알았다. 

 나는 다만 그 결론을 끌면서 회피했을 따름이다.'.......


이세상에서 너 말고 내가 바라는 건 없어. 라고 말했을때, 이 책은 할 일을 다한거다. 

가끔은 주변의 열렬한 노르웨이숲 신봉자들의 일장연설을 들을 때마다 따분하고 지리하고 뻔하고 너무 진지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무슨 미도리 이야기라도 할라치면 노르웨이의 숲에서 '미도리'는 그저 장신구일뿐 핵심 캐릭터가 아니라고 날 설득하고 와타나베의 심연과 나오코의 심리적 방화과 정신적 질병, 그리고 레이코의 트라우마를 끌고 오곤했다. 물론 그 이야기들이 꽤나 중요할 수도 있다. 단 개개인의 내밀한 관점에서 보자면 여러가지의 선택지가 있다고 볼 수도 있을테니..하루키가 어디선가 밝힌 바와 같이, 소설가란 다양한 가능성과 가설의 상황들을 독자에게 던지고 작가는 선택이란 걸 하지 않는 것이 맞다고..다양한 가설 속에서 유독 난 미도리와 와타나베만 보고 있는 거겠지 싶다. 


시간이 많이 지난 후, 세월의 풍화작용에 깍인건 와타나베가 미련퉁이였다는 사실과 미도리의 현실감각에 칭찬을 주는 정도였지만, 그게 다 일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여전히 난 도입부의 와타나베 트라우마를 읽으며 나 자신의 가슴에도 과거의 트라우마가, 추억이..기억이 몰려오는 걸 경험한다. 아 드디어 그 시절의 내가 오는군, 다시 또 그 시절의 다사하고도 다난했던 에피소드들이 쏟아지며 잠시나마 플랑드르파의 암울한 하늘묘사에 그럴듯한 내 그림을 걸어두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이 책은 유독 젊은 시절의 한 단면을 그대로 가직한 느낌이다. 내가 이 책을 젊은 날에 읽었으니 앞으로도 나이를 먹고 기억이 헐거워지고 시야가 흐릿해지고 만사가 귀찮을때라도 이 책의 편린들만큼은 선명할 것이다. 


그런게 노르웨이의 숲이 가지는 몫이다. 더도말고 덜도말고 그렇게 한 귀퉁이에서 오래도록  자리잡고 청춘을 대변해주고 있다는 느낌..그게 얼마나 갈지는 더 두고 볼 일이지만서도...




노르웨이의 숲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13-09-02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한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현...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
Review BOOK/소설2014. 5. 23. 16:49


아르투르 페레즈 레베르테의 작품들의 기저에는  '쉬운 문학'을 지향하겠다는 일념같은 것들이 엿보인다. 그렇다고해서 마냥 무협지처럼 읽기 편하고 쉽게 눈동자가 흐르는데로 마구 뇌속으로 이입되는 스폰지 같다는 느낌은 아니다. 그저 표현력에 있어서 한번 정도 곱씹어볼 만한 문학적 색채감이 약간 옅다는 정도, 그리고 고전문학계에서 늘 써왔던 '인간탐구'에 대한 진지한 고찰같은 겉만 번드르한 주제에 탐닉하지 않았다는 정도다. 사실 그것만 해도 독자가 가지는 부담감은 훨씬 준다. 대개의 독자들은 작가로부터 한여름 습기눅눅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연설같은 '해설과 담론'을 브리핑받고 싶지 않을테니까. 우리는 단지 이야기만 좋아할 뿐이라는 고백을 알기라도 하듯 레베르테의 소설은 드러내놓고 '내 소설은 쉬운 소설이야' 고 말하고 있었다. 


<뒤마클럽>은 철저히 설정으로서의 역사적 배경을 이용하고 그 이면에 숨겨져있는 미스테리한 에피소드, 그리고 상상력에 의해서 발휘된 '악마 이야기'를 적절히 섞으면서 흥미진진함을 자극하면서 시작한다. 거기에서 실제 알렉산드르 뒤마에 대한 평전에 가까운 견해들이 등장인물들의 토론에 의해서 드러나게 되는데  뒤마는 흥청망청의 쾌락주의자였고, 역사적 사실의 변형을 밥멋듯이 하는 사기꾼에다가 , 음흉한 동료의 글 가로채기, 이윽고 '난 역사를 위조했지만 창의력만큼은 발군이야'라고 궤변을 놓았다고 비평하고 있다. 여기에서 다시 뒤마의 고백이 인용되는데 '그렇지만 자신의 문학은 쉬운 문학이다'라는 것이었다.  앞서이야기했던 레베르테의 취지. 즉 뒤마가 지향했던 '쉬운 문학'으로서의 가치를 <뒤마클럽>에 오마쥬하면서 자신도 '쉬운 문학을 지향하고 있음'을 은근히 주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동안 <검의 대가>,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을 통해 형성된 팬층에 의해 명성을 얻기시작한 아르투로 페레즈 레베르테는 <뒤마클럽>을 통해서 스페인의 '움베르트 에코'라는 별칭이 붙어버렸다. (이건 '장미의 이름' 번역가인 이윤기씨의 추천평도 어느정도 영향이 있다.) 하지만 대중들의 치밀한 탐독과 구체적인 정황분석에 의해서 '수준미달'의 유사작이란 의심을 받곤 했다. (지금도 갑론을박 중이시다.) 읽어도 별 도움도 안되는 정서함양에 도움조차 되기 어려운 통속소설에 불과한 레베르테의 소설이 어떻게 에코의 걸작들과 비교될 수 있다는 거냐는 비아냥들이 난무하고 있었던 것이다. 레베르테가 <뒤마클럽>이야기를 하면서 움베르트 에코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는 지점이 의심스러운 의도로 호도되고 있었나보다. 정작 레베르테는 '쉬운 문학'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공교롭게도 독자층이 바라보는 시점은 지적유희가 판을 치는 움베르트 에코적 분위기가 오버랩되어 있는데 무슨소리냐라고 항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움베르트 에코'적이란게 도대체 뭘까.  움베르트 에코는 <장미의 이름>에서 자신의 소설적 정체성을 드러냈드랬다. 그러니까 플롯자체는 미스테리 추리소설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과정에서 수많은 담론과 역사절 사실을 통한 갖가지 충돌식 토론과 의견을 지면위에 펼쳐놓음으로써 자신의 지적인 두께를 꽤 자랑했다. 독자들의 상당수는 한 인간이 두뇌에 담을 수 있는 지식총량의 무게에 이런 정도의 분량도 들어있을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면서 움베르트 에코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어쩌면 일반독자의 취향적 선택으로 보았을때,  추리소설로서 '장미의 이름'은 '잘못된 선택'으로 판단했을 가능성도 있다. 너무 길고, 너무 장황하고 그리고 너무나도 심취된 담론들의 연속이었으니까..취향이 죄는 아닐 것인데 에코스럽다에 너무 경의를 표할 건 없을테니 '장미의 이름'을 중도포기해도 충분히 납득할 만했다.  


어찌되었든 섬세하고 지적이며 현학적인 지식들을 백과사전식으로 펼쳐놓으며 역사적 사실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는 기술이란 왠만한 소양가지고는 어림없는 일이긴 하다. 우리는 상상력의 한계를 알고 있다.  적어도 '에코'적일 수 있으려면 몇가지의 조건들이 뒷받침되주어야 하고 그런 것들이 다 펼쳐지고 나서도 그 '케미'가 결론에 다다렀을때 얼마나 가슴이 공감해주는지도 기준으로 작용한다. 뒤마를 끌어들이고 '쉬운 문학'과 '정통문학'의 담론들 사이에서 보리스 발칸루카스 코르소를 대비시킨 채 격론 이끄는 정도로는 에코적이다라고 판단하기 어려웠을 것이나, 애초부터 레베르테는 그럴 마음조차 없지 않았을까. 자신은 '움베르트 에코'의 어려운 문학과 서술을 할 의도가 없었으니까. 그저 뒤마처럼 통속적이고 흥미위주의 쉬운문학이지만 자신의 창작성을 충분히 들러낼만한 내러티브였다고 <뒤마클럽>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데 방법적으로 에코의 서술적 스타일을 이용했다는 느낌은 강하게 든다. 


주로 독자들이 오해했던 건 <뒤마클럽>에서 발휘된 레베르테의 독서편력과 방대한 지식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역사절 사실 이면에 감춰진 미스테리한 설정들과 에피소드들. 팩션(Faction) 창조자였던  움베르트 에코 파트2가 되려면 이런 배경 없이는 불가능하다. 사실 이 유사성이 <뒤마클럽>의 매력이기도 하다. 우리는 초반부터 뒤마의 <앙주의 포도주>에 얽혀있는 이면 스토리에 집중할 것이고, 이윽고 병렬 대두된 아리스티테 토르키아의 17세기 델로멜라니콘의 삽화가 들어간 "어둠의 왕국에 있는 아홉번째 문'에 완전 몰입할 수 있다.레베르테가 쳐놓은 역사적 사실과 슬며시 틀어놓은 상상력의 설정의 늪에서 서서히 함몰되어가는 거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특유의 독서편력이 껴들고 갖가지 인용문과 상징이 결합되면서 장대한 '에코적 월드'를 은근슬쩍 그려놓았으니 혐의는 이제 충분하다.  

라파엘 사바티니를 소개하면서 <스카라무슈><캡틴블러드>를 소개하고 아예 초장에 주인공 루카스 코르소에게 캡틴 블러드보다 '스카라무슈'쪽이 더 사바티니의 경전에 가깝다는 의견을 슬쩍 비추고,  '아르멩골의 자식들' '고서와 사서학에 관한 호기심들', '페르실레스' '카스티야 왕국의 법전',  즈바코의 '호걸들', 폴페발의 작품들, 갈도스 번역의 디킨스의 '피크위크'등을 북 컬렉터들의 로망으로 묘사했고,  외젠느쉬의 '파리의 미스테리' 샤르니 백작부인, 두 다이아나총사들, 40권의 몬테크리스토 백작, 메리메'암노루의 복수' 등을 뒤마 그림자로 치장했으며,  베네딕토 카시아노 '악마사전', 피에르 크레스페의 '사탄의 증오' , 트리테미오 '스테가노르라피아' , 폰티아노'세기말에 대해'. 파올로 데스테 '에술에 관한 3권의 책' , 베르나르도 트레비사노의 '불가사의와 상형문자에 관한 엉뚱한 해석' , 붉은 집의 신사, 검은 튜을립등을 미스테리하게 창조, 인용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쉽사리 접해보지 못했던 몇몇 작품들의 나열에 기가눌리고 호기심과 그로테스크한 미심쩍음이 회오리칠 무렵, 이 <뒤마클럽>의 핵심이 되는 토르키오의 <어둠의 왕국에 있는 아홉번째 문>을 등장시켜 최고조로 긴장감을 증폭시켰다. 


자..독자들은 이 레베르테의 기가막힌 지적유희적 설정에서 얼마나 많은 내용을 캡쳐해낼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사실적 근거와 상상력의 산물을 구별해 낼 수 있는 것인가. 책사냥꾼의 코르소가 자기경험적 지적반항을 보르하나 보리스발칸에게 뿜어내는 것에 어느정도 공감하고 동의할 수 있는가. 책을 사랑하다못해 집착하는 책과 관련된 탐닉주의자들의 심리적 모양과 허세는 그럴듯했고 고딕적인 나인스게이트(조니뎁 주연의 동명 영화 : 실제 뒤마클럽을 원작으로 했다.)는 미스테리의 한 축을 증폭해 단독화될만큼 영향력 있었다. 뒤마클럽의 두 스토리축이 말미에 가서 허무하게 '아무관련 없음'으로 결론 지어질때, 신비로움의 연쇄반응이 응고되어 가라앉아버렸다는 실망이 문제였던 거지. 과정자체는 흥미진진했지 않은가. 그래서 서평의 기대에 못미친 아쉬운 작품이라는 평가들이 먼지처럼 떠도는 거다. 


솔직히 코르소의 빈정거리는 듯한 지적유희에 가까운 대화체에서 쾌감을 느끼는 것으로는 책중독자들의 구미를 충족시킬수 없었다. 진짜 원했던 건, 리아나 타이예페르가 밀레이디 환생으로 비쳐지고 돌아가는 상황이 루카스 코르소를 달탸냥으로, 그리고 로쉬포르가 생명을 위협한 채 '앙주의 포도주' 이면에 숨겨진 현실의 판타지화였을 것이다. 보리스 발칸이 수없이 떠벌이다시피한 '카를로스 데 바츠 카스텔모로'의 정체나 아르만도 드 쉴레그, 앙리드 아라미츠, 이삭 드 포르토와 같은 역사적 사실이 얼마나 삼총사와 밀접한지는 그저 장식에 불과하다. 그런 내용과 해설을 읽을 수록 느껴지는 건, '알았다구, 그러니까 도대체 지금의 상황과 그 총사들의 사건이 얼마나 신비스럽게 연결되어있는지 이제 그만 비밀을 밝혀줘' 였다. 그런데도 여전히 태연자약스럽게 보헤미안 스캔들의 '이레네 아들레르'가 등장하고 그만 '황량하고 비탄에 잠긴 분위기가 감도는 왕국에서 혼자 앉아있는 단조로운 모습'으로 루시퍼를 묘사한 코르소를 사랑하는 스토리가 등장해버렸다. 


하나도 힘든데 두가지가 얽혀있다니, 그렇다면 리슐리에는 연금술사이고 악마주의에 사로잡힌 고에시아(Goecia)를 연구한 역사적 인물이기라도 했다는 건가. 그리고 뒤마는 그걸 알아채리고 '앙주의 포도주'에 그 비밀을 숨기고  '어둠의 마왕을 불러내는 책' 델로멜라니콘의 열쇠가 되는 키워드를 '친필' 원작 원고에 숨겨놓아서 코르소가 이지경 이모양으로 생고생을 하면서 이리저리 사건을 겪게 되는 건가라고 상상하게 된다. 파르가스나 파리의 웅게른 재단의 컬렉터들로부터 얻을 수 있었던 건 컬렉터의 허무한 삶, 그리고 악마주의 탐닉자의 허접스러운 옹호였다. 세속적인 플라비오 라 폰테와 낸터것의 포경사 클럽은 조크에 불과했고 결정적으로 리아나의 밀레디 오버연출은 섹슈얼한 에피소드를 무리하게 끼워넣다가 아무것도 아닌 이상한 설정이 되버렸다. 차라리 폴란스키의 나인스게이트가 그쪽으론 일관되었던 게 아닌가. 

나인스 게이트(Ninth gate)는 '앙주의 포도주'를 초장부터 거세하고 '어둠의 왕국으로 가는 아홉개의 문'에만 할애했다. 조니뎁에게 연결되는 리아나 타이예페르는 악마를 신봉하는 은밀한 조직원이었고 보리스발칸은 보르하와 합체해서 루시퍼를 만나고 싶어하는 그야말로 악마추종자로 화했으며 이레네 보들레르는 델로멜로니콘의 아홉번째 삽화의 여자로 연출되어 코르소를 나이스 게이트로 '인도'해주는 진정한 루시퍼의 대리인으로 나왔다. 약간 우습지만 영화와의 이 괴리감 중에도 여전히 리아나 타이예페르가 코르소와 책을 댓가로 섹스를 나누고 리아나가 따귀를 날리며, 이레네와 몽환적인 라스트 섹스신을 원작처럼 연출했다는 점이다. 가히 플롯의 주요 이벤트를 살리며서 '앙주의 포두주'만 들어냈던 셈이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조차 '뒤마클럽'의 '앙주 포도주' 미스테리는 극적 긴장감을 한번에 무너뜨리는 허망한 설정이었음을 눈치챈게 아니었을까. 약간이나마 총사들의 이야기에 나이스게이트가 연결이라도 되었다면 거대한 '얼음과 불에 대한 노래' 미니시리즈에 필적할만한 미니시리즈로 연출되었을 수도 있을텐데 그만 뒤마클럽의 조직적인 게임놀이에 놀아난 코르소라니...그러고도 보르하는 영화의 발칸처럼 부르짖다가 허망하게 끝난다. 코르소가 이레네를 통해서 나인스게이트로 갔다는 이야기는 원작에 없다. 그저 아홉번째 삽화가 잘못된 것이었다는 의미심장함만 남겨둔 채..시니컬하게 마무리되었을 뿐이다. 다만 뒤마클럽의 몰입도를 증가시키는 몇가지는 영화 나인스게이트를 먼저 본 탓에 완변한 코르소의 조니뎁을 상상했다는 것과 (Corso가 해적을 가리킨다고 하니 '캐리비안의 해적' 잭스패로우의 조니뎁이 나이스게이트를 선택한 건 숙명적인 결과가 아니었나하는 생각마저 든다.)앙주의 포도주스토리가 너무 허무해서 너무 기대했던 부담감이 격감된 것이다. 


개인적으론 영화도 좋긴 하지만 여전히 레베르테의 <뒤마클럽>이 좋다. 작위적이긴해도 코르소는 책을 정말 사랑하는 캐릭터이자 비열함느껴지는 세상때 물씬 묻은 사랑스러운 캐릭터고 이레네와 리아나는 충분히 자극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콘스탄스와 밀레이디였다고 느껴지니까. 게다가 난 뒤마의 <삼총사>에 대한 로망이 그득하니 <뒤마클럽>이 주는 뉘앙스가 그다지 나쁘지 않았던 셈이다. 두고 두고 읽을 지는 모르겠지만 흥미롭기로는 아르투로 페레즈 레베르테의 이력 중에서 제일 낫다고 본다.   





뒤마클럽

저자
아르투로 페레스 레베르테 지음
출판사
시공사 | 2002-02-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210개의 역주, 2년여에 걸친 지난한 번역 작업 『뒤마클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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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ewell
Review BOOK/소설2014. 5. 23. 16:48


앙드레 지드<야간비행> 서평을 통해서 '리비에르의 숭고함'을 칭찬할 때, 이성과 정신의 강조를 통해서 작품이력을 넓혀온 앙드레 지드라면 냉혹하리만치 차갑고도 일관된 그리고 초인간적인 미덕을 가진 리비에르에게 마음을 빼앗기는게 당연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드랬다. 만약 야간비행이 '리비에르'의 이야기라면 여태 우리는 밤하늘에 고고하게 자신만의 차원과 세계를 회복하고, 고독하기 짝이없는 조종사를 로망으로 결코 읽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기엔 <야간비행>의 스토리가 너무 한가한 경치놀음으로 비추어질테니까....<야간비행>에서 결국 독자들이 기억하는 건 뭘까.    


비지니스 경영서적과 달성해야 할 인간적 정신력을 주제로 한 인문학의 세계에서라면 리비에르는 <야간비행>에서 온전하고도 확고한 '지휘자'의 롤모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조종사가 파타고니아 어디에 처박히던, 혹은 천킬로미터의 폭풍 구름 융단 위에서 오도가도 못할지라도 여전히 조종사를 하늘로 올려보내야만 하는 강력한 의지의 소유자라니...반면, 이것을 숭고하게 바라보고 자기초월적 의지의 순수성을 본다고 경탄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아마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리비에르는 완전한 덕목의 소유자였으리라. 단호하지만 갈등하고 괴로워하고 걱정하는데다가 겉으론 내색조차하지 않는 '상관'으로서 '야간비행'은 그저 뚫고 나가야할 목표이자 성과이기 때문이다. 난 그런데 리비에르의 강력한 카리스마앞에서도 동조의 시선조차 할애 하지 않고 있었다.


앙드레 지드의 서평을 읽으면서 동감하기 힘들었다는 건 이런 걸 두고 이야기하는 게 아닐까싶다. '우리가 보고 싶은게 의지의 순전힘으로 휙득할 수 있는 자기초월'이라고 하는 구절을 읽으며 속으로 누가 그런 걸 기대하고 야간비행과 남방 우편기를 본단 말인가라고 투덜대고 있었다. (물론 앙드레지드의 서평 정도면 굉장히 훌륭한 서평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대다수의 일반 독자는 야간 비행의 첫서두에 등장하는 몇 줄의 풍광 묘사을 따뜻하게 기억한다. '벌써 황금빛 석양속으로 구릉의 그림자가 짙어져 밭고랑을 지듯 펼쳐졌고 들판은 오래도록 스러지지 않을 빛으로 환하게 밝았다. 이 지방에서는 기울어가는 겨울에도 하얀 눈이 남아있듯 대지의 황금빛 저녁놀이 늦도록 불타올랐다'는 대목 말이다. 오히려 '야간비행'에서 이런 서정과 로망의 정서를 기대하고 기억하는 쪽일 것이다.  콘크리트같은 숭고한 의지를 기대하기보단 파비앵과 베르니스의 고독한 비행, 프로펠러 뒤로 펄럭이듯 사라져가는 마을과 항구와 산등성의 풍경들, 그리고 생을 정리하기도 부족한 황급한 순간들에서야 생각나버린 과거로부터이어진 회한들, 결국 묵묵히 "하강함, 구름속으로 들어감"을 무전치며 쓸쓸히 무전국 백지위에 유령같은 글자들이 찍힐 때, 마음 가득히 안타까움을 뭍고 조종사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신을 느낀다. 마치 '삶이란 풍경을 바라보고 음미하듯 그저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이 슬쩍 비춰질때 리비에르의 존재감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밤은 어두운 연기처럼 피어올라 계곡을 매우고, 벌써 불을 밝혀 별자리처럼 반짝임으로 서로인사를 나누고 조종사도 거기에 화답하듯 손가락을 튕겨 날개등을 깜박인다. 이윽고 등대가 바다를 향해 불을 밝히듯 집들이 저마다 광대한 밤을 향해 자신의 별을 밝히자 대지는 반짝이는 호출신호가 점점히 박힌듯 펼쳐지는 가운데, 인간의 삶을 감싸는 모든 것이 이미 반짝이고 있었다.


비행기 날개의 강철 소골부분을 쓸어보며 오백마력엔진이 이 물체에 아주 부드러운 전류를 흐르게 하여 얼음처럼 차가운 강철을 벨벳처럼 부드러운 살로 변하게 했다던 파비행을 보면서 우리는 축복같은 비행의 헤택이 그를 더 감성스럽고  로망스럽게 만들었다고 믿게 된다. 이윽고 야간비행이 가져다 주는 마음속의 정경과 이미지가 온통 이러한 쓸쓸하지만 동화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탄식과 독백으로 마음속에 그려졌음을 인지한다. 야간비행의 추억은 이런 명문장들의 차지가 되버렸다. 독자들은 이 야간비행을 읽으면서 서서히 서정적이고도 운명적인 조종사 좌석에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으리라  다만  인생이 그렇듯 이런 로망뒤에는 숙명적인 갈등과 절망이 몸을 구기고 숨죽이고 있는 것을 불안하게나마 눈치채면서 설마라는 단어를 동시에 떠올리면서...





살다가보면 결국 파비앵의 폭풍을 나도 만나는구나라고 생각되어질 때가 있다. 이제는 죽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되어지는 생애의 마지막에서나 겪는 암흑같은 절망감,  별탈 없을 거라고 근거없이 믿고 살았어도 늘 이 불안감이 없지는 않았는데 막상 닥치면 그냥 현실이 너무 비현실적이다.  그러기 앞서  '죽음을 부르는 미끼처럼 반짝이는 별 몇개를 따라 비상' 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인거다. 그런데도 삶이란 묘해서 죽을 만큼 힘이들고 괴로우면 그것이 '한번 별을 따라 올라가면 더이상 내려올 수 없어서 별을 깨물며 머물게 된다'는 결말을  알면서도 삶의 조종간을 당기고 싶어진다. 나도 파비앵도  결국 죽음을 부르는 미끼같은 별을 따라 하늘로 쏫구친건 아닐까 . 이 잠시간의 평안함이 일생동안 마지막으로 주어진 찰나적 안락함이 아닐까.  


리비에르의 진심은 사람들의 진심과 별반 다를게 없다. 절망을 바라보는 일반 시민들, 그저 아직 절망이 불행이..불운이 닥치지 않은 그 사람들의 입장인 것이다.  '우리는 영원하기를 바라는게 아니야. 행위와 사물이 갑자기 그 의미를 상실하는 모습을 보지 않으려는 것이지. 그렇게 되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공허가 나타나거든..' 다들 공허함이 두렵고 그 처지가 너무 운명적이어서 받아들이기 어렵고 미칠 것 같은 절박함이 바닥을 드러내게 되면 사람들은 냉혹한 현실의 룰을 하나씩 더 추가할 뿐이다. 엔진 1,900 회이상 회전금지.....삶에 딱히 해결책이 없으며 전진하는 힘만이 있을뿐이라고 결론지으면서 일상으로 돌아가도 우리는 뭐라고 할 수 없다. 그냥 쓸쓸함이 감돌지만 운명에 순응하고 상처받지 않기위해 규칙과 룰에 집착하고 부속같고 영향력 없는 한 인간의 무력감이 지면 위에 덩그라니 남았을 뿐,


그에 비하면 <남방우편기>에서 기억나는건 단 하나 뿐이다. 주느비에브를 데리고 비오는 날 호텔을 전전하면서 겪는 현실적인 어려움들..(주인공 베르니스는 불행해진 과거연인 주느비에브를 다시 자신의 곁으로 데리고 올 생각을 한다.) 과거의 연인이 자신을 데리고 가달라는 판타지스러운 로망이 있을지라도 결국에는 차가운 현실의 벽을 만나게 될거라는 대중적인 추측은 별로 어긋남이 없는 법이다. 그저 차가운 현실이 있음을 인지하면서도 그런 전제 아래에서 한없은 풍경속을 날아가며 초월하려고하는 욕구같은 것들이 비행에 스며든 것 뿐이지.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기 주위에 지속되는 현실이 필요하고, 부조리하다든가 부당하다는 건 그저 말뿐이고, 베르니스가 데려가 주느비에브는 더이상의 주느비에브가 아닐거라는 친구의 조언은 너무 통찰력이 있어서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여기선 베르니스의 희망찬 독백이 더 어줍잖고 비현실적이더라도 '남방 우편기'스러웠는데 ...그러고보면 생텍쥐페리는 몽상가라기보단 지독한 현실주의자가 아니었을까 의심스럽다. 


베르니스와 주느비에브를 보면 '정말 내가 꿈꾸었던 어떤 만남과 연인과 그리고 어떻게 일이 이렇게밖에 돌아갈수가 없는거지라고 푸념했던 불운같은 것들이 떠오른다. 꼬여버린 '지금'을 만나면 연인들은 자신들의 선택을 의심하고 '인연이 아니었음'을 떠올린다. '주느비에브, 이 밤이 이 비가 우리의 신뢰를 망치고 있는거야. 라고 읍조리며 불치병같은 현실을 의심했던 베르니스와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런 징그러울 만큼 흡사한 과거가 한번 정도는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대중들이 몇가지 가설을 진리처럼 믿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성숙되지 않은 시절의 사랑들은 다 '미완성'이 될 운명이라고..첫사랑은 이뤄질리 없고 그 사람은 떠날것이고 나는 훗날 더 단련이 되고서야 제대로 된 사랑을 만날 것이라고...   


'나의 여름은 덥고 짧고 우울하고 행복하다' 

...............................

포르테티엔 16시 45분 출발.

세네갈의 생루이 도착소식 없음.

자그 베르니스 프랑스기지 불시착 

이후 행방불명. 


풍경만으로 기억하기에는 너무 애절한 '남방 우편기'였지 아마.....


우리는 밤속으로 들어간다. 한개비의 담뱃불을 신호등 삼아..그러면 세계는 자신의 진짜 차원을 회복한다.'




야간 비행 남방 우편기

저자
생텍쥐페리 지음
출판사
웅진씽크빅 | 2008-09-3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찬란하게 빛나는 밤의 구름바다 위를 헤매고 있지만 저 아래 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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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ewell
Review BOOK/소설2014. 5. 23. 16:44


아주 오래전에 '폭풍의 언덕'과 '모비딕'을 읽었었다. 그러니까 이런 고전따위는 유년들의 삶에서 좀처럼 자발적으로 읽히기 힘든 어떤 지루함의 정서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건 내가 '문학'적으로 조금이나마 관심이 있었던 감성적 부류가 아니었음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때로는 친구들 중에는 캐서린 언쇼를 지긋한 눈빛으로 이해한다고도 했고 에이허브의 광기어린 하얀고래 집착증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본다고도 했드랬다. 나보다 다들 성숙해 있었던 걸 보면  그 나이, 그 시절, 내 정서의 함량을 넘어서는 퀄리티적인 괴리감이 그 친구들에게 있었던 것 같다. 당시의 나에게는 정신착란의 캐서린, 돌아버린 미치광이 에이허브였을 뿐이었으니까. 


그리하여 멜빌의 다큐같은 '모비딕'을 다시 차근차근 읽어보리라고 책장을 넘겼다. 무수한 세월들의 폭풍우가 가져다준 내 소양의 흔적들은 프랑스 척탄병같다던 피쿼드호을 완벽히 감싸안을 만큼 보호무늬가 되어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과연 나는 지리하게 이어지는 고래 해설서와 같은 대목들을 묵묵히 읽으며 지나갈만큼 동화되어 있었고 무덤덤해져 있었드랬다. 까짓거 2절판 운운하며 참고래와 향유고래 특성을 백과사전처럼 읇조려준다고 해도 난 이게 피쿼드의 생애와 사실적으로 여떻게든 연결되어있어서 갑판위에 이슈메일 뿐 아니라 스타벅스터브, 퀴퀘그에게 모종의 '지식'(?)이 되어줄거라는 착각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그리고 괴이하다고 느꼈던 크레타 문양의 형형색핵 문신을 가진 작살잡이 퀴퀘그를 비롯한 타슈테고와 다구의 투창병들 곁에서 작살날을 빼서 면도라도 하고..경건한 작살잡이는 한푼의 가치도 없다고해서 일부러라도 스스로를 흉포한척 하는 시늉이라도 할 뻔했다. 


이정도면 예전의 모비딕이 아닌거다. 135장 넘는 항해 일지같은 해설서를 관통하는 동안 어디 서고에 보관되어있는 기록지들의 몇 십년 연대사를 추적하고, 중간중간에 있었던 비밀스럽고도 은밀한 비화들을 숨죽여 읽던 후대 기록자의 마음으로 항로를 따라간다는 것, 이슈메일의 묘사대로 고래를 해체하고 작살던지기에 대해서 숙독하며, 기름통에 파묻혀 열병을 앓다가 살아난 퀴퀘그의 관을 옆에서 같이 만들었을 것 같고,  용연향 가로채기같은 고래강탈의 현장에서 같이 낄낄대고 있었던 것 같은 현실감, 다 모비딕을 다시 읽었을 때 생겨났던 보기드문 경험들이었다. 그러고보면 지리하게 서술된 고래에 관련된...바다와 관련된 수많은 백과사전식 해제들은 소설적 스토리와는 별개로 피쿼드호의 리얼리즘, 그리고 다큐적인 현실감들은 '시간의 세례'에 의해서나 드러나는 모종의 비밀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도 읽었지만 그땐 흰고래를 쫓는 광기어린 에이허브말고는 떠오르는 어떠한 이미지도 없었으니까..


낸터컷물보라 여인숙, 피터코핀에 걸려있는 성난고래가 선채를 뛰어넘다가 돛대머리에 꿰인 그림이나...,  광택이 나는 상아목걸이를 목에 건 야만적인 에티오피아 황제처럼, 적들의 뼈에 돋을 무늬를 새겨서 화려하게 몸치장을 한 솜씨좋은 식인종의 이미지를 뿜어냈다던 피쿼드호의 묘사는 기억조차 나지 않았고 퀴퀘그의 '요조'는 이제서야 그 존재를 눈치챘다고 한다면 가히 '모비딕'을 읽었다는 표식은 좀 더 레벨화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한 3 레벨 정도 되려나..요즘으로 치차면 잡설을 위한 잡설일지도 모르는 멜빌의 이런 묘사들은 '광경'에 대한 상상을 부추기고 감정에 대한 풍경을 그리게 된다. 나도 고래잡이를 더럽고 냄새나고 비위생적이고 기껏해야 도살업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었다. 도살업을 즐기면서 그저 흰색이 주는 순결함을 어떻게든 더럽혀보자는 잔인한 뱃사람들의 무모한 도전기가 모비딕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나보다.  



몇몇의 독자들은 피쿼드가 모비딕을 만나기전까지 수많은 여정들이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로망의 해양탐험소설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나. 캄비세스 카이사르, 그리고 티모르 잭이라도 만나고 일본왕 모르콴과 칠레고래 돈 미겔을 보면서 고래 수족관에 온 구경꾼마냥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관람하고 열대해역의 문지방으로 들어가 그곳을 영원히 지배하고 있는 키토의 화창한 봄빛 속을 달리면서 향기롭고 넘칠듯한 풍족한 낮시간을  장미향수를 뿌린 눈으로 만든 페르시아 빙과를 수북히 쌓은 수정그릇에 비유할 줄 안다면 잠시나마 모비딕은 로망소설일 거다. 게다가 에이허브는 선원들에게 듣기에도 애매한 고고한 자신의 은유와 비유를 설파하지 않는가. 듣고 있으면 마치 바다를 향해서 자신의 자아를 어떤식으로든 그럴듯하게 포장하려는 고집센 철학자같으니... 고래잡아 죽이기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소설치고는 너무 낭만적인 것이다. 


'나를 모욕한다면 태양이라도 공격하겠어' 대충은 에이허브가 어떤 캐릭터인지 알듯한 구절은 이 구절하나만은 아니다. 물그러미 바다를 내려보면서 '나에게 달아나는거지'라고 미친노인이 지금까지 보여준 것보다 훨씬 깊고 절망적인 슬픔을 띠고 있었다고 했는데 이즈음되면 이 포경스토리가 기어코 해피엔딩으로 가는 일은 배제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듣기에 따라서는 에이허브가 모비딕을 잡던 말던 책의 중간이상을 넘어가면 모종의 안도감같은 것들이 감돈다. 하이델베르그의 술통에 빠져서 생을 달리할 뻔했던 타슈테고와 그를 살려낸 퀴퀘그, 그리고 바다에 자신의 자아를 두고 정신이 나가버린 피핀, 요나와 잡힌 고래와 놓친고래에 대한 작가의 진지한 고찰.. 비록 스쳐지나가듯 정답없는 몇가지의 상념들이었을 지도 모르지만 배위에 있거나 지면위에 있거나 다들 비슷한 생각들을 하면서 살아간다고 보면 이 소설도 나름대로 역할을 다하고 있는 셈이다. 


퍼스를 얽어매고 치솟아오른 모비딕이 데리고 사라진 피쿼드의 영혼들틈에서 살아남은 이슈메일의 엔딩이 너무 단촐해서 시간에 쫓긴 블럭버스터의 가위질이 생각나지만 미친듯한 엔진과열음이 들리다가 기어코 어느순간 엔진은 멈추고 고요가 찾아오면 그때야 말로 꼭대기까지 삼켜진 피쿼드호 처럼 모든게 끝난다고 깨끗이 털어버릴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하여 수많은 여정끝에서 며칠간의 추적, 그리고 모비딕과의 해후끝에는 피쿼드에 실려 같이 항해를 했던 독자들의 지친 고단함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이슈메일이 구조되고 다시 낸터컷으로 돌아오면....잠시동안의 장례식대열을 쫓아가다가 물보라 여인숙으로 아니간다고 장담할 수 잇을까. 다시 퀴퀘그를 만나고 상아 장식의 식인종같은 피쿼드 같은 배에 다시 탑승하지 말라는 법이 있을까.  


이건 다 모비딕이 남긴 후유증이자 향수다. 

.


모비딕

저자
허먼 멜빌 지음
출판사
작가정신 | 2013-08-01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포경선을 탄 경험이 있는 특이한 이력의 작가 허먼 멜빌이 격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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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ewell
Review BOOK/소설2013. 11. 13. 20:16


불운은 너무나 오스카 와일드적이었고, 우연은 피츠 제럴드적이었으며 스팬서적인 암울함이 깃든 공기들이 앨런 포우적이었다고 느낄 때 데자뷰처럼 읽었던 단편들의 문장들이 현실세계의 미장센처럼 복원되곤 한다. 막연히 묵었던 숲속 호텔의 수영장에서 홀로 튜브에 둥둥떠다니다가 '개츠비'도 이렇게 마지막을 맞이했을거라는 둥, 아틀란타 레지던스 인 카운터에 놓여있던 은화단지를 보면서 '발할라 드러그 스토어'를 떠올리고, 매일매일 가쉽처럼 터지는 아이돌의 연애사 틈새에서 '멕기니스'의 사랑 이야기를 슬며시 떠올리는 식이다. 그게 카버가 되었든 피츠제럴드가 되었든 사실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니다. 다만 언젠가 삶의 언저리에서 맞닥드릴만한 사건들의 이면에는 '예전부터 있어왔었던 모종의 반복' 메커니즘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사소하게 스쳐지나가지 못하게 되는게 신경쓰일 뿐인거다.  아...이건 뭔가 상징적인 건가...내 인생의 중대한 핀 포인트라도 되는 걸까 라고 자꾸 되뇌이듯...


트루먼 커포티의 단편들도 유독 그런 기시감이 강했던 것 같다. 삶이란 세월을 지치듯 쏜살같이 지나쳐왔어도 질감은 비슷한 걸까. 다양하게 수놓았던 무늬들의 패턴이란 결국 모두 같은 뉘앙스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야기들은 시종일관 계속되었고 '요트여행'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커포티에 대한 안스러움이 종이 지면 위에 눈 내리듯 내려앉아버렸다. 이것도 소설일 뿐이데 어차피 허구의 세계와 가상의 이야기들이 남겨놓은 감정의 배출구를 따라 무엇인가를 토해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으리라 싶어 몇 번이고 앞쪽으로 리와인드해서 회상해보곤 했다. 커포티의 재능을 고려해본다면 대중들은 이 <차가운 벽>에서 따뜻하고 온정어린 시선이 맴도는 단편 몇 개를 이런 절절한 기억의 대상이었음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크리스마스의 추억>(1956)과  추수감사절에 온 손님(1967), 그리고 어떤 크리스마스(1982)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시대는 다르지만 정서는 비슷한 과거로 가게 될 것이고,  이 이야기들이 커포티의 자전적 이야기란걸 눈치 챌 즈음, 커포티의 쓸쓸했던 생애의 끝자락과 대비된 유년시절의 따스함, 그리고 밑바닥 정서에 침몰되어버린 불운한 나날들에 대한 회한같은 것들이 읽혀지게 된다.  아침, 찬서리가 풀잎을 덮어 반들거리고, 오렌지처럼 둥글고 더운날씨의 달처럼 오렌지빛인 태양이 지평선위에 떠올라 은색으로 빛나는 겨울 숲을 달구며, 검은색 풍로와 안락의자 두개가 놓여있는 벽난로에서 버디는 숙과 퀴니와 소근거린다. 으르렁거리는 국화꽃오드 헨더슨보다 더 치졸했던 과거야 불편한 기억도, 추억도 아니 될수 없겠다. 누구나 성장의 길목에서 졸렬해지기도 하고 끝없이 순수했음이 상처받기도 할테니까..독자들이 느끼는 안타까움이란 건, 이 정서가 성장의 연료로 쓰여지지 않은 채 불완전 연소되어 성인의 커포티에게 드리웠을거라는 막연한 추측 때문일 것이다. 커포티는 불운했던 것 같아...라고 혼자서 몇번이고 중얼거렸었지아마... 


 지인들과 이야기했었는데, 대개의 경우 <인 콜드 블러드>의 명성만으로 기억하고 <티파니에서 아침을>과 같은 로맨스적 감성만을 커포티의 정체성처럼 꺼내놓곤 했었다. 매스컴에서 떠들어대고 광고지에서 큰 폰트체로 위압적으로 시선을 장악당하고,  '20세기 소설지형을 바꾸어버린 역작' 타이틀에 포커스가 가면, 안 읽고는 못배기는 커포티의 마스터피스, 그리고 그동안의 이미지들은 다 점거당할테세다. 우리는 반지의 제왕을 읽으면서 사우론을 내일 만날것 처럼 생각하지도 않고, 어느 동물원에서 호랑이가 사자를 잡아먹었다던 해괴망칙한 또 하나의 이슈를 내 걱정거리로 치환하지도 않아서 '인콜드블러드'의 다큐멘터리 서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격리시킬수 있지만, <차가운 벽>에는 호랑이도 사자도 등장하지 않으며 사우론도 없고 몇 명을 피칠해가며 해치우는 연쇄살인마도 없어서 그냥 무미건조하다.  그저 일상적인 삶의 무늬를 그려놓았는데, 어쨋든 자주 읽게 되는건 <차가운 벽>쪽이다. 뜻뜻한 한 여름 아무도 없는 호텔 수영장 비치파라솔 밑에서 레몬색 햇볕을 배경으로 '차가운 벽'을 읽으면 완벽하게 온정적 관찰자로 변할 수 있다. 내 이야기일수도 있고 친구 이야기일수도 있으며 어제 있었던 사건의 감정 복제판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인 콜드 블러드'같은 부풀어오른 풍선의 불안함쪽 보단 개인적으로 완벽히 우위에 있는 셈이다.


불현듯 왜 단편집의 제목이 '차가운 벽'이었을까 생각해보았는데 '열여섯은 키스를 한번도 받아보지 않은게 아니라 한번도 강간을 당하지 않았다는 뜻이겠죠'(차가운 벽-1943) ..이 문장이 첫작품에 등장한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혹시라도 '차가운 벽'이란 독자가 커포티의 작품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반항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16살의 풋풋하고 설익은 애송이라할지라도 독자들의 '감정'을 받아들여 '연한 장미빛이 감도는 벽이 있는 방'에서 잠이 들 것이라고....자신의 작품이 좀더 따뜻해질수 있다는 인트로, 무언의 투정같은 것이었으리라. 물론 차갑다는 평에서 상처도 받고 토라지기도 한다는 은근한 고백까지 덧붙여서 말이다. 그 뒤로는 사실상 다양한 인간군상에 대한 씁쓸함(자기만의 밍크코드-1944)과 말도안돼는 행운이 현실로 다가오는 과정(은화단지-1945)을..., 그리고 노년의 여인이 정체성에 위협받으며 존재감을 잃어가는(미리엄-1945) 이야기까지.. 삶을 편광시켜 프리즘처럼 다반사시켜준다. 이외에도 이 책에는 다양한 편린들이 공존한다. 


예전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언급했던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의 모티브, <마지막 문을 닫아라>도 이 책에 있다. 그러고보니 이 정서를 이해할 것도 같다. 솔직하고 욕구적인 본능을 감출줄 몰라서 불행한 결말로 이어지고 말거라는 아슬아슬함은 1960년 앨랭들롱의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 Purple Noon) 가 떠오른다. 그때 들었던 캐릭터평이 '아름답지만 천박한 알랭들롱'이었던가. (아마 시오노 나나미의 평이었을 것이다.) 애나 스탐슨이 주인공 월터에게 말미에 한마디 던진 내용도 "그런건 싸구려것이야 월터, 싸구려지" 였다. 주인공은 신분상승의 욕구를 억누르지못해 끊임없이 사람들을 이용하며 상처주고 버린다. 욕구의 결말이 뻔해질 즈음. ..항상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싶었지만..외면하는 연인의 뒤를 따라가 소리없이 사랑해라고 말할수도 있었지만 기어코 모든 것이 자신을 외면하고 난 후, 배개에 얼굴을 파묻고 손으로 귀를 막아버리고 "아무것도 생각하지마, 바람만 생각해' 라고 속삭인다. 지극히 자연스러워서 겸연쩍은 감정이 들어버렸다면 반쯤은 '월터래니' 적인 거지 피할수 없는 숙명적 캐릭터인 거다. 우리는 모두 '월터래니'적일수 있다고 비아냥 거렸던 옛 친구가 기억날 정도다. 


이 후에도 '내 복숭아가 싫다면 내 통조림에는 손도 대지말라'던 보빗양의 파격, '꿈을 5달러에 팔아버린' 실비아가 내뱉은 '정말로 무섭지 않다고..어쨋건 더 이상 훔쳐갈것도 남아있지 않다던 고백을 기억한다. 방울뱀과 여자를 두려워하는 조지슈미트와 아이보리헌터, 그리고 중간에서 사랑을 인터셉트했던 프레디 페오, 현실도피하는 조지슈미트를 자신으로 치환해버린 조지와 부인 사라이야기를 읽으면서 레이먼드 카버도 이렇게 일상적 삶에서 벌어지는 균열을 '불륜과 일탈'로 묘사했었는데...묘하게도 다들 일상을 소리없는 균열로 보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쳐간다. 불편함이 느껴지지만 마치 몸의 일부인 것마냥 떨어지지 않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렇듯 이 책에서 행운과 행복을 말했던 단편은 몇개 안된다.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했던 작품은 <어떤 크리스마스>(1982)다. 어린 시절의 커포티가 자신의 아빠에게 말했을 것 같은 대사 때문이다. 자신을 낳아서 인생이 망가져버렸다는 엄마의 고백과 산타클로즈도 없고 하느님도 없다는 아빠의 외침사이에서 묵묵히 시선을 돌리는 버디, 아니 커포티의 불행이 떠올라서다. 아마 이런 감성조차 없었다면 그가 말미에 그토록 인정받고 싶어했을까. 사랑 결핍증이었던 것 같다..커포티는.....



"안녕하세요. 아빠 잘지내세요? 

나도 잘지내요. 

나는 이제 비앵기 페달을 아주 빨리 밥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금방 하늘로 날아갈거니까 눈을 크게 뜨고 잘 보세요. 그리고 

네 사랑해요. 아빠.  


버디 올림" 


 


차가운 벽

저자
트루먼 커포티 지음
출판사
시공사 | 2013-06-24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헤밍웨이와 더불어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한 작가 트루먼 커포티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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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ewell
Review BOOK/소설2013. 8. 28. 11:04


블레이크 애드워즈의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1961)을 본 건 어린시절이었는데 지금와 생각해보니 도대체 뭐가뭔지 알지도 못한 채 그냥 보았던 것 같다. 이건 다들 아시는 오드리 햅번(Audrey Hepburn) 때문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게 없다. 청순하고 깜찍하면서도 톡톡튀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홀리'에 이입되었을 때, 모두들 <로마의 휴일>의 앤이 좀더 세속적이고 거침없어졌구나라고 이해했었으니까. 관객들은 영화속에서 오드리 크로니클을 모니터링하는 마음가짐으로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로마의 휴일>(1953)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오드리가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에서 명예와 인기를 지속시키기 위해서 캐릭터를 유지하겠다고 선언했었어도 이상할 건 없다. 다만 <로마>나 <티파니>는 오드리를 담는 같은 성향의 그릇이었을까란 물음이 남긴한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계속 이야긴 하고 있지만, 사실 말하고 싶은건 영화가 꼭 트루먼 커포티의 <티파니>를  100% 반영했던 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로마의 휴일>의 앤은 결코 <티파니에서 아침을>(이하 티파니)의 홀리가 될 수 없었다. 이게 오드리였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도 있긴 하지만 가능했던 이유라면 '티파니'가 소설 원작과는 다른 지향점을 가지고 있었다는데에도 이유가 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발리에서 생긴 일>의 하지원이 조인성과 소지섭 중 한명에게 고백하고 한명과는 친구먹고, 발리에서 셋이 나이트파티라도 하면서 소근소근 웃으며 엔딩이 되버린 것과 비슷하다.) 


뭐 굳이 새드엔딩이나 극적인 내러티브가 있어야만 그럴듯한 작품완성도가 유지되는 건 아니지만 '홀리'는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영혼이었고 '폴'이란 인물은 등장도 안했고 (그럼 소설의 화자가 '폴'이 아니라면 누구냐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시겠지만 소설 어디에도 화자가 홀리와 결혼해야겠다고 다짐하지 않는다. 오히려 화자는 커포티의 감정이 깃든 CCTV 정도..게다가 커포티는 동성애성향의 뉘앙스를 너무 풍긴다.) 홀리는 행복했지지도 않았드랬다. 나도 홀리가 행복해지는데는 찬성이다. 소설속  인물이 불행을 향해 치닷는 걸 보면서 이게 제대로된 현실반영이야 이랬어야 해라고 위안따위를 하며 가식떨고 싶은 마음 추호도 없다. 결국 내가 어린 시절 보았던 영화 <티파니>의 그 꽉찬듯한 희망과 행복은 그저 꿈같은 연출의 산물이었으며 실제 원작에서의 홀리는 좀더 애처롭고 처연하며 쓸쓸하게 저벅저벅 스토리를 기어나가 풍문으로 엔딩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대로 했다간 1960년대 영화를 보고나서 다들 길거리에 침을 뱉거나 술병하나를 들고 '삐뚤어져버릴거야라고 우울해했을 것이다. 이걸 시대가 용납했을리가 없지 않나..


티파니에서 아침을 (양장)트루먼 카포티(Truman Cap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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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간히 섞인 황갈색 머리카락. 알비노처럼 하얀금발. 노란머리채가 아른거리고 여름에 가까운 따듯한 저녁에, 날씬하면서도 시원한 검은 드레스에 검은 샌들을 신었으며, 진주초커를 건 채 세련되게 마른몸매를 자랑하며 아침 식사용 시리얼처럼 건강하고 비누와 레몬처럼 청결한 분위기를 풍겼던 여인이 홀리였고 오드리였다. (햅번 스타일이라고 불리우는 블랙드레스와 진주목걸이 매치업은 솔직히 커포티의 묘사덕분이지 오드리가 창안해낸게 아닌 것일 수도 있다.) 영화에서의 오드리는 원작의 이미지를 제대로 반영했다. 이걸 그레이스 켈리가 할수도 없고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더더군다나 할수 없는 영역의 이야기다. 활자그대로 옮긴다면 오드리는 '홀리' 그 자체로 완벽한 변신을 했던 셈이다. 이후로도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는 홀리를 떠올리기에 앞서 먼저 머리속에 오드리 햅번이 해맑게 웃는 모습이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그 다음 소설의 명문장, 혹은 영화속 대사가 떠오르는 식이다. 


영화의 잔상이 이토록 강했으니 원작소설을 읽을 때 홀리가 어떤 캐릭터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건 다 영화덕분이지만 초반부를 지나 중반부를 넘어갈때까지도 괴리감은 미미했으니까 나쁜 상상력은 아니었다. 다만 스토리가 진행됨에 따라 커포티 원작의 소설이 좀더 농도짙은 현실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이건 위스키에 눈이 풀려서 <왈츠추는 마틸다>를 합창하는 호주장교들 틈을 스카프처럼 떠다니는 홀리의 행실에 관한 묘사때문만은 아니다. 코티지 치즈와 멜바토스토로 연명하면서도 레즈비언이 훌륭한 주부라는 홀리의 익살스러움같은 건 오히려 애처로운 것이기도 했고..주변에서도 그녀를 '세코날 병바닥을 비우고 인생끝났다고 신문에서 보게될 여자라고 읇조릴 때는 아 커포티가 홀리를 어떤 부류의 삶을 상징하는 캐릭터로 묘사하리라는 것정도는 예측이 되고 있었다. 다만 영화는 너무 귀여웠고 매력적이었을 따름이다.

시간이 지났어도 홀리가 사람들의 기억과 추억속에 남는건 오히려 이미지도 이미지지만 특유의 '솔직함' 때문이었을 것 같다. 대중매체들은 홀리를 고전 된장녀의 프로토타입이라고 가끔 언급하지만 된장녀는 모름지기 스스로를 되돌아보거나 처지를 신랄하게 비꼬거나 하는 일 따위는 별로 안하거나 스스로 인정하지 않거나 뭐 그렇다. 홀리가 영화배우로 변신해서 스타가 될 만한 기회가 왔음에도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자신은 절대 영화스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너무 힘들고 자신의 콤플렉스는 그럴만큼 열등하지 못했으며 영화스타가 된다는 것과 하늘높은 줄 모르고 솟는 자존심이 손을 잡고 나란히 가야하는 일이었다고...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난들 부자고 유명해지는게 싫겠어요. 내가 어느날 아침 '티파니'에서 아침을 먹는다해도 여전히 나이고 싶어요 " 라고.. <티파니에서 아침을>이라고 제목이 정해진 이유가 뭔지 좀 깨끗해지는 느낌이다. 

쿨하면서도 적극적이고 활력이 넘치고 매력적이기까지하면 모든 이들의 사랑을 받기 마련이다. 때가 지금의 분위기와도 많이 달랐던 원스어폰어타임 시절인데도 이런 여성을 그릴수 있었다는 건 굉장히 파격적이면서도 진취적인 여성성에 대한 사회적분위기를 가늠케한다. 대개의 경우 이렇게 매력적인 여성들이 이야기구조상 '결핍'을 가지지 않는건 일종의 배신같은 것이었을테지만 이런 것들은 동정심을 자아내고 애처롭게 바라봐주는 독자들의 증가를 위한 것들이지 신랄한 삶을 이야기하고 싶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가 그렇게 흘러갔던 거겠지 그래서 홀리가 마지막 프로포즈를 받아들이고 정상적인 삶으로 제자리 했던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은 아니올시다였다. 

홀리 골라이틀리의 소설속 등장에서 드러나는 몇가지는 '고양이에게 이름 붙이지 않기' 그리고 '심술궂은 빨강'에 대한 공포. 사랑을 바라보는 굉장히 작위적이고 가벼운 듯한 홀리의 태도. 감춰진 현실의 이름 '룰러매반스'에 담겨진 그녀 본연의 과거들. 그럼에도 유지되는 그녀의 애처로운 모습이다. 소설책의 정확히 반의 지점이 지나게 되면 이런 우울함과 안타까움들이 와인잔에 와인이 넘치도록 수위가 올라온다. 적당히 끝냈어도 좋았을 파티용 와인이었는데 그만 흘러서 넘치고 파티는 망가지고 그러는 느낌 알잖는가..

" 난 이 고양이에게 이름을 줄 권리가 없어요. 얘는 누군가의 것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해요. 우리는 어느날 그저 강가에서 마주친거나 다름없죠. 서로의 소유가 아닌걸요. 얘는 독립적인 존재이고 나도 그래요 " 

"두렵고 돼지처럼 땀이 나는데 뭐가 두려운지 모르는...다만 나쁜 일이 생긴다는 것 말고는..그런데도 뭔지 모르는 거예요" 

홀리가 그렇게까지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아마 스스로에대한 독립심이나 현실에서 불현듯 닥쳐올 미지의 아슬아슬함 공포감에 대한 반작용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도 가끔은 홀리같다면 참 삶에 조언같은 건 적나라하게 말해줄거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아마 홀리가 화자에게 이야기했던 '돈을 버는편이 좋을것 같다고 비싼 상상을 하니까라고 말하는 대목들은 폐부를 찌르면서도 현실적인 부분 아닐까. 그리고 내가 빈정거리며 그 의견에 반대라도 한다면 그녀는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여기서 저 문까지가는데 4초면 되겠죠. 난 2초 주겠어요. 라고....정신이 확들 것 같다. 

<티파니에서 아침을>은 커포티의 소설에서만큼은 여러가지로 머리가 복잡해지곤 한다. 나뭇잎이 쌓인 호숫가에서 낙엽을 태운 모닥불이 인디언 신호처럼 흔들리는 공기속의 유일한 얼룩이었다고 할 때만 해도 편안한 정서와 커포티의 탐닉적인 묘사를 그냥 즐기면 될 뿐이야라고 생각했는데 화자의 소설에 대한 평을 하면서 "두번 읽어봤는데 짜증나는 애들이랑 흑인이랑 떨리는 이파리 어쩌고...아무 의미없잖아요"라며 폭풍의 언덕고 비교하면 그야말로 멘붕이 올 것이다. 짝사랑하던 여인에게 의외에 말투에 당황하고 찬물담긴 컵한잔 확 뿌려맞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솔직함도 지나치면 병이겠지만 홀리정도 되야 현실에 발딪고 사는 것 아니겠는가. 티파니를 동경한다고 해서 상류사회를 꿈꾸는 머리에 바람든 여인이라고 매도하기는 억울한 거다.


그래서 아마 말미에 휘몰아친 사건들에 묻혀 사라져버린 홀리가 해피엔딩일지 새드엔딩일지 가늠이 안되는 것이겠지싶다. 걸어온 것만 보면 폭풍처럼 살아갈 수도.. 그렇다고 박차고 나갈 용기와 재능도 없어져버린 보통사람들로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었으니까. 그저 소설의 화자처럼 슬쩍 다가갔다가 연정의 마음을 품었다가 의외로 쌀쌀함에 상처받고 다시 너도 함 상처받아봐라고 외면했는데 아예 그 존재가 삶에서 사라져버린 느낌..비워진 자리를 보며 더 쓸쓸하고 슬프다는 느낌..그래서 차라리 홀리가 티파니에서 아침을 먹더라도 자리에 있었으면 하는 느낌...


아마 그런 느낌이 소설을 읽고 난 한동안 계속 스물스물 거렸던 것 같다. 


티파니에서 아침을

저자
트루먼 커포티 지음
출판사
시공사 | 2013-06-24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잊을 수 없는 한 시절에 관한 짧은 동화!고독한 소년의 눈을 가...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Posted by kewell
Review BOOK/소설2013. 8. 14. 18:18



레이먼드 카버의 이야기를 읽으면 '두려움'을 느끼곤 하는데 그 이유는 삶에 뭔가 문제가 생겨서 평온한 상태가 왕장창 깨져버릴 것만 같아서다. 젠장 안좋은 소식이야...라고 누군가가 굳은 얼굴로 이야기하고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뭐 그런 상태가 되는거다. 내 이럴줄 알았어 어쩐지 좋은 날들이 이어지나 싶었는데 기어코 이런 일이.....이렇게 혼자 읇조리면서 말이다. (드라마에서는 비일비재이지만 일상에서 일어나기를 원하는 독자들은 없겠지설마.) 그래서 말인데 카버 소설을 읽으면서 마음편히 즐기면서 읽지는 못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이 아저씨가 도대체 후반부에서 어떤 충격적인 결말을 보여주실려고 이러시나 그러면서 조마조마하면서 책장을 넘겼드랬다. 이윽고 처연하게 마무리되고 나면 씁쓸함이 가슴언저리에서 떠나지 않게 되고, 결과적으로  지구에는 늘 행복한 사람도 늘 기쁜 사람도 있을수가 없으며 슬펐다가 기뻤다가 그러는 반복된 일상이 진짜 인생인거야라는 속삭임만 가슴에 덩그라니 남는다. 이래서야 일부러라도 카버 소설을 집어들고 편안한 휴가를 보내고 싶을까.


대개 영미권의 현대소설, 특히 단편들에 이런 분위기가 많이 깃들어있는데 작품성으로는 깔끔하고 함축적이고 주저리주저리대지 않는 단백함으로 격을 높였다는 평가를 많이 받아왔다. '중산층의 체호프'라니...낯간지러운 타이틀일수도 있겠는데 오죽했으면 카버에게 그런 걸개를 걸어주었을까. 이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미니멀리즘'의 여파라기 보단 '서프라이징 엔딩' 효과 때문인 것 같다. 


평이하게 이야기하다가 느닷없이 반전으로 마무리하는 그런 흐름....'확 찬물을 끼얹으면서 정신차려 친구 이 이야기가 이렇게 끝나지 않는다는걸 눈치채고있었어야지 라는 식으로 말이다. 때론 충격적일수도 있고 그정도가 아니라면 잔잔하게 파도를 일으키며 끊임없는 밀물이 들이닥치는 자극들이 이어진다. 카버의 이 단편집에서도 그렇다.  <정자>에서 드웨인과 홀리 부부가 처음부터 나누는 대화가 뭘 의미하는지 당최 모르겠지만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고. 이윽고 드웨인이 하우스키퍼와 11호실에서 지속적으로 섹스하면서 아내인 홀리를 속여왔고 결국 들통이 났다는 중심사건이 드러나면서 씁쓸하게 마무리된다.  


사람들 마음속에는 사실 스토리의 반전만 가지고 '인상깊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보다 임팩트있는 것들은 카버의 소설에는 가슴속을 저미는 대목들이리라.  홀리는 '내 가슴은 돌이 되었어. 나는 아무 쓸모가 없어. 무엇보다도 나쁜 건 그거야. 내가 더이상 아무 쓸모가 없게되었다는 거'라고 말하며 드웨인을 압박하고 드웨인은 이제 그만하라며 홀리보다 더 괴로워한다. 이게 인생인거야 어느 가정에서도 일어날수 있는 폭압적이고 거침없는 일탈들..그런 걸 말하고 싶었나보다. 이외 카버의 단편들에서는 일탈이 묘한 '성적 일탈'로 이어지는 경향들이 있다. 


<봉지>역시 레스의 아버지가 어머니와 이혼하기 전에 있었던 스탠리 프로덕트 회사의 여직원과 불륜을 이어갔고 <미스터커피와 수리공양반>도 화자의 아내인 '머나'가 바람이 나서 가출했다가 돌아오는 아이러니한상황을 연결시켜놓았다. <우리가 아버지를 죽인 세번째 이유>도 뭔가 모자란 '더미'가 바람난 젊은 아내를 죽이고 자신도 몸을 던지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심각한 이야기>에서는 이혼한 가정에서 새롭게 남자친구가 생길려는 아내를 용납하지 못하는 남자의 심리를 묘사했다. 


이중에서 <봉지>는 더 인상적이다. '남자에게는 결혼과 관련된 모든 규칙을 지켜오다가 어느 한순간 그것이 더이상 문제되지 않는 때가 있단다. 운명처럼 말이야' 라고 레스의 아버지가 말한 대목때문이다. 그러니까 삶속에서 규칙처럼 지켜오는 것을 위반하는 일탈의 순간이 '본능적이면서도 운명적'으로 이뤄진다는 변명같은 것들이긴 하지만.... 일부러 '삐뚤어질테다'라고 마음먹고 일탈을 감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겠지?  그저 살다보니 갑자기 운명처럼 느껴지는 순간을 맞닥드리게 되고 그것을 따라가면 결국 기존 삶에서 중요하다는 것들이 다 무너진다는...뭐..그런 것들..불륜과 외도가 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것들을 가지고 있는게 아닌가. (이런걸 옹호하는건 결코 아니다.) 어찌됐든 미국 중산층에서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었나보다. 언제인가 '존 치버<그게 누구였는지만 말해봐>을 읽었는데 묘하게 카버와 오버랩 되었다. 이 더러운 기분이 뭐지라고 데자뷰를 느끼면서 카버의 단편들이 촘촘히 박혀있는 장면을 떠올렸던 것이다.(치버소 설에서는 더 구체적이고 절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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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버나 치버나 둘다 다 비슷한 양반들이로구만 그러고 말았는데 어쩌면 단편에서 임팩트를 주려면 서프라이징은 뻔하지 않을까싶기도 하다. 죽음. 사고. 불륜, 외도. 배신. 이런 것들 말고는 이야기하기 힘들테니까..그런데 불행과 불운이 끼어들어가 있으면 왠지 아..이래야만 하나..뭔가 희망을 말해주면 안되나 싶은 마음이 한구석에서 스물스물 피어오른다. <목욕>을 읽을때 유독 그랬던 것 같다. 아들이 생일을 맞이하고 케익을 주문하고 일상이 유지되나 싶었는데 그만 교통사고를 당하고 식물인간이 되고 깨어나지 못한다. 아이러니하게 부모는 아들을 두고 병원에서 안절부절하다가 몸이 더러워 목욕을 하러 잠시 들른다는 아주 단촐한 이야기다. 그런데 목욕을 하는 자신의 심리상태.그리고 말미에 조용히 울리는 병원에서 온 전화가 이어지면서 독자들은 자신들의 시각으로 이 상황이 불운이 아닐까하는 급작스런 우려을 지울길 없어진다. 


'남자는 운이 좋았고 행복했다. 하지만 이제 두려움이 생기자 그는 목욕이 하고 싶어졌다' 라고 써 있는데...행복했던 가정에 불운이 들이닥친 느낌이지 않나. 이게 무슨 전화일지 상상조차 하기 싫어지는 느낌이다.  


한편 굉장히 히스테릭하고 잠재된 폭력성을 터트리는 일탈도 등장한다. <여자들에게 우리가 간다고 말해줘>같은 경우에는 무슨 일본의 묻지마 살인을 연상시키는 사이코패스 이야기들이나 싶을 정도다. 빌 재머슨과 제리 로버츠. 두사람은 둘도 없는 친구. 그리고 인생을 공유하며 살다가 평범한 결혼에 아이들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남자들끼리 노는 것'을 해봐야 한다고 생각하고 차를 몰고 나가서 유부남들임에도 불구하고 길거리의 '바버라와 샤론'에게 작업을 건다. 두 여자가 시니컬하고 거절의 의사를 표시하자 제리는 숨겨두었던 폭력성을 드러낸다. 너희들이 우리를 거절해 감히..뭐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말미가 이렇게 끝난다. 


'그는 제리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했다. 하여튼 바위로 시작하여 바위로 끝났다. 제리는 같은 바위를 두여자에게. 처음은 샤론이라는 여자에게 그 다음에는 빌리의 몫인 여자에게 사용했다' 라고...



한참동안 고민해봤는데 바위라고 해서 결국에 제리가 유혹해서 억지로라도 두 여자를 강간했다는 소리인지..아니면 기어코 둘과 섹스를 했다는 뜻인지 헷갈렸다. 그러다가 바위에 눈이 가는 순간..이건 두 여자를 돌로 쳐죽였다는 소리도 되겠다 싶었다. 제리가 일을 저질렀군. 이 변태같은 살인마같으니라고 유부남주제에 거절했다고 돌로 쳐서 죽이다니...굉장히 충격적인 결말로 마무리된 거였다. 


카버 아저씨 너무 무서워요 이렇게까지 하셔야 하나요. 잔잔한 감동같은 건 없는거에요 구질구질하게 혼자 주절댔던 것 같다. 더군다나 몇 문장 되지도 않고 행간에는 상당한 공백과 고요와 침묵이 있는 것 같은데 우울한 정서들이 사이사이를 다 매꾸고 있다니... 이것이야말로 더블우울빅맥아닌가. 엄청난 공복감을 달래기위해 이 커다란 인생버거를 우걱우걱 씹어먹는 꼴이라니...달콤한 일상들 사이로 껴들어간 일탈과 우울, 그리고 서글픈 사이드메뉴라니...


아무리 먹어도 허무하겠지. 채우긴 어렵겠지 싶다. 




책을 덮고도 늘러붙은 껌딱지마냥 계속해서 궁금증이 따라붙는다. 

<대중역학>의 그 아기는 솔로몬의 지혜도 필요없어서 결국 분리된 건 아닐까. 

그리고 <그에게 달라붙어 있는 모든 것>..이건 내 이야기가 아닐까..




좀 절절하고 너무 생생해서 문제인거다. 

카버의 소설은....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저자
레이먼드 카버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05-02-24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젊은 소설가들의 번역으로 만나는 단편소설의 진경, 레이먼드 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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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ewell